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그림 같은 설경에 넋을 놓고 감탄했지만, 눈의 위력도 대단하더군요.
폭설에 큰 피해를 본 안타까운 소식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의 무지와 탐욕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자연도, 원치 않지만 사람을 습격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시세를 읽을 수 있는 지혜를 주셔서 잘 대비하고 대처할 수 있게 해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오늘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바울사도의 가르침을 계속 살펴 봅니다.
말씀이 우리를 잘 비춰주셔서 큰 은혜와 유익을 얻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8절부터 10절까지는 이웃 사랑에 대한 권면입니다.
교회를 다니며 제일 많이 듣는 말씀은 아마 ‘사랑’일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불신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랑을 제일 많이 말하면서 실제는 사랑이 없다는 것이죠.
사랑하기가 그만큼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성경에 그렇게나 많이,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셨을까요?
어차피 구원받았으니 되는대로 산다 해도 천국에 데려가실 거잖아요?
오늘은 우리를 아예 사랑의 빚진 자로 몰고 가십니다.
빚졌으니 갚으라시는 것이죠.
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이 말씀은 세상에서 빚지고 살지 말라는 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현대사회에서 빚 없이 산다는 게 어렵죠.
물론 그렇다면야 좋은 일이죠.
그러나 작게는 카드 대금부터 빚이고, 할부, 학자금 대출, 주택 관련 대출, 사업자금, 종류도 많은 빚을 지며 사는 게 현실입니다.
성경에서 물론 빚을 권장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지혜서인 잠언은 빚 진 사람은 빚의 노예가 된다는 사실을 경고하며 재정 관리를 철저히 할 것을 가르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우선은 그런 빚을 지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세웁니다.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
그러나 더 하고 싶은 이야기인즉슨,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빚은 지라는 역설입니다.
‘빚’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죠.
요즘은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살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 관계가 힘들다 보니 가급적 서로 엮이지 않고 사는 게 편하다는 것이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전화 통화 기피증이 있다고 합니다.
전화 벨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 공포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콜포비아라고 하죠.
우리는 준비된 상태에서 계획한 대로 사람들을 대해야 편합니다.
전화벨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울리니 부담되고 불안하다는 것이죠.
가수 아이0씨도 전화공포증이 있다고 하더군요.
통화하는 게 굉장히 힘들고, 심지어 엄마한테도 전화가 오면 좀 불편하다고 합니다.
최근 알바천국에서 MZ세대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3명 중 1명 이상이 콜포비아를 겪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갈수록 대인관계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는 10여 년째 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이 1위입니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 ‘외로움’이라고 합니다.
사람과의 소통은 점점 멀어지고, 결국 외로움이 덮친다는 것입니다.
전화공포증이나 대인기피증 같은 현상들은 남의 관심에 대한 부담감이 본질적인 원인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상태로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데서 오는 부담일 것입니다.
가까이 하자니 부담스럽고 멀리 하니 외로운 것이죠.
이렇게 부담되는 이웃사랑, 어떻게 해 낼 수 있을까요?
1) 우선 하나님이 이토록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알았던 사람은 아마도 사도 요한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요한일서에서 자기가 평생 섬긴 하나님을 한마디로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사랑보다 더 나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하실 때 가장 행복하시고 사람을 만드실 때도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하게 만드신 것이죠.
이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비록 창조의 사랑은 오염되었지만 아직도 그 사랑이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죠.
우리 어릴 때 부모님은 사랑 표현을 잘 못 하셨습니다.
그래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부모에게 받은 사랑의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아버지가 이대 앞에 새로 생긴 경양식집에 데려가서 돈까스를 사주신 것을 잊지 못합니다.
잡은 손 놓지 않을게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지난 폭설 때 안동 풍산대교에서 트레일러가 미끄러져 난간을 들이 받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운전석 부분이 난간을 뚫고 밖으로 나가 위태롭게 걸쳐진 상황이었죠.
그때 먼저 도착한 소방관이 운전석에서 운전자를 발견합니다.
부서진 창문으로 하반신이 밖으로 나와있는 상태였습니다.
소방관은 운전자의 피묻은 손을 꽉 붙잡았습니다.
굴절차가 도착해 안전하게 구조되기까지 45분간 잡은 손을 놓치않았습니다.
이 기사 아래에 엄청난 응원과 지지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개그맨 오지0씨는 하루 일과의 반은 자기 일을 위해, 반은 노숙인같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지난 폭설에 오르막길에 멈추고 눈에 바퀴가 빠진 차들이 많았죠.
그런 차들을 뒤에서 사람들이 같이 밀어주는 영상들을 보면 인류애가 충만해지는 것 같다고들 합니다.
이런 사랑의 순간들로 우리 삶이 완전히 다 채워진다면 어떨까요?
그럴 수 없는 그것이, 사실로 이뤄지는 게 천국의 삶입니다.
단지 으리으리하게 사는 게 천국은 아닐 것입니다.
천국에 사랑이 없다면, 그렇게 영원히 산다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우리가 행복하게 사랑하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그런 곳이 분명합니다.
이 죄악의 세상도 그나마 사랑의 온정이 많은 사람을 살리고 버티게 하는 것이죠.
그러나 죄에 오염된 사랑은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불완전하고 이기적이고 변덕이 심하죠.
또 사랑해야 할 상대는 항상 사랑스럽지는 않습니다.
자식이라도 하는 짓이 밉게 보이고, 부부 사이에도 서로 싫어하는 행동을 하잖아요?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이 힘든 것은 당연히 불완전하고, 이기적인 사랑이라서 그런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에서 사랑하라는 단어는 모두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상대를 위한 이타적이고 선한 사랑입니다.
죄인을 위해서 독생자를 주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받은 영원한 생명 속에는 놀랍게도 이 아가페의 사랑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나, 믿는 가족들끼리 조차도 아가페의 사랑이 힘들까요?
본성이 몸에 익어 먼저 나오기 때문입니다.
행동이 습관이 되면 머리에서 지시하기도 전에 자동으로 움직여지는 것과 같은 것이죠.
‘몸이 기억한다’는 말이 있죠.
그 말도 일리가 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그동안 뇌세포만 기억할 수 있다고 알았지만 신체세포도 반복학습에 의해 기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실패하는 것은 기억과 신체에 각인 된 죄의 본성과 습관 때문인 것이죠.
표준말을 알아도, 태어나고 자란 지방 사투리가 먼저 나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려는 의지적인 노력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하면 뭐가 당장 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서 기도를 잘 안하는 성도들이 많죠.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내 영을 강하게 하시고, 상황을 적절하게 움직이시는 게 눈으로 보인다면 아마 기도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걸요.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도하고, 내 의지적인 노력으로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게 사랑을 주는 것이기에 받는 우리는 서로 빚을 지는 것입니다.
남아돌 만큼 저절로 되는 쉬운 사랑이라면, 누가 빚졌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본문에서 왜 그런 사랑을 보고 율법을 다 이룬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 사랑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사랑이잖아요?
자기가 싫으면 안 합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의 사랑이 세상과 다름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말 사랑하기 힘든 상대라 해도, 의지를 다해 사랑하려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믿고, 사랑에 힘쓰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두 번째 단락은 11절부터 14절입니다.
두 번째 단락도 사랑이라는 각도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 단락은 ‘어떻게 나를 바르게 사랑할까’에 대해서입니다.
세상에서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9절에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잖아요?
이웃사랑도,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 기준이라는 것이죠.
성경이 부인하라고 하신 것은 죄의 본성이지 내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본문은 어떻게 나를 올바르게 사랑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1) 내 신분을 알고 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11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이 구절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라는 해석이 가능할지 좀 의아하죠.
이것은 먼저 우리의 신분을 깊이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에서 이 ‘시기’는 ‘카이로스’라는 단어인데, 어떤 특별한 의미가 담긴 시간을 말합니다.
구원의 때라는 단어와 결부해서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피로 대속하신 성도들을 주님의 신부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이해하기가 가장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날 날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씀이 피부에 절실히 와 닿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는 경험되어지는 부분이 있고, 지금은 경험할 수 없기에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오신다는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지구역사의 종말이든, 아니면 각자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든, 이 두 가지 종말은 확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때가 우리에겐 신부가 기다리던 신랑을 만나는 것처럼 믿음의 절정인 것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부는 신랑의 사랑을 확신하기에 자기 존재가 귀한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확신 없이 결혼하는 신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얼마나 신랑의 사랑을 받는 신부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누가 생명을 바쳐 나를 구해주고 영원히 사랑해 주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면 나도 나를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나를 보면 실망스러울 때가 더 많죠.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런 나를 나 자신도 사랑하기 힘듭니다.
이런 사실들을 항상 생각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자다가 깰 때라고 하십니다.
신자들이 왜 잘까요?
천성이 게으르고 나태해서만은 아닙니다.
우리들 중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꾸 주저앉고 자는 것은 신앙도 잘 안되고 인생도 잘 안돼서입니다.
열심히 살아도 안되기 때문에 낙심되고 포기하고 자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이제 좀 쉴까?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죠.
오늘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지 말고 깨어만 있어라’
일이 좀 잘 안돼도 괜찮습니다.
믿음에 자꾸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신랑이 오실 것만 기억하고 깨어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신랑의 사랑을 받는 신부인 걸 잊지 말고 내 자신을 사랑하시길 축복드립니다.
2) 그런 성도들은 이렇게 한다고 13절에서 말씀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왜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게 많으냐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이런 일들을 행하는 게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당연히 이렇게 살지 않는 게 나를 사랑하는 것이죠.
미국에서 한해 펜타닐 같은 마약으로 죽는 사람이 11만명이라고 합니다.
이 펜타닐 원료가 중국에서 들어온다고 트럼프당선인이 관세로 중국을 압박하는 것입니다.
미국 필라델피아 좀비 거리에 대한 영상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기괴한 모습으로 몸이 꺾이고 굳어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끔찍하고 비참합니다.
그런 게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요?
성적으로 방종하고,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지고, 욕하고 다투는, 그런 게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요?
3) 그러나 본성에 익은 어둠의 일을 벗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본문에서처럼 극악한 죄가 아니라 해도 우리에겐 어둠에 속한 죄악들이 많잖아요?
그런 것을 벗으려면 대신 입어야 할 두 가지 옷이 나옵니다.
12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빛의 갑옷’은 전투복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도 권면합니다.
5장8절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요즘 입을 수 있는 형태의 로봇이 나오죠.
입으면 힘을 받쳐줘서 쉽게 일할 수 있습니다.
빛의 갑옷은 그런 것과 비슷한 느낌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믿음으로 입는 것입니다.
매일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갑옷을 잘 입고 있는지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입을 또 하나의 옷이 14절에 나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갑옷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옷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죄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옷을 입혀 가려주신 것입니다.
대신 주님이 벌거벗은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옷 입었다면 그 의복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군인의 제복이 행동을 제어하잖아요?
국가대표의 유니폼을 입었을 때 선수들은 그 옷이 주는 의미대로 살게 됩니다.
국대 옷을 입고, 클럽에 가서 노는 사람은 없죠.
국대 옷은 입고 벗을 수 있지만 우리가 입은 그리스도의 옷은 항상 입혀져 있는 것입니다.
왕의 잔치집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왕이 이렇게 말하죠.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우리가 입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이 세상과 육신의 일만을 위해 사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러라고 입혀주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육신을 가진 삶을 소홀히 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의식주와 나를 추구하며 사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이생의 욕망을 위해서만 열심히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방탕과 음란과 시기와 질투가 아니라고 해서 성도답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만을 위해서 삽니다.
열심히 사는 게 무슨 죄냐 하겠지만 그것만을 위해 산다면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180만 구독자를 보유한 김미0강사의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김미0강사는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입니다.
김강사에게는 게을러서 자기계발 안하는 사람은 인간도 아닙니다.
새벽 4시반에 일어나 하루 계획을 세우라는 미라클모닝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었습니다.
그렇게 삼십 년을 달려 왔던 김미0강사에게 최근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김강사가 본래 모태신앙이고 어머니는 권사였고, 언니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본인에겐 믿음이 없었습니다.
코로나가 터지자 모든 강의가 끊어지고 어느 순간 수입이 0원이 됩니다.
망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온라인 콘텐츠라는 걸 깨닫고 영상 콘텐츠 사업을 시작합니다.
코로나 때 정말 많은 사람이 김강사가 제작한 영상을 구매했습니다.
대박이 납니다.
일곱 명이었던 직원이 일 년 반 만에 백 명이 넘었습니다.
원하던 대로 자기계발 분야에서 정상에 선 것이죠.
승승장구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끝나자 비대면 콘텐츠 사업은 붕괴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다시 위기를 돌파해야 했습니다.
회사를 지키려고 머리를 짜내며 집에도 못 들어가고 탈진되도록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할만큼 했어, 이보다 더 할 수는 없어. 아무리 해도 결과가 이렇다면, 더 살 필요가 있을까?‘
그때 갑자기 목사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평소에는 언니 전화는 제대로 받지도 않았는데, 그날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언니목사와 울면서 통화를 합니다.
언니 나 죽고 싶어라고 말합니다.
대전에 살던 언니는 한밤중 급히 서울로 올라와 동생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언니가 가르쳐 준 예수님에 대해 듣고 그렇게 거부했던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그 당시 처참했던 기분을 김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텅 빈 광야에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이 혼자 서 있는 자신이 정말 벌거벗겨진 것 같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것만 향해 달렸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정말 신비한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자기에게 하시는 걸 느꼈다고 합니다.
옷을 입혀주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괜찮아, 옷 입어, 너는 내 딸이야. 이제 이 옷 입고 다시 잘 살면 돼’
김강사는 여전히 강의를 합니다.
그런데 이젠 육신의 정욕을 위해 열심히만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옷을 입고 그 목적을 위해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강의가 달라졌어요.
예전엔 똑 부러지는데, 압박하고 강요하는 스타일이 좀 부담스러웠습니다.
최근 강의를 들어보니, 그 안에 복음을 소개하려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얼굴이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회심하던 그날 밤 언니 목사는 동생에게 전화를 하려한 게 아니었다고 합니다.
주소록에 있는 다른 김미0에게 전화하려다 잘못해서 동생 김미0 번호를 눌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렇듯 오묘할 때가 많습니다.
방탕하고 악하게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세상 일만 생각하며 나를 혹사 시키는 것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옷 입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 안에서 나를 향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잘 살아가는 것이 진정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며 사는 게 가장 행복하도록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나를 바르게 사랑하는 것도 너무 중요합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인지를 알고 싶다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서 내 소중함을 발견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나를 위해 죽어 줄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이 거룩한 의의 옷을 입혀 주셨으니, 더러운 것 튀지 않게, 구겨지지 않게 잘 관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것이 진정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길입니다.
성령님의 힘을 구하며 나와 이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길 다시 애쓰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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