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사무엘하24장1절-25절) 다윗의 인구조사

남수연 2024. 3. 21. 16:43

https://www.youtube.com/watch?v=Mj1Q5LHPVdA

 

오늘 사무엘하 마지막장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다윗에게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다윗의 자손 중에 한 사람을 보내 영원히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게 하시겠다는 다윗언약이죠.

이것만 잘 기억하시면 가장 중요한 걸 챙기신 것입니다.

오늘 사무엘서의 마지막 역시 다윗의 자손에 대한 아주 중요한 정보를 터트리고 막을 내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해답인 다윗의 자손, 예수님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깨닫는 은혜를 충만히 주시리라 믿습니다.

 

다윗의 편안한 말년에 인구조사라는 또 한 번의 큰 사고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이 명령한 인구조사, 하나님의 징계, 속죄제사로 구분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다윗은 자기가 다스리는 이스라엘의 인구 규모를 조사하고 싶었습니다.

1) 그것이 왜 죄가 된다는 것일까요?

왕이라면 당연히 국민의 인구수와 병력 규모 같은 것을 알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미의 인구조사는 이스라엘에서 허용되지 않은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이래 인구수를 조사한 것은 지금까지는 단 두 번입니다.

한번은 출애굽을 한 뒤 시내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조사하라고 하십니다.

또 한번은 광야 40년을 끝내고 가나안땅 정복을 앞두고 실시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인구수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실시되었습니다.

인구조사를 할 때는 한 사람당 반 세겔씩의 속전을 내서 성막 봉사에 사용되게 하셨습니다.

속전은 말 그대로 속죄를 얻기 위한 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은혜이지만 죄인인 사람들은 속전이라는 대속의 댓가를 드려야 하는 것이죠.

죄인이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으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인구조사의 속전은 예수님의 대속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6절에서 말씀하시죠.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께 속죄의 값을 치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인구조사엔 이십세 이상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만 포함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전쟁을 수행할 군사력을 조사하는 것이죠.

특히 가나안땅 입성 전에 이뤄진 두 번째 인구조사는 정복전쟁으로 얻은 땅을 각 지파에 나눠주고, 나라의 행정 조직을 갖추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의 인구조사는 그런 취지에서 이뤄지지 않았죠.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도 받지 않았고, 속전도 걷지 않았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전쟁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신데, 다윗이 자신의 분수를 넘어간 행동을 한 것이죠.

 

2) 그렇다면 다윗은 이런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인구조사를 했을까요?

이 사건이 좀 미묘한 것은 1절 말씀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먼저 하나님이 진노하셨고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다윗의 마음을 움직여 인구조사를 하게 하셨다는 것이죠.

1) 여기서 먼저 풀어야 할 의문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냐는 것인데 성경엔 그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단서는 다시라는 말에 있습니다.

이전에도 진노하신 적이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사울왕이 기브온부족들과 맺은 생명의 조약을 깨고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던 것으로 인해 삼 년 가뭄이 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또 다시 백성들에게 징계받을 일이 있었다는 것이죠.

사실 사울왕이 기브온주민들을 죽였는데 왜 백성들이 기근의 징벌을 받아야 했는지도 의문이 들죠.

기브온 조약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이스라엘 민족이 기브온민족을 보호하겠다는 언약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의 당사자니까 누가 어겼든 언약을 깬 책임이 있는 것이죠.

그리고 오늘 다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징계하시는 것도 언약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언약을 맺으셨고 백성들은 다윗왕조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건너뛴 앞의 내용 중에는 두 번의 반역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사울왕의 지파인 베냐민 사람 세바의 반역입니다.

이들이 반란 때 이스라엘 사람들 대다수가 그 반란에 가담합니다.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신하는 행위인 것이죠.

그 언약을 배신한 사람들을 징계하시는 의도가 이 인구조사와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인구조사를 할 때는 반드시 속전을 걷어서 전염병을 막으라고 하셨거든요.

속전 없이 계수가 되었으니 언제든 전염병의 징계가 내릴 수 있는 것이죠.

 

2) 그렇다면 다윗은 백성들을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이용당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10절을 보면 인구조사를 하고 나서 다윗이 자기 잘못을 깨닫죠.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렇게 죄를 회개하잖아요?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고 정신을 차린 뒤, 하나님이 왜 나한테 이런 일을 시키셨냐고 따지지 않죠.

마음으로 인구조사를 오래 계획했다는 것을 본인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의 자율적인 의지가 상호 작용해서 어떤 일들이 이뤄지는 것은 신앙 안에서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거의 그렇게 이뤄지고 있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우리 인생에 끼어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인구조사가 기록되어 있는 역대기를 보면 거기는 사탄이 다윗을 충동했다고 나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려는 마음을 사탄이 더 부추겼다는 것이죠.

우리가 죄지을 마음에 마귀의 충동까지 있는데 누가 죄를 막겠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우리의 죄성에서 나오는 악한 마음들을 억제하시고 마귀의 충동으로부터도 보호해 주시는 것이죠.

그러나 어떤 계획이나 어떤 죄는 이번처럼 그냥 일어나게 두십니다.

그 호된 결과를 통해 죄인 됨을 인정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연단하시고, 더 성숙한 믿음으로 이끄시는 것이죠.

인구조사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오래 전부터 다윗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르며 나라를 지켜냈습니까?

그러니 그동안 인구가 얼마나 늘었는지, 군사력은 얼마나 강해졌는지, 당연히 궁금했겠죠.

자기 수고와 고생에 대한 보상과 인정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 다윗이 나이가 들어가며 군사력을 의존하는 마음도 커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돈이 힘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힘 없어지고 하나님과 결속력이 떨어지면 눈에 보이는 것들, 현실적인 것들을 더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젊은 시절 다윗은 아무 것 없어도 골리앗을 상대할 만큼 담대했잖아요?

우리 믿음도 청년기 장년기만 있는 게 아닌지라 다윗의 마음도 이해가 됩니다.

사실 다윗은 지금 가장 안전하고 부강한 나라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군대장관이 인구 조사하러 아홉달을 넘게 돌아다녔다는 것은 사방에 이스라엘을 넘볼 나라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군사력을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봤자 그 군사들이 과거 압살롬을 따랐고, 세바의 반역을 따랐던 사람들이잖아요?

저는 지난 주 통영 욕지도 앞 바다에서 배가 전복해 세 분이 숨진 사고를 보고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평소보다 정어리가 많이 잡혔다고 합니다.

고기가 많으니 잡다가 시간도 더 걸리고 무게도 늘어난 것이죠.

빨리 위판시간에 맞추려고 배 밑에 싣지 않고 급히 갑판에 실었다가 배가 균형을 잃고 전복되었다고 하더군요.

고기가 많이 잡혀서 그날 선원들이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그런데 다른 날보다 더 많이 잡힌 고기가 화근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인생이 참 냉혹하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죠.

내가 기른 군사들이 언제 내게 창을 겨눌지 모르고, 의지했던 것이 오히려 나를 덮칠지 모르니 인간이 얼마나 불쌍하고 연약합니까?

나를 지켜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데, 그래도 뭔가를 자꾸 확인하고 의지하는 게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보이는 힘을 의지했다는 것은 사실 우리들 모습 아니겠습니까?

 

3)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령하자 요압장군이 반대를 합니다.

요압은 묘한 인물이죠.

다윗 생애의 큰 사건에 요압이 항상 등장합니다.

3,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하나님의 명령 없이 인구조사를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요압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요압이 하나님을 내세워 인구조사를 반대하는 것 같지만 그럴까요?

우리아를 죽이라고 할 때는 두 말도 안했잖아요?

우리아가 다윗에게 불려 갔을 때 벌써 뒷조사를 다 했던 것입니다.

다윗 통치 후반기엔 모든 전쟁은 실제적으로 요압이 다 합니다.

요압은 명실상부 이스라엘 병권을 장악한 일인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이 이제 와서 왜 병권에 관심을 갖는지 불만이 없었을까요?

아무리 왕이라도 국방은 건드리지 못한다고 자부했을텐데요.

다윗의 독촉에 요압은 할 수 없이 전국을 돌며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10개월이 다 되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요압은 조사한 군사의 수를 백삼십만 명이라고 보고합니다.

그런데 역대기에 보면 요압이 다윗을 미워해서 베냐민 지파와 레위지파의 숫자를 빼고 보고했다고 기록합니다.

신하라면 왕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지 자기가 왜 왕의 계획에 딴지를 놓습니까?

사람이 신앙을 내세우든 정의를 내세우든 결말을 보면 그가 무엇을 쫒았는지가 드러납니다.

요압은 이후 아도니아 왕자의 반란에 참여해 다윗의 대적이 됩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왕이 된 뒤 그동안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흘린 죄를 물어 요압을 죽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통치 기간 전체에, 다윗과 가장 가까이서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요압의 입은 항상 하나님을 내세웠지만 속마음은 항상 자기 실리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았다고 성경은 평가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나라에서 제외된 요압의 결말도 교훈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내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는 게 아니라 그게 곧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2. 다윗이 인구조사에 대해 잘못을 뉘우칩니다.

10,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1) 다윗은 원하던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가나안 입국 때 장정 육십만 명이 백삼십만 명이 되었으니 두 배가 넘게 부국강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원하던 결과를 받고 나니 자책감이 들고 죄를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달려가죠.

그러나 막상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만족보다 허무한 마음이 든다는 것은 심리학에서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에 암논이 다말을 범하고 나니 오히려 관계에 염증을 느끼잖아요?

백지0 가수가 전성기 때 무대를 하고 나면 출연료로 돈다발이 가득 담긴 쇼핑백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돈이 계속 들어오니까 나중엔 돈에 대한 개념이 없어지더랍니다.

어떤 연예인이 태국에 가서 맛사지를 받고 팁을 주는 데, 얼마를 줘야 할지 몰라서 한 달 월급만큼 줬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십만 원도 값어치가 있잖아요?

백만 원이 생기면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 사람들도 자기 욕망을 다 채우면 허무한 데 믿는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내 기분대로만 해도 곧 자책감이 들죠.

상대방에게 팩폭을 날렸는 데 시원하기는커녕, 후회만 남죠.

좀 더 참아야 했는데, 비판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런 자책감 들잖아요?

다윗은 갈망하던 것을 얻으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얻은 것은 죄책감과 후회였습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걸 구해야 그게 복이 되고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회개하는 다윗에게 갓선지자를 보내셔서 죄에 대한 징벌을 내리십니다.

징벌은 심판이 아니라 용서하셨다는 뜻입니다.

징계를 통해 더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세 가지를 제시하고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징벌에서 이랬던 적은 없는 데 이것도 좀 의아하죠.

징계는 칠 년 기근과 다윗이 석 달 동안 원수에게 쫒기는 것, 나라에 사흘간 전염병이 도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느라 곤혹스러워 합니다.

그리고 사람 손에 빠지는 것보다 하나님께 벌을 받는 쪽을 택하겠다고 하죠.

우리는 이게 뭔 소리인가 싶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전염병을 택했다는 것을 아셨기에 전염병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 다윗의 선택으로 이스라엘 전역에 전염병이 돌아 7만명이 죽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전염병을 택할 것을 아셨을까요, 모르셨을까요?

당연히 아셨죠.

이 사건이 백성들에 대한 징계도 되는 것이기에 백성들에게 이 직접적인 징계가 돌아가는 게 맞는 것입니다.

그래야 백성들도 하나님을 두렵게 알고 다윗왕조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옵션을 주신 이유가 있을까요?

다윗은 백성들이 순식간에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쓰러져 가는 걸 보며 자기 이기적인 선택을 후회합니다.

그냥 전염병만 보내신 것과는 다윗이 느끼는 책임감의 무게가 엄청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라고 목자로 세워주셨는데, 자기가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잖아요?

또 이스라엘이 범죄한 것은 다윗이 그들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잘못도 됩니다.

단지 외적의 침입 없고 끼니걱정 없이 편하게만 살면 양이 복된게 아닙니다.

편해지니까, 다른 데 더 좋은 게 있나 다른 사람 따라간 것이잖아요?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게 양을 잘 이끄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양은 어떤 양입니까?

목자를 따라가며 좋은 풀을 먹고, 매일 양젖을 내고, 때때로 양털을 주인에게 드리고, 새끼를 배서 주인의 양떼가 더 많아지게 하는 것이 양에게도 복입니다.

그러지 못하는 양이라면 병들거나 제대로 크지 못했다는 것이죠.

건강한 성도는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잘 따르며 봉사, 헌신, 믿음의 열매들을 하나님께 돌려 드립니다.

그런 복된 주님의 양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 다윗이 수많은 백성들을 어떻게 그런 복된 성도로 이끌 수가 있겠습니까?

나중에 요시야라는 왕을 보면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열정으로 수백 년 우상숭배로 뒤덮힌 땅을 완전히 다 갈아엎습니다.

지칠 줄 모르고 정말 혼자서 신앙개혁을 이뤄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죠.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자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잖아요?

예수님을 사랑하면 양떼를 먹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양떼를 사랑하냐고 묻지 않으시고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사회에서든 목자의 역할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가서 제자를 삼아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예수님을 사랑해야, 사람들에게 실망하거나 지치지 않고, 끝까지 사람들을 섬기고 주님께로 인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끝까지 해내지 못합니다.

다윗이 옛날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충분히 백성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이끌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다윗에게 희생할 옵션을 주셨고, 다윗은 그것을 회피합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이 눈 앞에서 쓰러져 죽는 쇼킹한 광경을 보고 나서야 다윗은 통렬히 회개하고 목자의 사명을 되찾게 되는 것이죠.

17,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역대상을 보면 다윗은 이 사건 이후 열심히 성전 건축을 준비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뒤 드려질 예배를 위해 제사장의 봉사 순서와 찬양대와 성전의 업무 같은 전체적인 틀을 만듭니다.

또 다윗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철저히 당부합니다.

만년에 다시 목자 같은 왕으로 돌아간 것이죠.

 

3. 전염병을 내리던 하나님의 사자가 예루살렘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이르자 하나님이 갑자기 심판을 멈추게 하십니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나쁜 버릇을 못 고치는 자식에게 매를 들었다가, 자기도 그걸 어쩌지 못하는 그 자식을 보며 안쓰럽고 속상해 매를 집어 던질 때가 있죠.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진노를 완전히 그치실 영원한 대속제물을 스스로 준비하신 것입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대체 어떤 곳이기에 그곳을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이 울컥하셨을까요?

뒤에 보면 바로 이 장소에 솔로몬이 성전을 세웁니다.

역대하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모리아산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던 그 산입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도 안되고 황당한 명령을 왜 하나님이 하셨겠습니까?

그 사건의 진짜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제물로 쓰실 것이다

대속을 위해 아들을 보내신다는 놀라운 암시입니다.

그곳이 천년이 지난 지금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되어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여기서 멈추었고, 솔로몬이 이곳에 성전을 짓게 된 것입니다.

마치 성경 말씀이 살아서 어떤 그림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그리고 다시 천년 뒤에 예수님이 바로 이곳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이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키심이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정하시고 수천년에 걸쳐 하나씩 계획을 이루어 오시는 게 보이십니까?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다 다르지만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모두가 예루살렘에서 제물이 되어 구원을 이루실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께서 이 증언을 듣는 우리에게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리키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 구주, 네 하나님이시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하려 했다가 오히려 7만명이란 큰 인명의 손실을 봅니다.

무엇을 의지해야 할지 확실히 마음에 입력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헛된 것을 하나님보다 의지할 때 그걸 거두어 가기도 하십니다.

요압에게서는 겉으로는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속에는 자기의 영광만을 좆는 인간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그런 강한 동기를 항상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까지 살펴본 말씀은 이런 모든 연약한 죄인들을 위해서 다윗의 자손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은 예루살렘이라고 장소까지 정확히 공개해 주신 것이죠.

그 곳에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참성전을 지으신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배운 대로 믿고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