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Qf-Sw44qhSI
다윗의 가정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어느 기사를 보니 한 유명 연예인이 자기는 결혼을 못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주변에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못 봤다는 거예요.
세상에 많은 가정엔 작은 불화부터 시작해 폭력과 살인까지 일어납니다.
작년에 경북 영주에서 친여동생을 성폭행한 20대 오빠가 12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초등학생이던 여동생을 고교생 때부터 5년간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했다고 합니다.
동생은 이 사실을 부모에게 말했지만 부모는 외면하고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학교 성폭력 담당교사에게 알려져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이복 남매 사이에 파렴치하고 충격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 역시 이 일을 묵인합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왜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지난 주 나단선지자가 다윗의 집안에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을 경고했죠.
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로 오늘 사건에 관련된 암논과 압살롬이 모두 칼에 죽습니다.
만일 다윗이 간음과 살인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이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이 세 명의 자녀들은 자기 결정권이 없이, 정해진 운명대로 따라간 희생제물이었을까요?
오늘 이 부끄러운 사건을 하나님은 왜 기록해서 우리에게 전해주셨을까요?
이런 질문을 갖고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큰 은혜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1. 성경 역사 전대미문의 사건 발생 경위를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범죄와 관련 된 다윗의 자식 세 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다윗에게는 정식 아내가 여덟 명입니다.
그 아내들이 낳은 아들의 수가 열아홉 명입니다.
이미 다윗의 집에 불화는 예견된 것이죠.
그 중 오늘 범죄한 암논은 첫째 부인의 아들입니다.
다윗의 장남이고 왕세자입니다.
둘째 아들도 있지만 정치판에는 나서지 않습니다.
셋째 아들이 압살롬인데, 어머니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그술이라는 나라의 공주입니다.
다윗이 정략결혼을 해서 낳은 아들이겠죠.
피해자 다말은 이 압살롬의 누이동생입니다.
본문이 다말을 다윗의 딸이라고 하지 않고 ‘압살롬에게 누이가 있었다’고 한 것은 이 사건이 압살롬과 암논의 스토리라는 암시입니다.
당시의 관례로 볼 때 장자인 암논이 왕위를 잇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도 장남을 신임했고, 사랑했습니다.
암논은 이스라엘의 차기 왕을 확신하며 스스로 오만방자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압살롬의 여동생인 아리따운 다말에 대해 흑심을 품게 된 것이죠.
본문 4절에서 암논이 다말을 사랑했다고 번역했지만 원어는 성적 관심에 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다말이 아직 처녀인 까닭에 궁중의 규율 속에 보호받고 있었습니다.
자유자재로 누구를 만나거나 바깥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암논이 점점 안달이 나 병이 날 지경이 된 것이죠.
2) 암논에게는 아주 꾀가 많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인 사촌 요나답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장차 암논이 왕이 되면 참모가 될 인물입니다.
요나답의 눈에 암논이 속앓이 하는 게 보인 것이죠.
이복 여동생을 짝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암논의 욕정을 채울 계략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읽은 내용대로입니다.
암논은 그 계략대로 아픈 것을 소문내서 아버지 다윗이 먼저 병문안을 오게 합니다.
이미 한번 아들을 잃었던 다윗은 혹여 왕세자인 암논마저 죽는 게 아닐지 놀라서 달려왔을 것입니다.
그때 암논이 다윗에게, 누이동생 다말이 와서 자기 음식 시중을 좀 들어주면 조금이라도 먹고 기운을 차릴 것 같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암논의 속셈을 모른 채 다말에게 사람을 보내 오라비에게 와서 음식을 차리라고 합니다.
결국 다말을 암논 집으로 부른 것은 다윗입니다.
설마 오누이 간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겠죠.
그런데 뒤에 나오는 압살롬의 보복 사건에서도 다윗이 압살롬에게 속아서 암논을 압살롬에게 보내주는 바람에 거기서 살해당합니다.
이 비참한 자식들의 사건에 희한하게 다윗이 끼어있는 것이죠.
다윗이 아들 두 명에게 철저히 농락을 당한 것입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면 암논도 그렇고, 뒤에 압살롬이 하는 말도 분명히 궁색한 구실인 게 보이는 데 속아 넘어갑니다.
다윗이 왜 그렇게 판단력이 흐려있을까요?
사무엘서 앞의 십 장까지는 다윗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왕 위에 오르고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사실상 가나안땅 국가 전부를 다스리는 최강국 정상이 됩니다.
그때는 다윗과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장면이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밧세바 사건을 기점으로 다윗 신앙이 내리막길을 걸어갑니다.
다윗이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배반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전성기 때 다윗처럼 철저히 하나님을 의존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괴악한 일이 벌어진 것을 듣고 다윗이 심히 노했다고 하지만 암논에게 어떤 벌도 내리지 않습니다.
다른 성경 버전을 보면 암논이 장자였고 다윗이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왕조를 이어받을 사랑하는 장자였기에 죄를 덮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민족을 다스릴 아들이라면 더욱 공의를 깨우치도록 징벌 해야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전의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를 아주 중시했던 사람입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압살롬은 양털을 깎고 잔치를 하는 날에 누이를 욕보인 암논을 초대해 죽입니다.
그리고 외가인 외국으로 도망갑니다.
그때도 다윗이 형을 죽인 압살롬에게 어떤 처벌도 내리지 않습니다.
본장 39절은 오히려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목동이었고, 광야의 도망자였을 때의 다윗은 가진 게 없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했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가장 소중했습니다.
저도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을 때 그때 하나님을 가장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할 때 돈이 간절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보다 더, 예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데 간절했습니다.
그때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자주 그때를 돌아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가 가장 영화롭다는 것이, 지금 모든 부귀를 누리는 다윗의 무력함과 비교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가진 것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자식들과 자기의 왕조를 더 사랑하게 된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주신 것이 복이 안됩니다.
그것들이 가져오는 악의 부스러기들로 삶이 지저분해질 뿐입니다.
헌신과 봉사보다도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회개했고 여전히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을 소홀하지는 않았습니다.
평생 우상숭배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전처럼 하나님을 사랑했던 마음이 식어진 것이죠.
그 결과 비범했던 다윗이 평범한 다윗이 되었고, 자식들에게도 농락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볼 때 자식들은 부모를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무시당하지 않게 늙으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부모의 리더십과 권위는 부모다울 때 자식들이 인정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지위도 그에 걸맞게 살아야 인정받고 존경받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훌륭한 게 어디 있겠어요?
하나님을 힘써 경외하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진심으로 따르며 내 위치를 살아갈 때 점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왕의 자질과 능력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만 의존할 때 가장 빛났던 것입니다.
그것을 잘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마음이 식어지지 않게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저는 그것을 되새기려고 요즘은 ‘하나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해요’라는 말을 일부러 자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는 게 사실 부끄럽지만 그렇게 고백하면 정말 내 마음이 그렇게 주님을 다시 생각하게 되더군요.
성도님들께도 권장드립니다.
3) 암논의 검은 속내를 모르는 다말은 아버지의 명을 받아 암논의 집으로 옵니다.
8절, 다말이 그 오라버니 암논의 집에 이르매 그가 누웠더라
사건의 내막을 아는 우리는 누워 병든 채 하는 암논이 가증하고 꼴보기가 싫죠.
본문에서 누웠다는 단어는 부정적인 성관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암논이 그럴 목적으로 누워있는 것이죠.
본문은 다말이 밀가루를 반죽해서 과자를 굽고 그릇에 담아서 차려내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암논이 여동생을 범하려는 자기 욕망을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암논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밧세바를 넘보면 안된다는 신하의 보고를 듣고도 역시 그랬죠.
육체의 욕망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 불이 자기를 홀랑 태울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리로 뛰어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더 부채질하는 것은 권력이죠.
다윗의 절대적 왕권과 암논의 왕세자 권력이 악을 향한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부추긴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만족스럽고 부족한 여러 가지 여건들이 사실 죄성의 질주를 막는 브레이크라는 것도 알면 좋겠습니다.
4) 결국 다말은 암논의 욕정의 희생양이 되고 맙니다.
다말은 음식을 들고 침실까지 와서 먹여달라는 병든 오라비의 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나 다말은 욕정과 권력욕에 눈먼 암논과 압살롬에 비해 제일 온전한 정신을 가진 소녀였습니다.
12절, 13절에서 다말은 암논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합니다.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패악은 이스라엘에서 있을 수 없다, 나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고 장차 왕이 되어야 할 오라버니에게도 큰 수치다’
그리고 암논을 구스릅니다.
‘차라리 아버지에게 말해서 나를 아내로 달라고 하면 아버지도 허락하실 것이다.’
어떻게든 암논을 설득해서 위기를 벗어나려고 아직 십 대 소녀였을 다말이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암논은 강제로 누이 동생을 겁탈합니다.
그리고 나서 문제가 더 커집니다.
15절,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여동생을 범하고 나니 암논의 마음이 한순간 사랑에서 미움으로 뒤바뀝니다.
그것이 단지 욕정이었기에 욕구를 채우고 나니 흥미가 떨어진 것입니다.
남녀 관계에서 이런 일은 흔하죠.
오히려 누이에게 정이 떨어지고 천하게 보이고 미운 것입니다.
관계 뒤에 싸늘하게 자기를 대하는 암논을 보며 다말은 더 큰 수치와 절망감을 느낍니다.
16절,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쫒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 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17절, 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이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다말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암논이 그나마 이 불행을 책임져 주길 바랬지만 헛된 기대였습니다.
암논은 시작도 잘못했지만 끝은 더 악했습니다.
그런 경우 신명기에선 아내로 삼고 평생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쓰다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그러면 안되잖아요?
사람 함부로 자르지도 말고, 사람 관계 성급하게 끊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에서 없어져야 좋을 사람은 하나님이 끊어 내십니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은 피차 죄인이라 변치않는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지 못합니다.
그냥 일평생 함께 가는 동반자가 되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것이죠.
전에 일본 작가가 가족은 보는 사람이 없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가족은 물론 이웃일지라도 좀 밉고 싫증 나도 버리지 말고 함께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이 패역한 사건에는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암논과 압살롬은 죄의 본성을 따라 뒤엉켜 서로를 죽이고 멸망한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엮여 자기의지도 없이 피동적으로 산 게 아닙니다.
자기가 결정한 대로 산 것입니다.
1)암논은 왕세자 신분을 믿고 되지도 않는 권력 놀음의 맛을 보려 했습니다.
이복 여동생을 욕보이고 내친 암논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악인이죠.
암논이 일을 벌인 뒤 다말을 책임지지 않고 홀대한 것은 압살롬에 대한 견제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암논과 압살롬은 왕위를 두고 은근한 경쟁관계였을 것입니다.
경쟁자들은 기가 막히게 서로를 알아보죠.
성경은 압살롬에 대해서 기록하길 이스라엘 중 압살롬만큼 잘 생긴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완벽했다니 사람들이 얼마나 흠모했겠습니까?
나중에 보면 민심이 다윗에게서 압살롬에게로 옮겨갈 정도입니다.
암논이 압살롬의 여동생을 무참히 짓밟은 것은 압살롬을 모욕한 것입니다.
경쟁자 압살롬의 의지를 꺾으려는 정치적 속셈이 없었다면 아우 압살롬을 봐서라도 어떻게 다말에게 그런 치욕을 안겨주겠습니까?
2) 압살롬은 얼핏 보면 친동생이 당한 수욕에 복수의 칼을 품은 정의로운 사람같이 보입니다.
아버지 다윗이 동생의 원통함을 처리해 주지 않으니 자기가 일을 끝낸 듯하죠.
그러나 후일에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역하고 아버지까지 죽이려는 것을 보면 암논을 죽인 것이 단지 다말의 복수때문이었을지 의심스럽죠.
압살롬은 다말의 일로 명분을 얻어 경쟁자 암논을 죽인 것입니다.
그 결과 왕위 계승 일인자가 된 것이죠.
그러나 악으로 욕망을 채우려 했던 압살롬도 결국 아버지를 반란한 끝에 요압장군의 칼에 죽임을 당합니다.
3) 그렇다면 아무 이유 없이 당한 다말의 억울한 삶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무고해도 그런 죄인들 사이에서 재앙을 피하지 못한 것입니다.
음주운전 차에 치여 배달을 가던 젊은 가장이 죽고, 묻지마 범죄에 사랑하는 아내가 희생되고, 금융사기에 전 재산을 날리고.
아무리 내가 바르게 살려 해도 악과 재앙을 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다말은 사랑을 빙자한 죄에 이용당하고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그 치욕적인 사랑에라도 희망을 걸었지만 그것마저 처참하게 배신당합니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상대방의 마음의 문 밖으로 쫒겨나는 일은 인간사에서 놀랄 일이 아닙니다.
다말은 아버지에게 조차 위로 받지 못한 딸입니다.
다윗은 왕위를 이을 장자 암논만 생각했지 딸의 아픔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폭행당하고, 거절당하고, 위로받지 못한 다말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죄악세상에서 살며 피할 수없이 당해야 했던 모든 슬프고 억울한 일들일 것입니다.
위로 받지 못하고 마음 깊은 곳에 아직도 웅크리고 있는 아픈 상처가 우리 안에 있는 다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다말의 처지가 너무나 안타깝지만, 성경은 이들 중 다말 혼자만 의로웠다는 것을 이렇게 자세히 기록해 전해주는 것으로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인생의 이런 죄악과 재앙들을 우리가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 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서는 하나님의 다윗 언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성경 말라기까지 다윗의 후손을 보내셔서 정의로 영원히 다스리신다는 이 언약을 따라갑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일대 손의 이야기죠.
이들 중 하나님의 집을 세우고 영원히 다스릴 다윗의 후손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암논도 압살롬도 솔로몬도 아닙니다.
자기의 죄도 다루지 못하고 비운의 죽음을 맞은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집을 세우고 백성들을 편히 눕게 하겠습니까?
이후로 역사서는 다윗 자손 왕들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죠.
성경은 계속 묻는 것입니다.
누가 그 다윗의 자손이냐?
결국 바벨론에 침공에 나라를 뺏기고 왕손이 다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후 4백여년 간 모든 것을 회복시킬 다윗의 자손 메시야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며 환성을 지릅니까?
마태복음21장9절,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더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목숨을 대신 주신 사랑이고, 싫증내지 않으시고 영원하십니다.
사람은 사랑하면서도 싫증날까 봐 두렵잖아요?
다윗의 사랑은 식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아들 솔로몬의 우상숭배의 죄로 나라를 쪼개실 때도 다윗을 생각하셔서 다음 세대로 미루시잖아요?
뒤로도 성경엔 ‘하나님이 다윗을 생각하셔서’ 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또 주님은 우리 죄의 수치를 드러내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님이 벌거벗겨져 십자가의 수치를 내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 피로 우리를 씻어주시고, 주님의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신 것이죠.
다말처럼 세상에서 받은 우리의 모든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날수록 모든 상처는 분명히 완벽하게 치료가 됩니다.
암논과 압살롬과 같은 죄의 본성을 가진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게 되었죠.
이제는 우리 안에 새마음을 주시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탐욕의 불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게 된 것입니다.
만일 오늘 다윗의 가정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성도의 가정이었을 것을 상상해 보면, 본문에서 일어난 이 비극과 얼마나 비교가 됩니까?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다윗 가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죄악 세상의 실화입니다.
암논, 압살롬은 각자의 욕망을 쫒아 살다가 멸망한 것입니다.
다말은 아무리 대비하고, 또 내 잘못이 없다 해도, 억울한 일과 재앙을 내 힘으로 피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다윗은 이런 자식들을 보며 아버지로서의 절망과 고통을 당하며 하나님께 지은 죄의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 속에 파묻혀 살다 보면 그냥 저들처럼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착각이 들 때가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집의 몰락을 통해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며 아쉬움이 남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 받았다 해도, 다시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에서 시작했으면 어땠을까요?
그럴수록 더 하나님을 사랑하던 과거로 돌아가서 자식들은 자기 같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 경외하기를 가르쳤어야죠.
그랬다면 오늘 같은 가정의 참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단지 자식만 사랑한다고, 자식을 보호한다고 세상의 죄와 심판을 자식들이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윗보다 뭐가 더 낫겠습니까?
우리도 잘못 선택하고 죄의 본성을 따랐다 무수히 실패합니다.
그래도 매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오늘 다윗의 집 같이 무너져 가는 가정일지라도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임할 것입니다.
잠언19장23절 말씀으로 마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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