에스더

에스더서5장 (제 삼 일에)

남수연 2022. 3. 16. 22:38

https://www.youtube.com/watch?v=A8--QVkKb3I 

오늘 5장부터 본격적으로 왕후에스더가 하만과 맞서 유다 민족을 구원하는 대활약이 시작됩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된지 5년이니 아마도 에스더는 이십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로는 에스더의 성품이 강성이 아닙니다.

온화하고 순종적인 젊은 여성이 어떻게 최강의 권력을 장착한 교활한 악인 하만에 혼자 맞서 민족을 구원하는지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에스더의 어깨에 육백만 유다인의 목숨이 걸려있는 싸움입니다.

거기에 에스더는 자기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삶은 에스더서의 축소판입니다.

판의 크기는 달라도 원리는 동일하기에 에스더서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 에스더의 이 역사적 대결에서 비결을 배운다면 우리 또한 맞서야 할 혹독한 환경들과 잘 대결하고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에스더의 구국의 과정은 ‘삼 일’에서 시작됩니다.

1절,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오늘 본문은 ‘제삼일에’ 라고 간단히 언급한 뒤 에스더의 행동을 추적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은 이 ‘삼일’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이 ‘삼일’이 어떤 날입니까?

4장 끝에서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이렇게 전했죠.

16절,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이미 에스더는 모두가 살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왕을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에스더처럼 우리도 어떤 중대한 사안이나 사람을 대면하기 전 하나님을 먼저 만나는 것이 철저히 훈련되면 어떤 문제든 절대 기죽지 않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금 에스더는 이중 삼중의 난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마귀는 이미 배수의 진을 치고 겹겹이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 보았지만 에스더는 왕의 얼굴을 못 본지가 이미 한달입니다.

왕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왕을 만나러 가도 금규를 내밀지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를 상황입니다.

하만은 지금 왕의 최고의 신임을 받고 있는 페르시아 권력 2인자입니다.

게다가 왕의 정치자금 조달자로서 왕과는 뗄 수 없이 유착된 관계입니다.

그런 하만이 내린 조서를 철회시키려 하는 것은 누가 봐도 무모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왕을 만나는 순간 승기는 이미 에스더에게 넘어옵니다.

이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짧게 언급한 이 ‘삼 일’ 안에 있습니다.

‘삼 일’은 에스더에게는 밤을 지새며 통곡하는 눈물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종종 홀로 밤을 지새며 씨름해야 할 ‘삼 일’이 있습니다.

가족도 있고 형제와 친구도 있어 조언도 하고 위로도 하지만 결국 문제와 마주 서야 할 사람은 나 혼자잖아요?

하나님과 이 ‘삼 일’을 독대할 수 있다면 어떤 문제에도 혼자 당당히 마주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황이 절박한 에스더에게는 숫자 그대로 ‘삼’일’이었지만 ‘삼’일’이란 숫자가 가진 의미는 기도가 충분히 찬 때를 말합니다.

다윗에게는 눈물을 삼키며 시편의 기도를 수없이 지었던 십여년의 세월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긴 기도의 시간은 응답보다 그 과정에서 얻게 될 유익이 더 클 때일 경우입니다.

인내든, 연단이든, 성장이든, 구원이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든, 더 큰 유익을 위해서 ‘삼 일’의 실제 기간을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죠.

에스더는 이 ‘삼 일’에 받은 응답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나서 완성품이 내려오길 바랍니다.

예를 들면, 금식기도가 끝나자 왕이 조서를 철회한다는 소식이 들리는 것이죠.

물론 이 ‘삼일’에 하나님은 이미 응답의 그림을 그려 놓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완성본을 얻으려면 기도하며 받은 지혜를 따라 하나하나 그 그림의 퍼즐 조각을 맞춰 가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기도응답을 만들어 가는 것이죠.

퍼즐 조각을 잘못된 데 놓고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면 하나님이 의도하신 아름다운 그림의 완성품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기도했지만 성급함, 내 욕망, 내 판단에 대한 과신, 불순종 등으로 잘못된 결론을 얻은 경우도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우리는 퍼즐을 바르게 맞춰 완성품을 얻는 방법을 터득해 가는 것이죠.

그 퍼즐 조각 하나하나는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에스더가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전략으로 싸우는지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에스더는 기도하며 얻은 하나님의 전략에 따라 신중하게 승부수를 펼칩니다.

1) 먼저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에게 나갑니다.

1절,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사랑이 식은 남편, 왕을 만나러 가는 아내라면 누구든 가장 매력적인 모습으로 치장할 전략을 세울 것입니다.

왕후의 예복이 그런 옷일까요?

왕후의 예복은 여성적인 매력을 보이기보다는 공식적이고 권위적인 느낌을 주는 옷입니다.

에스더가 자기의 타고난 미모와 매력을 앞세운 전략을 세우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남심을 흔드는 여인의 매력 같은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죠.

중요한 일에 나의 장점과 경험과 실력으로만 맞서려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왕후의 예복을 입다’라는 본래 문장은 ‘왕 신분의 옷을 입었다’ 라는 뜻입니다.

에스더가 애정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자기 백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통치자의 권위로 문제를 풀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어떤 어려운 문제를 대하거나 사람들을 대할 때 이래야 할 것입니다.

정중하고 겸손하되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라는 존귀함을 잊을 정도로 자신을 비하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문제의 열쇠는 그 사람이 쥐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고 비굴해 보이는 사람에게 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무시하는 마음으로 낮은 것을 그것도 박하게 내 줍니다.

긍휼을 구하려면 하나님께 구해야지 이렇게 본성이 못된 인간에게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 ‘왕후의 예복을 입다’에서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이 ‘입다’와 같은 단어를 어떻게 사용했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가 다른 성경에서 ‘성령을 덧입다’는 뜻으로 여러 번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에스더에게 왕후의 옷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덧입혀졌다는 것을 이 단어가 은연 중 드러내 주는 것이죠.

왕을 상대하는 이 두렵고 떨리는 상황에서 에스더가 성령의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이렇게 지혜롭고 대범하게 처신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하고 문제에 맞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옷을 입혀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에스더의 전략에 왕은 기세가 꺾이고 수동적인 태도로 끌려 옵니다.

왕후의 예복을 입고 나타난 왕비의 모습에서 왕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것은 사적인 일이 아니라 국정과 관계있는 문제라고 직감하는 것이죠.

에스더가 한 달이나 찾지 않는 자신에게 그동안은 한번도 대면을 요청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규례를 어기며 왕후의 예복을 입고 찾아온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거란 것을 왕이 눈치채지 못했겠습니까?

왕은 에스더에게 얼른 금 규를 내밉니다.

2절,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성경이 정확히 전하려고 하는 것은 단지 왕이 에스더를 보고 사랑을 느꼈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의 문장은 에스더가 ‘왕에게서 호의를 받아냈다’ 입니다.

이 협상의 주도권이 에스더에게 있다는 걸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에스더가 하나님께 왕의 호의를 얻기를 기도했고 그 기도대로 왕에게서 호의를 받아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문제의 주도권이 점점 내게 넘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왕은 가까이 다가온 에스더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3절,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왕은 분명 에스더가 어떤 소청을 갖고 왔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그걸 다 들어주고 싶은 호의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왔소, 요구하는 게 무엇이오, 내가 다 들어주겠소’

이런 뜻입니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관용적인 표현이지 정말 나라 절반을 주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렇게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을 보며 에스더 자신도 놀랐을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기도대로 되면 내가 제일 놀라잖아요?

그런데 지금 에스더 상황에서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할까요?

‘지금이 기회구나!’

즉시 왕에게 ‘하만의 궤계로 내 민족이 다 죽게 된 것을 구해주십시오’ 이렇게 울며 읍소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하나님께 다른 전략을 받았습니다.

4절, 에스더가 이르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 하니

이 중요한 시점에, 기회가 왔는데, 에스더가 뜬금없이 잔치를 배설해 놓았으니 하만과 같이 오라는 소청을 합니다.

왕의 마음이 바뀌면 어쩌려구요.

에스더의 전략이 무엇인지 읽혀지십니까?

이 문제가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걸 왕에게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미 왕은 에스더의 문제가 뭔지에 관심이 쏠려 계속 에스더의 말에 끌려 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5절, 왕이 이르되 에스더가 말한 대로 하도록 하만을 급히 부르라 하고 이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가니라

왕은 왜 그런지도 모르며 에스더의 말대로 황급히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에는 하나님의 손도 함께 움직이십니다.

어떤 기류와 돕는 손길들을 보내셔서 내게 유리하게 움직이게 해 주시는 것이죠.

이 모든 것을 에스더가 삼 일, 하나님을 독대한 그 간절한 시간에 얻었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합니다.

여기서 잠언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6장6절,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하나님 앞에 구하는 사람은 전략과 지략을 얻을 줄 믿습니다.

야고보서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장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3) 에스더는 왕과 하만을 함께 잔치에 부르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 문제를 왕하고만 의논했을 것입니다.

에스더는 만행의 당사자인 하만을 동석시킵니다.

오랜만인 사적 자리에 하만을 데려오라고 했다면 왕은 분명히 이 문제가 하만과 관련이 있나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만일 하만이 없는 자리에서 이 문제를 요청했다면 왕은 돌아가 하만과 이 문제를 상의할 것이 뻔합니다.

하만과 같이 닳고 닳은 정치인이 자기 유리하게 문제를 왜곡시킬 것도 뻔한 일입니다.

에스더는 왕과 하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 문제를 정면돌파 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에스더가 이런 대단한 정치 능력을 갖게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 기도의 ‘삼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잔치에 참석한 왕은 에스더가 무엇을 구할지 궁금증에 사로잡혀 또 다시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하만의 흉계를 말하고 유다민족의 구원을 요청해야 할 때일까요?

그러나 에스더는 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8절, 나의 소청, 나의 요구가 이러하니이다..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오소서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하니라

내일 다시 하만과 잔치에 참석해 달라고 하죠.

이 정도면 왕이 화라도 내지 않을까 우리가 다 심장이 쫄깃해 집니다.

그러나 에스더의 지혜는 한 번은 부족하고 세 번은 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때를 알고 일처리를 아는 지혜를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지금 에스더가 긴장감을 이기지 못해 소원을 털어놓으면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그림은 엉망이 되는 것이죠.

6장을 보면 두 잔치 사이에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으시거든요.

이미 에스더의 문제에 궁금증이 폭발한 왕은 이제 그걸 듣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날 지경이 됩니다.

우리도 그럴 때 있죠.

누군가 내게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아냐, 됐어’ 그러면 그때부터 궁금해 죽겠잖아요?

에스더는 두 번째 잔치에도 또 하만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건 이 문제가 하만과 관련 있다는 걸 왕에게 자꾸 암시하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유다민족 말살이라는 큰 문제를 풀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왕과 하만과의 유착된 관계에 틈을 벌려 놓는 것입니다.

지금 왕은 에스더보다 하만의 말을 더 믿고 신임하는 사이잖아요?

과연 에스더의 전략대로 왕과 하만의 사이에 서서히 틈이 벌어지는 것을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고 일을 풀어갈 때 조심할 것은 ‘기회가 왔나’ 하고 성급히 움직이는 것입니다.

제가 충분히 기도하지 않고 성급히 저질렀다 망한 것이 개척 초기에 교회에서 운영했던 제이스도시락입니다.

기도를 했다고 해서 서둘러 일을 매듭지으려고 하지 말고 환경과 사람을 어떻게 움직여 주시는지를 살피며 신중히 따라야 실패가 없습니다.

중요한 문제를 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땐 항상 내가 원하는 것, 벌써 마음에 정해 놓은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응답을 빙자해서 우리는 종종 내가 원하는 걸 관철시키려고 하잖아요?

이렇게 에스더는 기도로 얻은 전략과 지혜와 능력으로 참극을 향해 굴러가던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되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기도로, 얼마든지, 내게 유리하게 방향을 전환할 수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에스더가 문제를 풀어 가는 한 편에서는 서서히 하만의 몰락도 시작됩니다.

하만의 몰락은 에스더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시작됩니다.

왕은 에스더의 요청이 무엇일까 복잡한 마음으로 궁으로 돌아갑니다.

하만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치 빠르고 교활한 하만이 에스더의 작전에 넘어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9절부터 14절까지 하만의 행동에서 모든 게 다 설명이 됩니다.

하만이 자기 영광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11절, 자기의 큰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

12절, 또 하만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 받은 자는 나밖에 없었고 내일도 왕과 함께 청함을 받았느니라

하만의 이런 자만심은 냉정한 판단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죠.

왕도 이상하다 눈치채고 있는 일을 전혀 감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교만과 자만심은 결국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고 모래 위에 허무하게 세운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뜨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광기 어린 전쟁을 일으킨 푸틴을 사람들이 정신병자, 오만증후군이라고 진단하지만 자기만 모르고 있습니다.

권력자의 오만함으로 수천명의 무고한 인명을 참혹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을 이미 역사가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만의 증세를 보면 주변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자기 입으로 계속 자랑하며 병적으로 자기를 높입니다.

하만은 사탄의 도구가 되어 유다민족 말살이라는 살벌한 일을 벌이고 있지만 마귀는 아닙니다.

마귀가 작업하기 좋은, 마귀와 같은 교만을 타고난 악인인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자신을 추켜세워주지 않는 사람에게 분노합니다.

그 대상이 바로 모르드개였습니다.

13절, 그러나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아니하도다 하니

이 말은 한편 모든 인간의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토해내는 말입니다.

세상 부귀와 영광을 다 가졌다고 말하면서도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모르드개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다 불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에게 만족을 주는 걸 찾아 일생을 헤맵니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것조차도 마음을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취미에 빠져보고, 연애에 빠져보고, 높은 목표를 정해 빠져 보지만 그나마 잠시 기쁨을 줄 뿐이지 그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만족을 얻으려고 집착하는 거기서 더 불만족이 생기고, 마음 상하고, 갈등이 더 생기지 않습니까?

성도는 하나님 한 분만이 채울 수 없는 인간의 결핍을 만족하게 채운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없다면 인생 자체가 신기루 같은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없으시고 영생이 없다면 이렇게 한 평생 희노애락 속에서 살다 흙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얼마나 허탈합니까?

그렇게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면 아등바등 한평생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영원한 만족과 행복으로 살아가는 나를 되찾는 것입니다.

사람이 불만족을 인지하는 것은 반대로 만족의 상태가 어딘가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그 만족을 되찾는 것이죠.

그것은 천국에서 완벽하게 누리겠지만 지금도 언제든 우리가 예수님을 찾을 때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 시선을 둘 때 전 언제나 깊은 숨이 쉬어집니다.

세상이란 게 심호흡도 하지 못하고 살만큼 각박하고 어렵다는 뜻이죠.

내게 좋은 일, 감사할 조건들이 분명히 많은 데도, 한 두 가지로 인해 불만이 쌓인다면 예수님께 시선을 두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냥 꽉 차게 만족스럽습니다.

하만처럼 모든 것을 다 갖지 못했어도 하나님께 내 인생을 정조준해서 살아간다면 하루하루가 감사와 만족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결국 하만은 그 한 사람 모르드개를 없애 버리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 20미터가 넘는 교수대를 자기 집 마당에 설치하고 왕에게 윤허 받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음 주의 스포를 미리 알려 드리자면 결국 하만은 그 교수대에 자기가 매달려 죽음을 당합니다.

하만은 일을 꾸미면 꾸미는 대로 그 모든 것이 결국 자기에게 부메랑이 되어 자신이 멸망을 당하는 것이죠.

우리는 남에게 무언가를 행할 때 그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도 내게 복이 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궁중에서 가부장적 궁중문화에 순응하던 에스더가 기도의 힘을 통해 에스더장군 같이 활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이 놀라운 전략과 용기에서 우리가 정말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깨닫고 실천하길 원합니다.

매일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신자들의 영적 상태는 자가 호흡을 못하고 인공호흡기를 끼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 우리 신앙의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을 생각해 보면 믿음은 곧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더욱 녹록치 않은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는 에스더와 같이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모든 일을 대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넉넉히 감당할 지혜와 전략과 능력을 매일 부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