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0aWlHGU-hTo
우리가 몰래 지은 죄가 발각된다면 큰일이겠죠.
다윗이 밧세바의 일을 숨기려고 우리아를 죽인 죄는 발각되지 않고 끝난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때 임신했던 아이가 태어납니다.
다윗궁에 웃음꽃이 만발했겠죠.
가해자가 법망을 피해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살고 있다면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공분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다윗의 죄를 물어 법정에 세울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이 나단선지자를 보내셔서 다윗을 문책하고 벌을 내리십니다.
만일 다윗에게 죄를 묻지 않으셨다면 다윗은 죄를 가진 채, 끝내 모두에게 수많은 악한 왕들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었겠죠.
죄인에게는 죄가 드러나는 게 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드러나고, 죄를 시인한 사람이 용서를 받기 때문입니다.
죄 지은 것을 모르는다면 용서가 무색한 것이잖아요?
오늘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죄와 형벌, 그리고 용서에 대해 살펴 볼 때 큰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나단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들고 다윗을 찾아옵니다.
1) 나단은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죄 문제를 꺼내지 않습니다.
지금 다윗의 양심은 자기 합리화와 하나님과의 절연으로 인해 무뎌질 대로 무뎌진 상태입니다.
나단은 다윗의 양심을 일깨울 아주 손쉬운 이야기부터 꺼냅니다.
나단은 마치 어느 마을에서 있었던 사건인 양 한가지 이야기를 꺼내죠.
그 마을의 큰 부자가 손님을 대접하는 데 자기 양이 아까워서 가난한 사람의 양을 뺏어서 썼다는 것입니다.
그 양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유일한 양이고 자식같이 사랑했던 양이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윗이 천벌 받을 자라고 진노합니다.
‘그런 자는 죽어 마땅하다, 뺏은 양은 네 배로 갚아야 한다’
나단선지자의 이야기는 오래전 다윗이 양을 돌보던 그때의 기억을 불현듯 떠오르게 했을 것 같습니다.
양 한 마리를 구하려고 사자에게 달려들었던 어릴 때로 돌아간 듯, 양을 뺏긴 사람의 심정으로 부자의 죄를 심판하고 있는 것이죠.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단의 손가락이 다윗을 가리킵니다.
7절, 당신이 그 사람이라
다윗은 순간 얼어 붙었을 것입니다.
2) 그리고 하나님은, 어쩌면 다윗이 잊고 싶었던 과거의 초라함과 광야의 시간으로 필름을 되돌리십니다.
양을 치던 비천한 다윗을 하나님이 찾으셔서 기름을 부으셨고 사울의 손에서도 건져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왕이 누리던 모든 것을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아마도 나단이 이 말을 할 때 실제로 다윗의 머리 속에 그때 모습들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보여주셨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택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목자이신 이 나라를, 그렇게 성실하게 양을 돌보았던 다윗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양을 절벽에서 떠밀어 죽이는 목자가 된 것이죠.
3) 다윗이 헷사람 우리아를 죽인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이라고 하십니다.
9절,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10절,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다윗은 사람에게 악행을 한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경외했던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졌다는 게 우리를 두렵게 하죠.
인간의 본성 속에 하나님을 무시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간음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교묘하게 궁리에 궁리를 하며 우리야를 죽이잖아요?
우발적으로 죽인 것도 아닙니다.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처럼 하나님 면전에서 악을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무서운 반역이고 교만이죠.
신자들이 마치 하나님이 안 보시는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마음이 나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와 선의의 인도하심을 업신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에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악을 행한 다윗에게 두려운 심판이 내려집니다.
1) 10절,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칼로 살인한 죄 값을 네 집에서 일어날 칼부림과 분쟁으로 되갚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11절,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겠다고 하십니다.
남의 아내를 뺏었으니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어 백주에 동침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다윗의 왕권에 큰 격변을 예고하시는 것이죠.
신자들은 지금은 은혜로 구원받은 시대이니 이런 벌은 구약시대에나 해당 된다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벌이 따르지 않는 죄는 이 세상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지은 죄를 세상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먼저 징계받는 것이 더 낫습니다.
나단이 전하는 두려운 심판에 다윗은 고뇌하며 즉시 죄를 시인합니다.
13절,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나님이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라고 우리를 가리키시면 빠져나갈 생각도 못합니다.
거기서 변명을 하거나 화를 냈다가는 당장 벼락을 맞아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입니다.
2) 다윗이 자기 죄를 처절하게 회개하며 쓴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시편51편의 제목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그런데 이 시편에서 우리는 다윗의 기가 막힌 죄인식의 도약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자기 죄를 깨닫는 데 그 수준이 어디까지 가는지 놀라운 고백이 나옵니다.
5절,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이 자기가 한 짓이 얼마나 악랄하고 비열한지 통탄에 빠져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악한 자가 되었지?
밧세바를 범할 때인가?
왕이 되었을 때인가?
사울에게 쫒겨 다닐 때는 내가 과연 의로웠나?
베들레헴 아버지 집에서 양을 칠 때는 죄가 없었나?
그렇게 자기 속에 있던 죄를 역추적해 보았더니 기가막힌 걸 알게 된 것이죠.
내가 기억하는 모든 날 동안에 나는 죄인이었구나.
그렇다면 이미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해서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고 악인이었구나라는 결론을 얻은 것이죠.
한번 내가 몇 살부터 죄를 지었는지, 내 마음이 언제 선이 아니라 악으로 기울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나에 대해서는 기억을 못할지 모르겠지만 자식을 키워보면 알죠.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
성령께서 놀랍게도 다윗에게 근본적인 원죄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 최초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죄인이라는 것이 다윗의 입을 통해 진술되는 것입니다.
그 죄의 본성이 다윗 같은 보통사람에게도 이런 무서운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이죠.
다윗은 아마 밧세바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자기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죄인이라는 걸 몰랐을 것입니다.
도덕적인 죄에서부터 하나님이 우리 원죄를 깨닫게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에 호주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목사님 얘기를 들으면 감옥에서 전도하면 제일 좋은 게 ‘당신 죄인이다’라고 하면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짜 죄를 짓고 감옥에 왔으니까요.
죄지었으니 천국 가겠냐, 지옥 가겠냐 하면 다 지옥에 간다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감옥을 경험했기에 지옥도 인정한다는 것이죠.
죄수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물론 근본적인 차이가 있지만 일단은 복음에 귀를 기울인다고 합니다.
구원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이잖아요?
복음을 믿으려면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인정해야만 그 속죄의 의미가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한때는 승려였고, 울산대 법학과 교수였고, 지금은 목사가 된 분의 이야기가 이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분이 불교에 심취하다 보니 가장 눈에 거슬린 것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다 서로를 인정하는 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잖아요?
뭘 믿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당당한지 괘씸해서 기독교를 우리나라에서 싹 다 없애버려야 한다는 목표를 세웁니다.
이분이 법학자다 보니 종자연이라는 단체에 속해서 종교에 대한 법안을 만들고 국회에 제출하는 일을 합니다.
당시 미션스쿨에서 필수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공직자의 선교활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저도 교사 시절에 성경연구반이라는 동아리를 운영했었는데, 어느날 학교에서 종교연구반으로 이름을 바꿔야 할 것 같다고 했던 일이 있습니다.
이분이 기독교를 더 완벽하게 파괴하기 위해 기독교에 불리한 차별금지법을 준비합니다.
지금은 자기가 준비했던 그 차별금지법의 폐지 운동을 벌이고 있지만요.
그때 법안을 만들며 적을 알기 위해 성경을 샅샅이 연구하고 기독교방송의 설교도 계속 들으며 모니터를 합니다.
공부를 하다 좀 쉬면서는 항상 기독교TV를 보았다고 합니다.
목사님들의 설교를 비평하며 ‘저러니 기독교가 틀렸다’
기독교를 욕하며 설교를 듣는 게 아주 즐거운 일과였다고 합니다.
나중엔 ‘내가 설교해도 저것보다는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그날도 방송을 보며 비판을 시작합니다.
마침 설교하는 목사님이 평소에 점잖아서 그래도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톤을 높여 ‘인간은 다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죄인입니다’라고 강조합니다.
‘또 죄인 타령이구나’ 말하는 순간 입과 온몸이 굳어 버립니다.
전혀 믿지도 않았던 하나님이 그냥 자기를 압도해 버리는 경험을 한 것이죠.
그다음은 ‘내가 죄인이구나’ 그게 몇 초 상관도 안되서 연달아 깨달아집니다.
그러자 ‘난 망했다. 하나님 앞에 죄 값을 다 치러야겠구나’ 이게 저절로 알아집니다.
두려움에 꼼짝 못하고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만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동안 연구했던 예수님의 십자가가 딱 매치가 되는 것입니다.
‘아,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이구나.’
심판의 공포와 두려움이 그 십자가가 믿어지는 그 순간, 완전한 기쁨과 평안으로 바뀝니다.
그것이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그날 기적같이 깨달아지고 믿어지고 경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떨떨하게 밖으로 나왔는데, 세상이 이전의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이 그렇게 찬란한 줄 처음 알았다고 합니다.
이 분의 극적인 회심은 마치 바울사도가 회심했던 것과 비슷하죠.
예수님을 믿을 때 이렇게 극적인 경우는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분이 믿음을 갖게 된 과정은 중요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기독교 구원의 전반적인 교리들을 다 알았죠.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님과 죄를 깨닫게 해 주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 죽을 것을 깨달았고, 그것에서 구원해 주시는 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라는 게 믿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그런 믿음이 보통은 한번에 생기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성경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갑니다.
그러면서 성령께서 오늘 다윗에게 나단의 손가락으로 죄를 지적하듯이 말씀을 통해 조금씩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내 죄를 아는 만큼 십자가의 대속도 알아가게 됩니다.
신기한 것은 죄에는 더 예민해지는 데, 내가 죄인임을 알면 알수록 마음은 더 편해집니다.
이 말은 백지0가수가 했던 말입니다.
죄가 깨달아지면 십자가가 믿어지니 오히려 더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이죠.
아직도 주님의 십자가가 내 몸에 착 붙지 않는 것 같다면 내 죄에 대해서도 그만큼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죄가 주님의 끔찍한 십자가 죽음만큼 크다는 것까지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단지 거짓말 가끔 하고, 술 담배 좀 하고, 청렴하지 않은 것, 그 정도 죄 때문에 예수님이 그 쳐다보기도 끔찍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을거잖아요?
우리의 깊은 속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빛으로 탐사하셔서 본질상 죄인인 우리 모두를 점점 더 깨닫게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하나님은 회개하는 다윗을 용서해 주십니다.
13절,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그런데 다윗이 받을 벌의 양을 보면 어마어마합니다.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고, 재앙을 내리시고, 아내들을 뺏길 지경이 되고, 거기다가 태어난 아이까지 죽게 됩니다.
이 정도면 벌을 다 받는 것이지 용서를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1) 하나님이 다윗을 용서하셨다는 것은 다윗과의 근본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그런 죄를 저질렀다면 관계가 끝나야 맞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다윗과의 언약을 통해 오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셨다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는 게 그런 뜻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예수님이 죄값을 이미 치르셨기에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2) 죄가 가져오는 이 세상의 결과까지 없애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아가 죽은 것은 다윗의 죄의 결과물입니다.
우리아의 죽음을 어떻게 없는 것으로 만드시겠습니까?
결과를 완전히 없애주시려면 우리아를 다시 살려내셔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물을 그래서 완전히 없애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3)죄를 짓고 하나님이 무조건 다 용서하시고 벌도 없다면 누가 죄에 대해 경각심을 갖겠습니까?
오늘 다윗이 받을 벌은 사실 하나님이 내리시기 보다는 다윗의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것입니다.
간음하고, 충신을 죽이는 잔인한 배신자 다윗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그걸 본받는 행위를 한 것이죠.
그래서 자식들이 서로 죽이고, 이복여동생을 겁탈하고, 아버지에게 반역하고, 충신들이 배신해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죄는 스스로 자기 몫을 한다는 걸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더구나 다윗은 자기 한 사람이 아니고 다윗의 타락은 온 국민들의 타락입니다.
징계를 통해서라도 그런 악이 나라에 퍼지는 걸 막아야 하는 것이죠.
4) 다윗 같은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을 죄로부터 제어하려면 평생 그 정도의 시련이 필요합니다.
성공한 사람, 재벌, 최고 권력자, 이런 사람들을 통제할 법은 없습니다.
푸틴을 누가 통제할 수 있고 일론 머스크를 누가 통제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통해서만 통제가 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지난 주 한블리에 십여 년 전 인기 최정상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한 가수가 나왔습니다.
교차로에서 난 사고로 목 이하 전신마비가 됩니다.
뒤통수, 허리, 엉덩이까지 욕창으로 썩어가는 중에 일주일에 세 번씩이나 살을 긁어내는 치료를 받으며 수년간 병원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목 아래 부분으로는 아무 감각이 없으니 노래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죠.
그런데 아버지가 이 아들이 노래도 못하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병실에다 계속 노래를 틀어 놓습니다.
노래를 들으며 어느새 할 수만 있다면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다시 생깁니다.
아버지가 혁건씨의 배를 눌러주면 다행히 이전 같은 소리가 나왔습니다.
노래하는 동안 손으로 계속 눌러줄 수는 없죠.
배를 자극해서 복압을 높여주는 의료기기를 특별제작해서 지금 다시 노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전에 간증 프로에 나왔습니다.
MC주영0씨가 혁건씨에게 고난은 무엇이냐고 묻더군요.
혁건씨 대답이 ‘고난은 나의 구원입니다’
이것이 대답이었습니다.
사고가 없었다면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 테고 구원받지 못했을거라는 것이죠.
또 지금 전신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살지만 그래도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렇게라도 살고 있고, 나같이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며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고나기 전의 혁건씨 영상과 최근 영상을 비교해 보니 사람이 얼굴이 완전히 달라졌더군요.
그렇잖아도 과거 팬들이 왜 그렇게 교회오빠 같아졌냐고 한답니다.
좋은 환경, 내 편에 있는 사람이 우리 믿음을 강하게 하고 바른 사람으로 다듬어 가는 게 아닙니다.
지긋지긋한 병, 쪼들리는 가난한 생활, 풀리지 않는 인생. 사람의 굴레.
그런 것들이 조금씩이나마 더 나은 믿음의 나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사실 그런 고통이 오면 죄의 본성이 더 드러납니다.
고난을 믿음으로 의연하게 이겨내기보다는 악쓰며 버틴다는 게 더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래도 그때 내가 성숙해졌고, 그런 상황들이 반복되며 내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믿음을 버리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죠.
다윗의 인생에 길게 이 형벌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유이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혁건씨와 같이 평생 견뎌야 하는 안타까운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도들에겐 또 특별한 위로와 은혜로 그걸 견디게 하시는 것이죠.
생명체들을 정밀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정말 정교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조정경기 같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조정경기를 보면 진행 방향을 등지고 노를 젓잖아요?
앞에 있는 걸 보면서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지나온 길을 보면서 가는 것이죠.
우리가 지나 온 방향을 보면 그때 내가 가장 비참했던 그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은혜가 보이잖아요?
징계와 또 여러종류의 시련들이 과거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오늘의 나를 만든 것입니다.
5)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죽은 것은 하나님의 징계하고는 좀 다릅니다.
14절,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아이가 죽어야 다윗의 죄에 대한 원수의 비방이 그친다는 것입니다.
원수는 누구일까요?
이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대속 이전에, 성도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늘 고발하던 사탄과 악의 세력들일 것입니다.
다윗의 살인죄, 간음죄는 본인의 죽음으로 갚아야 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셨지만 사탄은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심판을 청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 대신 다윗의 아들이 죽었다는 결론이 나오죠.
구약성경에서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다른 누군가가 죽을 수 있다는 대속의 이치를 여기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완전한 속죄는 물론 먼 훗날 자기 후손 중에 오실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다윗은 당시로는 마치 미스테리 암호 같은 메시야에 대한 시편을 여러 편 지었습니다.
그 중 시편110편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이것을 해석하며 자신에 대해 알려주시죠.
‘이 시편은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의 영광을 다윗이 예언한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 후손에게 내 주님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 때문이냐’
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지만 그 분은 다윗의 주님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오늘 다윗이 낳은 아이의 죽음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다윗만이 그 의미를 깨닫고 메시야 시편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죄는 끔찍했고 그 징계는 뼈아픈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도 복음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죄가 넘친 곳에 은혜도 넘친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득히 멀어진 분들이 있습니다.
나단선지자 같이 다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사람과 죄는 죽을 때까지 함께 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죄로 인한 징계와 죄로부터의 성결을 위한 여러종류의 고난도 끝까지 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말씀과 성령께서 항상 우리의 죄를 일깨워 주시길 원합니다.
남을 정죄하는 순간‘ 그 사람이 바로 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길 원합니다.
그때 우리가 속에 감춰졌던 나의 죄성을 깨닫고 예수님의 대속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죄에서 돌아섬으로써 죄의 쓰라린 열매까지는 맺지 않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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