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OIfl4LdimLc
정치인이나 신뢰받던 유명 인사가 성 비위 사건을 일으킨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몇 년 중에 그런 일로 정치 인생이 끝난 사람들이 여럿 있었죠.
지난 달 미국 법원은 트럼프전대통령의 성비위에 대한 재판에서 피해자에게 1112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합니다.
클린턴의 경우는 비서 르윈스키와의 스캔들로 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되기까지 갔습니다.
상원에서 부결되었지만 클린턴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따라다니게 된 것이죠.
오늘 다윗에게 삼천 년이 지나도록 따라다니는 바로 그 일이 일어납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건이라고 하죠.
다윗과 골리앗이야기 만큼이나 세속 세상에까지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두 달 정도의 설교를 통해 신뢰를 쌓아왔던 다윗을 한순간 추락시킨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경외했던, 다윗도 그럴 수가 있었다고?’
이 실례를 통해서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큰 교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1. 이 사건의 발단입니다.
다윗은 즉위 이후 전쟁에서 승리하며 주변 나라들을 평정합니다.
그런데 10장에서 이스라엘 동쪽에 있던 암몬이라는 나라가 다시 도발해 옵니다.
다윗왕와 요압장군은 암몬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1절로 이어집니다.
1절,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겨울철 소강상태였던 전쟁을 봄이 되어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겨울은 비가 많이 와서 전쟁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계절과 기후는 전쟁의 큰 변수잖아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얼었던 땅이 녹는 바람에 러시야 탱크가 수렁에 갇혀 꼼짝 못하는 광경을 뉴스에서 보았었죠.
암몬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다윗은 이 전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군사력이 약해진 암몬이기에 요압의 지휘로도 충분히 함락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압은 암몬의 수도인 랍바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절에서 굳이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다고 밝힌 것이 걸리죠.
왕들이 나서는 전쟁이라면 다윗도 군사들을 위해 함께 참전하고 격려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남았던 다윗은 저녁 때가 되어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다윗의 군대가 우세하다 해도 전쟁은 전쟁입니다.
군사가 희생되지 않는 전쟁은 없잖아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왕을 구할 때 왕이 우리를 대신해서 전쟁에 나가게 해달라는 게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백성들의 기대에도, 하나님의 뜻으로 통치하는 왕으로도, 뭔가 과거와 달라진 다윗이죠.
이 변화가 결국 이 엄청난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책 ‘에고라는 적’에 보면 사람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그 사람을 쓰러뜨리는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일수록 더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강력한 왕권을 누리며 그 에고가 절정까지 부풀어 있었습니다.
잘 안될 때는 그래도 우리가 크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무릎이 다 꺾여 있는데, 더 넘어질 것도 없죠.
뭔가 잡고 일어날 수 있기만 간절히 기도할 뿐이죠.
그럴 땐 혹시 일탈을 저지르고도 하나님 앞에 즉시 회개합니다.
그러나 잘나가는 상황이라면 죄를 짓고도 오히려 뻔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선 우리가 힘든 환경 속에 있을 때 더 안심이 되실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어렵게만 살게 하실 수는 없잖아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움도 허락 하지만 복도 주십니다.
큰 어려움이 없을 때는 우리가 의지적으로라도 자꾸 하나님께로 내 마음을 가져가야 합니다.
지금 얻은 평안과 행복을 오래 누리려면 힘들었던 때만큼 더 주님을 찾아야 한다고 나 스스로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죠.
그러나 평범한 일상은 내 선에서 해결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은 것도 함정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평범한 날들이 오늘의 다윗을 만든 것입니다.
호주에서 청소년 사역을 하던 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호주 이민 가정의 자녀들이 겪는 고통도 만만치가 않다고 합니다.
이분이 전도사 때 그런 아이들을 교회로 데려와 성경을 가르치고 생활지도와 가정 문제까지 개입하며 엄청난 헌신을 합니다.
한번은 가출이 일상이던 한 여학생을 지도하다 너무 화가 나서 등짝을 한 대 때립니다.
그때 같이 있던 청년들도 전도사에게 대드는 여학생에게 격분해 손을 댔다고 합니다.
이 여학생이 감금, 집단폭행으로 전도사와 그때 같이 있었던 자기 부모까지 고발 한 것입니다.
사실이 밝혀지면 금방 나오게 될 줄 알았는데 재판이 길어지며 구치소에서 1년이나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살벌한 베트남 마약사범 죄수들을 전도하며 재판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재판 결과는 추가로 일 년 징역형이 떨어진 것입니다.
당시 이 재판이 중계될 만큼 사회적 관심이 쏠렸던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일년 징역형이 추가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것이죠.
주님을 위해서 산 죄 밖에는 없는데, 일 년이나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으니 이젠 주님도 좀 봐주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무시하신 것 같아 얼마나 서럽고 원망스러웠는지, 다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 마치 깜깜한 우주에 혼자 있는 것 같은 절망감과 고독감에 밤새 무서워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모태신앙이라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알았었는데, 하나님을 떠나보니 고아와 같은 두려움을 처음 느꼈던 것이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떨어져 나가 지옥에 들어간 사람들의 그 고독감과 절망감이 이런 것이겠구나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면 자유로운 세계가 펼져질 것 같지만 스스로 지옥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도 고독감과 외로움, 우울감이 몰려온다면 아마도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기간이 길어지면 불신자와 다름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세상과 쾌락으로 그 공허함을 달래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하나님으로 내 삶을 채울수록 죄와 세상이 주는 쾌락은 점점 밀려납니다.
나의 어두운 부분과 상처가 되는 문제들도 거기에 매여있기보다, 자꾸 예수님께 관심을 두면 그 문제들이 더 쉽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려울 때도 예수님, 형통할 때도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스스로 어둠에 들어갔던 다윗의 말로를 통해서 이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2. 밧세바에 대해 성경이 무심하게 다루는 것 같지만 이 여인이 미스테리입니다.
왕궁 옥상을 거닐던 다윗의 눈에 목욕하는 밧세바가 보였습니다.
여인이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을 보면 왕궁에서 가까운 집이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왕궁 주변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평민이 아닙니다.
밧세바 집안이 꽤 유세 있는 가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심부름꾼을 보내서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오게 합니다.
사람이 돌아와서 하는 말을 잘 보셔야 합니다.
3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이 말의 뉘앙스는 왕이 관심 가질 여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뒤에 23장을 보면 다윗의 최측근 용사 삼십칠 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 삼십칠 인의 용사는 다윗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전쟁 영웅들입니다.
거기에 우리아가 포함됩니다.
또 밧세바가 엘리암의 딸이라고 하죠.
삼십칠인의 명단에 엘리암도 들어갑니다.
특히 엘리암이 아히도벨의 아들이라고 나옵니다.
아히도벨은 모략과 지혜가 뛰어난 다윗의 원로 고문이었습니다.
밧세바가 그 아히도벨의 손녀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다윗이 절대로 건드리면 안되는 여인인 것이죠.
왕으로서 마땅히 이 가정을 존중하고 지켜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던 다윗의 경우는 죄의 갈망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줍니다.
거기에 권력이 합세하면 아무도 막을 자가 없는 것이죠.
다윗의 범죄에 밧세바가 단지 피해자였을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아직 밝은 시간에, 왕궁에서 내려다보이는 장소인 줄 알면서 목욕을 했다는 것이 석연찮다는 것이죠.
우리가 같으면 어디 그렇게 하겠습니까?
가릴 것 다 가려놓고 하겠죠.
다윗이 한두 번 왕궁 옥상을 거닌 것도 아닐텐 데, 밧세바가 의도적으로 다윗을 유혹한 것은 아니냐는 의문도 타당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할아버지 아히도벨이 책략가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피가 어디 가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밧세바는 아들 솔로몬의 등극을 미루고 있는 다윗을 설득해서 왕자들의 치열한 왕위 다툼 중에 솔로몬을 왕 위에 올린 장본인입니다.
다윗의 명으로 왕궁으로 불려온 밧세바가 순순히 동침에 응한 것 같기는 합니다.
뒤에 보면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겁탈한 사건이 나옵니다.
물론 오늘 다윗의 죄로 인한 심판 중 하나입니다.
그때 여동생 다말이 암논을 설득하며 강경하게 거부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오늘 밧세바에게 그런 기미가 전혀 없는 것과 대비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 책임을 물으시고 이때 태어난 아들이 죽는 엄중한 징계를 하십니다.
그러나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죽은 것은 다윗에게만 고통일 리가 없죠.
밧세바야말로 일주일 만에 아들이 죽었을 때 어미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맛봐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후에 겪는 사별 증후군은 여성이 남성보다 9배나 더 많이 나타난다고 하잖아요?
또 나중에 할아버지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역 때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책사가 됩니다.
어쩌면 자기 집안을 모독한 다윗에게 원한을 가졌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아히도벨은 다윗을 끝장낼 수 있는 유력한 자기의 책략이 압살롬에게 거부 당하자 모욕감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와 자결을 합니다.
밧세바 주변에서 일어난 이런 일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일말의 책임을 밧세바에게 돌리신 것 같죠.
마태복음 예수님의 족보에 밧세바를 끝까지 우리야의 아내라고 표현한 것도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3. 다윗은 결국 밧세바를 데려와 동침을 하고 밧세바는 임신합니다.
사람마다 기질적으로 쉽게 빠지는 죄가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사기죄를 짓고 복역했던 사람은 또 사기죄로 들어가죠.
금은방을 턴 사람도 보면 나와서 또 금은방으로 가더군요.
성범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독에 잘 빠지 기질도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식 투자도 중독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도박이나 마약 같은 약물에 빠진 뇌와 주식에 빠진 뇌의 모양이 똑같다고 합니다.
성중독 같은 경우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에 있을 때 그 좋았던 기분이 기준이 되다 보니 계속 이성과의 그런 관계를 쫒아 다니게 됩니다.
다윗에게 기질적인 약점 중에 이 성적인 취약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왕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아내와 후궁을 두었잖아요?
우리도 내게 어떤 약점이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넘어지기 쉬운 부분, 내가 남들보다 더 죄성이 강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질투심이 강하거나, 이성에 약하거나, 말을 함부로 한다거나, 게으르거나, 거짓 언행을 쉽게 한다거나, 과장되거나, 인정욕구가 지나치다거나, 세속적인 쾌락에 잘 빠지거나.
내 약점과 단점을 잘 파악해야 큰 시험에 빠지는 걸 방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환경을 만들지 말고 피하면 그 약점으로 큰 사고가 나는 걸 미리 관리할 수 있는 것이죠.
사실 약점이 아닌 것에서는 사고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밧세바가 임신까지 했으니 이제 다윗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는 일단 내 맘대로 짓지만 죄의 결과는 내 맘대로 수습되지 않습니다.
사소한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한마디 섣불리 했다가 큰 곤욕을 치러야 할 때도 있습니다.
다윗은 그동안 얼마나 성군으로서의 이미지를 쌓아왔습니까?
충신의 아내를 건드려 아이를 갖게 했다는 걸 국민들이 안다는 게 끔찍하죠.
그냥 막 살았던 사람이 아니어서, 잃을 게 너무 많은 것이죠.
위기에 빠진 다윗은 죄로 죄를 덮으려고 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 죄로 덮으려는 게 최악입니다.
그나마 만회할 기회를 놓치고 죄가 눈덩이처럼 커지게 되는 것이죠.
이 일을 은폐하기 위한 다윗의 소행이 점입가경으로 펼쳐집니다.
다윗이 궁리해 낸 것은 전쟁터에 있는 우리아를 데려와서 아내와 동침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아이를 우리아의 아이로 둔갑시키려는 것이죠.
요즘 나오는 막장 드라마와 비슷하게 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게 다 인간의 머리에서 똑같이 나오는 치졸한 생각입니다.
사람이 고상한 것 같지만 궁지에 몰려보면 다 이런 것 밖에 안 나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우리아에게 다윗은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요압은 어떤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목적은 딴 데 있으면서도 딴청을 피우는 다윗이 좀 가증스럽죠?
사실 다윗의 이런 성격이 성경 여기저기서 조금씩 내비칩니다.
이런 꿍꿍이를 부리고 있는 것이 다윗 뿐입니까?
어딘지 익숙한 모습은 아닌가요?
다윗은 마치 포상휴가인 듯 우리아를 집으로 보내며 왕궁의 음식까지 하사합니다.
그런데 아침에 보고가 올라오는데, 우리아가 집으로 가지 않고 군인들 틈에서 잤다는 것입니다.
다음 날은 다시 우리아를 불러 술을 진탕 먹여 취하게 만듭니다.
취하면 집으로 들어가지 않겠냐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나 이번에도 우리아는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술 취한 우리아가 맨 정신인 다윗보다 더 훌륭합니다.
다윗이 왜 집으로 가지 않았냐고 묻자 11절에 다윗에게 말하죠.
‘언약궤와 요압과 군인들이 다 야영 중에 있는 데’ 어떻게 나만 집에서 아내와의 시간을 갖겠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계속 간악하고 비열해지는 데 비해 시종일관 우리아는 자기의 본분과 신의를 지킵니다.
결국 다윗은 가장 악랄한 카드를 꺼냅니다.
적진 깊숙이 들어가 우리아를 고립시켜 전사하게 하라는 편지를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냅니다.
이게 이스라엘이 최고의 선왕으로 존경하는 다윗입니다.
다윗을 욕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렇게까지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아는 다윗의 편지를 요압에게 전해 주고 전사 아닌 전사를 당합니다.
어떻게 의인 우리아가 다윗의 쾌락의 희생양이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씁쓸하죠.
하나님은 왜 의로운 우리아가 억울하게 죽게 두셨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그의 의로움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 살아있습니다.
그러니 이 땅의 결과만으로 우리가 성급히 판단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애곡기간이 끝난 밧세바를 데려와 아내로 삼습니다.
죄가 완벽하게 은폐가 되었을까요?
아니요, 이렇게 역사서에 기록될 만큼 온 나라에 다 알려졌습니다.
또 이 모든 것을 지켜 보신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27절,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이 일의 결과는 다음 장에서 하나님의 엄중한 징계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처럼 쫒아내지 않으십니다.
사실 다윗의 이런 잘못은 사울왕보다 더 나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왕조를 계속 유지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앞 7장에서 다윗과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집이 잘못해도 사울에게서처럼 왕조를 뺏지는 않는다고 하셨었죠.
그러나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뒤에 계속되는 다윗 인생의 큰 환난을 예견할 수 있는 것이죠.
다윗에게 징계가 없었다면 그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실패는 사람에게는 형통만 있으면 안되고 시련도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그로 인해 호적을 파버리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한 언약으로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단 인간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원수가 될 사람과 환난을 일으킬 사건이 무수히 많습니다.
계속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들고 일어나게 내버려 두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1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말씀을 마칩니다.
밧세바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한 리더들의 윤리적인 실패를 말합니다.
그래서 성공 안에는 이미 실패의 요인이 담겨있다는 말이 있는 것이죠.
내가 여전히 힘든 골짜기를 가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를 낮추시고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이니 낙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길이 평탄하고 큰 문제가 없다면 오늘 다윗을 보고, 더 의지적으로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동행하기를 힘써야 됨을 깨닫고 행하시길 바랍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이 밧세바에겐 졌습니다.
외부의 적이 있었을 땐 하나님을 의지해서 이겼는데, 내부의 적에겐 다윗이 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내부의 적은 우리 본성에서 나온 것이라 적으로 잘 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죠.
우리 성도들의 삶은 경건을 중단하는 순간 본성의 죄에 빠지게 됩니다.
왜 영적으로 늘 긴장하며 살아야 하나,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좀 편히 살면 안되나, 다윗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젠 나도 좀 긴장 풀고 마음 편히 살아도 되지 않나?
하나님 없이 사는 게 행복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뭐하러 예수님을 보내셔서 구원을 하셨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똑같이 믿는다 해도 이 땅에서 죄를 이기며 능력있게 사는 성공의 방법은 끊임없는 경건, 나를 쳐서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다윗같이 연단 되고, 다윗같이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어떻게 이리 쉽게 무너지는지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해야 합니다.
믿음에 있어서는 쉬어가는 만큼 실패합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고 힘들 때나 평탄할 때나 더 주님을 찾고 동행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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