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불안한 탄핵정국입니다.
걱정되는 시기지만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평안히 생활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지난 주 바울사도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편지 마지막 한 페이지를 남겨 놓고, 한번 더 간곡히 권면합니다.
서로 뜻을 같이 하고, 서로 받아 줄 것을 요구합니다.
다 똑같은 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죠.
왜 잘 맞지도 않는 사람들과 굳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바울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셨다고 합니다.
하나가 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어 사랑할 때는 우리 안에 하나님나라가 승리하는 것이고, 미워하고 분열될 때는 옛사람과 마귀가 승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끼리는 왜 그렇게 마냥 좋아했을까요?
서로가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하나로 뭉쳐졌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로 뭉치고, 가족들이 하나로 뭉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말을 너무 잘해서 유튜브에서 인기 있는 태하라는 아기가 있습니다.
엄마가 태하에게 물어봤습니다.
‘태하는 언제 제일 행복해?’
그랬더니 네 살짜리 태아가 뭐라고 했을까요?
‘엄마하고 아빠하고 사랑할 때 태아는 제일 행복해.’
이 말에 제가 너무 놀랐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그들 서로는 사이가 안 좋다면 괴롭죠.
어린 아이가 벌써 그걸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너무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서로 안 사랑하면 근심하실 것입니다.
오늘 어떻게 우리가 가정과 교회에서 하나 되어야 하는지 살펴보고, 순종해서 행복한 관계 속에 살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1. 바울사도가 분열되고 있는 로마교회에 주는 처방이라면, 당연히 하나가 되라는 것이겠죠.
1) 하나가 된다는 것은 생각이 일치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과 주장은, 비록 신앙에 대해서라도 진리 외에는 절대 일치될 수 없습니다.
잘 맞는다는 것은 생각이 항상 같다는 게 아니라, 잘 맞춰준다는 뜻입니다.
가끔 방송에 특이하게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가 나올 때가 있죠.
그들의 사랑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서로 받아주는 걸 터득한 부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가 되라는 것은 나와 같지 않더라도 서로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결코 쉽지 않기에 사람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눈에 거슬리는 사소한 것도 넘어가 주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그렇기에 서신서의 모든 교회들이 그런 분열을 겪고 있었던 것이죠.
결론은 7절에 나오듯이 그냥 서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누군가를 뜯어 고쳐서 나와 같게 만들려 한다면 하나되기는커녕 사분오열을 면하지 못합니다.
2) 하나가 되려면 있는 그대로 받아주어야 하는데, 강한 자가 먼저 약한 자를 받아주어야 합니다.
교회든 가정이든 말없이 받아주는 사람은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1절,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믿음이 약한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하지만 원문의 뜻은 한글 번역보다 더 강합니다.
약점을 담당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쁘게 살아도 겨우 먹고 사는 현대엔 자기 앞가림 하며 살기도 힘들죠.
때로 숨만 쉬는 것도 힘들 듯, 예수님을 그냥 믿기만 하는 것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무를 지우신 것은, 그래야만 더 힘든 분열의 고통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남을 받아 주기가 힘들잖아요?
믿음이 강한 사람이 받아주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교회는 처음부터 다 자란 성도들만 모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만 모인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성경 속 모든 교회는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가 함께 있습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도 이렇게 모여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가족들로만 구성된 가정들을 별로 못 봤습니다.
3) 그러면 우리 중 누가 믿음이 강하냐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1절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라고 한 것은 이방인의 사도인 자기 자신과 이방인 로마 성도들을 말합니다.
로마교회는 로마인들이 주축이었고 일부 유대인 성도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성도들이 구약성경의 율법 문제를 복음으로 잘 해석하지 못해 믿음이 연약했습니다.
당시 아직 완성된 신약성경이 없었죠.
편지 형태로 된 복음서 일부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믿던 때입니다.
천오백년 동안 구약성경을 보유하고 믿었던 유대인 성도들은 율법의 그림자를 벗어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우리 민족이 지켜왔던 게 다 뭐냐는 것이죠.
이들은 오히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만 믿고 자유로운 로마인성도들을 율법으로 정죄하며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서신서를 보면 이방인 성도들과 유대교 출신 성도들의 이런 갈등이 거의 모든 교회에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인 성도들을 믿음이 강한 자로 인정합니다.
반면, 구약성경의 세계에 발목이 잡혀 있는 유대인 성도들을 믿음이 약한 자로 지칭합니다.
걸리는 게 많고 복잡하면 약해집니다.
바울사도는 믿음이 더 옳고 강한 로마인 성도들에게 연약한 유대인 성도들을 용납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누가 믿음이 강한 자인지는 분명하죠.
예수님의 대속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들은 믿음이 강한 자들입니다.
내 믿음이 아직은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하기로는 서신서 당시 어떤 성도들보다 우리는 믿음이 강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이 믿음이 강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이죠.
성도들이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기준의 문제일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봉사와 헌신과 경건생활의 깊이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죠.
엄밀히 말해, 믿음은 있냐 없냐를 따질 수 있지만 강하냐 약하냐를 따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믿음이 강해 보이고 어떤 사람은 약해 보이죠.
그것은 모든 일에 믿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만큼 신앙이 훈련되고 연단되었냐 아니냐 즉 성화의 차이입니다.
믿음이 있지만 세속적인 가치관과 습관을 다 벗지 못한 성도들을 믿음이 약한 자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또 교회에 나온 지 얼마되지 않은 새신자들 역시 믿음이 약한 자들에 해당되죠.
3) 그러면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어떻게 담당해야 할까요?
본문에서 ‘담당하고’는 ‘짐을 져 나르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짐을 대신 져 주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 의미를 알 수 있는 예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걷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죠.
베드로와 요한이 일어나 걷도록 기적을 행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런데 이 앉은뱅이가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할 수 있도록 매일 사람들이 메고 왔다고 합니다.
‘메고 왔다’는 단어가 약점을 ‘담당하라’는 단어와 같습니다.
약점을 담당한다는 것은 내 힘으로 약점을 고쳐주라는 게 아닙니다.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내가 약점을 고쳐주려는 데서 옵니다.
비난하고 잔소리하는 게 나쁜 의도만은 아닙니다.
내가 더 좋은 걸 알고 있으니, 그걸 가르쳐주고, 내 방법대로 하라는 것이잖아요?
어떤 면에서는 도와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 좋은 걸 가르쳐 줘도 안 하니까 나중엔 화가 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옳은 것, 좋은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다 따라하지 않습니다.
약점을 지적하고 고쳐주는 게 약점을 담당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장애인의 친구들이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걸을 수 없는 친구를 메고 와 성전 미문 앞에 앉혀주는 것이었습니다.
병든 다리를 고쳐주는 게 아닌 것이죠.
고쳐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연약함을 담당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계속 나올 수 있도록 여러모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걷지도 못하는 신앙을 메고 나른다고 생각하면 그것만도 얼마나 힘들 것인지가 느껴지죠.
교회에 안 나오려고 매 주일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자녀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전도한 이웃을 계속 데려오는 것은 무한한 인내와 수고가 필요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믿음의 자리에 있게 하려면 잘 섬기고 받아주어야합니다.
무관심하고, 냉냉하게 대하다 보면 어느날 교회에서 안 보일 것입니다.
물론 늘 섬기는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때로 지치고 억울할 수가 있죠.
그렇지만 내게 강한 믿음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강한 것은 곧 내가 얼마나 강해졌냐는 것과 같습니다.
강한 자로서의 능력과 장점을 누리고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특혜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두렵고 무서울 때가 언제입니까?
내가 무너질 때입니다.
내가 더 이상 나를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이 마음이 무너질 때, 그때 사람들은 절망감에 자살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강자는 어떤 위기에서도 자아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혼란과 낙심은 있겠지만,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더 정신을 바짝차리고 난관을 타결해 갑니다.
이런 강한 믿음을 받았으니 약한 사람의 연약함을 떠맡는 것도 감당해야 합니다.
약자를 섬기는 것은 퍼주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믿음이 강한 성도들은 약한 성도들의 짐을 져 주며 더 강하게 성장합니다.
그 일을 주저하면 더 이상 믿음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나 혼자만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절대 믿음이 강하게 성장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고 세워가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2. 믿음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계속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두 번은 참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실수와 잘못이 고쳐지지 않고 반복되면 인내에 한계를 느끼게 되죠.
우리는 내 기준보다 낮은 사람들을 오래 받아주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연약한 믿음이 강한 믿음이 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급하고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게 중에 물렁게라는 게 있습니다.
게는 여름이 지나면 본래의 껍질을 벗고, 새 껍데기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꽃게 먹다 보면 단단한 껍데기 안에 톡톡한 붉은 막이 있는 걸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얇은 막이 나중에 새 껍데기가 되는 것입니다.
보통 껍데기를 바꿔 입는 기간인 8,9월은 꽃게 금어기입니다.
전에 뉴스에 보니 9월 말 전에 금어기를 해제하는 데, 그때 잡힌 꽃게들의 90%가 물렁게라고 하더군요.
아직 껍질이 단단해지지 않았는데, 너무 빨리 금어기를 해제한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물렁게는 손으로만 눌러도 껍질이 터져버립니다.
뉴스에 보니 건져 올린 열 마리 중 아홉 마리가 물렁게였습니다.
그렇게 아홉 마리 물렁게를 포대에 넣어서 폐기처분을 합니다.
좀 더 기다렸다 잡으면 열 마리가 다 껍질이 단단하고 속이 꽉 찬 맛있는 꽃게가 될 텐데 너무 아깝죠.
문제는 사람들이 빨리 잡아서 추석 장에 내 보내려고 금어기를 빨리 해제해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고되게 조업해서 물렁게 다 내 버리고 10프로만 건져 비싼 값에 파느니, 나중에 좀 싸지더라도 잡은 대로 다 파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조급함 때문에 그게 안되는 것이죠.
우리도 조급증 때문에 사람 몰아세우고, 문제 해결 안된다고 불안해 하는 것 고쳐야 하는데 잘 되지 않죠.
하나님 모르던 사람이 믿음 갖게 되는 게 오래 걸립니다.
태어나면서 가졌던 옛사람의 게딱지를 벗고 겨우 새사람을 옷을 덧입었어도 껍질이 단단하게 성장하는 데 또 오래 걸립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지만 가족들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도 늘 섬겨야 하는 믿음이 강한 사람은 고달픕니다.
교회 성도들은 일주일에 한 번 보면 되는 데, 가족은 매일 봐야 하잖아요?
매일 연약함을 담당해 주다 보면 지치잖아요?
그럴 때, 아직 단단해지지 못한 물렁게 시절이라 생각하고 이해해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또 아직 믿음이 연약한 성도님들은 내 물렁게 시절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인내하며 믿음을 잘 키워가시길 바랍니다.
3. 이렇게 연약함을 담당해 기쁘게 해 주면 믿음도 세워지고, 가정도 세워지고, 교회도 세워집니다.
2절,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교회는 다 함께 믿음이 세워져가는 게 맞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서로를 보면 함께 믿음이 세워져 가는 게 보이죠.
실제로 교회를 떠나 혼자는 절대로 못 섭니다.
유럽 축구는 빌드업 축구라고 하죠.
11명의 선수들이 골을 넣기 위해 과정을 하나 하나 쌓아가는 걸 말합니다.
이강0 선수가 가끔 지탄을 받았던 게, 빌드업 작전을 무시하고 개인기로 공을 몰고 가서 혼자 넣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덕을 세우라는 단어가 영어로 빌드업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팀 워크를 통해 빌드업을 하라는 뜻입니다.
빌드업을 잘 하지 못하면 낙오되는 팀원도 생기고 팀원들이 목표에 맞는 믿음에 도달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신앙은 공동체의 빌드업 신앙임을 성경은 크게 강조합니다.
개인의 신앙도, 교회 전체의 신앙도, 차곡 차곡 쌓아가는 것입니다.
빌드업 신앙에서는 모든 선수들의 능력이 똑같지 않습니다.
전에 어떤 감독이 한국 축구는 유럽축구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럽 같은 천재 플레이어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천재 플레이어 한 사람이 팀의 경기를 좌우합니다.
누구에게 공을 차서 빌드업을 해야 할지, 어떤 공간이 비었는지를 노련하게 보고 정확하게 경기를 운영합니다.
믿음이 강한 성도들이 공동체에서 그런 천재 플레이어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연약한 성도를 빌드업에 개입시킬지를 알고, 원팀이 되도록 이끌죠.
믿음이 강한 성도들의 이런 헌신은 상당히 강도 높은 희생입니다.
교회에서도 감정과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며 수고합니다.
그렇다고 섬김의 결과가 항상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봉사하다 시험드는 일이 교회에서 비일비재입니다.
가족들에게도 잘 하다가 시험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힘써서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세워가야 할 근거를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1)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 대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시편 69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다윗의 고난에 빗대어 메시야의 고난을 예언한 시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사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유익과 우리의 본이 되시게 사셨습니다.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지 불가능이죠.
그런데도, 비방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만큼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했어도 사람들이 비방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비판과 비난을 받을지라도 이웃에게 유익이 되도록 섬기고 세워주라는 것입니다.
2) 또 기록된 성경에서 우리가 인내해야 할 이유들을 계속 찾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4절,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예수님의 행적은 물론이거니와 신구약성경이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인내와 위로와 소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왕에 대해 얼마나 인내했습니까?
그러나 그 결과를 보면 인내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죠.
욥의 고난 이야기에서 대인관계에서의 인내도 배우고 소망도 배우는 것입니다.
욥의 소식을 듣고 평소 서로 존경하고 가까웠던 친구들이 위로해 주려고 찾아옵니다.
그러나 나중엔 욥의 인격과 삶에 문제가 있었다고 매도합니다.
믿음으로 잘 살았는데, 이런 고난을 받을 리가 없다는 것이죠.
결국 인간 관계의 속이 드러나고 말잖아요?
안타깝게도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들이 거의 그럴지도 모릅니다.
욥의 친구들과의 갈등은 욥기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욥의 편을 들어주심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성경은 욥의 인내와 결말을 보고 소망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본받고, 성경에서 인내와 위로와 소망을 발견하며, 믿음이 연약한 자들의 약함을 담당해 주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7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바울사도가 지금 미움과 갈등 중에 있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지 않는 것은, 지혜입니다.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죠.
당장 사랑은 못해도 있는대로 받아 주기만 하자는 것입니다.
서로 받아주기만 해도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포용하고, 믿음이 약한 자는 그 수고를 알고 인정해 주며 서로를 받아주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를 함께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강하다면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도우며 더 성숙한 믿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 믿음이 아직 연약하다면 교회의 도움으로 장성한 믿음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면 다른 연약한 성도들을 도울 수가 있는 것이죠.
약점을 담당하고 섬겨도, 상황과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남의 연약함을 받아주고 섬길 때 분명한 보상이 돌아옵니다.
앞14장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죠.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사람들을 받기 힘들 때는 예수님이 나를 사랑으로 받아주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여전히 연약한 나를 지금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좀 실수하고 미운 짓 하면 받아주기는커녕 매몰차게 밀어내잖아요?
그러니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매일 실수하고 잘못하지만 부끄럽게 나오는 우리를 받아주시고, 오히려 위로와 사랑으로 용기를 더해 주시잖아요?
하나님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우리도 모든 사람을 밀어내지 말고 서로 받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2024년12월15일 주일설교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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