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8ttMhnT1C_8
이번 주일부터는 에스더서를 통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에스더서는 막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기에 너무 좋은 성경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도 일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의 뜻대로 인간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에스더서는 그렇게 세상나라에서 성도들을 지키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통해 지금도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복된 시간이 되리라 믿습니다.
1. 에스더서는 이스라엘이 아닌 페르시아 땅, 아하수에로왕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에스더서 내용을 잘 이해하려면 당시의 역사를 좀 아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1) 에스더서의 대표적인 등장인물은 주인공인 에스더와 사촌오빠인 모르드개, 그리고 아하수에로왕, 하만입니다.
오늘은 그 중 아하수에로왕만 등장합니다.
아하수에로왕의 세계사의 이름은 크세르크세스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이름을 히브리어, 헬라어를 그대로 음역해 놓아서 세계사의 이름과 다르다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해당 성경이 세계역사 어디쯤에 들어가는지 성경만 봐서는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이 아하수에로왕은 기원전 4세기 페르시아왕으로 고대 역사에서 꽤 이름 있는 왕입니다.
나라마다 보면 기념비적인 전쟁이 있죠.
우리나라 같은 경우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을 들 수 있습니다.
명량해협의 급류를 이용해 거북선 12척으로 133척의 왜군을 무찔렀죠.
고대 그리스 역사에는 스파르타 군인 300명이 페르시아의 백만 군대와 맞서 싸운 경이적인 전투가 있습니다.
그때 백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정복하러 갔던 왕이 바로 오늘 본문의 아하수에로왕입니다.
이 전쟁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300’이라는 영화입니다.
팔 다리가 뚝뚝 잘려 나가는 참혹한 전쟁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촬영한 일명 정육점 신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죠.
거기보면 아하수에로왕이 지옥의 화신처럼 무시무시하게 분장하고 나옵니다.
이 페르시아가 지금의 이란이잖아요?
미국인들이 만든 헐리우드 영화이다 보니 이란과 사이가 안 좋은 게 그렇게 좀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하수에로왕의 부친인 다리오왕도 그리스를 침략했다 실패했던 전력이 있습니다.
다리오왕은 아끼던 다니엘을 신하들의 모함으로 사자굴에 집어 넣었던 왕이죠.
그때도 전함 6백척과 1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의 아테네를 향해 진격해 마라톤 평원에서 격돌합니다.
누가 봐도 수적으로 열세인 아테네 군사들이 지략으로 페르시아에 완벽한 승리를 거둡니다.
이 소식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전령이 42킬로를 쉬지 않고 달려서 승전보를 전하고 죽었다고 하죠.
이것을 기념해서 올림픽 종목에 마라톤이 있게 된 것입니다.
역대 올림픽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마라톤에 참가하지 않은 나라가 바로 이란입니다.
조상들의 패전을 기념하고 싶지는 않겠죠.
이렇게 에스더서는 성경과 세계사의 정확한 접점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이런 배경을 좀 알면 에스더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성경 속에서 에스더서의 위치도 좀 아시면 좋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문명과 종교에 빠져 타락해 팔백년 만에 망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에 함락되어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포로로 잡혀가죠.
이 바벨론이 다시 페르시아에 함락됩니다.
페르시아를 세운 고레스왕은 이스라엘 포로민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고레스칙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 귀환행렬은 3차에 걸쳐 이뤄집니다.
1차 귀환의 지도자는 스룹바벨인데 귀국해서 우여곡절 끝에 성전을 건축하죠.
2차 귀환의 지도자는 학자 에스라인데 돌아온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칩니다.
3차 귀환의 지도자는 느헤미야인데 돌아와서 여전히 폐허로 남았던 성벽을 건축합니다.
오늘 이 에스더서는 1차 귀환과 2차 귀환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페르시아 일대에 많게는 2백만명 정도의 이스라엘 교민들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본국으로 귀환한 사람들은 10만명 정도였습니다.
당연한 것이죠.
대부분이 페르시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고 다 페르시아에 가정과 일터가 있으니 쉽게 고국으로 돌아가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에스더서는 귀환 명령을 받고나서 귀국하지 않고 페르시아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의 이야기입니다.
2. 그러면 아하수에로가 베푼 잔치와 이 잔치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면에서 사람들이 선망하는 이 세상 영광의 실상을 보여 줍니다.
1) 오늘 왕의 잔치는 페르시아제국의 규모만큼 잔치의 규모도 엄청납니다.
1절을 보면 페르시아제국이 얼마나 넓은 영토를 다스리던 나라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중동 일대와 남쪽으로 이집트까지 무려 127개의 관할 영토가 있었다고 합니다.
왕위에 오른 아하수에로는 국가의 부성함을 과시하고 자신의 혁혁한 영화를 자랑하고자 대대적인 연회를 주최합니다.
또 이 연회는 부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그리스 진격을 앞두고 필승을 다짐하는 결의대회 같은 목적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화려하고도 거창한 잔치의 규모입니다.
이 잔치가 무려 180일, 즉 여섯 달 동안 진행되었다고 하죠.
아마도 각 지방의 지방관들이 돌아가면서 며칠씩 참가하도록 일정을 짠 연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잔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화려한 휘장과 금과 은으로 꾸민 의자, 세공한 금잔과 은잔, 그리고 제한 없이 마실 술로 표현됩니다.
한마디로 음식이 차고 넘치는 흥청망청한 연회였던 것이죠.
성경 기록자가 유난히 왕의 잔치를 아주 공들여서 표현하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의 복선을 까는 것입니다.
잔치로 시작되는 게 별로 좋지 않더군요.
파티로 시작되는 드라마를 보면 점점 파국으로 치닫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죠.
전에 화제작이었던 ‘부부의 세계’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드라마를 볼 때 첫 회에서 주인공이 최상급의 행복으로 나온다면 무슨 뜻입니까?
이제 내려 갈 일만 남았다는 복선을 까는 것이죠.
마지막에 잔치하는 게 좋은 것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잔치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신부로 맞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죠.
지금 내 인생이 세상이 주는 잔치로 흥겹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천국잔치에 데려가시고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 행복의 극치에 있다면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한없이 올라가는 것은 없기에 그 다음은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비대하고 과해지면 그 무게에 못 이겨 스스로 무너진다는 것을 세상 역사가 가르쳐 주죠.
우리에게 지금이 잔치할 만큼 좋은 날들이라면 잔치가 끝나는 날을 대비해 마음을 낮게 해야 합니다.
이 비대하고 허세와 허영으로 가득한 페르시아제국도 결국 알렉산더대왕의 헬라제국에 의해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역사를 움직이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관제탑에서 세계 역사에 관여하시고 마지막까지 구원의 그림을 완성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예레미야서45장4절에서 말씀하시죠.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
세상의 영화를 얻지 못해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뽑으시면 뽑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언제가지나 높이 들어 주시는 사람들이 누군지를 잠언4장8절이 이렇게 알려주죠.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삶에 이런 세상 잔치의 쾌락과 풍요가 없어도 겸손히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결국 높여주시고 영화롭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잔치가 두 번 나옵니다.
지방 행정관들과 귀족들을 초청한 여섯달 잔치 후에 다시 칠일 간의 잔치를 배설합니다.
이 잔치는 여섯 달 잔치에 수고했던 수산성 모든 주민을 초청해 위로하는 잔치였습니다.
여기까지 아하수에로가 기획한 대로 궐기대회가 흡족하게 진행되고 성공리에 끝날 것 같았습니다.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죠.
육개월 칠일간의 잔치의 맨 마지막 날에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2) 이 마지막 날에 그 누구도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합니다.
10절을 보면 왕이 주흥이 일어나 즉흥적으로 왕후 와스디를 연회장으로 나오라고 부릅니다.
그때 와스디는 왕궁에서 따로 여성들과의 연회를 주관하고 있었습니다.
내시들이 왕명을 전했지만 와스디는 참석을 거절합니다.
왕비의 격에 맞는 공식 석상도 아닌데다, 아내의 미모를 술 취한 남자들 시선 앞에 내 보이는 게 남편의 매너는 아니잖아요?
와스디가 남편 말을 안 듣다가 폐위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와스디가 자기의 자존심과 명예를 지키고 왕후의 자리를 잃은 용감한 여성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와스디가 왜 왕명을 거부했는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성경이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대제국 페르시아의 황후가 폐위 된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석이 될 그 자리에 앉힐 유대인 고아 처녀 에스더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피로 속죄하신 나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내시들이 왕비가 오지 않겠다는 말을 전했을 때 아하수에로왕의 진노가 어땠겠습니까?
12절을 보면 왕이 진노하여 마음 속이 불 붙는 듯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공들인 잔치의 마지막에 재를 뿌린 왕후를 어떻게 처지할지 즉석에서 모인 참모들에게 법적 조언을 구합니다.
세상 권력의 냉혹함을 보여줍니다.
반려자로서의 왕후의 신변을 생각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죠.
세상은 어디서든, 심지어 가족 간에도, 좀 더 권력을 가진 자가 약자 위에 군림합니다.
재벌들 가문 안에서도 형제들 간에도 서열 다툼이 치열합니다.
뭐니뭐니 해도 돈은 강한 권력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돈이 주는 지위로 암묵적으로 사람 위에 군림합니다.
전에 이런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실험을 위해 사람들을 동일 조건으로 뽑아서 그 중 한사람이 나머지 사람들이 업무를 다 수행한 뒤 돈을 지급하는 역할을 맡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그룹에 간식을 넣어 주는데, 과자 한 개를 남게 줍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모두 과자를 한 개씩 먹고, 나머지 한 개는 아주 자연스럽게 돈을 지급할 사람에게 양보하고 그 사람도 당연스럽게 먹더라는 거예요.
돈의 권력을 실험한 연구였습니다.
이런 권력 구조로 돌아가는 게 세상입니다.
오늘 왕후의 신변이 어떻게 논의되어지는지도 흥미롭습니다.
왕의 측근 중 므무간이란 신하가 왕후를 폐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왕후가 왕의 말을 무시했다는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퍼지면 이 나라의 여자들이 다 남자들을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다른 왕비를 맞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아내들이 남편을 존경하게 될 것이라며 조서에 한 가지 조항을 덧붙입니다.
22절, 남편이 자기의 집을 주관하게 하고 자기 민족의 언어로 말하게 하라 하였더라
그렇게 법령을 만든다고 아내들이 남편을 존경하나요?
이 조서를 받고 페르시아 아내들이 과연 남편을 존경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남들이야 그럴 듯이 포장 된 내 모습을 보고 존경한다고 해 줄지 모르지만 가족들에겐 어림도 없습니다.
가족들은 내 존경할 점을 무력화 시킬만한 내 단점들을 더 많이 알잖아요?
부모가 억지로 자식에게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남에게 존경을 받는다 해도 자식들 눈에 자식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 모습이 보일 때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예수님을 마음으로부터 영원히 존경할 수 있는 게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이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목숨을 내 놓기 까지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남편들이 아내에게,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존경받으려면 희생해야 합니다.
오늘 이 사건의 전말을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게 됩니다.
주흥이 일었고, 왕후를 소환했고, 거절 당하자 왕비를 폐위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남성들의 지위를 높이고 아내에게 존경을 받아 보겠다고 불평등법까지 제정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신을 치장하고 대단히 여긴다 해도 털어 볼수록 드러나는 이런 하류소설 같은 본성이 캐고 또 캐도 끝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약자를 짓밟고, 야합하고, 진실을 덮고서라도 내 체면을 살리려하고.
또 이들의 화려하고 흥청망청한 연회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약자들을 죽이고 약탈한 은금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또 정복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끝없는 이 세상의 탐욕인 것이죠.
그것이 이 세상 나라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행동을 결정할 때 기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약관화하게 두 개의 계명을 주셨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지,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에 맞는지가 우리의 유일한 기준입니다.
그렇기에 에스더서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자기의 체면과 권위를 위해 아내를 폐위하고 불평등법을 제정하는 왕과 관료들, 그리고 반대로 자기 동족을 위해 목숨을 거는 유대인 두 명을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하수에로왕의 필승결의대회는 예상치도 못하게 전개되더니 와스디왕후의 폐위로 끝났습니다.
2장부터는 에스더가 이 왕비 간택에 지원하고 왕비가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3. 그렇다면 에스더서 전체에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세상나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사람들이 사회체제를 만들고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 같지만 거기엔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됩니다.
오늘 와스디왕후가 폐위가 되는 것은 더 힘있는 자들의 세상권력에 의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를 에스더를 위해 준비하십니다.
그런 상황을 하나님이 일부러 조장하신 것과는 다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범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얼마든지 섭리하십니다.
세상권력을 취해서 성도들에게 주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뒤로 가면 이백만명의 유대인들이 하만이라는 관료의 계략으로 몰살 될 위기에 빠진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아직 그 누구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모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을 해결할 에스더왕후를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말씀을 나누겠지만 이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계획을 저지하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인 이스라엘을 필멸하려는 사탄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세력들은 성도들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려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고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매일 이 악에게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길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은 악의 세력에게 성도들이 유린당하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에스더서에는 왜 하나님이라는 호칭이나 직접적인 믿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페르시아에 남은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에 돌아가지 못한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겨 주실 지에 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시대엔 약속의 땅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구원백성의 증표였습니다.
약속의 땅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은 ‘내가 돌아갔어야 하는데, 돌아갔어야 하는데’, 그런 후회 속에서 눈을 감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에스더나 모르드개가 당당하게 하나님을 내세우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사람을 돌보십니다.
돌아가지 못한 자들은 어쩌면 항상 신앙의 고뇌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습일 것 같습니다.
더 하나님께 가까이 하지 못하고, 말씀에도 순종하지 못하고, 세상에 발을 담근 채 이도저도 아니게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가 외형적으로는 신앙생활을 그런대로 꾸준히 따라가고 있지만 마음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누가 온전합니까?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을 면목 없어 부르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받으신 성도들을 끝까지 돌보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훨씬 크시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2) 그리고 고국에 돌아가지 않은 이 이민자 공동체에 대해 에스더서가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전까지 이스라엘은 가나안땅, 예루살렘 성전에 거주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의미였습니다.
구약성경이 장차 오실 구원자를 위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임무를 마친 다음엔 더 이상 옛 방식은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1차 귀환자들이 돌아와서 성전을 세운다고 했죠.
그것을 솔로몬이 지었던 파괴 된 성전과 비교해서 스룹바벨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스룹바벨 성전은 집만 덩그러니 지었지 광야시대의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성소의 기물들이 없습니다.
법궤도 없고, 등대와 떡상과 분향단도 없습니다.
다 약탈당했습니다.
사실 제물을 잡아 제사를 드린다 해도 제물의 피를 부어 용서받을 속죄소가 없으니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민 백도, 제사법도 다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알리는 모든 모형은 충분히 제시되었고, 이제 사백년 뒤에 진짜 구원자가 오실 것이기 때문인 것이죠.
모든 사람들은 어디서든 인격의 집에 예수님을 모시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에스더서는 구약적 하나님 백성이 신약적 하나님 백성으로 확대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전해져 어느 곳이든 예수그리스도를 부르는 곳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람의 명성과 화려함이 점점 높아질수록 그 내면의 죄된 인격과의 괴리는 점점 더 커집니다.
오늘 아하수에로왕이 잔치 끝에 기습적으로 내면이 털렸듯이 많은 사람들은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로 인간됨이 적나라하게 보여집니다.
우리의 역시 본성에서 다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성과 싸우며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의 대전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항상 내 마음과 행위를 맞춰가야 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으셨지만 막후에서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의 옷자락에 덮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지나 온 내 인생과 지금의 나를 보면 하나님이 내게도 함께 하시고 섭리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내일을 준비하시고 영원히 악에게서 우리를 구해주실 것을 앞으로 에스더서에서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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