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야고보서5장7절-11절 (인내하는 자의 복)

남수연 2025. 3. 18. 17:51

야고보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다음 주까지 보면 야고보서가 끝납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에는 행함이 따라야 함을 강조합니다.

또 박해를 피해 흩어진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니만큼 시련에 대해 인내하기를 여러 번 촉구합니다.

시련이 지나가기를 참고 견디는 인내는 정말 힘듭니다.

오늘 말씀이 인내심에 한계가 온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힘을 더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성도들은 내게 오는 시련의 의미를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시련에 대해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기본은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참으라고 합니까?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련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것이죠.

1) 우리 평생에 시련이 계속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이미 이런 인생의 시련이 예고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를 저지른 뒤, 하나님은 몇 가지 선고를 하시죠.

인간관계의 고통입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관계까지에도 갈등을 선고하십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도 고난이 있을 것이라 하십니다.

평생 땀흘려 일해야 할 뿐 아니라 일해도 수고한 만큼 다 얻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인생의 끝에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육체의 죽음을 선고하십니다.

사람은 거의 병들어 죽습니다.

사는 동안에 질병에 대한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예고하신 것이죠.

이게 다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고통들이잖아요?

하나님이 이렇게 정하셨기에 그 어떤 사람도 이걸 피해 갈 수 없는 것이죠.

잘 벌면 고민이 없을 것 같습니까?

부자들의 가장 큰 고민도 돈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쌍가마 속에도 근심이 있다는 속담이 나오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은 하나님이 벌로 이런 고난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벌이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진짜 벌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받은 것입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잖아요?

그 죽음은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의 죽음과 다릅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은혜에서 영원히 단절되는 심판을 말씀합니다.

단지 아담의 후손으로만 한번 태어나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단절된 상태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자녀로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은혜에서 단절되는 것만큼 큰 고통은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시면 이 아름다운 자연세계도, 우리 영혼도 무서운 고립과 암흑에 갇힐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순간 하나님과 단절된 영의 상태가 어떻게 드러납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보고 숨잖아요?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오셨지만 아담은 숨었습니다.

대면을 피한다면 깨진 관계입니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멀리서 보면 피해 가게 되잖아요?

하나님을 피하는 사람들은 지금 심판의 상태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심판 받은 인간에게 고난을 부과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죄인들이 멋대로 세상을 살도록 두시겠습니까?

에덴도 지옥을 만들텐데요.

인간이 원하는 대로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그런 장치를 걸어 놓으신 것입니다.

의외로 이것은 사람들의 기본권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들이 돈 잘 벌면 집에 꼬박꼬박 들어올 것 같습니까?

돈 쓰러 다니느라 달라질 걸요.

하나님이 이런 제재를 두지 않으셨다면, 여기 나와서 예수님을 믿고 있을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이런 이유로 선고하신 시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단 비인도적인 전쟁과 살육과 무자비한 학대, 도를 넘는 고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저지른 거대한 악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인생이 어떻게 고난이 없겠습니까?

사람관계가 괴롭다, 가난에 화가 난다, 낫지 않는 질환에 지친다.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오느냐.

이렇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3)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의 고난이 성도에게는 유익이라고 하십니다.

시편1191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 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마지막 날 형벌의 고난 외에는, 고난을 단 한번도 부정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을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고난은 더 당연하고 귀하다고 합니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인생의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고난이 가져다 주는 유익을 우리는 이해 해야 합니다.

아시잖아요?

애가 타서 하나님을 찾다가 어느덧 문제가 사라지면 하나님을 생각하는 우리 마음이 달라지잖아요?

문제가 해결되면 날아갈 듯 기쁘지만, 묘한 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 사는 게 무료하고 나태해지고 교만한 마음이 고개를 듭니다.

그렇게 교만해진 마음은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헤칩니다.

고난을 통해 그나마 예수님께 붙어 있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죄를 더 멀리하고, 죄를 멀리하게 됨으로, 우리 삶이 평안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삽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죄의 본성대로 살지 않도록, 항상 작은 시련들이라도 계속 주고 싶으실 것입니다.

교사가 숙제를 내주는 것은 학생들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잖아요?

4) 우리가 인생의 고난을 인내해야 하는 이유는 이로써 얻을 귀한 열매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7,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괴로워도 할 수 있냐, 죽지 못해 사는 것이지.

고난을 대하는 성도들의 태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힘든 삶을 믿음으로 견디는 사람들입니다.

7절의 농부의 예가 기가 막힙니다.

농부는 결실을 기대하고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 이스라엘 농사는 물을 길어 대지 않았습니다.

그럴만한 수원이 별로 없거든요.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약속하실 때 이른비와 늦은비를 내려 농사짓는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농부들은 하나님을 믿고 해마다 씨를 뿌리고 비를 기다려야 합니다.

물이 없어도 농부는 비를 주실 하나님을 믿고 뙤약볕 아래서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벌레를 잡으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일 농부들이 자기 밭에 물을 길어다 댄다면 길이 참을 필요가 없겠죠.

우리 인생 밭도 그런 인내 없이 내 힘으로만 추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놓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비를 참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필요한 이른비와 늦은비를 반드시 내려주십니다.

비를 주실 것을 믿지 못하는 농부는 씨를 뿌리지도 못합니다.

조금만 가물어도 참지 못하고 농사를 포기할 것입니다.

우리 삶을 위해 성실히 씨를 뿌리고, 좀 비가 늦어진다 해도 반드시 내려주실 것을 기다려 결실을 보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어떤 자세로 고난을 참아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1) 마음을 굳건하게 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고난을 잘 이기면 우리에게 큰 축복이지만, 고난에 무너진다면 가장 나쁜 결과죠.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굳건하게 붙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 스스로 마음을 무너뜨린다면 그것까지 막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보다 의지를 더 보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감정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위하지만, 의지적인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잖아요?

그동안 참고 견뎠다면, 그것은 내게 소중한 것입니다.

소중하기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버텨온 것이잖아요?

반드시 마음을 굳건하게 하셔서 결실하기까지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2) 주님의 강림이 가까운 것을 생각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성도들은 억울하죠.

1세기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우리보다 더 급박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야 이후 이천년을 지나온 교회 역사를 보며 그런 긴박감은 별로 없죠.

그러나 사람이 죽음을 코앞에 두면 누구나 다 내 인생의 종말이 이렇게 가까웠었나생각할 것입니다.

신자들 중에는 젊을 때는 일 하고, 가정도 꾸리고, 삶도 좀 즐기다 천천히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 바빠서 열심히 신앙생활 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내가 원하는 때 열심을 내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가 되면 그때 잘 믿어볼 것 같지만 믿음이 내 맘대로 잘 믿어집니까?

매주 큰 변화 없는 것 같은 주일예배를 평생 드리고, 인내하며 꾸준히 믿어야 노년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암살이라는 한국영화 아시죠?

저는 영화관에는 잘 안 가고, 가끔 영화 줄거리를 요약한 영상을 봅니다.

거기서 변절한 이정재가 일본 지도부를 암살하려는 독립군의 작전을 일본군에 밀고합니다.

정보가 흘러 나갔으니 작전은 실패하고 투입된 독립군들이 희생됩니다.

나중에 독립이 되고 이정재는 반민특위의 재판을 받게 되죠.

거기서 얼마나 뻔뻔하게 무죄를 주장하는지 이정재씨 연기가 볼만합니다.

그러나 증인들은 이정재의 변절로 다 죽었기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옵니다.

재판소를 나온 이정재는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냐며 기분 좋게 인파 속으로 걸어갑니다.

그때 살아남은 전지현이 이정재를 향해 총을 겨누고 묻죠.

왜 동지를 팔았나?

이정재가 뭐라고 말합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그리고 밀정 염대장은 전지현의 총탄에 처단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분명한 진실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염대장처럼 말하지는 않을까요?

재림이 진짜인줄 몰랐으니까, 알면 인내하고 믿음을 지켰을 텐데.

주님이 다시 오시든, 내가 주님 앞에 먼저 가든,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것을 기억하면 고난 중에도 또 힘을 내서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3) 서로 원망하지 말고 말에서도 인내해야 합니다.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시험이 극심하고 환난이 길어지면 관계 속에서도 불화가 생깁니다.

로마제국은 오랜 역사를 가진 유대교는 공식적으로 인정했지만, 기독교회는 보호받지 못하는 신흥종교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프스의 기록대로라면 야고보가 이 서신을 쓰던 때는 네로황제의 광기가 극에 달했을 때입니다.

로마의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씌워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던 때죠.

그런 소식은 도처에 흩어져 살던 성도들까지 불안하게 했을 것입니다.

독립군 조직 내에서도 염대장 같은 변절자가 생기듯, 주님이 언제 재림하시냐 조롱하는 사람들도 생겼다는 걸 베드로후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늦어지는 재림은 믿음의 변절과 실망으로 이어졌습니다.

서로 탓하고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그 원망을 문 밖에서 계속 듣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서로 원망하는 게 얼마나 나쁜지, 심판까지 거론합니다.

원망은 나만 넘어지는 게 아니라 상대방도 걸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간신히 견디던 서로의 믿음을 가차없이 무너뜨리는 것이죠.

그리고 모든 원망의 화살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망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원망하고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불쑥 솟아나는 원망하는 마음까지는 어떻게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말을 참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내하는 자에게 주실 상을 주실 것입니다.

 

3. 잘 참기 위해서는 고난을 먼저 인내한 성도들을 본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특히 고난을 인내하고 복을 받은 욥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1) 욥은 의인이지만 짧은 시간에 가장 큰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이 당대의 의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열 명 자녀들이 지붕이 무너져 죽고, 사업은 망하고, 도적이 들어 모든 재산을 털어갑니다.

울 기력도 없는데, 몸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악성 피부병이 돋아 비참한 몰골이 됩니다.

아내는 그런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에 분노하며 욥을 떠납니다.

2) 그러나 욥은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인내라는 뜻에는 바라는 게 있어 참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바라고 참았다는 것이죠.

욥기를 보면 의인 욥도 참담한 재앙을 만나자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자기 생일을 저주합니다.

예민해진 욥은 찾아와 정죄하는 친구들과 다툽니다.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욥기23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답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고난에 대해 따져보고 싶다고 합니다.

환난 중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놓치 않은 것이 욥의 인내입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의심하고 불평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욥처럼 하나님을 더 치열하게 붙잡는다면 그 고난을 통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3) 내 고난 때 못 보는 것을 욥의 고난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욥을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사탄에게도 욥을 자랑하셨잖아요?

우리가 시련 당할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이든, 질병이든, 배신이든, 어떤 실패든, 그런 환난을 당할 때는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하고 무가치하단 생각도 듭니다.

욥이 모든 것을 잃고 온 몸은 피부병으로 덮혀 친구들의 충고를 들을 때 자존심과 자존감을 바닥까지 떨어졌을 것입니다.

신분이 고귀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참혹한 현재의 나는 창피하고 초라하고 버려진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도 그런 마음이 듭니다.

돈이 없어서 남에게 꾸어본 사람은 그 비참한 기분을 다시는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기억 속에 고난은 수치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우리 체면과 자존심만 깍아 내리는 게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두껍게 덮고 있는 죄의 굳은 살도 깎아 내립니다.

고난을 제대로 겪은 사람은 그게 무서워서 불신의 죄든 도덕적인 죄든 멀리하게 됩니다.

고난이 우리 마음을 저절로 정금같이 고귀하게 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들여다 보면 우리 본심은 늘 똑같습니다.
무서운 맛을 보았기에 스스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게 연단 된 마음입니다.

그 매서운 과정을 겪는 우리를 하나님은 욥을 바라보신 것처럼 귀하게 지켜 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4) 욥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우리에게도 인내를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욥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죠?

죽은 자녀들 대신 훌륭한 열 명의 자식들을 다시 주셨고 욥이 잃었던 재산은 두 배로 돌려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재산이 두 배라는 데 꽂힙니다.

그런데 이것이 욥이 받은 최고의 축복일까요?

욥과 같은 거부가 재산이 두 배가 되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재산이 어느 수준을 넘으면 천억이나 이천억이나 사람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한계도 넘어버립니다.

전에 아이유가 돈을 어느 정도 벌고 나니 이제는 벌어도 아무 느낌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버는 돈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기로 했다고 합니다.

내가 사용할 이상이 되면 그냥 숫자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욥에게 두 배의 재산을 주신 게 축복의 전부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해 욥에게 주신 복은 육신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된 복입니다.

욥의 소원대로 하나님이 정말 욥을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을 만난 욥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우리가 설교로만 듣던 하나님이 누구신지 만났다면, 틀림없이 큰 고난을 인내하는 중에서였을 것입니다.

또 욥은 스스로 의인으로만 알았던 자신의 본 모습을 알게 됩니다.

그게 축복이죠.

욥은 자기 속에서 부글부글 올라오는 죄의 모습을 봅니다.

사람이 여유가 생기고, 나를 존경하는 사람들 속에 있고, 나를 긁어대는 사람이 없을 때는 극단적인 모습이 나올 필요가 없죠.

나를 힘들게 하는 상대가 있어야 내 본 모습이 나오고, 극한 상황에 몰려야 나도 모르던 나를 보게 됩니다.

욥이 그런 자기를 직면하고 티끌에 앉아 회개하겠다고 합니다.

욥은 고난을 겪으며 이렇게 말하죠.

욥기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기가 씌어진 게 족장시대인데, 어떻게 이런 복음이 담겨있는지는 놀랍죠.

욥은 자기의 죄가 결코 자기 수행으로 없어지지 않을 것을 안 것이죠.

내 죄를 속량해 줄 구속자가 필요하고 그 분이 계시다는 엄청난 계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욥이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감당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 욥처럼 나 자신과 하나님을 알고, 위로와 보상도 받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결핍과 시련은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고난을 견디고 계십니까?

고난 속에서 주님은 우리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사이 사이에 평안과 축복도 주실 것입니다.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은 우리 평생에 계속될 것이니 고난의 날에 너무 근심하지는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굳건히 하고, 주님의 재림을 생각하고, 원망하지 말고, 모든 일에 인내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욥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반드시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