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세상과 벗이 되지 말라 (야고보서4장1절-7절)

남수연 2025. 3. 4. 20:51

https://youtu.be/Bp4YkQvTX5c

 

요즘 야고보사도처럼 이렇게 설교했다면 성도들 다 떠날 각입니다.

당시 성도들 신앙이 그만큼 위태로웠다는 것이고, 야고보사도는 그에 대한 준엄한 처방을 내린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처럼 사랑과 책임을 가진 관계이기에 필요하면 병증에 칼을 대기도 하는 것이죠.

이 편지를 받을 성도들은 야고보사도와 생면부지의 관계는 아닙니다.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큰 성령의 역사도 경험했습니다.

야고보사도에게 직접 신앙지도를 받았던 성도들이기도 합니다.

20여년전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있을 때, 오직 믿음 하나를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떠나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보았지만, 오늘 4장에서도 성도 간의 갈등과 세속화가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살인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우리도 늘 사람들과 갈등하고 때로 죽일 듯이 미워하죠.

영국 킹스칼리지에서 조사한 바로 우리나라가 갈등지수가 1위라고 합니다.

이런 갈등사회에서 서로가 괴롭게 부딪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야 그렇다 쳐도 그렇게 예수님만 보았던 야고보서의 성도들이 변했다는 게 두렵죠.

내 살붙이처럼 사랑하며 재산까지 공유했던 그 초대교회 성도들이 변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닙니다.

믿음은 쉬엄쉬엄 가도 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또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성장하고 성숙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이렇게 주일예배라도 힘들여 나오고 매일성경 한 장이라도 애써서 묵상하려고 해야 우리 믿음이 뒤로 미끄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성도들의 믿음이 세속화 된 것에 대한 강한 질책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의 벗이 되었다는 것이죠.

세상적인 믿음이 이들만의 문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성도들은 세상과 잘 어울리는 게 세련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성도님들은 자신의 믿음이 경건한 믿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세상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오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당시 성도들의 문제에서 우리의 믿음에도 유익한 답을 찾아보게 되리라 믿습니다.

 

1. 야고보서의 성도들은 왜 그렇게 믿음이 세속화 되었을까요?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세속화되기 쉬운 이유이기도 한 것이죠.

1) 야고보서의 성도들의 믿음의 퇴보에는 환경적인 요인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국가였습니다.

당시엔 비록 하나님이 가르치신 참신앙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래도 삶 자체에 하나님 인식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들이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 방랑하다 정착한 곳은 외국땅입니다.

이들이 살게 된 곳은 소아시아지방과 유럽 마게도니아였습니다.

이곳은 그리스 로마의 신을 섬기는 신전 문화였습니다.

거기서 올림픽이 열리고 각종 신의 이름으로 축제가 열리던 곳입니다.

돈과 향락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였죠.

그런 사회 속에서 살다 보면 그 문화에 젖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상도 다를 것이 하나도 없기에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성도들보다 더 일찍이 타국땅에 뿌리를 내린 유대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회당을 짓고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드리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믿음이 점차 악화일로를 걷게 된 것이죠.

우리도 코로나 당시 교회 못 나오고 온라인으로 예배드린 기간이 꽤 되었습니다.

그 여파로 아직도 신앙을 회복하지 못한 성도들이 많잖아요?

내가 주로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믿음의 환경 속에 자꾸 나를 데려다 놓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2) 이들이 믿음이 세속화된 두 번째 원인은 박해는 피했지만 생계의 직격탄은 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게 힘들면 믿음이 좋아질까요, 나빠질까요?

사람이 살 길이 아예 끊기면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눈을 돌리죠.

그런데 아등바등해서라도 먹고 살 수 있다면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도시에서 뭔가 일자리를 얻으면 돈버는 일이 우선시됩니다.

미국이민자들의 삶이 그렇다고 합니다.

한국 살 때는 그래도 내놓을 명함이 있던 사람들이 지위가 없어졌잖아요?

세탁소에서 일하고 식당에서 일하다보니 악착같이 벌어서 부자라는 신분이라도 얻으려 한다는 것이죠.

돈은 벌었을지 모르지만 그 사이 잃은 것은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 봐야 겨우 한 달 먹고 사는 정도입니다.

자칫하면 빚을 지게 되죠.

그렇기에 자꾸 일과 돈에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 유튜브에 한 영상이 눈에 띄었습니다.

제목이 가난한 그리스도인의 삶이기에 한번 열어 보았습니다.

20년간 쉬지 않고 해외선교 사역을 하고 한국에 돌아온 선교사였습니다.

현재 통장 잔고가 0이고 생계를 위해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헌신에 후회는 없지만 지금의 이런 현실에 현타가 온 것이죠.

일하지 않으면 가족들과 먹고 살 수가 없어서 부득이 사역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세련되지 않은 8분짜리 조악한 영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회수가 열흘 만에 13만회가 넘고 사람들이 55백개의 좋아요를 눌렀더군요.

그 아래 11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이 선교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역자와 성도들이 주로 댓글을 달았더군요.

대부분 우리나라 뜨거운 부흥기 때 믿음에 헌신했고 가난한 은퇴기를 맞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도 지지해 주지 않는 가난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서로가 격려하고 위로하는 모습들이 좀 슬프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잔고는 0이라 해도 20년간 사역하면서 먹고 살았잖아요?

헌신을 안했다 해도 먹고 사는 것 외에 달리 뭘 했겠습니까?

댓글의 성도들도 다 믿음을 지키며 그래도 무사 생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실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래요.

하나님이 꼭 필요한 것을 맞춰주지 않았던 적이 거의 없으셨던 같습니다.

어떻게든 맞춰서 살게 해 주셨거든요.

야고보서에서 느끼는 아쉬움은, 그때 성도들이 힘들었겠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간수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맘몬을 왕으로 모시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입니다.

야고보서의 성도들도 결국 세상 임금을 숭배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이것이 예수님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성도들의 모습이라니 인간의 연약함에 속으로 눈물이 납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제대로 얻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추한 나락으로 빠지게 된 것이죠.

처음부터 예수님은 우리의 통장은 천국에 쌓인다고 하셨잖아요?

예수님을 믿고 시작했으면 좀 가난하고 답답해도 끝까지 하나님만을 신뢰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사는 동안 우리를 보호하시고, 마지막 눈을 감을 때는 후회 없는 기쁨으로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3) 믿음의 세속화의 또 다른 원인은 우리가 세상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태어난 고향입니다.

세상은 우리 본성과 가장 짝이 잘 맞는 것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세상에 벗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성도들에게도 세상의 유혹이 얼마나 강합니까?

송태0 목사님이 설교 중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송목사님 친구 한 분이 하도 교회가 안되서 금식하러 기도원에 올라갔다 잘못되서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긴급한 상태에서 친구 목사님들이 소식을 듣고 급히 기도원을 찾아갔습니다.

이미 소생하기 힘든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뭔가를 자꾸 중얼거리고 있길래 송목사님이 가까이 귀를 대고 들어 보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너무 좋아, 떠나기 싫어

송목사님이 깜짝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목사로서 교회를 위해 금식하다 죽게 되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 가니 좋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 좋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난 고향인 이 세상이 끔찍이 좋다는 것입니다.

천성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냥 두면 저절로 드러나는 게 천성이고 본성입니다.

천국과 믿음에 대한 것은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의지적으로 해야 합니다.

세상은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각납니다.

그러니 믿음에서 세상적으로 되는 것은 그만큼 쉬운 것입니다.

 

2. 이런 성도들의 세속화에 대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임을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세상이라는 환경,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 세상과 기가 막히게 잘 맞는 본성, 이 세 가지의 피할 수 없는 요인을 핑계할 수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스스로 세상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아주 큰 경적을 울립니다.

차선을 이탈하는 동료를 향해 클락션을 울려서 정신차리게 하는 것이죠.

그건 간음이야그렇게 고함을 치는 것입니다.

4, 간음하는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1) 여기서 간음은 육체적인 죄가 아니라 영적 간음입니다.

간음하는 여인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성결을 지켜야 하는 신랑과 신부로도 비유됩니다.

엄연한 신랑이 있는데, 세상에 한눈 파는 것이죠.

어떤 목사님이 자기 경험을 담아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어느날 퇴근하던 길이었습니다.

큰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빨간 불이 들어와 차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횡단보도에 서 있는 청춘 커플이 초록불인데도 건널 생각을 안 하고 부등켜 안고 부비부비하고 있더랍니다.

참 젊음이 좋긴 좋구나’, 좋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내 여자친구가 어떤 남자와 저러고 있었다면, 어땠겠냐는 거예요.

당장 차에서 내려 멱살잡이라도 했겠죠.

성도들이 세상에 연연하고 세상을 곁눈질해서 흘끔거리는 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과도 친하고 싶지만 오늘 말씀은 강력하게 제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말로는 원수가 된다고 번역했지만 본래 단어는 원수로 임명된다는 뜻입니다.

임명되면 빼도 박도 못하는 거잖아요?

이 세상에 단 두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길이 되신 좁은 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배제한 모든 세상은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입니다.

세상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사는 게 아닙니다.

어느 길에 서 있냐, 단 두 부류의 사람이 있고 두가지 운명만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잖아요?

세상은 신은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인정하는 말을 하루에 단 한번인들 들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세상의 종착역은 멸망임을 성경은 무수히 경고하십니다.

세상과 원수가 될지언정, 하나님과 원수되는 일은 결단코 없으시길 바랍니다.

 

2) 영적 간음이기에 하나님은 세상과 벗하는 우리를 질투하신다는 것입니다.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성경에 난해한 구절들이 많지만 이 구절만큼 공감이 안되는 구절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질투하실 만큼 사모하냐는 것입니다.

사람 중에서도 나를 사모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이 말씀은 공감과 이해보다는 믿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이 아니라면 뭘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무능해서 십자가형으로 죽으신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보내신 성령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냥 성령께서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되는 데 왜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당연히 하나님과 동일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세상에 눈길 주는 걸 질투하실 만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도 똑같이 그러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도 내가 싫은 데, 도대체 내가 뭐라고 삼위 하나님이 이렇게 완전한 사랑을 주시는지 우리는 이해가 안되죠.

좀 세상적으로 살고 싶을 때, 적당히 믿고 싶을 때,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사랑이 없는 남편처럼, 가까이 할수록 우리를 더 비참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를 질투하시며 사랑하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 밖에 없으십니다.

 

3) 실제로 성도들이 곁눈질하는 세상의 배후에는 인격적 존재인 마귀가 활동합니다.

7절에 보면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죠.

갑자기 주제가 바뀐 게 아닙니다.

야고보사도는 지금 계속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동경하고 애틋한 세상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 인류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한 존재입니다.

지금도 성도들의 마음을 세상으로 유인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또 마귀의 유혹을 당하는 것에 강력한 질투를 느끼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할 때도 그러셨잖아요?

물론 이제 우리를 다시 세상과 마귀에 뺏길리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가 마귀의 덫에 걸리면 낭패일 걸 아시기에 엄히 대적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워 본 부모들은 그런 일을 당해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 딸이 중학교 때 저희가 일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은평구에 있는 중학교에 다닐 때는 서원이가 너무 상냥하고 밝고 모범생이었습니다.

일산에 있는 중학교에 전학을 가보니 그곳 출신 아이들끼리만 친하고 끼워주질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품행이 좋지 않은 아이들하고 어울리게 된 것이죠.

아이가 조금씩 외모가 이상해지고 말투가 사나워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느날 퇴근해 아파트로 들어섰는데, 멀리 우리 현관 쪽으로 한 여학생이 들어가는 게 보였습니다.

운동화는 비닐봉지에 담아서 옆구리에 끼고 교실에서 신는 삼선 슬리퍼를 찍찍 끌며 가는 데 한 눈에 봐도 비행청소년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게 우리 딸이었습니다.

눈에 불이 번쩍 나는 것 같았죠.

그냥 두면 안되겠단 생각이 들어 어울리던 아이들하고 억지로 떼어 놓느라고 한동안 애를 썼습니다.

물론 제가 교사시절에 학교에 부적응인 아이들에게 신경을 많이 써 돌보기도 했지만 부모로써는 딸 걱정을 더 할 수 밖에 없었죠.

하나님이 우리가 세상을 가까이 하는 걸 왜 막으시는지는 자명하죠.

우리가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으로 미혹하는 것들의 배후에는 악한 영들이 있다는 걸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 마귀의 세력을 어떻게 분별을 할 수 있을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천성은 본래 세상의 것들과 쾌락과 탐욕에 끌립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균형을 잡고 사는 것이죠.

그런데 마귀가 개입하면 죄의 본성으로 급격히 기웁니다.

마귀가 개입하는 순간을 보면 평소 나와 다르게 뭔가에 끌려가듯이 죄에 확 넘어가게 됩니다.

이게 아닌 데 하면서도 넘어갑니다.

마귀의 역사를 인식하는 것은 아주 어렵지는 않습니다.

마귀는 우리 믿음에 도움이 될 일에 역사 할 까닭이 없죠.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사건을 만들고 사람을 이용합니다.

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과 반대가 되는 쪽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걸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귀신을 쫒는 그런 부적 같은 행동으로 물리치는 게 아닙니다.

마귀의 일을 지혜롭게 간파하고, 우리 본성이 끌려가지 않도록 내 마음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면 귀신을 내쫒지 않아도 우리를 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마귀와 돈이 지배하는 세상을 질투하지 않으시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직설적인 야고보사도의 책망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에 팔려가게 된 성도들을 온유한 말로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절박하고 간절하면 외마디 소리라도 지르고 고함이라도 쳐야죠.

북한음식 만드는 탈북사업가 이순0씨가 방송에 자주 나오더군요.

아홉 번 탈북을 시도해서 겨우 남한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다시 잡혀갔을 때마다 당했던 끔찍한 폭력과 폭행을 견디고 사람이 살아있다는 게 놀랍더군요.

이분이 마지막에 3살 된 딸을 데리고 탈북했다고 합니다.

아이를 가방에 담아 업고 압록강을 건넌 것이죠.

그런데 건너자마자 갈대밭에 숨어있던 인신매매단한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때 인신매매범 세 명이 아기를 놓고 물건 팔 듯이 흥정했다고 합니다.

아기는 삼천원에 팔렸습니다.

그렇게 데려가는 걸 보면서도 오천원에 팔린 엄마는 끌려가며 울부짖을 수박에 없었던 것이죠.

아기가 엄마 손을 붙잡고 바들바들 떨면서 안 간다고 발버둥을 쳤지만 그렇게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아기가 너무 그리워서 흔적을 찾고 있지만 아직 만나질 못했다고 합니다.

야고보사도의 마음에 마치 성도들을 그렇게 세상에 뺏기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간곡하고 강경한 충고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정말 안타깝게도 세상에 뺏긴 아까운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과 돈은 우리의 친구처럼 손짓하고 행복을 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야고보서의 성도들이 세상을 따른 결과가 어떻습니까?

행함이 없는 위태로운 믿음,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차별, 독한 혀로 인한 끊임없는 분란.

이것을 본보기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목숨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만을 절개 있게 믿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