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 에스라가 2차 귀환자들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성전은 재건되고 58년이 지났지만 귀환자들의 신앙은 아직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잘 모르면 신앙이 바로 세워지기 힘들죠.
에스라는 율법과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2차 귀환자들과 함께 고국에 돌아온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이보다 좋을 순 없다’죠.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다시 보니 구약성경 중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때가 있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아름다운 역사의 한 페이지입니다.
8장은 이들의 귀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합니다.
그중 일부만 읽었지만, 전체 내용을 세 가지로 살펴볼 것입니다.
첫째는, 귀환자의 명부를 작성한 내용입니다.
둘째는, 예루살렘을 향한 실제 여정에 대해서입니다.
셋째는,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했던 일에 대해서입니다.
이 순서로 2차포로귀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도 정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믿음의 지식과 은혜를 더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에스라는 출발 전 귀환자들의 명단을 작성합니다.
앞에 나온 명단을 보면 귀환자들의 숫자는 천칠백 명쯤 됩니다.
1차 귀환자들이 4만 명 넘은 것과 비교하면 적은 숫자죠.
그래도 여자와 아이들을 합치면 오천명 정도니 꽤 많은 사람이 돌아온 것입니다.
1)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유다인 대부분이 바벨론에 남아있었는데 이들은 왜 귀국을 결심했냐는 것입니다.
1차 포로귀환 때는 그래도 해방에 대한 감격이 있었죠.
돌아가 예루살렘의 영광을 다시 이루자는 개척자의 꿈이 있었습니다.
이국땅에서 가난하고 멸시받는 삶이 싫어서 나온 사람들도 다수였을 것입니다.
2차 포로귀환자들은 그때와 다릅니다.
이들은 페르시아에서 태어나 완전히 그 땅에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1차포로귀환자들의 삶이 어떤지 소문으로도 들어 이미 알고 있었겠죠.
장밋빛 환상을 갖고 따라 나온 사람들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차 귀환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채우려고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도록 그 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이들은 성전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대단한 지위가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이들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떠날 수 있는 이것이 성도입니다.
계시록14장에서 어린양의 신부가 될 성도가 이렇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어디서나, 어떤 처지에서나, 항상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인 것이죠.
이 평범한 성도들의 결단을 하나님이 지켜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하나님의 책 에스라서 8장에 기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고 뭐 대단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봉사도 조금, 기도도 조금, 성경묵상도 조금, 그렇게 조금씩 깔짝거리다, 거의 종일 나를 위해 살지 않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가는 방향이고 목적지이고 누구를 따라가냐입니다.
지난 주에 백목사님이 담석이 막혀 응급실을 찾았습니다.
복통이 너무 심해서 119를 부를까 하다, 요즘 구급대원이 전화할 때 거절하는 병원이 많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운전해서 의정부성모병원 응급실로 무조건 찾아갔습니다.
다행히 다섯 시간 정도를 기다려가며 검사를 받았습니다.
문제가 된 담석은 빠졌지만 염증을 일으켜 급성췌장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집중치료실에서 하루, 일반병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퇴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잘 회복 중입니다.
저는 남편이 검사받는 동안 보호자 대기실에서 기다렸습니다.
옆에서 전화하는 소리, 대화하는 소리가 다 들렸습니다.
몇 시간 있다 보니 거기 온 사람들이 무슨 병으로 왔는지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집 사정까지 얼추 알 정도였습니다.
그 중 팔십 대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검사받는 남편을 혼자 기다리고 있더군요.
연신 자식들과 전화를 했지만 자식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한참이 지나서 간호사가 입원실이 배정됐다고 할머니를 불렀습니다.
할머니는 힘들게 일어나더니 구석에 놓여있던 짐꾸러미들을 챙겼습니다.
성인용 기저귀 한 팩과 이불 보따리를 한 손에 들고, 입원 짐이 잔뜩 담긴 가방 하나를 밀면서 나가는데, 할머니 등이 많이 굽어 있었습니다.
제가 그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인생, 정말 만만치 않구나.’
‘평생 찾았던 행복은 어디 가고, 아픈 몸과 가족에 대한 책임만 남았을까.’
사람들이 저것을 인생의 끝이라고 안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요?
우리는 그 너머에 있는 영광스러운 영생을 보면 절망이 아니라 감격이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자기들과 똑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목적지가 다르고 바라보는 게 다릅니다.
페르시아가 인생의 끝인 사람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길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괜한 고생을 사서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편히 살다 죽으면 되지’
그러나 귀환자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실 나라로 돌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니 섬기는 사람들도 영원히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포로가 되기 전부터 하나님은 심판받을 것을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탐욕과 죄의 끝을 보여주셨지만 그들은 세상과 가나안의 풍속이라는 잘못 된 목적지를 선택한 것이죠.
하나님이 그것만 예고하신 게 아닙니다.
포로에서 다시 본토로 인도하시고 다윗의 자손인 목자가 영원히 다스릴 것을 무수히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목적지로 삼지 않고 이번에는 바벨론을 목적지로 삼고 남은 것입니다.
하나님나라가 목적지였지만 마치 고속도로를 타고 목적지를 가다 휴게소에 들려 먹고 놀며 평생을 보내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담 너머 집집마다 떠나오지 못한 사연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남은 자들의 이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남아서 하나님을 잘 믿었을까요?
바벨론에서 유대인들이 회당도 짓고 율법도 가르쳤다지만 유대교가 번성했다는 역사의 흔적은 없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의 삶도 그다지 풍요롭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들의 자손은 이스라엘 땅에서 번성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유다 땅에 이스라엘 민족이 번성해 하나님 신앙을 지켜냅니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이뤄질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미약하게나마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게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온 포로들처럼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 와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시민으로 명부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오늘 귀환자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과정 속에 유심히 보아야 할 게 두 가지 있습니다.
에스라가 작성한 명단을 자세히 보면 흥미로운 점이 보입니다.
2차에 돌아온 가문이 1차에 돌아왔던 그 가문들이라는 것입니다.
남아있던 자손들도 결국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면 우리의 자손들이 따라오기가 쉬운 것입니다.
또 15절을 보면 아하와 강가에 귀환할 사람들을 모아 명부를 작성하다 보니 문제점이 발견 됩니다.
그 중에 레위인들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성전에서 봉사할 레위인들은 더 책임감을 갖고 돌아갔을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때로 믿음이 좋은 사람들에게도 힘겨운 일입니다.
성실히 주님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본능은 아니잖아요?
본능이라면 저절로 되겠지만, 하나님과 형제를 섬기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결심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실히 하나님을 섬기는 서로를 귀히 여기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한발 물러선 사람들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에스라가 제사와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 귀국하는 것인데, 그 일을 할 레위인들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에스라는 족장들을 레위인 마을로 보내서 지원자를 데려옵니다.
그랬더니 18절에서,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약 사십 명의 레위인들을 데리고 옵니다.
이들이 아하와강에 모여서 출발하기까지 시간이 십이 일 정도였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귀국을 결심한다는 건 쉽지 않죠.
에스라가 생각해도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셨기 때문인 것것이죠.
우리가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함께 예수님을 믿자라고 권유하는 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힘써 권면할 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셔서 그들도 우리와 함께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2.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고 처음 행한 것은 금식과 기도입니다.
21절,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1) 무리들이 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까?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땅을 채우기 위해 그 힘든 여정을 선택했다는 게 왠지 마음을 뭉클하게 하죠.
우리 자녀들을 믿음의 길에 동행하게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복된 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금식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했는지 그 이유가 22절에 나옵니다.
당시 아닥사스다왕에게 군대를 붙여 달라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에스라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군대가 호위한다면 넉 달 여행길이 얼마나 안전하겠습니까?
그걸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안 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다고 합니까?
에스라가 왕에게,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그동안 말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는 길이 위험하니 지켜 줄 군대를 왕에게 구하는 게 부끄러웠다는 것이죠.
2차 귀환 프로젝트는 페르시아 왕실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이뤄진 일입니다.
25절을 보면 페르시아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남아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26절, 은이 육백오십 달란트, 은그릇이 백 달란트, 금이 백 달란트, 금잔이 스무 개였다고 합니다.
1달란트가 30킬로 정도됩니다.
지금 가치로 얼마나 거액일지 정확히는 몰라도 엄청나다는 건 알 수 있죠.
1차포로귀환 때 가져온 금은 보물보다 훨씬 많은 양입니다.
금전을 그만큼 모아서 주었다는 건 귀환 프로젝트가 왕실의 큰 사업이었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들이 왜 그랬겠습니까?
에스라의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이고, 그런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 나라와 왕실과 자기들의 복을 빌어달라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에스라가 그런 그들에게 군대의 보호를 요청하는 게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크신 하나님을 철썩 같이 믿는데, 그렇게 말해 온 자신이 안 믿는 게 되는 것이잖아요?
또 오천 명의 사람을 안전하게 호위하는데 몇 명의 군사가 필요하겠습니까?
주변에 산재한 대적과 적군을 생각할 때, 수백 명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 많은 병력을 예루살렘으로 가는 데만 넉 달, 다시 바벨론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계산하면 여섯 달 이상 붙잡아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왕실에 큰 폐가 되는 것이죠.
에스라는 군대의 보호 대신 하나님의 보호를 선택한 것입니다.
에스라에겐 실제적인 군대의 보호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호가 다르지 않았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라면 당연히 현실적인 방편을 선택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을 불신앙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청년 때는 감기 걸리고 약 먹는 것도 믿음이 부족하다고 부끄러워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기도해서 나아야 믿음의 실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오늘과 반대의 경우도 지지합니다.
느헤미야가 3차 귀환을 할 때 똑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결정했는지가 2장8절에 나옵니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느헤미야는 왕이 붙여준 군대 장관과 마병을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셨다고 하죠.
군사의 보호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랬겠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어디까지 현실을 보고, 어디까지 믿음으로 해야할 지 좀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에스라가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선택한 것은 아까 살펴보았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의 경우든 느헤미야의 경우든 하나님은 믿음대로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주님이라는 목적을 따라가고 있다면 에스라인지 느헤미야인지 지혜롭게 적용하면 될 것입니다.
보통 느헤미야와 같이 합리적으로 살겠지만 때로 에스라와 같은 믿음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준비되고 타당해야만 움직인다면 하나님도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십니다.
믿음의 자존심이 기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 아무 것도 없지만 믿음과 기도로 감당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감동하심도 무시하지 않으시길 축복드립니다.
2) 하나님은 이들의 믿음과 기도대로 귀환자들을 철저히 보호하셨습니다.
31절,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아니나 다를까, 그 길엔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금과 은을 운반한다는 소문을 듣고 매복한 강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이 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손이 더 강하겠습니까?
군대의 손보다, 대적의 손보다, 하나님의 손이 강한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사막에 모래바람을 일으켜 대적들을 흩으셨는지, 불뱀과 전갈을 보내셨는지,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을지 궁금하죠.
에스라는 당연한 듯, 아주 간단히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셨다고 합니다.
결과는 기도했던 그대로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가 털끝도 다치지 않고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의지하고 맡기는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새백0 교회 김민0 목사님이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분이 당뇨를 방치해 젊을 때 한쪽 눈을 못 봅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던 중 나머지 눈도 안 보이게 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죠.
목회를 어찌 계속할지 하나님께 대한 원망으로 삶의 의욕을 다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 침대에 다섯 살 정도 된 여자아이가 입원해 있었습니다.
소파에서 뛰어내리다 연필 같은 것에 눈을 찔려 한쪽 눈을 실명한 것입니다.그 날도 낙담해서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데, 커튼으로 가려진 그 옆 침대에서 아이 엄마가 아주 나지막하게 아이에게 찬양을 불러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너를 해치 못하리.
그 찬양소리가 들리는 데 앞이 안 보이는 목사님 눈에 커튼 너머 옆 침대가 환상 속에 훤히 보였습니다.
아이가 침대에 앉아 있고, 아이 엄마는 보조 의자에 앉아서, 두 손을 벌려 아이를 축복하며 찬양하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이와 엄마 뒤에서 감싸고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이 목사님이 너무 놀라 커튼을 열어젖혔습니다.
놀란 아이 엄마에게 자기는 앞을 못 보는 목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방금 찬양 부르는 성도님을 예수님이 뒤에서 감싸고 계신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아이 엄마가 털썩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습니다.
실명하고 살아갈 아이 걱정과 아이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자기는 지켜주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앞으로 이 아이를 지켜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며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키고 계시다는 말에 마음이 녹아내린 것이죠.
이후로 이 목사님도 앞이 안 보여도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기적적으로 한쪽 눈이 회복되어서 목회를 잘 하고 계십니다.
에스라는 군대보다 강한 하나님의 선한 손이 지켜주실 것을 믿었고, 하나님은 믿음대로 귀환자들을 안전하게 지키셨습니다.
우리와 자녀들의 안전과 미래를 무엇에 맡기겠습니까?
군사보다, 대적보다, 전쟁보다, 질병보다 강하신 하나님께 맡기시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3. 에스라와 2차 귀환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한 일입니다.
에스라가 도착해서 행한 일들의 순서가 우리 성도들에게 중요한 점을 지도하시는 것 같습니다.
1) 32절,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기서 삼 일 간 머물고
귀환자들은 넉 달 간 고된 여행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세워진 하나님 성전을 처음 보고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이 성전을 지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내 할아버지, 내 증조할아버지입니다.
내 가문의 수고로 지은 성전이니 그 감격은 더욱 남다른 것이죠.
내 손으로 교회를 세우는 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남다른 축복입니다.
우리가 그런 복된 사람들입니다.
에스라는 여행에 지친 귀환자들을 재촉해서 예배 먼저 드리지 않았습니다.
사흘 동안 긴장과 피로를 충분히 쉬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얘야, 난 괜찮으니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한 쟤들을 좀 쉬게 해라.’
우리가 본업만으로도 늘 지치고 힘든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지난 주 튀니지의 한 이슬람사원이 나오는 여행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사원이 성지가 된 것은, 사원 안에 있는 우물이 무하메드의 고향에서부터 흘러나온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깊은 우물에서 계속 물을 길어 올리는 것은 낙타였습니다.
수건으로 눈을 반은 가린 낙타가 도르래를 움직이는 막대에 몸이 묶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뱅뱅 돌며 물을 길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낙타가 너무 가여웠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길어 올린 물을 성수라고 복을 빌며 받아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기적이고 무지몽매하기까지 한 인간들 모습에 한숨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우리를 낙타처럼 부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안식일을 주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은 일하다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도 잘 쉬고, 다른 사람들의 쉼도 배려해 주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가져 온 금은 보물들을 성전 제사장들에게 넘겨 줍니다.
24절에 보면 에스라는 왕궁에서 받아온 보물을 출발 직전 제사장들에게 맡깁니다.
그때 금과 은과 그릇들의 중량을 재서 정확히 기록합니다.
그리고 도착한 뒤 33절에서 다시 보물의 무게를 측정합니다.
넉 달 전 달았던 무게와 똑같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받은 헌물들을 정확하게 성전에 바친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에스라의 정직성과 정확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배운 정직이 우리 모든 생활에 녹아있기를 축복드립니다.
3) 그리고 나서 돌아온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예배를 위해 온 귀환자들인데, 의외로 예배에 대해선 35절 한절로 간단히 기록하고 끝냅니다.
이들이 돌아가서 하나님께 제사드리겠다 결심한 순간부터 이미 예배는 시작된 것입니다.
광야 4개월은 예배입니다.
오늘만이 우리의 예배가 아니라 가정과 세상에서 살아가는 나머지 날들도 예배이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귀환까지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에스라의 신앙과 능력과 인간다움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에스라 같은 장성한 믿음으로 함께 자라길 축복합니다.
우리가 현실과 이성을 사용해서 살지만, 마음 한 켠엔 에스라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당돌한 자존심을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방편보다 하나님의 손이 더 강하십니다.
에스라서에서 보아야 할 큰 구원의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다시 백성들을 모으신 것은, 구원을 성취하실 예수님이 구약 성도들의 공동체 속에 오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것도 우리 안에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기쁘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오지 않고 있는 가족과 이웃들을 에스라처럼 계속해서 불러올 수 있다면 우리 삶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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