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이유로 결혼식을 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간혹 어떤 단체에서 합동으로 결혼식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죠.
오늘 이야기는 그 반대입니다.
백십삼 가정이 집단으로 이혼한 사건입니다.
이런 일은 성경에서 밖에는 찾아볼 수 없죠.
그동안 에스라서를 어렵게 살펴 왔고 오늘이 마지막 장입니다.
그런데 에스라서의 결말이 좀 당황스럽죠.
차라리 지난 주에 하나님 보시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던, 믿음의 귀환으로 끝이 났으면 은혜로웠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 보면 끝도 좋았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에스라서 마지막장이 어떻게 아름다운 결말이 되는지를 살펴볼 때 우리에게도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1. 돌아온 포로들의 공동체에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일은 에스라가 돌아온 지 다섯 달이 지나서 터집니다.
어느날, 백성들의 지도자가 에스라에게 와서 기가 막힐 소식을 전합니다.
1차 귀환자들이 이 땅에 살고 있던 이방 민족들과 통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엔 제사장도 있고, 지도자들도 끼어 있다고 합니다.
에스라가 이 보고를 받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9장3절에서 알 수 있죠.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학자 에스라의 엄청난 충격, 절망, 슬픔, 고통이 느껴집니다.
어찌 보면 누구랑 결혼하든 각 사람의 자유 아니겠습니까?
이방인과의 결혼이 무엇이 문제이기에, 에스라서에서 단지 이 한 가지 사건을 두 장에 걸쳐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을 좀 알아야 오늘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민족들과의 통혼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정체성, 존립의 이유에 직결된 중대 사안입니다.
이스라엘이 분열된 것도, 나라가 망한 것도, 다 이방 민족과의 통혼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방 민족과의 혼인을 금하셨는지는 다 아실 것입니다.
9장에 이어지는 에스라의 긴 기도에도 정확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죠.
너희가 들어가서 얻을 가나안땅은 더러운 땅이다.
가나안의 부족들의 우상숭배와 죄악이 땅을 더럽혔다.
그러니 절대 그 부족들과 혼인하지 말아라.
가나안부족들과 혼인하고 ‘섞여 살면’ 그들과 똑같아질 것이고, 반드시 너희도 그들처럼 그 땅에서 쫒겨 날 것이다.
2절에 보면 지금 일어난 이방 혼인의 문제를 정확하게 ‘그들과 섞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좋은 땅을 주시면 될 일이지 왜 더러운 땅을 주시고 섞이지 말라고 하십니까?
사람이 살고 있는 어떤 땅이 죄가 없고 깨끗하겠습니까?
지금도 우리를 그런 땅에 두신 것이잖아요?
하나님은 더러운 가나안땅에 이스라엘을 심고 거기서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모토가 되고, 만민에게는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것이죠.
이것은 신약의 성도인 우리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귀환자들 중 왜 나라가 망했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조상들이 그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 겨우 심판의 기간을 채우고 조국으로 돌아왔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기에, 그 죄를 다시 반복한다면 심판도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백성들이 지은 죄도 충격이었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에스라가 얼마나 막막했겠습니까?
뒤에 보면 가정을 이루고 이미 자식을 낳은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분명히 바로잡아야 할 중죄인데, 그 가정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 것이죠.
2. 에스라와 공동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단합니다.
문제와 시련은 항상 있는 것이고, 그것을 돌파하는 게 믿음의 실력입니다.
이 엄청난 문제를 에스라와 공동체가 결국 해결했다는 게 놀라울 뿐입니다.
우리도 이 원칙을 잘 알고 문제가 되는 나의 상황에 잘 적용해야 합니다.
1) 먼저 에스라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기도하고 회개합니다.
9장에 있는 에스라의 기도를 보면 마치 자기가 죄를 지은 것처럼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이것은 단지 백성들의 죄를 ‘내 탓이라’고 회개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또 거역하고, 반복되는 인간의 죄가 부끄럽고 한탄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 명령대로 진지하게 살면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모습이 더 드러납니다.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고 행하고 가르쳤다고 앞에서 배웠죠.
말씀을 촘촘하게 내 마음과 언행에 적용하고 지키려고 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이타적인 사랑이 기반이 되는 것이잖아요?
우리 본성이 이기적이라, 말씀대로 사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만 점점 더 ‘내가 죄인이로구나’ 그걸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죠.
그렇기에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저들의 죄와 무관한가?
그렇지 않죠.
로마서 3장 23에서 말씀하셨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장10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래서 십자가의 대속 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에스라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만 비난하지 않고 ‘우리의 죄’라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팔복의 그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모두의 죄와 고통에도 공감하는 상한 심령이 되는 것이죠.
작년에 인천에서 교제폭력으로 살해당한 젊은 여성이 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는 중에 문 앞 엘리베이터에서 지키고 있던 가해자의 칼에 찔려 사망했습니다.
딸의 비명소리에 함께 살던 친정어머니가 달려 나와 범인이 휘두르는 칼을 손으로 막았습니다.
그런데 피해자의 여섯 살 난 딸이 따라 나왔던 거예요.
할머니는 손녀딸을 지키려고 데리고 황급히 집안으로 도망쳤습니다.
딸은 심장을 찌르고 내리그은 피해자의 칼에 장기가 다 절단되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1심재판에는 정신적 충격으로 나오지 못했던 친정어머니는 딸에 대한 사건을 정확히 진술하기 위해 지난 6월에 2심재판에 증인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재판장이 먼저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손 다치신 데는 괜찮으신가요?’
친정어머니는 재판이 끝난 뒤 재판부에 감사를 전했습니다.
사고 이후 자기 안부를 물어 준 사람이 처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날 칼을 잡았던 손을 내가 왜 놓았을까, 손녀를 데리고 안으로 도망가지 않았다면 딸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끔찍한 딸의 주검이 생각나고, 그 자책감에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칼을 잡았던 손은 다 나았지만, 딸을 범인의 손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상처는 어떻게 치유가 되겠습니까?
부모라고 모든 위험에서 자식을 지켜줄 수는 없습니다.
40센티 칼을 손으로 막았을 때 왜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겠어요?
사람들은 왜 끝까지 범인과 싸우지 않고 손녀를 데리고 들어갔냐는 비난의 눈으로 어머니를 보았을지 모릅니다.
부모도 힘없는 인간인 걸 아는 재판관이, 같은 부모로서 걱정해 주는 말에 어머니는 비로서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손녀를 구한 것에 위안을 삼고 살겠다고 하더군요.
에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민족의 역적이 된 그들을 죄인이라고 몰아붙이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면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어요?
내 당장의 즐거움과 이익을 위해 말씀에 귀를 막은 적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10장1절,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그런 에스라의 눈물과 회개에, 모인 백성들도 똑같은 마음으로 통곡합니다.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만일 에스라가 죄인들을 데려다 무조건 잘못을 추궁했다면 공동체 전체가 회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잘못이라고 회개하는 공동체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가정에든 교회든 누구나 잘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어려운 문제가 사람 관계에서 온 것이라면, 에스라가 가졌던 그 마음을 항상 먼저 갖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그리고 이 일의 해결을 도울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서만 애통했을 뿐인데,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신 것입니다.
문제의 실마리는 이렇게 하나님이 슬슬 풀어주셔야 엉키지 않습니다.
2절을 보면,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라는 사람이 나섭니다.
엘람 자손은 1차 포로귀환자 명단에도 나오고, 2차 포로귀환자 명단에도 나오는 가문입니다.
1차 귀환한 엘람자손의 후손이었던 스가냐는 그동안 귀환 공동체를 이끌던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도움이 될만한 자격이 되니까 나섰겠죠.
스가냐는 큰 충격에 빠져 있는 에스라를 놀랍게 격려합니다.
2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이스라엘에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배척하지만 않으면 어떤 난관에도 당연히 소망이 있습니다.
진짜 방법이 없을 것 같을 때도 하나님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율법을 어기고 이방 결혼을 한 사람이 무려 백열세 명입니다.
그런데 소망이 있다는 것이죠.
스가냐라는 사람도 믿음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스가냐는 에스라에게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제안합니다.
방법은 이들을 다 이혼시키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이 있으려면 우리를 지도하시는 말씀대로 하면 됩니다.
말씀대로 따르면 문제가 풀려나갑니다.
3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에스라도 이 말을 차마 하지 못했잖아요?
마지막에 보면 이방 결혼한 사람의 명단이 나옵니다.
거기 보면 스가냐가 속한 엘람 자손 중에도 6명이 들어갑니다.
26절, 엘람 자손 중에서는 맛다냐와 스가랴와 여히엘과 압디와 여레못과 엘리야요
스가냐가,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 율법대로 강행하자는 것이 아닌 것이죠.
단지 이 큰 사건을 하나님과 약속하고 율법대로 행하는 게 맞다는 것입니다.
이방 민족과의 결혼을 금지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 문제의 폐단을 가장 잘 파악하셔서 명령하신 일이잖아요?
하나님이 결정해 주신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든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이방 결혼을 덮어주면 이스라엘은 또 다시 심판을 불러올 만큼 타락합니다.
나중에 느헤미야가 3차귀환자들과 함께 돌아오죠.
그때도 이방여인과 결혼한 유다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의 형편이 이랬습니다.
느헤미야13장23절,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24절,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이방 여인과 결혼해 낳은 아이들이 유다 말을 아예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어머니 영향을 더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은 외가의 말을 배우고 외가의 풍속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9장1절에서도 이방 결혼을 한 사람들이 이미 우상숭배에 발을 들여 놓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구약성경에서 가증한 일이라는 단어는 우상숭배를 일컫는 말입니다.
방법은 이 결혼을 여기서 끝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죠.
스가냐는 더 힘주어 말합니다.
4절,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옷을 찢고 애통하던 에스라에게 얼마나 큰 격려입니까?
단체를 이끄는 지도자에게 이런 조력자들이 있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이죠.
믿음의 공동체는 한 사람 지도자가 이끌지 못합니다.
우리교회도 모든 성도님들이 항상 저를 지지해 주고 용기를 주시고 함께 동역하고 있잖아요?
모세에게도 아론과 미리암이 든든한 동역자였죠.
충성스러운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조력자도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나라를 얻을 때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역대상 12장 22절,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돕는 사람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돕는 사람들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3. 용기를 얻은 에스라가 일어나서 이 사건을 해결해 종지부를 찍습니다.
5절,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에스라는 또 다시 하나님께 금식하고 기도합니다.
이때는 ‘이방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죄를 근심했다’고 합니다.
헤어질 결심이 얼마나 힘들지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결단하는 것 외에는 복된 결말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에스라는 귀환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모이라고 공포합니다.
8절을 보면 만일 삼 일 내에 오지 않으면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쫒아 낸다고 하죠.
아닥사스다왕의 조서를 보면 에스라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자는 재산을 적몰하고 죽여도 좋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에스라에게 이런 행정적인 권한이 있었기에 강제성을 띤 조처를 취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유다와 베냐민의 모든 사람들이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게 됩니다.
그 다음은 또 하나님이 일하시죠.
9절, 때는 아홉째 달 이십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 비 때문에 떨고 있더니
유대력 아홉째 달이면 11월 중순 정도됩니다.
이때는 춥고 비가 잦은 우기입니다.
무리들이 다 성전 앞 광장에 앉아 있었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일과 큰 비 때문에 떨고 있었다고 했죠.
공동체에 다시 하나님을 배반한 이방 결혼과 우상숭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에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떨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심판처럼 쏟아지는 장대비에 몸과 마음도 떨었다는 것이죠.
오늘 백명이 넘는 가정에서 이방인 아내와 자식들을 내 보내게 하는 일은 듣도 보도 못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두려움이 임하지 않았다면 단 한 사람도 이 일에 동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이 문제를 바로잡길 원하시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찔리고, 불편하고, 두려움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하실 때는 나 자신을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귀환자들은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11절,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12절,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이 일은 이후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각 성읍마다 장로들과 재판장들이 이방 결혼 한 사람들을 먼저 조사해 에스라에게 보냅니다.
이방 여인 중에 하나님을 믿는 경우도 있을 거잖아요?
이 모든 일을 석 달에 거쳐 마쳤다고 합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내 보내려면 살아갈 대책을 세우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죠.
그리고 마지막에 보면 이방 여인과 결혼했던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어찌보면 부끄러운 이름들 같지만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들이 하나님 앞에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켰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아내와 아이들까지 다 헤어질 수 있었냐는 게 미스터리죠.
그만큼 뭐가 무서웠다는 것입니까?
포로생활이 무서웠다는 것이죠.
우리나라가 일본하고 왜 감정이 예미합니까?
일제강점기 때문이잖아요?
이방결혼은 결국 무서운 과거를 되풀이 하게 한다는 것이죠.
당시는 전쟁에 지면 적들이 어린아이들을 바위에 메쳤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내들은 칼에 맞아 죽고, 산 자들은 노비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역사는 반복되죠.
지나간 역사에서 배우지 않으면 아픈 역사는 반복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보다 넘어지기 쉬운 약점과 단점이 다 각기 다릅니다.
전에는 자주 넘어졌지만 점점 이겨나갈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오늘 유다인들의 이방결혼의 문제점을 불신자와의 결혼으로 적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적용하는 게 더 나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주변의 모든 것이 다 가나안의 풍습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과 문화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 자녀들만 다른 방식으로 삽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법대로 살지 않는다면 세상과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삶이 다르지 않다면 교회 다니는 것, 사람들이 절 다니는 것이나 똑같이 봅니다.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고 야고보서는 경종을 울립니다.
세상과 가까워지고, 결혼까지 하게 되면 헤어질 결심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거룩한 하나님 자녀로 나를 세상과 자꾸 구별하고,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은 사람들 때문에 충격이었지만 죄인들에겐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단체로 이혼한 게 더 큰 충격입니다.
그만큼 죄에 대한 심판이 두려웠고, 하나님도 긴밀하게 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에스라와 공동체는 이 사건을 최선을 다해 해결한 것입니다.
2차 포로들이 돌아올 때도 ‘더 이상 좋을 수 없었지만’, 끝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후에 느헤미야가 와서 보니 이방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이 또 생겼습니다.
에스라의 신앙 회복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절반의 성공이라 함은, 귀환자들이 에스라의 지도 아래, 오늘과 같이 범죄하면서도 살을 도려내는 회개로 하나님께 돌이켰다는 것이죠.
이후 유대인들은 회당을 짓고 모세의 율법을 더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지금 포로귀환기 다음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가 침묵기죠.
그 사이 성경기록은 없지만 일반 유다역사의 기록을 보면 안식일을 얼마나 철저히 지켰는지 안식일에 쳐들어온 시리아 군대를 막지 않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살당했습니다.
그런 것이 예수님 당시에도 안식일 문제로 주님과 바리새인들이 갈등을 일으키게 된 것이죠.
간음한 여인 데리고 와서 ‘돌로 칠까요?’ 그랬잖아요.
절반의 실패라 함은, 율법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죄가 반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율법에 목숨을 걸었지만, 율법을 주신 하나님도, 이웃도 사랑하지 않는 민족이 되었던 것이죠.
결국 에스라서는 이것으로는 완전하지 않다는 결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땅에 메시야가 오셔야 완전해 집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오셔야 하는 것이죠.
포로시대에 에스겔선지자가 장차 올 메시야의 나라를 예언했잖아요?
36장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절,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 말씀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대속하시고 우리 안에 성령이 오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대속을 믿고 구원 받았지만, 혈육을 끊어낸 귀환자들의 오늘 믿음의 순종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책망하실 때 죄와 세속의 풍습과 헤어질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점점 더 오염되고 타락하는 세상에서 말씀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스스로 구별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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