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12장14절-21절)

남수연 2024. 11. 28. 16:22

오늘 말씀은 우리가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문제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이,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드러나게 하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세상 관계 속에서 우리의 역할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만큼이나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사람 관계가 천국처럼 기쁘게도 하지만, 때로는 지옥을 경험하게도 하죠.

오늘 말씀은 세상이 말하는 대인관계 처세술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믿음으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배우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박해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보편적인 사람 관계, 그리고 개인적인 원수 관계로 나누어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가 다 이런 인간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어떻게 사람들을 대할지, 왜 그래야 하는지 배우고 믿음으로 실천함으로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며 살게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1. 박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입니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관계죠.

이런 관계에 대한 처방은 14절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이것은 바울사도의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셨죠.

누가복음6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본문에서 너희를 박해한다는 동사는 반복된다는 분사형입니다.

누군가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박해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 데 계속 괴롭히고 억압하는 사람이 있죠.

살다 보면 이런 사람들 몇 번은 만나게 됩니다.

대개 직장 상사나 나보다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기가 쉽습니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당하면서도 대항하기는 어렵죠.

동료 중에도, 아니면 일반적인 친분 관계에서도 묘하게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어릴 때는 심지어 부모가 그런 대상인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본문 당시는 로마 인구의 1/3 이상이 노예였다고 합니다.

로마 교회 안에는 노예 신분의 성도들도 많이 있었겠죠.

그런 성도들이 주인으로부터 지속적인 억압과 학대를 당하는 건 일상이었습니다.

겉으로 복종하지만 저주가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상대를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왜 피해자가 축복해야 하냐 반문할 수 있습니다.

피해 당한 사람에게는 더 굴욕적으로 들릴 수 있죠.

세상사람들끼리의 관계에서는 이런 사람을 만날 때 속으로 욕하며 참고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참고 사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을 빌어 주라시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이게 좀 이상한 논리입니다.

세상에서 약자가 강자를 축복한다면 가소로운 일이라고 하겠죠.

성경에도 나와 있지만 축복하는 사람은 축복받는 사람보다 더 높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피해자인 성도들이 가해자를 축복할 만한 지위라는 뜻이죠.

상대가 아무리 위세를 부린다 해도, 나만큼 하나님께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 억압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나를 주목하고 계시다는 것이죠.

성도들에게는 이런 관계가 운이 나빠 걸려든 게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을 만난 게 남들이 보기엔 얼마나 운이 나쁜 겁니까?

다윗은 사울왕을 볼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렸을 것입니다.

요셉이 인정머리 없는 형들을 만난 것도 그렇죠.

그런데 그 박해와 억울함 없이 그들이 복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이런 악인들을 만나면 눈물도 쏟고, 가슴도 치고, 두려움에도 떨고, 억울함에 잠도 못 이룰 것입니다.

그런 관계도 다 지나갑니다.

남는 것은 연단 된 믿음과 우리 신앙 인격인 것이죠.

연단 되지 않은 것은 세상살이에서도 최약체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상대를 통해 나를 연단하시기에 그 사람도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악역인 빌런이 없으면 주인공이 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더 축복할 위치다, 그리고 당신의 악행이 결국 나를 연단해 더욱 복되게 될 것이다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축복해야겠죠.

원수라도 일단 나랑 얽혔으면 그 사람에게도 나를 통해 축복이 흘러갈 테니까요.

이것을 사람 관계에만 적용할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만 우리를 박해합니까?

때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혹은 건강문제가, 혹은 일 문제로, 얼마나 가슴 졸이고 억압을 당합니까?

그러나 그 역할도 박해자와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겪는 모든 환경과 신체의 억압에 대해서도 결과가 좋게 되도록 축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드니 스타크라는 사람이 쓴 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왜 기독교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로마에서 성공했냐는 것입니다.

서기 100년까지 로마제국의 6-8%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 300년경에는 무려 50%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이죠.

이 작가는 그 이유를 두 번의 전염병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 사이 백년마다 한 번씩 로마제국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하루 5천 명씩 사망할 정도의 경악할 전염병이 15년씩이나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로마 인구 1/4이 줄었을 정도입니다.

전염병이 접촉에 의해 전파되었기에 가족들은 물론 의사들마저 로마를 떠납니다.

그때 남아서 병자들을 돌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박해 속에서 살던 성도들이 병자들을 데려다 먹이고 돌봐주었던 것이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리스도인들은 전염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이 현저히 적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서기 313년에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나라, 주님의 교회, 그리고 우리 개인의 믿음이 성장하는 게 동일한 원리입니다.

박해가 있는 상황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이 전파되고 인내를 통해 아름다운 결과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죠.

한국교회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두 박해 기간을 거치며 복음이 크게 확산 되었다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끼어든 고통, 괴로운 존재, 억압, 절망, 이런 것들은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으로 인도하심을 믿고, 그것들의 복을 빌어주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 보편적인 사람 관계에 대해서입니다.

15절부터 18절까지는 매일 대하는 일반적인 사람관계에서의 원칙입니다.

평범한 관계를 잘하는 것도 힘들죠.

평범한 관계를 잘해야 우리 일상이 편합니다.

적용할 교훈을 세 가지로 살펴 보겠습니다.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 이것은 다른 이들의 처지에 공감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는 박해자를 축복하는 것보다 쉬울 것 같지만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남이 나보다 더 잘되면 불행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 감정이 질투심이죠.

질투는 타인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을 조금도 해치지 않는데, 고통을 느끼는 마음입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한 말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월급이 나보다 두 배나 높다고 하면 갑자기 입맛이 떨어지죠.

친구 자식이 우리 아들보다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가슴이 휑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느날 친구가 구찌백을 들고 나왔습니다.

남편이 출장가서 사왔다고 합니다.

돈 걱정 안 하고 사는 것도 부러운데, 남편도 저렇게 자상하니 같이 좋아해 줄 수가 없는 것이죠.

심리학에서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잘 되는 걸 기뻐해 주는 게 더 어렵다고 합니다.

친한 친구였는데 라이벌 관계가 되면 우정도 금이 갑니다.

상향질투만 있는 게 아니라 하향질투도 있습니다.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훌륭한 성과를 내고 나보다 인정 받으면 그 타오르는 질투심을 끄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웃이 나쁜 일을 당했을 때는 같이 아파할 수 있을까요?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해 주는 건 그나마 쉬울 것 같지만 그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남의 슬픔은 그 사람의 보따리 안에 싸여있는 것 같이 잘 안 보이고 잘 안 느껴집니다.

심지어 부모자식, 형제간에도 그 고통을 백 프로 똑같이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남의 고통을 보며 내 처지에 대한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박절합니다.

우리의 처지와 아픔에 똑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처럼, 타인의 감정에 공감 못 하는 분이라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오실 리가 없죠.

죄질이 나쁜 본성을 갖고 살아가는 게 우리를 참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지해서, 죄악에 뒹굴며 사는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불쌍함이 느껴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잖아요?

누가 죽는 당사자만큼 슬프겠습니까?

죽어가는 내가 제일 슬프죠.

주님은 나사로가 죽어갈 때의 그 고통과 슬픔을 똑같이 느끼셨던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어갈 때,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예수님의 눈물만이 그들과 똑같은 농도의 눈물인 것입니다.

내 상한 마음, 불안한 마음을 가족이라도 몰라줍니다.

하나님만은 내 마음을 그대로 들여다 보시고, 나를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은 주님 같은 공감이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충만할수록 타인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력이 커지죠.

기아에 죽어가고, 지진에 파묻힌 사람들의 고통이 내 일처럼 느껴지기에 봉사하러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인에게 공감하는 마음을 성령 안에서 키워가라시는 것입니다.

남의 슬픔과 기쁨에 맹숭맹숭해지지 않도록 우는 사람을 안아주고, 기쁨도 축하해 주는 태도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런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면 나도 위로받고 이해받으며 힘을 얻게 되는 것이죠.

남의 위로와 공감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따뜻한 마음이 오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2) 가족이나 교회 공동체, 직장생활 등에서 가장 큰 갈등의 요인은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가족 간의 갈등도 결국 서로 자기가 우월하다는 태도에서 생기잖아요?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 내 생각이 최고다, 이런 것이 사람 관계를 망치는 데는 첫째일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하고는 감정 상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진실한 겸손은 성령이 충만할 때의 상태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하다 생각했던 사람도 어느 순간 교만이 불쑥 드러나는 게 보이잖아요?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항상 의식적으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어느새 사람들 위에 올라가 있는 게 우리 모습이잖아요?

하나님은 교만에 대해서는 엄격한 징계를 경고하십니다.

벧전55,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잠언 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시편 1015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이런 말씀들에 우리 교만한 본성의 고삐를 묶어 매일 끌어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힘든 데, 이런 것 세세히 신경 쓰며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들 것입니다.

이런 것 신경 쓰며 살지 않으면 사는 게 더 힘들어집니다.

말씀의 검으로 매일 웃자란 내 죄성을 쳐내며 살지 않으면 내 인격과 삶에 악하고 무가치한 것들이 무성해집니다.

평생 그 작업을 충실히 해야 마음 밭도, 삶의 경작지도 풍성하고 아름답게 가꿔지는 것입니다.

 

3) 모든 관계에서 사람들과 화목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18, 할 수만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할 수만 있다면이란 단서는 화목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심각한 성격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런 경우는 정신과 의사들도 끊어 버리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보통 관계에서는 노력해서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보는 사람과 불화를 만드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상대방보다 내가 잃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화목 하려면 참기만 잘해도 됩니다.

참지 못하면 화목은 깨지고, 불편한 감정은 정말 불편하게 오래 갑니다.

감정대로 저지른, 일 분의 쾌감 뒤에는 큰 댓가가 따라온다는 걸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힘들게 이룬 화평과 화목은 아기 다루듯 조심해야 오래갑니다.

일반적인 사람 관계의 중요한 지침을 세 가지를 꼽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같은 마음을 품는 공감력, 서로 낮은 곳에 두는 마음, 모든 사람들과 화목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고, 의도적으로도 명심하고 지킨다면 평범한 관계들을 원만하게 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극단적으로 대립적인 관계에 대해서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때로 원수 같은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원수가 되는 걸 보면, 처음부터 원수인 경우는 없습니다.

대개는 친분이 두텁던 사이가 원수가 되죠.

19절부터 21절까지 원수 같은 관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지침입니다.

1) 우리가 스스로 원수 갚는 것을 금지하십니다.

19,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받은 대로 갚아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원수 관계가 된다는 것은 처음에 누군가 나쁜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피해자가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하게 되면, 모두 가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도 정당방위에 대해서는 법 적용이 민감합니다.

상대가 먼저 때려서 나도 때렸는데, 그러면 정당방위보다는 쌍방 과실로 가기가 쉽죠.

우리의 원수 관계도 내가 해결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만일 쌍방 보복 관계가 계속되면 양쪽 다 파멸합니다.

결국 처음엔 피해자였다가 가해자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재판하실 가장 공정하신 재판관이십니다.

그렇기에 비록 내게 죄를 지었다 해도 그 사람의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가 할 일을 가르쳐 주십니다.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이게 가능할까 싶죠.

토니0이라는 가수의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토니0은 아이돌 그룹인 HOT 멤버였습니다.

그룹이 해체되고 교복 사업을 시작했는데 큰 성공을 거둡니다.

우리가 코로나 때 스쿨푸드 김밥도 시켜 먹은 적이 있는데, 그것도 토니안이 만든 사업체입니다.

젊은 나이에 이룬 큰 성공 뒤에 찾아온 것은 8가지 정신질환이었습니다.

죽을 만큼 고통을 당합니다.

팬이 선물한 신앙서적을 통해 신앙의 문제점을 발견합니다.

일단 세상에서 좀 멀어져 하나님을 찾아야겠다 생각하고 군입대를 결심합니다.

그런데 제대하고 와서 보니 10년 동안 벌었던 전 재산을 매니저가 자기 마음대로 투자해서 다 날려버린 것입니다.

미납 세금만 5억이 빚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기가 막힐 일이죠.

그런데 토니형제가 매니저를 고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MC가 왜 그랬냐고 안타까워했더니 말하길, 그 형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어차피 돈은 사라졌고 매니저는 갚을 능력도 없는데 고발해서 뭐하겠냐는 것이죠.

그게 다가 아니라, 토니안 형제는 처지가 딱하게 된 매니저에게 다시 자기 일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매니저가 일을 하면서 조금씩이라도 횡령한 돈을 갚아 나갔다고 하더군요.

이걸 보고 사람들은 참 세상물정 모른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법정으로 간들 그 소송에 사람만 피폐해 집니다.

어차피 돈은 돌려받지 못할 테고, 한집의 가장을 감옥에 보내봤자 마음만 불편했겠죠.

그렇게 인생의 큰 원수였던 매니저를 오히려 돌봐주었던 것입니다.

이럴 수 있는 것은 어리숙해서가 아닙니다.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믿음 안에서 갖게 된 명석함이고 지혜입니다.

그 이후 하나님이 방송일을 계속 만들어 주셔서 빚도 다 갚고 돈을 또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이 말씀에 순종하려면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드신다면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원수는 주리고 목마른 곤경에 처했지만, 우리는 도울 위치에 있다는 거잖아요?

그런 처지라면 그래도 감사하게 순종해야죠.

그 결과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20,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 말씀의 뜻은 정확하게는 알기가 힘든 구절입니다.

머리에 숯불을 놓는다는 것은 타격감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겠죠.

계속되는 선행이 원수의 생각에 큰 타격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숯이 머리에 계속 쌓인다면 머리를 숙여서 쏟아 버리겠죠.

결국은 원수의 생각이 변하고 머리를 숙이게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21절의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한 것에 답례로 왜 내가 피를 흘려 주겠습니까?

악인은 내가 괴로워하면 자기가 나를 조종한다고 생각하고 우월감을 느낄 뿐입니다.

세상을 보면 악을 이기는 것은 더 강한 악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으로만 악을 이길 수 있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렇게 이기는 훈련을 계속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람관계가 우리 삶의 전부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관계는 그야말로 살얼음판 같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 말실수로 상처를 주고 받고, 원수가 되기도 하죠.

오늘 나를 괴롭히는 박해자에 대해, 그 또한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오히려 사람이든 환경이든 잘 되길 축복하라고 배웠습니다.

매일 보는 일상의 관계에서 핵심은 공감과 겸손이라고 살펴 보았습니다.

잘 지내다 원수가 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고 도울 수 있다면 오히려 도우라고 하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아주면 시원하고, 대등한 것 같고, 이기는 것 같지만 결과는 나도 그 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승리의 비결대로, 악에게 휩쓸리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