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에스더서8장 (모르드개의 두 번째 조서)

남수연 2022. 4. 6. 03:00

https://www.youtube.com/watch?v=tDTiwdmdGvQ 

그동안 열심히 달려 온 에스더서를 오늘로서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안 나오지만 에스더서를 통해 우리는 막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우리 삶에도 하나님의 모습이 안 보이고, 음성도 들리지 않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위해 섭리하고 계십니다.

지난 주 하만이 죽었는데 에스더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만이 작성한 조서는 파발마와 함께 페르시아 땅 끝까지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왕의 어인이 찍힌 조서는 아하수에로왕 자신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은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어떻게 하만의 죽음의 조서에서 민족을 구하는지 에스더의 마지막 승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고 믿음으로 응답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에스더는 하만의 조서를 막기 위해서 다시 왕에게 간청합니다.

지난 주 에스더의 두 번째 잔치에서 하만은 모두가 예기치 못했던 최후를 맞았죠.

시편에는 악인의 말로를 살핀 사람들의 증언이 많이 나옵니다.

시편 9편에서는 악인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지고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다고 합니다.

시편37편,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삶의 자리에서의 신앙을 고백하는 시편에는 ‘악인’이란 단어가 무려 80번 이상 등장합니다.

나를 괴롭히는 악인이 있음을 이상히 여기지도 말고, 악인의 번영을 부러워도 말고, 악인의 말로가 이러니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에스더서가 드라마라면 하만이 죽고 모두가 행복하게 웃으며 끝났겠죠.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했던 일이라고 해도 현실이 자로 잰 듯이 한 번에 성취되는 일이 드뭅니다.

응답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각자 다른 생각과 성질이 있는 사람들 관계에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어설프게 만든 공식 안에 정확히 들어오지 않습니다.

에스더는 다시 하만의 조서를 해결하기 위해 변덕스럽고 예민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아하수에로왕과 협상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하만이 사형을 당한 뒤 왕은 공을 세운 에스더에게 하만의 재산을 모두 넘겨줍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모르드개가 아버지나 다름없는 친척임을 밝힙니다.

7장에서 이미 왕의 신임을 받게 된 모르드개가 총애하는 왕비의 사촌임을 알게 되자 왕은 하만에게서 회수한 반지를 모르드개에게 줍니다.

하만의 총리직을 모르드개가 얻게 된 것이죠.

이 정도면 누가봐도 에스더의 협상은 예상을 뛰어 넘는 대성공입니다.

왕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2월13일에 유다인을 살해하고 재산을 갈취해도 된다는 하만의 죽음의 조서는 여전히 유효한 상태인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에게 간청했던 것은 여기서 민족을 구해 달라는 것이었잖아요?

그런데 정작 에스더의 소원을 왕이 들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8절에 왕이 말한 대로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왕은 자기 실수를 인정해야만 하는 이 골치 아픈 일을 여기서 끝내고 싶었습니다.

조서를 내린 하만은 이미 죽었잖아요?

게다가 왕후가 유다인이고 유다인 모르드개가 총리가 되었는데 누가 하만의 조서를 믿고 유다인들을 살육하겠냐 생각했을 것입니다.

왕후인 에스더도 왕의 그런 마음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대단한 걸 얻어냈잖아요?

이 정도면 절반의 승리라 생각하고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끝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에스더는 한 달 만에 겨우 왕의 관심을 받게 된 상황이기도 하잖아요?

그러나 수산성 안에선 살육을 막을 수도 있겠지만 인도와 구스까지의 광활한 제국의 시골까지 왕궁의 입김이 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수많은 동족이 악인들의 칼에 죽고 재산을 뺏기게 될 것이 뻔하죠.

어떻게든 하만의 조서를 철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할 만큼 해줬다고 생각하는 지금, 이 곤란한 문제를 다시 요청하는 것은 처음보다 더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만큼 받은 뒤에 더 도와달라고 하려면 말을 꺼내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지금 이 일을 매듭짓지 않으면 다시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에스더는 다시 왕에게 간청하되 더 간곡하게 간청을 합니다.

3절과 5절을 보면 에스더가 이번엔 왕의 발 아래 엎드려 울며 한없이 자신을 낮추며 왕의 더 큰 호의를 얻어내려고 애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에스더가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내가 언제부터 온 민족의 보호자였다고?’이런 마음이 안 들겠습니까?
신앙생활이 낙담될 때, 남을 위한 수고에 지쳐갈 때, 결과가 없는 일을 계속할 때, 멈추고 싶잖아요?
내 생각으로만 모든 것을 결정하고 여기까지 걸어왔다면 벌써 멈췄을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붙드시기에 우리는 멈추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시편37편23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24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그렇기에 또 한번의 위기에 맞서 에스더는 다시 왕에게 간청합니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왕을 상대하지만 사실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졌다 해도 결국 아하수에로왕 같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나를 도와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라 기도로 끝까지 하나님을 상대해야만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잘 새겨두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변덕스럽고 환경과 상황은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코로나로 인해 인생이 뒤바뀐 사람들을 보면 두려운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순탄했던 일이라고 끝까지 성공하리라 장담하지 못합니다.

에스더는 기도의 힘을 아는 성도였습니다.

성도들은 기도를 미루게 되고 좀 하기 싫어서 그렇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기도를 하기만 하면 일이 풀립니다.

인생을 수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걸 아는 사람들이죠.

기도하지 않고 내가 다 해결하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에스더는 한 발 빼려는 왕의 마음을 눈치챘지만 내 편이신 하나님께 간청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완고한 아하스에로왕과 다시 협상 할 용기를 낼 수 있던 것이죠.

사람을 상대하면 거절의 눈빛 하나만으로도 움찔하고 낙담하게 되잖아요?

하나님아버지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는 적이 한번도 없으시니 우리는 언제든 안심하고 도우심을 요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물러서는 왕의 마음을 다시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드디어 왕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원문에 사용된 어휘를 보면 왕이 얼마나 이 일을 탐탁치 않게 허락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사람의 마음을 그 인격 안에서 조금 움직이지 딴 사람되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에스더는 이 일을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7절의 왕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보라, 나는 너희를 위해 할 만큼 다 했다. 더 이상 무엇을 내가 더 해 줘야 하느냐! 내가 하만을 처치했고 왕후의 생명을 살려주고 거기다 하만의 재산을 다 주었고 사촌 모르드개를 총리직에 올려 주지 않았냐’

그러나 이제부터 너희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가 ‘허락은’ 하겠다는 말입니다.

8절,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니라

하만이 썼던 왕의 조서를 없었던 것으로 철회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 조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조서의 내용은 그대로 두고 유다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너희가 짜내서 내 이름으로 조서를 다시 보내라는 것입니다.

결국 왕의 허락을 받았고 숨막히는 고비를 넘긴 것입니다.

그러나 죽이라고 명령한 조서를 살려둔 채로 유다인의 생명을 구원해야 하는 모순 된 상황을 해결할 조서를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가 문제인 것이죠.

그 지혜 또한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2. 마침내 유다민족을 구원할 두 번째 조서가 만들어졌습니다.

9절, 그 때 시완월 곧 삼월 이십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고 모르드개가 시키는 대로 조서를 써서

10절, 아하수에로 왕의 명의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치고 그 조서를 역졸들에게 부쳐 전하게 하니 그들은 왕궁에서 길러서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는 자들이라

조서가 만들어진 때는 삼월 이십삼일이라고 합니다.

하만이 유다인 말살 조서를 쓴 때가 일월 십삼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에스더가 삼일 금식기도를 하고 왕을 초대한 두 번째 잔치에서 다른 조서를 쓰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두 달이나 지나서야 서기관들을 불러 조서를 썼다는 얘기잖아요?

왜 한시가 급한 일을 두 달 간이나 지체했을까요?

페르시아는 광활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많은 수의 최정예 전령들로 파발마 부대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하만의 조서를 뿌리고 돌아오기까지 시간적 공백 때문에 거기 맞춰서 두 번째 조서를 작성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에스더서의 이런 내용들이 대충 쓴 스토리가 아닌 것입니다.

사실대로 궁중일기에 기록된 신빙성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조서의 내용을 어떻게 작성했을까요?

11절입니다.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되

십이월 심삼일 하루 동안에 하게 하였고

모르드개가 내린 두 번째 조서의 내용을 잘 보면 먼저 공격하라는 게 아니라 방어권을 준 것입니다.

유다인들도 자기를 죽이려는 세력들에 대해 이제 똑같이 그들을 진멸하고 재산을 탈취할 수 있게 한 것이죠.

그러니까 12월13일에는 두 조서가 맞붙어 큰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 조서가 다 효력이 있기에 죽이려는 자와 방어하려는 자 간에 대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다만 이 두 번째 조서를 보고 유다인을 치려 했던 자들이 그런 생각을 포기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9장을 보면 그렇지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이날 유다인들이 대적 칠만 오천명 이상을 죽였다고 합니다.

유다인의 대적들이 두 번째 조서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감행했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원수들은 쉽게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다인들이 그동안 세력을 모아 일년을 준비하고 공격한 원수들에게 큰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을까요?

조서에 쓰여진 대로 유다인들도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크라이나사태를 보면 방어하며 싸우지 않으면 그냥 뺏긴다는 걸 실감하게 되죠.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키려는 마귀는 포기를 모릅니다.

우리가 방어를 포기하면 뺏기는 것입니다.

악의 공조는 강력합니다.

악을 성취하기 위해 사람들이 결집하고 협공하는 모습을 많이 보셨잖아요?

성도들이 이기는 방법은 함께 모여 힘을 합쳐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삶에 있던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부르셔서 우리교회로 모아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방어해 주시는 울타리십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힘을 합쳐 하만과 같은 괴로운 상황들도 다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큰 시련의 때 내가 아는 사람들이 자기 앞가림하기도 힘든 사람들인 데 누가 나를 얼마나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가장 강력한 동맹은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성도의 동맹은 하나님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습니다.

오늘 에스더서가 보여주잖아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대학살의 위기를 넘겼겠습니까?

유다인들은 함께 금식하고 울며 기도했고 유다인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목숨을 걸고 방어권을 얻어냈잖아요?

또 유다인이 이날 대적을 상대로 완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유다인을 돕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9장에 보면 그날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3절, 각 지방 모든 지방관과 대신들과 총독들과 왕의 사무를 보는 자들이 모르드개를 두려워하므로 다 유다인을 도우니

하나님은 사람의 손을 통해 도우십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예기치 않은 다른 곳에서, 엉뚱한 사람을 통해서 풀릴 때가 의외로 많습니다.

누군가 나서서 뜻밖의 도움을 줄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성도로 살면서 느끼는 것은 원수같이 구는 사람들보다 돕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우리가 협력하고 밖에서는 돕는 손길을 보내주시니 우리에게 점점 더 많은 승리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3. 9장을 보면 유다인들이 예정 된 멸망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은 이 날을 부림절이라는 명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부림은 제비뽑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만이 유다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제비를 뽑아 얻은 날 오히려 유다인들이 그들을 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이죠.

그때부터 시작된 부림절은 현재까지도 이스라엘의 국경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부림절은 제2의 유월절과 같은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모세를 보내셔서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날이 유월절이라면 하만의 궤계로 온 민족이 말살 될 처지에서 목숨을 건진 날이 부림절입니다.

부림절의 가장 빛나는 주연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두 번째 조서’입니다.

‘두번 째 조서’가 그들을 구원한 것이죠.

두 번째 조서의 위력에 우리는 주목하며 여기서 숨겨져 있는 구원의 코드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당하게 하신 것에 대해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신다면 그냥 용서하고 구원하시면 되지 왜 독생자를 보내셔야 하냐는 것이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에스더서에서 왕의 조서를 통해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맺은 조약이 왕의 첫 번째 조서처럼 살아서 지금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자유의지입니다.

만일 그 자유를 이용해 하나님을 배반한다면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이 아담과 하나님의 조약입니다.

페르시아왕의 이름으로 작성한 조서를 변개치 못하게 한 법은 왕이 결정한 일의 공신력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영혼을 놓고 하나마나한 조약을 맺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과 장난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아담의 불순종으로 선악과를 따먹는 즉시 그 조약은 하만의 조서처럼 영원한 효력을 발하며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과 원수 되어 첫 번째 조서의 멸망 선고 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두 번째 조서가 전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제는 죄사함과 구원이라는 십자가의 복음이 첫 번째 사망의 조약처럼 똑같은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도 이 세상엔 이 두 가지 조서가 작동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첫 번째 언약이 지금까지 작동하지 않는다면 두 번째 복음의 언약도 작동할 수 있다는 근거가 없는 것이죠.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지금도 모든 죄인들 위에 효력을 발휘하는 죄와 사망의 법조문이 무력화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신약성경 골로새서2장에서 이렇게 멋지게 표현합니다.

13절,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절,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절,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에스더서에는 하나님만 숨어 계신게 아니라 구원자로 오실 주예수님께서도 숨어 계셨던 것입니다.

이 날 부림절에도 구원자에 대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날은 유월절 밖에 없었습니다.

부림절은 모세가 아닌 에스더, 즉 모세가 아닌 누군가가 유다인들을 구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새겨 놓은 명절인 것입니다.

에스더서는 제2의 유월절, 제2의 구원자에 대한 강력한 기대감을 주는 예언적 성경인 것이죠.

현재 이스라엘사람들이 유월절과 부림절을 국경일로 열심히 지키면서도 그 날이 가리키는 주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이 정말 미스테리입니다.

우리의 눈이 이 날이 예수그리스도의 날임을 보게 하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에스더서를 총 정리하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 에스더서는 하나님이 구원을 계획하셨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직접 섭리하고 계시다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도 구원을 작정하셨고 부르셨을 뿐 아닐 일평생 섭리하시는 것이죠.

2) 에스더서는 악의 세력이 세상 끝날까지 성도들의 대적이 된다는 것이고 그러나 하나님이 싸워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도들 공동체도 힘을 합쳐 악의 세력을 대항해야 합니다.

3) 에스더서는 하만의 첫 번째 조서를 모르드개의 두 번째 조서로 이길 수 있었듯이 죄와 사망의 법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예수님의 대속의 복음의 법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르드개의 조서가 반포되었을 때 유다인에겐 큰 기쁨과 명예가 회복되었듯 복음이 우리를 그렇게 해 줍니다.

16절,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죄와 사망의 법 아래 놓인 죄인은 아무리 높은 지위와 권력과 부를 가진다 해도 영광스럽지도 존귀하지도 명예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큰 상을 받고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을 보고 참 존귀하고 영광스럽다고 느껴지십니까?

대단한 사람이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정도죠.

오늘 8장의 마지막에 왜 본토 페르시아인들이 유대인이 되겠다고 개종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유다인은 포로였고 식민지 국민이었지만 아하수에로왕의 통치를 받는 자기들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유다인들이 영예롭고 그 얼굴이 빛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고난받을수록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고통 중에도 오히려 그 빛이 꺼지지 않고 더 명명해집니다.

구원받은 기쁨은 성도들로 세상에 없는 광채가 나고 존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의 왠지 모를 존귀와 영광을 세상 사람들이 속으로 다 부러워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런 우리의 당당함과 영예로움을 통해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나올 수 있는 그런 축복의 삶이 되길 간절히 축원드리며 에스더서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