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제목이 비장하다고 너무 긴장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실 에스더서는 흥미진진한 소설처럼 아주 재미있는 성경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전체적인 내용과 역사적인 배경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마라톤경기의 유래에 대해 들은 적이 있으실 겁니다.
기원전 490년경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정복하기 위해서 마라톤 평야에 10만 대군을 상륙시켰습니다.
그러나 만명 밖에 되지 않는 그리스군은 뛰어난 전술로 페르시아의 10만 대군을 물리칩니다.
이 승리를 알리려고 그리스 병사가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까지 약 42㎞를 달려가 '기뻐하라 우리가 승리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죠.
청년의 이 애국심과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올림픽 경기에 마라톤을 뛰게 된 것입니다.
이 전투가 바로 마라톤 전투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하수에로 왕의 아버지 다리오왕이 바로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한 그 왕입니다.
이 페르시아는 1935년에 국호를 이란으로 바꾸었습니다.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한 이란에선 아직까지 마라톤 경기를 금지합니다.
지금까지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한 선수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1974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마라톤종목을 아예 빼고 진행시켰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아하수에로 왕은 다리오왕에 뒤를 이어 페르시사제국의 왕에 등극했습니다.
1장1절에 보면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이십칠 지방이나 되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으니 대단한 왕이었죠.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땅이 아니고 바로 이 아하수에로왕이 거하는 페르시아의 수산궁입니다.
아하수에로왕이 즉위하고 왕권이 안정되자 귀족과 백성들을 모아 수산성에서 큰 잔치를 벌입니다.
취기가 오른 왕은 그 당시 왕비였던 와스디에게 왕후의 의복을 차려입고 잔치석상에 나오라는 전갈을 보냅니다.
와스디왕비의 외모가 아리따워서 뭇 백성들 앞에 자랑하고 싶어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별궁에서 여인들과 한창 잔치를 벌이고 있던 와스디왕비가 이 명령을 거절합니다.
왕비의 공식 만찬 중에 아무 사전예고도 없이 불쑥 들라하는 왕의 즉흥적인 명령에 기분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여인들 앞에 위엄을 부리고 있던 와스디가 왕명을 받고 쪼르르 달려가는 것이 체면상 걸렸을 수도 있었겠죠.
왕후가 왕명을 거절하자 아하수에로왕이 진노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결국 와스디왕후는 이 일로 폐위를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새 왕후를 위해 간택령이 내려지고 에스더가 왕궁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식민지 미천한 신분의 에스더가 일국의 왕후가 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유대민족이 몰살 될 위기에 처한걸 봅니다.
그 이유는 사촌오빠 모르드개의 숙적인 하만의 계략 때문입니다.
하만이란 사람은 아하수에로왕 밑에 최고 권력자였습니다.
그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그를 보고 모두 엎드릴 때 유독 모르드개만 자기는 유대인이라며 머리를 꼿꼿이 세웁니다.
그걸 볼 때 마다 하만의 속이 부글 부글 끓어 올랐겠죠?
결국 그는 모르드개와 유대인을 다 몰살시킬 계략을 꾸미게 됩니다.
왕에게 가서 유대민족은 독특한 자기들 법이 있어 왕명을 따르지 않으니 살려두는 게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일에 필요한 부대비용은 자기가 다 담당하겠다며 왕의 허락을 받아냅니다.
하만은 유대민족을 살해할 날을 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고 정해진 그 날 하루 동안 유대인을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해도 좋다는 왕의 조서를 각 도에 보냅니다.
유대민족이 완전 몰살 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죠.
4장3절에 보면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고 기록합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어떻게든 왕을 설득해 이 위기를 막아보라는 전갈을 보냅니다.
에스더는 그래서 오늘 죽음을 각오하고 왕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이면 약속의 땅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에스더와 유대민족이 페르시아까지 흘러들어간 것은 바벨론에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간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배반한 죄 값을 치르는 이스라엘에게 70년 뒤 다시 본토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예언을 주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 예언의 말씀은 페르시아 초대왕인 고레스왕 때 유대인은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칙령이 내려져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고레스왕 다음이 다리오왕이고 그 다음이 오늘 아하수에로 왕이죠.
에스라1장1절을 보면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수산성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 앉은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오늘 페르시아에 남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귀환할 것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 때 사할린이나 북해도 까지 끌려갔던 사람들이 해방 후 돌아오지 못하고 아직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죠.
유대인들이 포로생활 70년 동안 얼마나 예루살렘을 사모했는지 시편137편에 이렇게 노래한 걸 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그들이 그렇게 사모하던 예루살렘 귀환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동안 일군 것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이방 왕의 지배와 이방 풍습 속에 그냥 살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닦아 놓은 기반을 버리고 황폐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가서 나라를 재건하고 성전을 다시 짓고 사회적 기반을 일으키려면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당시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 부와 번영을 누렸던 수산성을 떠나 무너진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겠죠.
그러나 히브리서11장 25절은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던 모세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보다 어떤 이유이든 현실적인 이익과 세속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예기치 못한 큰 위기가 닥칩니다.
그들은 왕후의 자리까지 오른 유대인 에스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지금의 영화와 안락함이 영원할 것을 꿈꿨을 것입니다.
모르드개의 머리가 그래서 더 꼿꼿해 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들에게 눈치 채지 못한 위험한 대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만이라는 사람입니다.
에스더3장1절을 보면 그는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이라고 기록합니다.
하만은 아각사람,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영원한 숙적 아말렉 족속이었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있는 영원한 영적 대적 악한 마귀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을 멸절시킬 계략을 꾸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주님과 함께 고난 받기를 회피한 사람들에게 어느 순간 마수가 가까이 와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 일 없이 평안할 거라 믿었던 행복한 삶 속에 갑자기 환란이 덮친 것입니다.
1995년 6월 29일 5시 57분을 기억하실런지요.
서초동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날입니다.
순식간에 500여명이 목숨을 잃고 9백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한 최악의 사고였죠.
당시 삼풍백화점 대표인 이0상씨는 40세의 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를 다 가진 부러울 것 없는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집 앞 교회를 가끔 다녔지만 형식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부귀영화였고 욕심은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돈을 적게 들이려고 백화점 건물을 불법 설계했고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무리한 용도변경을 했습니다.
원하던 것은 손에 다 잡힌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 사고와 함께 영원할 것 같던 호사스러운 삶도 끝났습니다.
옷 한 벌, 숟가락 하나 자기 것이 없는 감옥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쪽 벽에 등을 대고 다리를 뻗으면 발이 닿는 좁은 방에서 24시간을 보내며 곧 숨이 멎을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후회도 하고 원망도 하고 자책도 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을 이기려고 만화도 보고 소설도 보고 펜글씨도 썼지만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그 때 그의 손에 성경이 잡혔습니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성경을 코 앞에 대고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던 중 그는 어느 날 요한복음 21장 15절 말씀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에 걸친 예수님의 물음이 그의 심장을 때렸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모든 게 없어진 뒤에야 주님은 그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울면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죄인이면 저만 죽이시지 왜 그 많은 사람까지 죽게 하셨습니까? 묻고 또 물었습니다
침묵하시던 하나님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냥 순종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7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출소 이후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기도했습니다.
사업 경력이 아깝다며 작은 회사를 맡기려는 지인도 많았으나 기도하던 중 길이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이제 세상 것을 좇지 않겠다. 그 많은 생명을 죽였지만 이제 생명을 구하는 일에 나서야 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출소 후 몽골에 있는 선교사를 만나러 가던 중 그곳이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역지라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는 사고 피해자와 그 가족의 아픔이 회복되고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날의 사상자 보다 더 많은 생명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평탄하리라 믿었던 세상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한순간 날려 버리는 직격탄을 맞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선택하고 십자가의 길을 좇아가는 삶이 기쁨과 은혜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죠.
그러나 믿음의 헌신과 희생이 싫어 현실에 안주한다해서 언제까지 무탈한 나날이 오리란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항상 세상이 아무 일 없이 우리를 반겨줄 거라는 생각은 넌센스입니다.
저는 인생의 반을 불신앙으로 살았고 반은 믿음 안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제 인생이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다고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고백도 같을 거라고 믿습니다.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할 때 성가신 일도 많고 낙심될 때도 많습니다.
매일 은혜가 넘치고 힘이 나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믿음의 결실과 축복도 눈물로 씨를 뿌릴 때 거두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인줄 믿습니다.
힘들 때 주저앉고 싶고 아무 생각도 고민도 없어 보이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있어야 할 곳은 약속의 땅이고 나의 얼굴 앞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축복의 땅에 있을 때 안전한 보호 속에 있는 줄 믿습니다.
불편과 손해와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주님 앞을 떠나지 않고 진정 복된 인생길을 걸어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두 번째는 하나님은 어디서든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집에 가셔서 본문 전체를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하나님, 혹은 여호와란 단어가 몇 번 나오나 한 번 세어보십시오.
몇 번 나올 것 같습니까?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 가운데 에스더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에스더서의 묘미를 몰라서 하는 생각입니다.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 은밀하게 숨어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구절마다 숨어 있는 것이 에스더서입니다.
하나님이란 단어가 없어도 에스더서를 읽다보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상황과 사건 속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계심이 저절로 느껴집니다.
보이지 않게 우리를 인도하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깨달으라고 우리 성경 속에 에스더서를 넣어주신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직접 나타나 말씀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걸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왜 와스디왕후는 아하수에로왕의 부름을 거절했을까요?
왕의 불 같은 성격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을텐데요.
그 많은 왕비 후보자 중에 어떻게 고아에 식민지 출신의 에스더가 왕의 눈에 들게 되었을까요?
왜 하만은 왕의 허락을 받고도 즉시 유대인을 살육하지 않고 제비를 뽑아서 죽일 날을 멀찍이 받았을까요?
그 사이 에스더를 통한 구국활동이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에스더서를 읽다 보면 그런 우연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치밀하게 얽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뒤돌아보면 정말 여기까지 온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언니가 알고 지내던 분이 경영하는 아주 작은 회사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장과 저희 언니가 크게 다툰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회사 일에 취미를 붙여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었는 데 결국 언니 성화에 못 이겨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당장 할 일이 없어 순위고사 준비를 두어 달 하게 되었죠.
그즈음에 처음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최초의 기도가 순위고사 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전무후무하게 미술교사를 많이 채용했습니다.
두 달 준비하고 신기하게 합격이 되었습니다.
참 절묘한 때 회사를 그만두고 절묘하게 순위고사를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의 각본이 아니면 될 수 없는 일이었죠.
성도님들도 한번 돌아보십시오.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건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신실하게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손을 잘못 잡아 사업에 실패해도 투자를 잘못해서 많은 손해를 입을 때도 건강을 잃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끝까지 도와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나를 모르신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오늘 하나님은 등장인물 속에서 자신을 숨기고 계신 줄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도 소중하고 초자연적 은혜도 감사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변함없이 순종하는 믿음은 주님께 인정받는 큰 믿음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은 지, 정, 의를 다할 때 온전해 집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뜨겁게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 그것이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의 의지를 다해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 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 하나님은 때로 숨으시고 때로 보여주시며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신실하게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아멘.
세 번 째는 이스라엘을 구한 에스더의 신앙입니다.
오늘 16절에 에스더가 말한 죽으면 죽으리라란 말은 세간에도 널리 사용되는 히트 친 카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의 죽음을 각오한 결심처럼 반드시 일을 성취하겠다는 다짐이겠죠.
그러나 오늘 이 말을 한 에스더는 단지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11절에 보면 이 일이 잘못 될 경우 그는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일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스더는 사촌오빠 모르드개가 유대민족을 위해서 힘을 좀 쓰라는 전갈을 받았을 때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11절에 보니 에스더왕비가 아하수에로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지가 한 달이라고 합니다.
왕이 한 달을 찾지 않을 때 궁중의 비빈들 마음은 뻔한 것 아닙니까?
왕의 총애가 사라지고 언제 추출될지 모르는 두려운 시간을 보내는 에스더에게 민족을 구할 힘이 어디 있겠습니까?
좀 왕의 사랑을 받고 잘나갈 때라면 왕을 졸라서라도 동족을 구원해 보련만 지금 실정은 그게 아닙니다.
왕이 부르지도 않은 때 목숨을 걸고 나가 혹 금 규를 내밀어 줘 죽음을 면할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대인을 살려달라는 에스더의 소청이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이미 왕의 어인이 찍힌 조서가 전국에 배부 된 상황에 왕권을 실추시키며 그걸 번복할리가 없습니다.
에스더 인생에 난감한 문제 위에 또 문제가 얹혀 지는 걸 봅니다.
우리가 산 너머 산이고 설상가상이란 말이 왜 생겼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그만큼 고단하고 곤고한 일들이 덮치고 또 덮치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더의 답변에 사촌오빠 모르드개의 대답은 냉혹합니다.
네가 왕비가 된 것은 이 때를 위함이 아니겠냐?
네가 모른 척하면 이스라엘은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너는 망할 것이다.
결국 에스더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명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결단을 하고 벌떡 일어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죽으면 죽으리라.
필리핀 한알의 밀알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이0주 선교사가 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필리핀 선교를 떠났는 데 하나님은 미국으로 남편을 불러가시고 여자 혼자 몸으로 최악의 빈곤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혼자 있을 때 스타킹을 뒤집어 쓴 강도가 침입하여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 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감히 하나님의 성전에서 죄를 짓지 말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자 강도가 뒷걸음질 쳐 도망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개척한 교회 바로 옆에 아볼라리오교라고 필리핀 귀신을 섬기는 신당이 있었습니다.
검은 옷에 검은 맆스틱을 바르고 검은 두건을 쓴 사람들이 귀신의 힘을 빌려 주술도 하고 병도 낫게 하는 그런 무서운 미신 종교입니다.
여덟 번이나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 한 그들이 이선교사를 잔혹하게 죽이겠다고 경고장을 보냈습니다.
그 때 얼마나 큰 두려움이 임하던지 꼼짝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순교의 각오로 선교지에 왔던 내가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죽으리라 결심하고 삼일 금식을 한 후 밤에 혼자 신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문 밖에서 쩌렁 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야, 이리 나와라.
어디 너희 믿는 귀신하고 내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판 붙어보자라고 필리핀 말로 소리 소리 질렀습니다.
아무도 없는 밤에 혼자 나타난 이은주 선교사를 끌어다 죽이면 그만이었을텐데 그들이 꼼짝 못하고 바라만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는 그럼, 너희가 진거다. 나 간다
그리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일주일 후 성도들이 할렐루야를 부르며 뛰어 들어왔습니다.
사당이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린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이 땅에 두려울게 없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찬양을 부른 한국의 프리마돈나 소프라노 김0미씨는 기도로 모든 것을 돌봐주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두렵고 자신이 없어 어머니를 따라 죽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가 기도했던 것처럼 큰 소리로 기도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생각하고 우울증 약을 다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니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임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죽음의 위기를 맞은 유대인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귀환을 거부하고 세상의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조상들의 잘못 된 선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왕궁에 혼자 살아남아 쓸쓸히 생을 연명하기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고 하나님의 사명의 길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16절에 보면 모든 유대민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자신도 사흘을 금식하고 왕에게 나가 간청하기로 결단을 합니다.
하나님은 왕의 눈에 에스더가 한없이 사랑스럽게 보이게 하신 줄 믿습니다.
삼일이나 금식하고 초췌해진 왕비가 뭐 그리 아름다웠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결단이 있은 뒤 그 다음은 하나님의 손이 일하시는 줄 믿습니다.
본문의 뒷 부분을 읽어보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하만과 그를 따라 유대민족을 멸절하려던 자들이 오히려 다 목숨을 잃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란 게 쉼 없이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리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뜻이냐 세상을 쫒느냐 둘 중 하나란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결단해야 할 순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정을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녀를 키우고 가족을 건사하고 이 땅에서 살려면 돈도 명예도 건강도 있어야 한다는 것 다 아십니다.
그걸 위해 이 땅에서 우리가 안간힘을 다해 애 쓰는 것도 다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놀라운 은혜가 임하는 줄 믿습니다.
당장 손해와 고통을 감수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할 때 하나님은 우리 힘으로 하는 것 이상의 축복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유대민족을 몰살 될 위기에서 건져주셨습니다.
하만이 유대인을 멸망시킬 날로 제비 뽑았던 날은 오히려 하만과 그의 추종자들이 전멸당한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날을 정하고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 되고 승리의 날이 될 줄로 믿습니다.
유대인은 그 제비뽑은 날을 부림절이라는 명절로 지금도 크게 지키고 있습니다.
택함을 받은 민족을 끝까지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에스더의 믿음의 결단을 칭송하고 기념하는 날이죠.
지금도 부림절이 되면 이스라엘에서는 집집마다 이 에스더서를 낭독한다고 합니다.
읽다가 에스더란 단어가 나오면 환호성과 손뼉과 휘파람을 불고 하만이란 단어가 나오면 발을 구르고 야유하며 떠들썩하게 부림절을 지킨다고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한 말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쓸 건강이 있고 능력이 있다면 주님을 위해 쓰시기를 축복 드립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동일한 구원을 받지만 축복과 상급은 각자의 헌신과 행함에 따라 다르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은 우리를 복되게 하고 우리 자녀들을 축복의 자녀 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일상의 크고 작은 결정을 해야 할 때 믿음의 편에 서시길 축복드립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믿음의 결단을 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고 역전의 드라마가 장엄하게 전개되리라 믿습니다.
에스더가 사흘간 죽음과 같은 금식을 하고 내 민족을 나에게 달라고 왕에게 나갔던 것처럼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살리려 죽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죽음의 문제가 해결 된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환경으로 억누르고 사람으로 고달프게 하는 악한 마귀에게 절대로 등을 보이지 마시길 축복드립니다.
죽음을 불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최선을 다할 때 우리 앞에 장애는 없습니다.
다 피할 길이 있고 하나님의 시기적절한 도우심이 우리 인생을 인도해주시리라 믿고 강하고 담대하게 서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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