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서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짓고 신앙을 회복하는 이야기입니다.
1장에서 고레스왕의 조서로 포로들이 귀환하게 된 내용을 보았죠.
2장에는 1차 포로귀환자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가문별로, 혹은 출신 동네별로 대표자 이름과 거기에 소속된 인원수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걸 보면 믿음이 자녀세대에 이어진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누구와 어울리냐, 주변에 어떤 사람들과 살아가냐도 신앙을 갖는 데 아주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죠.
가족 중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는 경우, 최초의 신자가 된다는 게 어렵고 또 그만큼 귀한 것입니다.
포로들의 귀국은 3차에 걸쳐 이뤄집니다.
대략 5만 명 정도가 이 1차 포로귀환 때 돌아와 성전을 건축합니다.
본서가 에스라서인데, 학자 에스라는 성전 건축이 끝나고 2차 포로귀환 때 돌아옵니다.
율법학자인 에스라는 귀환 공동체에 말씀을 가르칩니다.
3차 포로귀환 때는 느헤미야가 돌아와 그때까지도 무너져있던 성벽을 건축한 이야기가 느헤미야서에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은 귀환자들이 제단을 만들어 첫 예배를 드리고, 성전 터를 놓은 이야기입니다.
에스라서는 성전 재건의 과정을 건축 일지를 쓰듯이 세밀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귀환자들의 성전재건을 잘 관찰해서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세워갈지를 깨닫는 은혜를 주시길 소망합니다.
1. 돌아온 사람들이 일곱째 달에 예루살렘에 모입니다.
1절,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1) 돌아온 사람들은 먼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직 예루살렘은 폐허였고, 성벽은 무너지고 불에 탄 채 남아 있었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지어야 하지만 귀환자들은 우선 짐을 풀러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죠.
돌아간 고향집과 논밭은 타인의 소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장 살아갈 터전을 마련하는 데 몇 개월이 소요되었겠죠.
그러던 중 유대인들의 달력으로 일곱째 달이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쓰는 달력으로는 9,10월 정도에 해당합니다.
유대인들의 칠월에는 율법으로 정해진 중요한 신앙 절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초막절 제사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 모여 예배드려야 할 삼대 절기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이죠.
아마도 이 초막절이 고국에 돌아와서 처음 맞는 명절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추석 명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초막절은 마지막 추수가 끝나고 드리는 감사절입니다.
우리나라 추석명절과 비슷한 의미가 있는 절기죠.
이 절기가 있는 칠월에 귀환자들이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귀국해서 아직 생활도 안정되지 않았을텐데, 율법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일제히 모였다는 것입니다.
누가 강제로 소집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바벨론에선 한번도 지키지 못했던 명절 제사를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독려하여 예루살렘에 모인 것이죠.
이전에 성경에서 본 적 없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계속 이들과 함께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킴, 하나님께 대한 관심과 열정은 성령을 받은 우리들에게도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듣거나, 하나님나라 일이라면 바짝 다가오는 게 성령충만의 증거입니다.
다른 일에는 말이든 행동이든 적극적인데, 예수님에 대해 미온적인지 내 마음의 상태를 잘 살피고 늘 주님에 대해 뜨거움이 있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마음만으로 온 것은 아닙니다.
희망이 없는 바벨론 생활을 접고 내 나라에서 행복을 찾아보겠다는 마음이 더 컸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좀 행복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으로 신앙을 갖는 것이잖아요?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게 무엇일까요?
내 인생이 남들 앞에서 비굴하다는 생각이 들 때일 것 같습니다.
남에게 굽신대야 한다면 굴욕감을 느끼게 되죠.
돈이 없으면 그것 자체가 주는 불행감보다 가난 때문에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구차한 상황이 더 힘듭니다.
돈이 없고 가난해도 살아가긴 하잖아요?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으로 사는 게 그렇잖아요?
하는 일 자체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나를 자기 아래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은 것이죠.
건강하지 못한 것도 힘들지만 건강한 사람들에 비해 약자가 되는 게 괴로움을 더하는 것입니다.
포로가 되고 노예가 되는 게 그런 것입니다.
신체적인 학대를 당하고, 무시당하고, 가난하고, 미래를 꿈꿀 수 없는 게 노예입니다.
거기서 구원해 다시 옛 선조들의 영광을 가져다 줄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기에 포로생활 중에 그들이 통탄하며 선지자들의 말씀을 읽고 회개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행복’과 ‘그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
이 두 가지가 사람들이 돌아온 이유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귀환자들의 정착 생활 중에 서로 충돌하기도 하는 걸 보게 될 것입니다.
‘내 행복’이 먼저냐 ‘하나님’이 먼저냐.
이것은 비단 이 사람들의 문제만은 아니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데도 이 두 목적이 신앙의 갈등을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이 땅의 행복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순서만 바뀌지 않으면 됩니다.
결국 내 행복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일치된다는 걸 아는 것이 믿음의 성장인 것입니다.
2. 돌아온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터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
1)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 드렸다고 합니다.
또 4절에 보면,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킵니다.
귀환자들은 대부분 바벨론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1차 포로귀환자들을 이끌고 돌아와 성전 재건을 주도한 사람이 총독인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입니다.
2절에 이름이 나오죠.
이들도 바벨론에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지금 처음으로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켜보는 것이죠.
그런데도 모세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율법에 근거해서 차근차근 제사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들 세대가 포로 생활 중에서야 드디어 자식 세대에 신앙과 율법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방식대로 섬겨야 합니다.
내 마음이 진실되면 어떤 방법으로 믿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은 죄와 이기적인 본성으로 치우쳐 신앙을 타락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계명과 말씀이라는 신앙 교본이 없다면 조만간 정도에서 이탈합니다.
운동선수들이 기량에 최적화된 폼을 계속 훈련하지 않으면 폼이 무너지고 기록도 무너집니다.
우리가 항상 말씀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며 마음과 언행을 거기에 맞추며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길을 갑니다.
모두를 혼합해서 내게 유리한 방식으로 신앙을 갖는 것이죠.
그래서 세계 종교들을 보면 이것저것을 다 섞어서 기묘하고 세속적인 종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니면 내 종교를 강요해 무력으로 정복하고 착취, 억압하는 이슬람 같은 폭력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 신앙은 유일한 진리라 혼합도 없고 타협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기에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이롭게 해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타락과 멸망은 진리의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신들을 숭배한 데서 시작됐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만들어진 신들을, 탐욕적으로 섬기다 국가 전체가 타락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말씀을 잘 배워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이들이 성전도 짓지 않고 제단을 만들어 먼저 제사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전 건축을 위한 기공식 예배는 당연히 먼저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빈 성전터에 제단만 덩그러니 만들어 놓고 계속해서 율법대로 모든 제사를 드렸다고 하죠.
3절입니다.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원문대로 번역하면 ‘번제를 드리기 위해 제단을 세웠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 백성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입니다.
제단을 세우고 아침 저녁 계속 제사를 드린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것이죠.
여기서 모든 나라 백성들은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땅에 계속 살고 있었던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분열왕조에서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보다 먼저 앗수르에 멸망 당합니다.
그때 앗수르왕이 자기가 정복한 다른 여러 나라 포로들을 데려다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로 이주시킵니다.
사마리아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다른 식민지로 끌고 갔습니다.
일제 때 우리민족의 뿌리를 아예 없애려고 창씨 개명을 단행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라들이 다시 독립할 생각을 못 하도록 다 혼혈을 만들어 버린 것이 앗수르의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사람들을 이방인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귀환자들이 돌아와 보니 그런 사람들의 적대감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주류로 살아왔잖아요?
본토의 주인들이 돌아왔으니 환영할 리가 없는 것이죠.
귀환자들에겐 아직은 보호해 줄 정부도 없고, 왕도 없고, 군사조직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페르시아의 속국입니다.
소수인 귀환자들에겐 성전 중심의 공동체를 세우는 게 더욱 절박했던 것입니다.
정치적인 왕을 세울 수는 없지만 신앙적으로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게 할 수는 있는 것이죠.
이스라엘이 뼈저리게 깨달은 게 무엇입니까?
왕이신 하나님을 버렸을 때, 정치적 왕이 있었지만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주지 못했잖아요?
지금 불안한 환경에 대처할 최선이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다시 왕으로 섬기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성전터에 쌓인 돌무더기를 들어내고 임시 제단을 놓고 제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위기감이 없었다면 성전을 다 짓고 낙성식을 드리고 나서야 예배를 시작하지 않았겠습니까?
뒤에 보면 본문으로부터 이십 년이 지나서야 성전이 완공됩니다.
그렇다면 그 기간 동안 예배는 뒷전이었을 게 뻔합니다.
정착해 편안히 살아갈 환경을 만드는 데도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우리도 간혹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죠.
급한 문제들 때문에 신앙생활을 미루면 끝까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신경 써야 할 문제들은 끊이지 않고 생깁니다.
그렇기에 오늘 귀환자들처럼 즉시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시급히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끊임없이 밀려오는 문제들에 떠밀려 이리저리 치이지 않고 잘 살아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방인들에 대한 두려움이 빠른 예배 회복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에게 돌발적으로 생긴 문제이든, 아니면 내 환경 속에서 오래 뿌리를 내려 왔던 문제이든, 성도들에게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찾도록 이끈다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예배하며 살아가는 게 가장 복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배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마귀에게 조종당하고, 이용당하고, 눌려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동복지시설에서 살던 아이들이 만18세가 되면 시설을 나와서 독립을 해야 합니다.
자립준비청년이라고 하죠.
그런 청년들을 돕는 단체를 운영하는 최상0장로님이 있습니다.
이분이 청년시절 등산에 빠져 드문드문 교회를 다녔습니다.
회사에서 중국 지사로 발령을 받고 출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며칠 계획으로 지리산 종주에 나섭니다.
주일이 끼었지만 예배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첫날 텐트를 치고 자는데 아주 기괴한 꿈을 꿉니다.
자고 있던 텐트의 지퍼가 열리더니 마귀 같은 손이 하나 쑥 들어와서 자기 머리채를 확 낚아채는 꿈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깼지만 등반으로 피곤했던 몸이라 다시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텐트가 무너져 깔리는 꿈을 꾸며 가위에 눌립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내려가려고 했지만 같이 간 선배 때문에 등반을 계속했습니다.
두 번째 날, 대피소가 복잡해서 옆에다 텐트를 치고 자는 데 한기가 뼛속까지 들어왔습니다.
선배가 배낭에서 낡은 가스등을 꺼내 불을 켜고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사람들이 몰려 자기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정신은 몽롱하고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밤에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몸을 뒤척이다 가스등을 발로 찼는데, 그게 두 발목을 태운 것입니다.
헬기로 이송되서 7개월간 지독한 화상치료와 여섯 번의 수술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만 가득했습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교회 좀 안 갔다고 날 이렇게 만들다니.’
그런데 7개월을 넘어가던 어느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만일 그날 30분만 늦게 발견되었어도, 내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었겠구나.’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셨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사고 전에 돌이키도록 눈에 보이지 않는 악령들의 실체도 보여주셨건만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것이죠.
그날 비로소 하나님을 진실되게 섬기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믿어지는 걸 경험하게 됩니다.
황장로님은 그후 두 아이를 입양하고, 지금은 사업을 하며 자립청년들을 돕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그래야만 악귀도 쫒겨 나가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계획과 일들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 예배드리는 일을 미루지 않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3. 매일 드리는 제사를 먼저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 성전 지대를 놓습니다.
6절,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예배는 시작되었지만,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7절을 보면 석수와 목수를 고용하고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운송해 오느라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나자 성전을 세울 지대를 놓는 공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8절,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년 둘째 달에..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돌아온지 2년 만에 이렇게 해서 성전의 기초공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도 철저히 율법과 규례대로 진행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찬양대는 제금을 들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백성들도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워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폭발할 듯한 기쁨의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기쁨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게 이만큼 기쁘고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뛸 듯이 기쁜 일들도 가끔 있지만, 그것은 제한적입니다.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그보다 작은 근심에도 사그러듭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반대죠.
지금 대적들이 주변에서 노려보고, 집에 울타리도 치지 못했지만 그런 모든 것을 능가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공간과 한계를 초과하기에 세상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 그런 기쁨을 약간 맛보지만 천국에서는 영원히 그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며 살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며 세상에서도 복되게 살길 바라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구원만 받고 이 땅의 행복은 필요치 않다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항상 우선되게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 행복이 따라올 것입니다.
귀환자들이 돌아온 고국의 삶도 녹록치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상황이 한번에 역전되지는 않죠.
여전히 원치 않는 자리로 내려가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처럼 자존심 상하고, 자존감이 무너지고, 내가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감정들은 분명히 점점 바뀝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고 천국의 유업을 받는다는 게 막연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현실에서 보험 들고 적금 들어 놓은 것처럼 분명하게 힘이 됩니다.
지금 남보다 조금 더 올라서는 것, 내려가는 것, 거기에 대해 절대적이던 생각도 바뀝니다.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에 비해 이 땅이 지극히 짧다는 게 사실로 믿어지기 때문이죠.
신앙에서 마술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통계를 보니, 자영업자의 폐업률이 79%로 최근 10년 중에 최고치라고 합니다.
열 곳이 창업하면 8곳은 폐업했다는 것이죠.
서로 연결된 사회이기에 한 곳이 무너지면 모든 곳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더 획기적으로 좋아질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길 큰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왕이 되시게 하고 예배의 자리를 지킴으로 복되고 평안한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에스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스라의 귀환 (에스라7장) (9) | 2024.10.17 |
---|---|
에스라6장 (성전 완공과 회복 된 예배) (9) | 2024.10.09 |
에스라5장 (다시 시작한 성전 건축) (3) | 2024.10.02 |
에스라4장 (중단 된 성전 건축) (4) | 2024.09.23 |
에스라1장1절-11절 (하나님의 감동-고레스 칙령) (4) | 2024.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