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에스더서7장 (하만의 몰락)

남수연 2022. 3. 31. 21:32

 

https://www.youtube.com/watch?v=H_Mo_qYXEKA 

에스더서는 유다민족 말살 위기를, 침체 되었던 신앙 부흥의 기회로 만들어낸 기적의 역사를 전해줍니다.

우리의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도 이런 결과를 얻게 되죠.

오늘 왕후 에스더는 목숨을 건 협상에 들어갑니다.

최근 핵위협까지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위해 양국 협상단이 다섯 차례 회담을 가졌죠?

그 협상 테이블에서 얼마나 치열한 공방과 두뇌 싸움이 펼쳐지겠습니까?

젤렌스키대통령도 국제회의마다 화상 연설을 하며 도움을 호소하지만 각국 정상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또 얼마나 어렵습니까?

일어나서 뜨겁게 박수는 치지만 자국의 이해관계를 계산하느라 실질적 도움은 더디기만 하잖아요?

오늘 에스더의 협상 테이블의 긴박감은 그 이상입니다.

오늘 왕과 담판을 짓고 이미 속력을 내고 있는 민족 말살이라는 기관차를 정지시켜야만 합니다.

그런데 왕과 하만이 바로 이 일을 제안하고 승인한 당사자들입니다.

아무리 협상의 기술이 좋은 정치인이라도 이건 승산이 없다고 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협상 테이블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얘기가 달라지죠.

지난 주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하만의 계획을 철저히 뒤집어 놓으셨던 하나님을 보였죠?

오늘은 에스더와 함께 또 어떻게 일하시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를 삼키려 하는 저 하만 같은 온갖 악과 사탄의 흉계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도 에스더가 받은 지략을 배우고 얻어야겠습니다.

 

1. 에스더는 왕과 하만을 상대 할 치밀한 두 번 째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1절, 왕이 하만과 함께 또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가니라

여기까지 에스더의 전략대로 진행되고 있죠.

이제 왕과 하만 두 사람의 관계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게다가 어제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는 왕복을 입혀 퍼레이드를 벌이자는 하만의 제안에서 왕은 하만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하만은 돌변한 왕의 태도에 당황하며 불길한 마음으로 왕후의 잔치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어제 모르드개를 말에 태우고 하만을 마부로 붙인 사실은 수산성 내에 쇼킹한 뉴스였고 에스더도 그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고 계시다는 명확한 증거인 것이죠.

하나님이 하신 일은 우연이 아님을 알도록 심증을 남기십니다.

그래서 막막하고 두렵던 일을 놓고 기도하던 중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어떤 사인을 받을 때 눈물이 핑 돌고 용기가 나는 것이죠.

어제 일은 오늘 이 두려운 협상장에 나서는 에스더에게 확신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8장을 보면 왕이 어인을 찍은 조서를 철회하는 것은 왕 자신도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또 왕이 자기가 내린 조서가 잘못되었다고 번복하겠습니까?

계약 서류에 아주 작은 글씨로 써 놓은 규약도 엄청난 효력을 갖잖아요?
에스더가 하려는 일은 현실적으로 가망성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정말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꼬인 사람 관계를 푸는 일, 치료가 힘든 병, 답이 안 나오는 재정문제, 꽉 막힌 진로.

그 한 가운데 있을 때는 정말 내가 여기서 무너지지 않을까 약해지고 무섭잖아요?

에스더가 해결 가능성이 없는 이 문제를 두고 산더미 같은 중압감을 무슨 힘으로 감당하고 있는 지 경이로울 뿐입니다.

그것은 3장에서 살펴본 대로 에스더의 삼 일 기도와 ‘죽으면 죽으리라’의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 혼자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하지 않겠다는 것이죠.

만의 하나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모르드개의 말대로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유다민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도리를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인 것입니다.

또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은 내가 선택한 행동의 결과는 내게 달려 있지 않고 내 책임도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강한 용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있다는 걸 인정하는 데서 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그 결과를 믿는 게 아니라 응답하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원하는 결과를 정해 놓고 하는 기도와 집착은 아무리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해도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을 줍니다.

이게 아니면 안된다는 게 많은 사람일수록 걱정과 두려움도 많습니다.

그게 그 사람의 약점이 되잖아요?

믿음은 이게 아니면 안된다는 게 점점 없어지는 삶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경영의 광대하심과 나를 향한 선하심을 믿기에 내 생각을 고집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에스더가 만일 모든 게 내게 달렸다고 생각했다면 덜덜 떨려서 무슨 말인들 제대로 했겠습니까?

에스더의 삼 일처럼 기도하되 결과는 항상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맡긴다면 더 용기와 담대함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두 번 째 잔치에서 드디어 에스더가 입을 엽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에스더의 소청이 간결하고 명료하게 소개됩니다.

그러나 이 짧은 대화 안에 한 민족의 생사가 걸린 패가 담겨있고 그것은 정확하게 계산된 지혜입니다.

에스더는 밤새 기도하며 대화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해서 받는 지혜와 그냥 고민해서 생각해 낸 지혜는 차원이 다르죠.

그걸 알면서도 항상 내 머리를 굴리고 고민부터 하고 보는 걸 빨리 고쳐야 하는데 잘 안되죠.

오늘 싸움에서 이기려면 치밀하게 대화를 구성해 담판을 지어야 합니다.

그저 눈물바람을 한다고 해서 이 큰 사태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에스더가 왕에게 한 말을 잘 읽어보면 이 계획이 성공한 몇 가지 핵심 포인트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지혜를 얻을 수 있길 바랍니다.

첫째는, 왕의 권위와 왕후 에스더와의 왕실 가족관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무엇이든 구하라는 왕에게 구구절절이 사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왕의 심리를 공략해 즉각 반응을 보일 말을 먼저 꺼냅니다.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왕후의 생명을 누군가가 해치려 한다는 것은 왕에 대한 역모와 똑같은 것입니다.

감히 왕의 가족을 모살하려 한다면 그건 왕에 대한 반역인 것이죠.

에스더의 생각대로 왕은 자기의 권위와 왕가를 위협하는 자가 있다는 말에 대노하며 에스더를 옹호하는 편에 섭니다.

두 번째는 이 학살 계획은 왕에게도 손해이고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호소합니다.

나와 내 민족 전체를 학살할 계획을 세운 사람이 과연 충신이겠냐는 것입니다.

내 민족을 노예로 판대도 그것이 왕에게 손해일 텐데 민족을 다 학살한다면 왕의 명예의 손상과 손해가 얼마겠냐고 합니다.

말하자면 왕도 이 사건의 피해자라는 것이죠.

왕이 이 악한 일에 동조한 당사자라는 대신 오히려 왕도 피해자라는 걸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에스더의 생각대로 왕은 진노하고 격앙되어 대체 누가 그런 짓을 꾸미냐고 묻습니다.

5절,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

이때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면 안됩니다.

에스더는 칼을 뽑듯 단호하게 손가락으로 하만을 가리키며 그를 범죄자로 지목합니다.

6절,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이 순간 비로서 왕에게 밝혀진 사실이 있습니다.

왕후가 유다인이라는 것과 하만이 학살하려는 것이 유다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왕은 이 사실을 이제사 알게 된 것이고 하만도 왕후가 유다인인 것은 처음 알게 된 것이죠.

에스더가 겨눈 칼에 하만이 잡힐지는 이제 하나님이 움직이셔야 합니다.

 

2. 아하수에로왕은 이 사건을 이제야 사실대로 알게 된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좀 정리를 해 봐야 합니다.

왕이 이미 알고 있던 일에 왜 이렇게 화가 났냐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내 민족이 진멸되게 되었다고 했을 때까지도 왕은 그것이 하만의 은 만달란트를 받고 자기가 허락했던 그 일이란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만이 왕에게 제안할 때 진멸 대상이 유다인이라고 밝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장8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지방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의 것과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페르시아제국이 정복한 민족과 부족이 한 둘이 아닙니다.

왕은 그 이름도 다 외우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왕의 통치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소수 민족 하나 없애는 건 큰일도 아닌 것이죠.

하만은 그렇게 이스라엘 민족임을 감추고 왕의 조서를 얻어낸 것입니다.

왕이 진노한 이유는 하만이 유다민족을 없애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유다인에게 뭔가 특별함이 있다는 의미겠죠.

하만도 그게 걸리기에 유다인이란 걸 숨겼던 것이죠.

그렇다면 왕은 왜 하만이 유다민족을 진멸하려 한 것에 대해 분노했을까요?

변수는 페르시아 왕실과 유다인과의 아주 오래 된 막역한 관계였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왕부터 시작해서 페르시아의 고레스왕, 다리오왕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 왕실에서 유다인은 특별한 지위였습니다.

다니엘이 왕조가 바뀌는 중에도 여러 왕을 거쳐 줄곧 총리직에 있었잖아요?

믿음의 선구자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믿음의 중진들은 앞장서서 전방을 강력하게 해야 합니다.

왕실에서 유다인은 신앙심이 깊고 충신이라는 신뢰 관계가 이어져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하수에로왕의 아버지인 다리오왕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본국으로 귀환한 유다인들이 속히 성전을 짓고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거기 필요한 물자를 국고에서 내 주고 성전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끊임없이 대 주라고 조서를 내렸습니다.

아들인 아하수에로왕이 당연히 그런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막역한 관계는 십년 뒤 이 아하수에로왕이 암살당하고 왕위에 오르는 그의 아들 아닥사스다왕에게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아닥사스다왕은 2차, 3차 포로귀환을 허락하고 최측근 느헤미야가 요구한 대로 성벽공사를 하도록 예루살렘에 파견했던 왕입니다.

유대인과 페르시아의 이런 호의적인 관계가 이후로도 오래 지속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메시야의 탄생임을 알고 경배하기 위해 왔던 동방박사들이 페르시아 사람인 걸로 알려져있죠.

또 페르시아가 현재 이란이잖아요?

중동 국가 중에서 이스라엘에 유일하게 우호적이었던 나라가 이란입니다.

미국과 틀어지면서 지금은 이스라엘의 적이 되었지만 페르시아와 유대인들의 상호호혜적 정신이 이렇게 오래 이어져 오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왕에게 유다인은 왕실을 위해 기도하는 민족, 모르드개와 같이 왕의 암살을 적발해 고발한 충신의 민족, 그리고 지금에 와서 알았지만 총애하는 왕후의 민족인 것입니다.

페르시아왕실에 유다인은 수호자와 같은 입장인 것이죠.

유다인의 하나님은 이미 왕들에게 두렵고 위대한 신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인들을 비참한 그들의 노예로 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시에 세속나라를 상징하는 바벨론제국, 페르시아제국에서 유다인들을 고위관료로 높여 주셨죠.

세상나라의 인사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왕이라 해도 하나님이 세우기도 하고 뽑아내기도 하십니다.

그 사실을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왕의 통치 중 있었던 일화에서 보여주시죠.

느부갓네살왕이 제국의 영광에 도취되어 자신을 한없이 높일 때 왕의 정신이 나가 칠년을 이슬을 맞으며 짐승처럼 살게 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칠 년 뒤에 다시 왕의 정신을 돌려주셔 왕위에 복귀했을 때 느부갓네살이 이렇게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합니다.

다니엘서4장34절,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7절,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 바벨론과 페르시아제국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계속 보여 오셨습니다.

성도가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1장에서의 모르드개와 에스더처럼 하나님과 나만의 신앙을 지키면 안되는 것이죠.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하나님께 대해 이전부터 신실하고 진심이었던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으면 악이 점점 득세하고 모두의 점령군이 되는 것입니다.

그걸 하만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에스더서입니다.

제가 음악프로를 가끔 보는 데 최근 노래를 좋아하는 배우들이 모여서 합창단을 만드는 프로그램이 있더군요.

어떤 합창을 만들어낼지 궁금해서 2회까지 시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 예고편에 보니 본격적으로 합창을 시작하기 앞서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목사님 모셔다 기도하고 했다면 난리가 났겠지만 고사 지내는 데는 우리 사회가 이처럼 관대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프로에 나온 사람들 중에 잘 알려진 독실한 신자들이 여러 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지혜롭게 설득해서 막아내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어쨌든 너무 실망이 돼서 다음 회 부터는 안 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드러내고 주님의 명성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속으로만 믿음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을 위해서도 사람을 위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샤이 모르드개가 하만이 최강권력으로 커져 마수를 뻗칠 때에야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됨을 밝히죠.

모르드개가 그런 결단을 하지 않았다면 총리가 되어 민족을 위로하기는커녕 하만의 권력에 눌려 숨통 조이며 살았을 것입니다.

물론 누구나 다 총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에 따라 내가 세상에 더 큰 영향력이 있는 신자가 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면 그렇게 기도하시면 됩니다.

내가 받은 재능과 성격이 내 주변을 비추는 작은 등불의 역할을 하겠다면 그런 잔잔하고 알찬 삶을 주실 것입니다.

다만 믿음을 묻어 두면 하나님의 지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세상의 복의 근원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아니면 우리 가정이 잘 안되고, 내 직장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사회가 불안해진다는 그런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성경이 계속 가르쳐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왕에게 유다인은 그런 사람들이었고, 하만이 자기를 속이고 학살하려고 했다는 데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하만이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것을 건드린 것이죠.

 

3. 그런 악인 하만의 최후입니다.

왕은 연회장을 뛰쳐나가 후원에서 서성이며 사건의 전말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하만의 처리 문제를 고심하며 연회장으로 돌아옵니다.

어제 모르드개의 일까지 겹쳐져 하만은 이제 왕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이 승인한 조서인데, 그로 인해 가장 높은 관직에 있는 하만을 처벌할 근거가 마땅치 않은 것이죠.

그런데 연회장으로 돌아와 보니 하만이 에스더가 앉은 소파까지 다가가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신임했던 하만이건만 살기 위해 왕후에게 애걸복걸하는 모습이 이젠 역겹기만 했을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왕이 신하들이 다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말합니다.

8절, 왕이 이르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아무렴 거기서 하만이 왕후를 강간하려고 했겠습니까?

왕도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하만이 지금 에스더에게 살려달라고 붙들고 애원하는 이 장면이 결국 왕에게 즉각 사형을 내릴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입니다.

왕 앞에서 왕후를 강간하려고 한다면 재판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옛날엔 왕이 ‘역모다’ 하면 그냥 죽였잖아요?

왕이 이 말을 하자마자 그 의도를 알아차린 신하들이 어떻게 합니까?

바로 하만의 얼굴을 감쌌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형수들에게 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이때 내시 하르보나가 냉큼 나서 하만의 말로를 깔끔하게 정리를 해 줍니다.

9절,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의 집에 오십규빗 되는 나무를 자기 집에 세웠나이다

거기다 하만을 매달라는 것입니다.

하만이 권력의 보좌에 있을 때 얼마나 사람들 앞에서 교만했는지 가늠이 되는 부분입니다.

힘과 권력과 돈이 있을 때는 진짜 자기를 존경하는지 알았겠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모든 것이 서둘러 그 곁을 떠납니다.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악인을 조종하던 사탄도 그를 버립니다.

사탄도 생각이 있는데 망한 인간에게 더 공을 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젠 자기가 뿌린 악을 스스로 거두며 저절로 파멸의 길로 굴러 떨어질 것만 남은 것입니다.

왕이 이르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이렇게 인간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사악한 대학살극을 준비했던 하만은 거꾸로 자기가 먼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만의 스토리는 오늘도 교회와 성도를 가운데서 진행 중입니다.

하나님이 아말렉과 영원히 싸우시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기에 이 싸움은 계속되는 것이고, 이 싸움에서 지는 성도도 없습니다.

세상과 악에게 졌다면 성도가 아닌 것이죠.

곁에 하만 같은 사람, 하만 같은 괴로운 상황, 없으십니까?

아무리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어도 오늘 하만의 최후처럼 끝이 있음을 믿으시고 하나님을 의지해 힘을 내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기까지 왔는 데 앞의 말씀들을 다 잊어버리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에스더서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해 주시는 것입니다.

에스더서는 악의 공격과 재난이 몰고 오는 인생의 고통을 경고합니다.

귀를 닫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 시련이 닥칠 때 에스더는 비장한 기도와 죽으면 죽으리라의 믿음으로 자신과 민족의 엄청난 비극을 막아냈습니다.

신앙의 실력을 갖추어야 악을 이기고 세상을 위한 복의 전달자의 사명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큰소리 안 내고, 손해 보고, 수완이 부족해서 세상이 무시하는 게 아니라 신앙에 무능해서 무시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믿음의 실력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에스더는 기도의 실력자였습니다.

에스더가 기도가 아니면 무엇으로 이 큰 일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기도의 유익이 가장 크기에 마귀도 가장 방해하는 게 기도입니다.

기도에 승리하고 기도로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과 나만의 비밀한 관계이면 안됩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을 진심으로 높이며 세상 중에서도 영예를 얻으시게 노골적인 성도로 살아야 합니다.

사순절 예수님이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신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져야하는 십자가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뜻만 행하겠다는 의지를 세상 앞에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