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서를 통해 바벨론 포로귀환자들의 성전 건축과 신앙회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경을 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더 확신있게 만듭니다.
세계역사 속에서 탄생한 성경을 잘 모르면 뜬구름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합니까?
그런 신앙이라면 스스로도 자기 믿음에 자신감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죠.
그렇기에 성경 전체를 잘 배우는 게 중요합니다.
결국 머리에 남는 것은 감동적인 이야기보다는 성경 본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꼼꼼하게 배울수록 믿음은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본문이 어렵다 생각 마시고 잘 듣기만 하면 믿음의 뿌리가 한 뼘 자랄 것입니다.
1. 에스라서의 주제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우리 신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만나는 곳이 성전입니다.
죄인 성도들에게는 희생제물이 필요하죠.
이 두 가지만 봐도 성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구약성경은 주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구약성경의 중요한 물줄기 중 하나는 성전입니다.
최초의 성전은 성막입니다.
출애굽 시대 지었던 성막은 가나안땅에 들어와 솔로몬성전으로 바뀌죠.
솔로몬성전이 바벨론의 침공으로 무너진 다음, 포로들이 귀환해 인솔자 스룹바벨과 세운 성전을 스룹바벨성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엔 헤롯왕이 이 스룹바벨 성전을 화려하게 개축해서 헤롯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이게 전부입니다.
구약시대에 국교가 여호와 신앙이었는데 전국에 성전을 딱 하나만 짓게 하셨다는 것은 성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예배의 효율성보다 상징성이 더 중요한 것이죠.
전 세계 나라 중에서 국교를 믿는 데 성전이 하나밖에 없는 나라는 이스라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헤롯성전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성전 된 자신의 육체를 가리키신다고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성전들은 다 무너졌고, 예수님의 몸으로 세우신 참성전만 남은 것입니다.
이후 이스라엘엔 아무 성전도 남지 않게 하셨습니다.
실체가 오셨는데 상징은 더 있어봤자 헷갈리기만 하게 되기 때문이죠.
이스라엘엔 유대교인들이 아직도 많지만 여러 이유에 묶여 성전을 절대로 못 짓습니다.
일단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이슬람 황금돔 사원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거 건드렸다가는 3차세계대전 일어납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참성전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몸으로 세우십니다.
그러면 에스라서처럼 성도들이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며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는 믿음 인생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겠다는 것이 성도들이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할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것도 물론 포함되죠.
오늘 성전을 짓는 과정이 우리 신앙의 과정과 같은 것이니 그 말씀을 이제부터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 주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제사를 시작했고, 성전 기초공사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그 땅에 살던 이방인들의 방해로 성전 건축이 중단된 이야기입니다.
좀 의아하죠.
하나님이 고레스왕도 감동하시고, 귀환자들도 감동하셔서 고국에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잖아요?
이것만큼 확실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무언가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신앙의 한 부분이 흔들리죠.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길은 다 형통하다.
반대로, 길이 막히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런 생각들이 다 맞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 인생이 무사태평하지는 않다, 닥쳐오는 시련을 견디며 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입니다.
2. 본문에서 성전 건축의 방해자들이 초반전부터 바로 등장합니다.
1절,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오늘 등장한 대적들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주변에 퍼져서 살던 혼혈 민족을 말합니다.
이들이 스룹바벨과 족장들을 찾아와서 성전 건축에 자기들도 끼워 달라고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하겠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솔깃한 제안일 수 있습니다.
귀환 공동체는 아직 생활 터전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개인의 일과 병행하면 성전 건축이 더딜 수밖에 없는 것이죠.
사마리아 사람들이 도와주면 완공을 좀 앞당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3장에서 귀환자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두려워했다고 했죠.
이들의 시비를 피하려면 일을 함께 하는 게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선악에 상관없이 쎈 조직에 소속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권력과 안전에 대한 본능 때문입니다.
또 이들의 제안이 신앙으로 볼 때 괜찮은 소리처럼 들리죠.
성전을 같이 건축하고 같이 하나님을 섬기자는 것입니다.
2절 보면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패망시킨 뒤에 여러나라 포로들을 데려다 사마리아로 이주시켰죠.
여기서 에살핫돈은 산헤립의 아들입니다.
세계사에 남아있는 이런 인물들이 성경의 사실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때 이주 정책으로 사마리아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각자의 신을 가지고 왔고, 와서는 이스라엘 땅의 신인 하나님도 섬겼습니다.
이 내용은 열왕기하17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29절,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33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밝히고 있죠.
그러니까 사마리아는 온갖 종교의 집산지입니다.
그런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 건축에 끼어들면 자기들 방식대로 성전에서 제사하겠다고 나올 게 뻔한 것입니다.
그럴 지분이 생기는 거잖아요?
바알과 하나님을 섞은 신앙으로 망했는데, 다시 그럴 수는 없는 것이죠.
스룹바벨과 장로들은 이 제안을 거절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결정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옳은가입니다.
이것을 일 순위로 놓으면 우리가 늘 선택의 문제로 갈팡질팡 할 필요없이 선택은 간단하고 분명해 질 것입니다.
당장 손해가 된다 해도 결과적으로 절대 해롭지 않습니다.
당장 얻을 이득만 보고 결정했다 뿌리채 실패하는 경우가 더 흔하죠.
이들의 의도가 악하다는 것은 제안을 거절한 뒤에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4절입니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자기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자 돌변하는 것이죠.
다정하게 잘 해줘서 교제를 시작했는데, 성격이 이상해 헤어지자 했더니 본색이 드러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다 살해까지 당하는 안타까운 소식들이 뉴스에 종종 나오죠.
제안을 거절하자 대적들은 노골적으로 건축을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방해하냐면 무려 백년 동안 대를 이어서 방해합니다.
5절부터 7절까지를 보면 이 건축과 관련 된 네 명의 페르시아 왕이 나옵니다.
고레스, 다리오,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
이들의 통치 기간을 합치면 총 백 년입니다.
이 기간 동안 대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건축을 방해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훼방이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죠.
6절에 보면 이들이 왕궁에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고발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고발했다는 단어가 사탄이라는 단어와 뿌리가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보면 사마리아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재건을 방해한 것이죠.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충동한 것이 또한 사탄의 개입인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나라가 세워지는 걸 전력을 다해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지금도 교회와 가정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게 단지 사람의 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성을 창세 이후로 제일 잘 파악하고 있는 사탄이 사람의 감정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사람들의 방해는 치밀했습니다.
고레스왕 시절에는 왕의 칙령이 내렸기에 대놓고 고발할 수는 없었죠.
그러니까 5절에,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일을 막았다고 합니다.
재목이나 돌을 운송하는 허가를 방해하거나 했을 것입니다.
또 석수들이나 목수들을 협박해서 건축에 참여하지 못하게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은 터만 놓은 상태로 중단됩니다.
성전 공사는 고레스왕이 죽을 때까지 중단됩니다.
그리고 다리오가 왕이 된 때 다시 재개되어 4년 만에 완공됩니다.
고국에 돌아온 지는 20년 만입니다.
그 내용은 5장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6절과 7절에는 다리오왕 이후의 왕들이 나옵니다.
거기에 나오는 아하수에로와 아닥사스다의 시대엔 성전은 이미 완공됐고, 도시와 성벽 건축에 들어갔을 때입니다.
귀환자들이 할 일은 성전만 건축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릴 성전만 완공하고 도시에 사람이 안 살면 어떡합니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과 성도들이 있는 거룩한 도성이어야 맞는 것이죠.
그런데 대적들이 이때도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아닥사스다왕에게 올렸던 상소문의 전문과 왕의 답변의 전문이 8절부터 23절까지 수록되어 있습니다.
대적들이 얼마나 끝까지 이스라엘의 신앙재건을 방해했는지의 증거로 상소문의 내용을 여기에 삽입해 놓은 것입니다.
성경을 꼼꼼히 읽는 성도들은 성전건축이 다리오왕 때 끝났는데, 왜 아하수에로와 아닥사스다왕 때 고발한 이야기가 나오는지 좀 헷갈리기가 쉽죠.
3.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성전건축이 중지되게 그냥 두셨냐는 의문이 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데 왜 장애물이 가로막냐는 것입니다.
성전 재건만큼 중요한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우리 계획들이 틀어지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서 얻게 되는 신앙의 이치들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다 짜여진 각본대로 실현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도록 자유의지를 주셨잖아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해서 사람의 자유의지를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자기 좋은 대로 사는 것입니다.
다만 특별히 작정하신 뜻은 반드시 계획대로 이뤄지게 하십니다.
지금 포로귀환 같은 경우 선지자들이 70년 뒤에 돌아올 것을 예언했잖아요?
이런 경우는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시간까지 정확히 이뤄지게 하시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결과물입니다.
단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허용하신 뜻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의 가장 좋은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내가 생각한 대로 커 주진 않았지만 부모인 우리가 자식들을 위해 가졌던 청사진은 있었잖아요?
2) 그 하나님의 계획과 감동에 우리가 협력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성전 건축을 중단한 게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귀국 당시 귀환자들의 손에는 고레스왕의 조서 사본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모든 땅은 페르시아 땅입니다.
조서 없이 성전을 지으면 무허가 건축이 되는 것이죠.
또 오만명이나 되는 포로들이 돌아올 때 다른 민족들의 관할 구역을 통과해야 합니다.
귀환을 허락하는 조사가 있어야 충돌 없이 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막강한 고레스왕의 조서가 있으면 거기 기록된 대로 성전을 건축하는 데 하등의 문제가 없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관리들을 매수하고 방해를 한다 해도 강력하게 대응할 수가 있는 것이죠.
사마리아인들과 무력 충돌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저항에 대한 아무 기록도 없이 순순히 성전 건축을 중단했을까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죠.
‘하나님이 도와주시질 않네, 아직 때가 아닌가?’
‘하나님의 뜻이면 언젠가 상황이 좋아지겠지, 그때 시작하면 되겠지.’
‘아직 내 집과 생활 터전도 다 준비하지 못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집안 일부터 마치고 나중에 성전 건축에 집중하는 게 좋겠네’
그런 생각들을 했던 것입니다.
또 싸우자는 사람들과 각을 세우고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합니까?
차라리 피하고 싶죠.
사람은 자연스럽게 세상에서의 내 행복을 먼저 챙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상황과 생각들이 뒤엉켜 결국 성전건축과 예루살렘 재건은 중단되고 만 것입니다.
3) 이 과정에서 짚어볼 것은 귀환자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는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뒤에 학자 에스라가 2차포로귀환자들과 돌아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안전한 귀환을 위해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지금은 성전 건축에 방해가 들어 오는데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앞길이 막히고 계획이 틀어진다면 당연히 기도로 뜻을 묻고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산다고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인데도 마음대로 안됩니다.
어차피 사는 동안엔 쉽게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편합니다.
그걸 어떻게 기도하며 해결할 것인지, 거기서 뭘 더 배우며 하나님나라에 유익하게 살아갈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김동0이라는 찬양사역자가 있습니다.
신자들이 좋아하는 은혜로운 찬양 ‘광야를 지나며’의 원곡 가수입니다.
이분이 고등학교 때 동방신기, 수퍼주니어 맴버들과 함께 아이돌 연습생 시절을 보냅니다.
데뷔를 앞두고 최종 리허설을 하는데, 자기 순서에서 가사를 까먹고 그 자리에서 입이 돌아가는 최악의 불운을 겪게 됩니다.
연습생들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시죠?
고생만 죽어라 하고 데뷔도 못했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트라우마로 결국 무대에 서지 못합니다.
이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찬양사역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음악을 더 공부하려고 버클리 음대에 들어갑니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가 되었습니다.
온갖 일을 하며 버텼지만 돈이 없어 등록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지만 도움의 손길은 없었고 등록 마감일이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끝이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무작정 학교장학관리담당자를 찾아갑니다.
장학관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밖에 있는 직원들에게 먼저 찾아온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여기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번 학기 수업료를 마련하지 못했다, 여기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냐’
김사역자의 사정을 다 듣고나서 직원들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없다, 네 나라로 돌아가라.’
이제는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것인가?
앞이 캄캄해서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 데 발밑에 환한 한 줄기 빛이 나타났습니다.
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어찌 된 일인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 보았습니다.
등 뒤로 사무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는데 그 틈으로 어떤 사람이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는 게 보였습니다.
장학담당관이었습니다.
네 이야기를 다시한번 해 보라고 해서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담당관은 컴퓨터에서 김사역자의 재적 상황을 살펴보더니 마이너스로 되어 있던 수업료를 제로로 고쳐주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며 받는 복과 기쁨은 정말 큽니다.
그러나 믿음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주님께 봉사하다 힘들어질 때는 괴로움도 견뎌야 합니다.
그럴 때도 뒤로 물러서지 말고 기도하며 문제를 돌파하시길 바랍니다.
물론 기도가 성가신 일을 대신 해주는 건 아닙니다.
기도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김동0형제처럼 할 때까지 해 봐야 합니다.
오늘 건축 중단에는 두 가지가 다 보이질 않았다는 걸 교훈으로 삼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4) 그래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귀환을 결심했을 때처럼 이들을 감동하시지 않았을까?
성전 건축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강한 감동을 하시면 되잖아요?
하나님은 돌아올 때만큼 이스라엘을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아무렴 돌아오게 할 때만 감동하시고 그 다음은 황폐한 곳에 내버려두셨겠습니까?
귀환을 결심할 때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과 자유로운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이 하나님의 감동에 강하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고난으로 인한 낙담과 척박한 고향 생활에 현타가 온 것이죠.
우선 먹고 살아야겠다는 현실감이 하나님의 감동을 억눌렀던 것입니다.
나중에 학개선지자가 다시 성전건축을 하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때 이렇게 말합니다.
학개2장5절,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하나님의 언약과 인도하시는 성령께서 출애굽때부터 계속 함께 하고 계셨다는 뜻이죠.
성전건축을 포기한 이유가 성령이 떠나셔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늘 감화하십니다.
그렇기에 바울사도가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감화를 거역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분명히 성전 건축을 밀고 나가도록 성령께서 감화하셨지만, 대적들과의 충돌에 대한 두려움, 해결해야 할 골치 아픈 절차들, 가족들을 위한 안전한 주거환경과 생업.
그런 것들이 건축을 중단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 결과 돌아온 귀환자들은 20년이 지나서야 성전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성전도 늦어졌지만, 성곽 공사를 하다가 또 대적들의 방해를 받아서 중단해야 했습니다.
총 백년 뒤에야 느헤미야가 3차 포로귀환자들과 함께 돌아와 성벽을 재건합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요?
놀랍게도 52일 걸렸습니다.
그 정도 시간이면 되었다는 것이죠.
느헤미야서를 보면 그때 한 손엔 무기를 들고 한 손엔 연장을 들고 밤에 보초를 서가며 성벽 재건한 내용이 흥미진진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하고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죠.
성벽재건까지 가야 예루살렘 성내에 사람이 거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래야 모여서 절기예배도 안전하게 드릴 수가 있는 것이죠.
지금 사마리아인들에게 굴복했기에 결국 이스라엘의 신앙회복이 늦어졌고, 그만큼 더 불안하고 두려운 시간들을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고레스왕은 칙령을 내린 뒤 십 년 뒤에 전쟁터에서 죽습니다.
고레스왕이 죽기 전 십 년 이내면 왕의 조서와 지원을 힘입어 충분히 성전건축과 예루살렘성을 중건할 수가 있는 시간이었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순종하는 여부에 따라 삶을 인도하십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를 다해 즉각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때 묵살하지 않고 내 의지를 순복시키는 것입니다.
믿음도 시기를 놓치면 계속 방해받고 시달리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것을 잘 깨닫게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외부의 압력과 내 안전과 행복에 굴복해 성전개건을 중단한 사람들은 백년 동안 행복했을까요?
백년 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궁에 살 때, 예루살렘에 다녀온 자기 형제에게 거기 사는 사람들의 형편을 물어봅니다.
그때 이런 대답을 듣습니다.
느헤미야1장3절입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그때까지 환난과 능욕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죠.
내 인생이 수치스럽지 않으려면 믿음을 잘 세워야 합니다.
귀환자들이 자기 행복을 앞세우고 성전신앙을 미뤘지만 역사는 그들이 원하는 행복을 찾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울타리가 되시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방해와 시험이 와도 물러나지 않고 함께 성전이신 예수님 몸에 붙어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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