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에스라서4장 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바벨론 포로생활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온 귀환자들은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 주변 민족들의 방해로 건축이 중단되었었죠.
오늘 5장으로 한 장 넘어 왔지만 그 사이 약 1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은 고향에 정착하느라 그 세월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귀환자들의 정착이 맨땅에 헤딩하는 것만큼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일하다 보면 금방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잖아요?
그렇게 벌써 올해도 10월이 코앞입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태어난 우리가, 살아가느라 땅의 것을 구하는 걸 뭐라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귀환자들이 평생 땅의 것만 구하다 끝나게 생긴 것입니다.
다행히 오늘 본문은 성전 건축이 다시 재개된 부분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해서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1. 다리오왕 제2년에 성전 공사가 다시 재개됩니다.
4장 24절이 이렇게 끝납니다.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
다리오왕 제이 년부터 다시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죠.
고레스왕은 포로귀환을 허락하는 조서를 내린 뒤 십여 년 뒤 전사합니다.
그 후에 아들 캄비세스가 왕이 되어 칠 년 정도 페르시아를 다스리다 죽습니다.
캄비세스는 세계사에 나오지만 이스라엘 역사와 특별한 관계가 없어서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캄비세스가 죽고 난 뒤 고레스의 사위인 다리오가 페르시아를 다스리게 됩니다.
이 다리오왕 제2년에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된 것이죠.
세계역사와 성경 역사를 나란히 알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성전 재건이 중단된 십육 년 동안 돌아온 유다인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그동안 귀환자들의 마음은 어떤 상태였을까요?
과거 성전 건축의 실패는 마음의 상처로 남았을 것입니다.
성전 건축을 위한 열심과 진심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게 아닌데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전 건축은 생각하기도 싫은 상처로 남은 것이죠.
사람이 상처를 받으면 깊은 흔적을 남깁니다.
성도들의 경우엔 사람이나 일에 대한 상처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할만큼 했는데 돌아오는 건 없고, 하나님도 몰라 주신다는 마음의 상처는 깊게 새겨지고 오래갑니다.
누가 다시 그 일을 하고 싶겠습니까?
건축을 접은 지 십육 년이면, 언젠가는 이루시겠지만 아마 우리 세대는 아닌가보다 합리화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왜 내가 꼭 그 일을 해야 하냐는 마음이 드는 것이죠.
현실을 봐도 그게 틀려 보이진 않았습니다.
왕이 두 번이나 바뀌었으니 죽은 고레스왕의 조서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전 건축은 한두 푼으로 할 수 있는 공사도 아닙니다.
귀환한 유다인들의 삶은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전재건에 대한 분위기는 완전히 가라앉아 누구도 앞장 설 수가 없게 된 것이죠.
성전 예배도 없고 삼대절기에 모이지도 못하는 유다 사람들이 신앙인들 제대로 간수하고 있었겠습니까?
몇 달만 예배 안 드리고 말씀을 안 들으면 열심 있던 신자들도 하나님께 마음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주저앉은 마음, 돌아선 마음을 되돌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실 것입니다.
이제 귀환자들의 힘으로 성전을 재건할 가망성이 거의 없는 것이죠.
이때, 하나님이 학개와 스가랴선지자를 보내셔서 이들을 책망하시고 성전을 짓도록 용기를 불러 일으키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과 환경에 실망하고 화가 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신앙생활이고 뭐고 냅다 집어 던지고 싶죠,
우리가 참고 살아서 그렇지 다 한 성질머리 하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일으켜주지 않으셨다면 힘든 신앙생활을 아직까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자주 무너지려는지는 믿음이 좋을수록 더 느낍니다.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끝까지 함께 하시는 게 우리의 희망입니다.
2) 성전이 없이 살고 있는 귀환자들의 생활은 어땠을까요?
그들의 삶이 학개서에 잘 나타납니다.
학개1장3절,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우선, 판벽한 집이라는 말은 잘 꾸민 집을 말합니다.
그동안 자기 집을 잘 지었고 논밭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도 성전 건축을 미루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면 잘 먹고 잘 살았을까요?
학개1장6절,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잘 살아보려고 쎄빠지게 일했지만 여전히 가난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죠.
월급을 받았는데 통장이 구멍이 난 것처럼 다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고생한 것에 비해 누리는 건 너무 적고 흡족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은 삶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세상에서 구하는 걸 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걸 못마땅 해 하시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이 다 채워지면 그거 챙겨서 탕자처럼 아버지를 떠날 거잖아요?
우리에게는 그런 본성이 없을 것 같습니까?
그렇기에 하나님이 자녀를 기르시는 방법은, 세상 것으로 백 프로 꽉 채워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하고 바라는 것에서 항상 칠, 팔부 정도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이 덜 채워주시는 이유는, 나머지를 하나님 자신으로 채우라시는 것입니다.
그 부족한 부분은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는 것이고, 믿음으로 견뎌야 하는 부분이고, 우리가 받은 큰 구원을 생각하고 세상에서는 자족을 배우는 부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부족함은 그냥 부족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부족함은 계획하신 부족함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이기에 부족했는데도 결과는 더 넘치는 것이죠.
그렇기에 하나님은 유다 사람들이 창고를 다 채우려고 악착같이 긁어 모은 것을 다 흩어 버리셨던 것입니다.
학개1장9절,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우리가 재물과 인기와 성공 때문에 하나님께로 부터 돌아선다면 하나님은 언제고 다 불어 버리실 수도 있다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이 사는대로,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들을 왜 내겐 주지 않으시는지 너무 속상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겐 바라는 것에 70%가 아니라 반도 못 받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산이 맞을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백프로가 아니라 칠십프로 정도로 만족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진정한 만족도 기쁨도 행복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다시 성전 건축이 시작된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신앙이 세워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마음을 돌아오게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학개와 스가랴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셨습니다.
학개2장14절,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15그 때는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감동시키신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성령님의 감동은 말씀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학개와 스가랴가 전하는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감동하셨듯이 지금도 동일한 본문 말씀으로 우리를 감동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이죠.
우리가 기록된 말씀을 읽을 때, 설교를 들을 때, 그와 비슷한 우리 상황에 맞춰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교회를 개척했지만 개척이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은 이게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총신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출애굽기 수업 중에 교수가 읽은 성경구절이 번개를 맞은 듯 머리를 뚫고 들어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하나님과 나눈 대화였습니다.
모세는 부르심에 대해 회의적으로 말합니다.
3장11절,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당시의 모세로서는 가당치도 않은 큰일이니 믿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3장12절,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지금 증거를 주시는 게 아니라,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모여 예배하게 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라는 것이죠.
우리는 미리 뭔가를 보여주시고 증거를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식 증거는 선믿음, 후증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 곧 하나님 뜻이라는 증거라고 분명하게 들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우리가 이렇게 예배하고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 한 명 교회 데리고 나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실 것입니다.
그 힘든 걸 우리가 수십 년 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지, 나를 부르셨는지,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성도님들께도 이 말씀이 곧 응답입니다.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다니는 직장이 곧 나를 거기로 보내신 증거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말씀에서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게 됨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를 받았죠.
그러나 이후 40년의 광야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또한 평생 말씀의 만나를 먹으며 나를 훈련하며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았다면 의지를 강하게 해서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학개선지자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을 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말씀을 들었으면 의지를 굳세게 해서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취약한 부분이죠.
늘 감동만 받고 스스로 굳세게 하지 않으면 제자리입니다.
기도를 하면 어떤 문제든 잘 될거라는 안심이 들고 낙담한 마음이 사라지죠.
그리고 나서는 내가 그 일이 잘 되게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도 함께 일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학개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장8절,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어떻게 들여오냐, 그런 불가능한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뒷산에 올라가서 거기 있는 나무를 베어오면 된다는 것입니다.
안될 것만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로 시작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화려하고 큰 성공에 별로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처음부터 굉장한 일로 시작되지도 않습니다.
요즘 거리에서 와플대학이라는 와플 가게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경영자가 손정0대표입니다.
이분이 오래전 의료사업을 크게 하다 사기를 당해 수십억의 빚을 떠안고 파산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은데 헌금할 돈 만 원도 없는 게 너무 슬펐습니다.
리어카를 사서 뭐라도 팔아보겠다고 벼룩시장을 뒤졌습니다.
전 재산이 삼십만 원이었는데 마침 중고 리어커가 삼십 만원에 나온 게 있었습니다.
동서울 터미널로 그 중고 리어카를 사러 갔습니다.
의료업계에서 화려했던 성공을 생각할 때, 리어카 행상이 웬 말입니까?
그런 새출발에 얼마나 자신이 초라해 보였을까요?
삼십만 원을 주니까 파는 사람이 이걸 어떻게 가져갈 거냐 물었습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신촌까지 리어커를 끌고 가야 하는 것이죠.
어이가 없었는지 상인이 오만 원을 깎아주며 용달을 불러주었습니다.
그렇게 리어카로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고, 그게 와플장사가 되었고, 지금은 4백개 지점을 가진 프랜차이즈가 되었습니다.
리어커 한 대로 이룬 것입니다.
손대표는 이 사업이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이고, 모든 걸 잃은 사람들이 다시 재기할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턱없이 부족한 자본금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도 돌려보내지 않고 어떡해서든 그 돈으로 시작해보자고 말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죠.
손대표가 세운 것은 와플대학이 아니라 와플신학대학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내가 세우려는 것이 무엇인지, 내 자녀들이 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리어카 한 대로도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게 하십니다.
내 신앙을 세워가는 것도 하루 한 장 성경을 읽고, 십 분이라도 기도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걸 미루면 신앙이 바로 세워지는 일도 한없이 미뤄집니다.
내 믿음과 인생을 위해 스스로 굳세게 행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그러나 이번에도 성전 건축에 방해자가 등장합니다.
믿음의 여정은 항상 이렇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3절에 보면 유브라데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보좌관들이 예루살렘에 현장지도를 나왔다는 것입니다.
당시 페르시아가 얼마나 넓은 영토를 다스렸냐하면,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이 고레스왕 때의 페르시아입니다.
남쪽으로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유럽까지 뻗어갔습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페르시아에 127개의 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귀환자들이 사는 유다 땅은 그중 아주 작은 한 개의 도였습니다.
유브라데강 서남쪽에 있는 많은 도를 총괄하는 총독이 바로 닷드내였습니다.총독이 남쪽 유다지방에서 큰 토목공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대적들이 고발했겠죠.
소식을 듣고 현장을 점검하러 나온 것입니다.
이들은 누구의 허락을 받고 이런 큰 건축을 시작하였냐고 문책합니다.
주동자가 누구인지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번엔 단순히 지역 사람들이 트집을 잡는 정도가 아닙니다.
공권력과 마주하면 보통 사람들은 두렵고 위축될 수밖에 없죠.
전에 코로나 시절 구청에서 교회에 현장 점검을 나온 적이 있습니다.
보내준 방역 포스터를 잘 부착했는지, 손소독제를 준비했는지, 교회 방역은 어떻게 하는지, 예배 참석 인원은 몇 명인지, 그런 걸 물어보고 하나씩 체크했습니다.
뭔가 잘못되면 집합금지 명령이 내리던 때라 괜히 긴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선지자를 보내셔서 당장 성전건축을 시작하라고 하셨는데 또 막히게 되었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번 시험을 이겼다고 다시는 시험이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추진하신다고 방해되는 모든 일들을 사전에 다 차단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끼어들든지 하나님께 문제 될 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은 진행됩니다.
총독 닷드내는 당연히 관할 구역에서 일어나는 큰 건축에 대해서 알아보고 당국에 보고를 해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업무입니다.
모든 일에는 거쳐야 할 절차도 있고, 불가불 원치 않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이 문제들을 인도해 주십니다.
5절입니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그들이 온 목적은 주동자를 문책하고 공사를 막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전 건축에 순종하는 유다 장로들을 보살피고 있었다는 것이죠.
허가도 없이 건물을 세우는 현장을 당장 중단시키려고 온 총독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추궁하던 중에 이것이 고레스대왕의 명령으로 지어진다는 말에 당국에 먼저 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전 왕조에서 승인했지만 그때 이루지 못했으니 묵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못하게 하신 것이죠.
우리를 괴롭게 하는 일들이 절대로 그들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총독 닷드내 일행은 다리오왕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들의 말대로 고레스왕이 성전 건축을 허락했는지, 그 조서를 찾아 보고 어떻게 조치할지 확답을 해 달라는 것이죠.
다리오왕은 이 편지를 받고 어떻게 답을 보냈을까요?
장애물이라 생각했던 일이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는지 다음 주 6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에스라서에서 장장 백년에 거쳐 성전과 예루살렘이 중건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활약상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성전 짓기에 집착하실까요?
구약 성경에서 포로귀환 이후의 역사는 스룹바벨 성전 지은 게 전부입니다.
참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사람이 지은 성전이 속죄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이 성전이 공백없이 주님을 가리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성전으로 사백년 뒤에 예수님이 오셔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실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선지자는 그것을 예언했죠.
말라기3장1절,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이제 주님이 오실 마지막 구간을 연결할 성전을 짓도록 성도들을 격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던 세상의 것들을 불어버리신 것은 세상으로 배불리면 하나님을 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걸 백프로 채워주지 않으시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칠십 프로 정도에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구하면 절대 부족하지 않습니다.
또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감동하시도록 항상 성경을 펼치고, 말씀대로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굳세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에 힘을 보태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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