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부터 계속 마음이 편치 못하게 지내셨을 것입니다.
전 주만 하더라도 전쟁이 남의 나라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전쟁 같은 상황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그 날 편의점의 라면, 생수, 즉석밥 매출이 300%나 뛰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거 전쟁이나 자연재난 같은 때 있는 일이잖아요?
그냥 사는 것만도 힘든 데, 사람은 죽어라고 다투며 삽니다.
가난과 질병과 슬픔 중에는 그나마 때때로 작은 즐거움도 있고 하나님의 위로도 있습니다.
가난도 힘들고, 병도 힘들지만 그것보다 헐뜯고 싸우는 게 더 힘든 건, 싸우는 동안은 잠시도 마음에 안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사도는 로마교회에 야기되는 신앙의 견해 차이에서 생긴 갈등을 중재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문제만이 아니죠.
가정과 사회생활에서도 늘 만나는 문제입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원칙을 잘 배우고 지킨다면, 매일이 힘든 이 시대에 서로에게 괴로움이 아니라 위로를 주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1. 로마교회 교인들 간에 신앙 생활의 견해 차이로 분쟁이 생겼습니다.
본문 내용은 두 가지를 시사합니다.
하나는 음식 문제, 또 하나는 절기와 절일을 지키는 문제입니다.
안타깝게도 신앙생활 잘 해보려다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서신서를 보면 당시 모든 교회들이 다 여러 가지 분쟁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교회도 죄인들이 모였기에 완전한 일치와 화합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늘 사람들이 싸우는 걸 보고 삽니다.
지난 달 분당에 있는 한 중견 교회에 경찰 수십 명이 출동한 사건이 뉴스에 보도 되었습니다.
백여 명의 교인들이 뒤섞여 몸싸움을 벌였고 부상당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담임목사 선임 문제로 교인들이 두 파로 갈라져 싸우던 상황이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게 된 것이죠.
전에는 서로 예의 있고 교양 있게 대했을 성도들이 원수가 되었습니다.
작은 갈등이 조정되지 않고 진행되면 결국은 사람의 바닥이 드러납니다.
아무리 가족이고 친한 사이라 해도 그런 지경까지 가면 회복이 힘듭니다.
믿고 의지했던 사이일수록 그 신뢰가 깨지면 상처가 더 깊이 남죠.
그렇기에 하나님은 로마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도록 말씀을 주십니다.
누군가 참지 않으면 점점 분당 갈보0교회 같은 파국까지 가는 것입니다.
다툼이 있는 가정과 교회에서 어떻게 평안과 믿음을 잘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경찰이 와서 겨우 몸싸움이 수습된 갈보0교회 성도들은 기도회를 하겠다고 두 군데로 갈라져서 모여있더군요.
지치고 황망히 앉아있는 모습들이 처량하고 안돼 보였습니다.
로마교회의 문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절,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1) 음식에 대한 문제입니다.
집에서 무슨 음식을 해 먹느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당시에도 교회에 모이면 성찬과 애찬을 나누었습니다.
함께 먹기 위해서 가져온 음식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교회 성도간의 식탁 교제는 아주 중요한 게 분명하지만, 그로 인해 말도 많이 생기죠.
당시 로마교회에는 로마인 성도들과 유대인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음식에 대한 율법을 지키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율법서에는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결한 음식만 허용되었습니다.
율법을 주실 당시엔 음식을 제한해서 가나안부족들과 거리를 두게 하실 목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와 또 음식을 통해서 절제와 거룩을 가르치실 목적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음식에 대한 율법은 철저히 지켰죠.
그게 여전히 남아서 속된 음식과 깨끗한 음식을 구별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돼지고기 안되고, 고등어 조림도 안되고, 장어구이도 안되는 그런 것이죠.
그러니 로마인성도들이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교회에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을 가져왔다면 기피했겠죠.
반면, 로마인 성도들은 모든 육류에 제한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로마인 성도들의 육식을 왜 비판했을까요?
당시 시장에 나온 고기 중에는 신전 제사에 사용되고 나온 것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전에서 고기를 다 소화할 수 없어서 시장에 팔아 현금화시켰거든요.
우상숭배에 사용된 고기일 수도 있는 데 굳이 왜 그걸 먹냐는 것이죠.
왜 고사 떡을 먹느냐 그것과 비슷하겠죠.
반면 육류파는 우상이 뭐라고 하나님이 주신 음식물을 터부시하냐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는 타협할 수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스도의 성육신, 대속과 부활, 예수님을 통한 유일한 구원, 재림 같은 것들은 타협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또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들도 타협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교회 내에서 대립은 진리 문제보다는 대부분 신앙방식의 차이에서 생깁니다.
교회의 각종 의식이나 개인의 신앙생활에는 성경에 정확히 규정하지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술 문제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절대로 금지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잠언에 보면 술을 금하는 말씀이 있지만 그만큼 멀리하는 게 좋다는 뜻이겠죠.
음주를 죄악시 하는 신자들도 있고, 적당한 음주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이 된 것들은 신앙에 유익에서 출발한 것이니 지키는 게 우선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니니 좀 융통성있게 볼 수있지 않냐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 내가 술을 음식으로 생각하고 자유롭다 해도, 그것이 다른 형제에게 시험이 된다면 굳이 앞에서 음주를 주장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도 뒤에 보면 우상의 제물인 육식 문제로 연약한 성도들이 시험에 든다면 차라리 먹지 말라고 결론을 내 줍니다.
2) 절기와 절일을 지키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5절,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유대인들은 절기와 전통적인 절일들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유대인의 절기는 예수님과 구원의 의미를 가르치려는 목적입니다.
유월절의 경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셨으니 더 이상 유월절 양을 잡을 필요는 없는 것이죠.
그렇지만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민족의 큰 명절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다들 지키는 명절을 안 지키려니 뭔가 께름직했다는 것이죠.
그렇게 절기와 절일을 지키는 습관을 가진 유대인성도들을 로마인 성도들은 비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대보름, 동지, 그런 절기를 여전히 지키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걸 시비거리로 삼는 고지식한 성도들도 있죠.
바울사도는 이것도 역시 각자의 마음에 확정한 대로 해도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으로 이미 폐기 된 율법조차 성도의 덕을 위해서는 수용하라는 것이죠.
그 성도는 아직 믿음이 약해서 전통을 안 지키는 게 용납되지 않은 것이잖아요?
바울 자신도 선교 상황에서 필요한 경우 제자에게 할례를 행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세상과 구별된 좁고 유일한 길임과 동시에 세상을 다 품을 만큼 관대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선교지에 가서 문화가 다른 사람을 수용하며 섬길 수 있겠습니까?
진리는 한 길이지만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방식은 한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밀하게 판단할 것은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입니다.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관대하게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이나 타인의 말과 태도와 사고방식이 거슬린다고 자꾸 비판하는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엔 지배욕, 교만, 공격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주의하는 의식조차 없다면 본성대로 모든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똑부러지게 비판 잘 한다고 사람들이 나를 똑똑하다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비판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바닥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주님의 기준에 형편 없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무시하는 행동과 발언을 하지 않으신 것은 속에 그런 게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속에 그런 교만과 악이 있으니 나오는 것이죠.
내 입에서 계속 비판하고 부정하는 말이 나올 때 남이 나쁜 것보다 내 안에 그런 것들이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더 경계해야 합니다.
먹고 안 먹고는 죄가 아닌데, 그것을 서로 비판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깨닫고, 기도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비판하는 입을 모두가 잘 단속할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2. 우리가 서로 비판을 멈추고 용납해야 할 이유들을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1)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4절,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교회에 나와서 자기 몸만 챙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의 봉사를 하는 것이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여러 가지로 마음써서 행동하는 것이죠.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봉사이고 신앙인데, 왜 네가 판단하느냐는 강력한 훈계인 것입니다.
특히나 바울사도가 하는 말에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저 성도들은 예수님의 일군인데, 저들을 비판한다면 너 혹시 다른 사람의 일군 아니냐는 것이죠.
같은 주인 밑에서 봉사하는 일군들이라면 서로를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이 맞다는 것이죠.
성도들이 절대 서로 비판하지 말 것은 주님은 우리를 받으셨고, 주님의 일군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행여라도 내 기준으로 형제의 봉사를 비판하고 하나님이 내 믿음을 더 인정하고 나를 더 사랑하신다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사랑만을 알기에 하나님 사랑에 대해 오해합니다.
세상은 자식들 사랑에도 편애가 있죠.
세상에는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항상 사랑의 서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사도나 로마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연약한 성도들이나 사랑에 차별이 없으십니다.
바울을 더 사랑하시고, 바울 발꿈치도 못 따라가는 나는 조금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오롯이 각각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죠.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나도, 저 형제도 예수님께서 목숨을 주실 만큼 사랑하십니다.
전에 새롭게하소서에 나온 최기0목사님 이야기를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버스도 없고 택배도 들어가지 않는 정선 두메산골 목사입니다.
그곳에 다 쓰러져가는 백년 된 교회에 후임자가 없어 교회 문을 닫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목사로 부임합니다.
무너져가는 교회와 사택을 지으라고 이름모를 분들이 헌금을 했지만 철거비용이 만만치 않았는데, 태풍이 와서 교회를 다 철거해주었던 그 교회입니다.
최근 근황을 영상에서 보게 되었어요.
당시 성도가 할머니 여섯분이었는데, 팔년이 지난 사이 두 분이 돌아가시고 두 분이 요양원으로 들어가셨더군요.
성도 두 분이 남으신 것이죠.
영상에 나온 주일엔 한 분이 아프신지 할머니 성도 한 분만 예배를 드리더군요.
그 할머니 성도 한 분을 놓고 최목사님이 설교를 하십니다.
한글도 모르고, 시간도 볼 줄 모르는 할머니입니다.
과연 저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실까,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성도의 눈이 반짝반짝하며 그 말씀을 너무 달게 들으시는 거예요.
목사 한사람을 힘들게 공부시켜서, 그 한가족을, 그 어려운 곳에 두시는 게 저 할머니 한 영혼을 위해서인게 세상 계산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누가봐도 낭비죠.
제가 보기에 그 할머니 소천하실 때까지 그 목사님 거기서 안 나오십니다.
하나님이 그 할머니를 주의 종 최목사나 똑같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할머니 성도가 말씀 하나 놓치지 않고 초롱초롱하게 듣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그 예배 받고 싶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 최목사는 기도하며 매일 울 것 같습니다.
그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걸 보며 나를 또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을 위해서인데, 그게 왜 낭비겠어요.
하나님이 나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이땅에 성육신하셔서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 그거야말로 세상에 없는 낭비죠.
그렇게 살리신 하나님 자식이 우리들입니다.
왜 비판해서 실족시키고 망하게 하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필요하시다면 단점을 고치셔서 일을 시키실 텐데, 나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단점, 약점, 불순종, 불신앙, 죄와 연약함을 다 아시면서도 참아주십니다.
백번을 가르치셔도 우리가 못 따라가잖아요?
사랑하라는 말씀을 백 번만 들었겠습니까?
혼내가며 가르치셨다면 우리가 편히 살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은혜받으며 행복하게 삽니까?
하나님이 우리 성격과 습관을 봐 가시며 조금씩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모두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육도 하고 훈계도 하지만 고칠 수 있는 것은 드러나는 것 일부일 뿐일 것입니다.
속으로부터 깨닫고 사람이 바뀌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비판해서 남의 단점을 고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단점을 알고 있다면, 고칠 마음이나 스스로 고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들 키우다 보면 그런 단점 아무리 고쳐주려 해도 안되잖아요?
몇 번 해보다 안 되면 계속 부딪치지 말고,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고 지혜를 얻어 지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마음 먹고 세우시면 그걸 스스로 고쳐간다는 것입니다.
또 모르는 것 같아서 내가 알려줄 생각이면 더 조심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자기 단점을 모른다면 말해 줘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변명하고,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내 잣대에 맞춰 사람을 바꾸려는 것, 안되면 미워하는 것, 그런 일들이 부질없고 관계만 나빠지는 것입니다.
혹여라도 친하다는 이유로 남의 나쁜 버릇이나 단점을 고치라고 얘기해 주지 않으시길 축복드립니다.
2) 형제의 부족을 보고 비판하기 보다 항상 하나님과 나 사이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의 신앙은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만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서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사는 것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입니다.
바울사도는 너희가 다 주를 위해 사는 게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왜 자꾸 사람에게 눈을 돌리냐는 것이죠.
우리가 어떻게 바울사도 같은 믿음의 경지에 도달하겠습니까?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그런 믿음은 내게 너무 멀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믿음이 불가능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지만 한편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삽니다.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 산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자식 일이라면 만사를 재껴두고 뛸 준비가 되어 있잖아요?
남편을 지극 정성으로 섬기고 아내를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게 마치 인생의 목적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에 어떤 주부가 쓴 글을 보니 남편하고 거의 싸운 적이 없다고 합니다.
남편이 워낙 자기를 위해 줘서 별로 싸움이 안된다는 거예요.
한번은 남편과 좀 다투게 되었는데, 밥을 차려서 같이 먹으면서도 계속 말다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싸움을 하면서도 남편이 연신 생선가시를 발라내고 살을 자기 밥그릇에 올려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인데 큰 싸움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그 남편이 아내를 위해 살겠다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서 이렇게 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섬기며 살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죽도록 어디 가서 일하라는 게 아니잖아요?
당장 주님을 위해 순교하라는 것도 아니고, 주님을 존중하고 주님을 위해서 조금씩 살아가는 것인데요.
이것을 기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9절,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목숨을 주실 만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주님을 따르는 일인지 항상 생각하고, 예수님을 존귀하게 섬기고, 말씀에 잘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3) 그리고 마지막에 이 말씀으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가 영원한 복락에 들어가기 전,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서 다들 믿는다고 할 테니지만 그 믿음이 진실인지는 형제사랑이라고 예수님은 심판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형제를 업신여기고 늘 비판했다면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만일 성령 안에서 우리가 행한다면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늘 마음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좀 교만하거나, 차갑게 말했거나, 비판하면 금방 잘못을 깨닫고 자책하게 됩니다.
우리의 비판하는 언행 중에 회개하지 않은 채 심판대까지 가지 않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난 주 겁나 비판하는 목소리를 쏟아냈는데, 오늘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나누려니 머쓱해 지는 면도 있습니다.
정당한 분별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는 늘 잘못하며 삽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그게 보이죠.
그래서 비판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도 다른 사람 눈에 잘못하고 비판할 것 투성입니다.
가족들, 형제들의 잘못이 보여도 비판하지 않고, 잘한 것만 인정하고 섬긴다면, 그런 걸 알아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오히려 더 기세등등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알아주십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시니 내 마음이 편합니다.
내 주변에 평화가 옵니다.
그게 우리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십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잖아요?
머리에 숯을 쌓아두면 뜨거워서 내게 고개를 숙일 때가 올 것입니다.
교회가 늘 시끌시끌하다는 것은 그로 인해 성도들의 죄가 드러나고 고쳐야 할 단점들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드러나야 고쳐지고,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가족들도 그런 의미에서 서로의 신앙의 연단과 성숙의 도우미들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모난 것들이 깎이며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칼 같은 비판을 하지 말고, 힘껏 서로의 약함을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부수적인 신앙 방식에 대해서는 서로에게 관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부르신 일군입니다.
연약한 형제를 우리가 고칠 수 없고 주인이신 예수님이 고치십니다.
우리는 사람보고 신앙생활하는 게 아니라 사나 죽으나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성도들입니다.
마지막 때 우리의 믿음 뿐 아니라 행위도 선하게 평가 받을 수 있게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14장1절-7절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5) | 2024.12.16 |
---|---|
지금은 자다가 깰 때 (로마서13장8절-14절) (1) | 2024.12.04 |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12장14절-21절) (4) | 2024.11.28 |
로마서12장3절-8절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 (5) | 2024.11.14 |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로마서12장1절-2절) (3) | 2024.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