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야고보서3장1절-12절 (혀의 해부학)

남수연 2025. 2. 24. 22:51

https://youtu.be/bhBxJFGiHEI

 

나의 언어생활에 대해 고민은 없으십니까?

말하고 나서 후회하고 마음이 종일 불편할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살면서 겪게 되는 소소한 갈등들이 많은 경우 말에서 시작되죠.

야고보서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말에도 믿음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전제로 야고보사도가 이 문제를 지도하고 있죠.

설교 제목을 혀의 해부학이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성령님의 지혜가 사람들의 혀를 해부해서 속을 드러내는 게 느껴지죠.

겉만 보아서는 우리의 말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 언어생활에 도움을 주고, 말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이 좀 해소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말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말은 정말 양날의 검인 것 같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잠언1218절을 보면 칼로 찌르는 것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은 대중 앞에 잘 드러나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뉴스를 보며, 왜 저런 말실수를 할까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루도 되지 않아서 그 말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폭주하죠.

말을 하다 보면 완벽하게 다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들과 대화할 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주워 담지도 못하고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1) 그래서 오늘 야고보사도는 먼저 말 많이 하는 사람들이 더 불리하다고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한 말에 대해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그렇다 해도 말실수 때문에 아예 가르치는 직분을 회피 하라는 것일까요?

교회에서 잘 가르치는 성도들이 많으면 얼마나 유익합니까?

큰 교회들도 만성적인 교사 부족에 시달립니다.

이 말은 목사가 되고, 성경 교사가 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 이렇게 말한 것은 먼저 교회 지도자였던 야고보사도 자신이 말실수 때문에 깊은 좌절을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다 보면 말실수가 더 큰 파장을 일으킬 수가 있죠.

말씀을 잘 전하고도, 개인적인 언행에 성도들이 시험드는 걸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목회자는 없을 것입니다.

-또 말에 대한 심판은 말에는 엄중한 책임이 따른다는 경고입니다.

보통은 내가 했던 말이 심판 받는다는 건 생각하지 않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아무런 심판을 받지 않을까요?

바울사도도 로마서와 고린도후서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했습니다.

평생에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또 어떤 말을 했든 하나님 앞에서 결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는 알아야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성도들의 작은 선행도 마지막 날에 되살려 상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일생을 평가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평가는 받되 이미 형벌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끝난 것입니다.

우리가 한 말을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도 평가받겠지만, 이땅에서도 톡톡히 댓가를 치르게 되어 있죠.

그러나 누구든지 말의 실수를 피할 수가 없다고 2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선생의 자리를 원하기에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이겠죠.

여기에는 당시 특정한 사람들을 향한 경고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1세기 교회에서는 말씀 가르치는 사람들을 존대하는 풍토였습니다.

한국교회에서도 우리 부모세대는 목사님들을 정성껏 섬겼죠.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인데도, 어머니가 생선을 사면 가운데 토막을 골라서 목사님 집에 보냈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봤습니다.

야고보사도 당시에는 교회를 방문해서 말씀을 나누는 순회 설교자들이 많았습니다.

교회가 그런 사람들을 환대하고 잘 대접하다 보니, 말로 성도들을 현혹하고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도 그런 문제들이 있었다는 게 발견됩니다.

교회 내에서도 다른 은사보다 가르치는 은사를 더 우월한 지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죠.

야고보사도는 말씀을 전하는 직책은 나중에 심판받을 일만 더 많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겸손하고 신중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죠.

본문 첫 구절은 당시 교회의 특수한 상황과 분쟁에서 나오게 된 점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2. 다음 단계로 말의 위력이 얼마나 큰 지에 대해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합니다.

1) 세 가지 예를 들죠.

달리는 말을 제어하는 재갈, 큰 배를 조종하는 작은 키, 산을 불사르는 작은 불씨입니다.

세 치 혀를 통해서 나오는 말의 위력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 전체를 좌우할 정도의 가공할 위력이라는 것이죠.

말의 재갈을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재갈은 금속으로 만든 작은 도구이지만 달리는 말을 서게도 하고, 방향을 바꾸게도 합니다.

말의 치아를 보면 잇사이에 치극이라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에 가로로 재갈을 끼우고 고삐를 매서 말을 조종하는 것이죠.

말이 얼마나 힘이 센지 전에 실험한 적이 있습니다.

장정 열여덟 사람이 말 한 마리에 싱겁게 끌려갔습니다.

말의 그 큰 힘을 제어하는 게 재갈입니다.

재갈이 없으면 말을 조종할 수 없으니 재갈의 위력이 대단한 것입니다.

다음은 배의 조종키입니다.

자동차의 방향을 핸들로 조작하듯이 배의 방향을 잡는 것이 키입니다.

큰 파도가 오고 풍랑이 일 때도 노련한 선장은 바람의 방향을 보며 키를 요리조리 틀며 배를 운행합니다.

만일 키가 망가졌다면 풍랑에 표류하다 파선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 두 가지 비유는 그것처럼 우리의 혀의 위력이 크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산 전체를 태우는 작은 불씨입니다.

삼 년 전 삼척과 울진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을 진화하는 데 거의 열흘이 걸렸습니다.

산불 역사상 진화가 가장 오래 걸린 산불입니다.

산불의 원인이 지나가던 차에서 던진 담뱃불이라고 잠정 결론이 났었죠.

담배에 남았던 작은 불씨가 서울 면적의 35%를 태우며 600채가 넘는 주택과 시설을 집어 삼켰던 것입니다.

특히 혀의 파괴력이 이렇게 크다는 것입니다.

실제 말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생명을 파괴하는 일들이 주변에 수두룩합니다.

선배 아나운서들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작년 생을 마감한 기상캐스터가 있죠.

말이 아니면 무엇으로 괴롭혔겠습니까?

터무니없는 악플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은 연예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2) 이렇게 위력이 강한 혀는 중립이 아니라 근본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성경은 신랄하게 혀의 근원을 파헤칩니다.

이렇게 지옥에서 나온 말은, 듣는 사람에게 지옥의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점잖은 말씨를 한다고 해서 속지 말아야 합니다.

뿌리가 악하니 언제든지 사고를 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저 사람이 저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혀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만 아니라 나 자신도 해칩니다.

우리 지체 중에서 내 온몸을 더럽히는 것은 혀 밖에 없습니다.

손 발은 더러워진 곳만 씻으면 되지만 혀에서 나온 말은 온몸 전체를 더럽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실수보다, 말을 한번 잘못하면 그 사람에게 평생 벗겨지지 않는 옷처럼 달라붙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또 악한 말은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고 합니다.

내 삶이 잘 굴러가게 하는 수레바퀴를 내 혀가 불살라버린다는 것이죠.

말로 인한 불화로 인생이 삐거덕거리고 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했던 말 때문에 잘 달리던 관계가 덜컹거리고, 결국은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도 꺼지지 않기에 계속 불꽃을 날름거리는 게 혀의 본색입니다.

물론 혀를 관장하는 나의 뇌와 인격의 본색이죠.

 

3.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런 혀를 길들여야 합니다.

8절을 보면 현실은 녹록치 않죠.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지만 성도들의 경우는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혀를 길들이는 게 불가능이라면 오늘 이런 교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혀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것은 제발 혀를 길들이라는 것이죠.

1) 혀를 길들여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말에서 내 신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인격과 사회적인 신분이 말에서 드러나죠.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증거가 말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한가지 예를 가져 옵니다.

11, 샘이 한 구멍에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난제를 던져줍니다.

하나는, 쓴 물이 나오면 그 샘의 본질은 나쁜 샘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말도 하지만 나쁜 말도 하잖아요?

또 하나는, 우리가 좋은 샘이라면 왜 여전히 나쁜 말을 내뱉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도는 우선 성도들의 입에서 나쁜 말이 나오면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단물을 내는 샘, 선한 말을 하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본래 쓴 물이 나오던 샘에서 이미 단물이 나오는 샘으로 바뀐 사람들입니다.

로마서에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고 나의 문제성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기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죠.

이것이 우리의 영생을 판가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내 안에 쓴물과 단물이 나오는 건 왜입니까?

어떨 때는 착하고 배려하는 말을 하다가도, 어떨 때는 거짓말, 찌르는 말, 위선 된 말이 나오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마치 두 개의 인격이 내 안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자아로 거듭난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다시 하나님을 대적하며 옛날로 돌아갈 그런 옛 자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믿지 않던 옛날처럼 되돌려지는 것은 완전 불가능합니다.

성도님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완전히 새생명으로 바뀐 것은 맞지만 이전에 이뤄진 성격이나 습관들까지 바뀐 것은 아닙니다.

, 우리가 나쁜 말을 하고, 설령 거짓말을 한다 해도 믿기 전처럼 뻔뻔하거나 자기 합리화가 안됩니다.

욱하는 마음으로 욕을 하거나,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거짓말 뒤엔 죄책감을 느끼고 회개하게 되죠.

그런 뉘우침이 있기에 우리는 혀를 길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어떻게 하면 우리 혀를 길들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으로 형제를 저주하지 않게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말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주로 가까운 사이입니다.

사람들이 왜 가족들 간에나 성도들 간에나 험한 말을 하며 갈등을 일으킬까요?

서로가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런 것이죠.

사람들이 나와 다른 것은 하나님이 다 개성있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봉준호감독이 만든 미키17이라는 영화가 나오나 봅니다.

열일곱 번이나 복제되고 소모품이 되는 미키라는 복제 인간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획일적인 걸 좋아하셨다면 그렇게 만드셨겠죠.

하나님이 다양한 것을 좋아하셔서 다 다르게 만드셨는데, 싸우는 이유는 왜 나처럼 하지 않냐는 것이잖아요?

제가 출애굽기를 읽다가 깨달은 게 있어요.

출애굽기에 보면 성막의 설계도와 기물들의 크기와 재질까지 전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 아론의 옷도 하나님이 직접 디자인해 주십니다.

그것은 그 하나 하나 속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사역이 예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슴받이인 흉패 디자인을 보면 열두 가지 각각 종류가 다른 보석을 알려주시고 그것을 부착하라고 하셨습니다.

미관상으로 너무 복잡한 디자인 아닙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뿐 아니라 장차 구원받을 영적 이스라엘인 모든 이방 민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각각 다른 인종적인 특성과 각자의 개성들을 가집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제각각 다른 우리를 가슴에 품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색으로 빛나는 것이죠.

그렇기에 성도들에겐 남을 수용하는 자세가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 탄핵 문제로 진보와 보수편으로 갈라져 한국 교회가 상당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지인들 간에도 정치 얘기 나오면 백 프로 갈라선다는 말도 있죠.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폭력 사태는 당연히 비판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나와 성향이 다르고, 인식이 다르다고 편 가르고 정죄하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나랑 좀 안 맞고, 말이나 성격이 거슬린다고 비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저 사람은 도대체 이해가 안돼이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개성도 다 다르지만 게다가 타고난 죄성과 살아온 환경 때문에 다 비뚤어지게 성장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그런 내 모습을 잘 알아야 남도 이해가 됩니다.

교양 있고 점잖은 사람들과는 우리도 그렇게 잘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사는 게 바쁘고 격식 차릴 힘도 없이 지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민하고 냉정하고 퉁명스럽게 말할 때가 많습니다.

기분이 상한 우리도 거기에 똑같이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죠.

서로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로 우리 입술을 제어할 수 있길 축복드립니다.

 

3) 함께 생각해 볼 것은 내가 나에게 하는 말도 잘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타인과의 대화보다 나 자신과의 대화를 더 많이 합니다.

우리 말의 사령탑은 뇌이기에 뇌과학과 연관을 시켜보겠습니다.

벤자민 리워프라는 사람은 언어가 단순히 생각을 그대로 전달하는 도구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말이 뇌에서 나오지만 나온 말이 뇌의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이죠.

뇌과학자들이 밝혀 낸 말의 법칙이 있습니다.

몇 개만 말씀드릴 테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걱정하는 말은 현실이 된다.

우리는 환난을 많이 당해봐서 보통은 근거 없는 낙관을 견제합니다.

오히려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중에 실망하지 않으려고, 또는 그런 상황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죠.

그러다 보니 걱정도 많아지죠.

그런데 그게 습관이 되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게 됩니다.

뇌과학에서 연구해 보니 말한 대로 현실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말할 때 긍정의 말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부정적일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어떤 상황도 나쁘게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저도 습관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을 아주 종종 합니다.

너 참 행복한 사람이야이런 말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생각과 말을 항상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긍정적인 말로 지울 수 있다.

불안한 마음이나 두려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믿음의 말을 내 귀에 들려주면 부정적인 감정을 지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그렇게 말하고 나면 우리 뇌는 힘든 이유를 줄줄이 기억나게 할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암울하게 시작되는 시가 많지만, 그 결론은 긍정으로 끝납니다.

시편이 기도잖아요?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 처음엔 걱정을 쏟아 놓을지라도 점점 기도가 희망적인 말로 바뀝니다.

충분히 기도하면 거의 그렇습니다.

그런 내 기도 소리를 듣고 부정적인 내 감정이 지워진다는 것입니다.

-말에 의해 몸의 모든 기관이 움직인다.

이것도 신기한 일이죠.

몸의 모든 기관을 명령하는 것은 뇌입니다.

그런데 내가 오장육부에 대고 하는 말대로 내 몸의 기관들이 실제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마술처럼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겠죠.

병약한 곳을 향해 하나님이 점점 고치시고 있다고 계속 말을 하면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뇌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말은 뇌세포에 98% 정도의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계속 짜증나, 우울해라고 말하면 뇌가 우울한 나로 인식을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슬퍼서 울잖아요?

그런데 우는 나를 보면 슬퍼져서 더 운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혀를 틀어막고 믿음의 말을 하면 그대로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민수기1428절에서 부정적인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거든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내게도, 복이 될 말을 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우리 믿음이 말로도 증명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노력해야 합니다.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열한 살 바이올리니스트가 나온 유퀴즈 영상을 보았습니다.

아직 어린아이인데, 매일 자기의 하루를 연습 노트에 기록합니다.

몇 악장이 부족했는지, 무엇을 더해야 할지, 그런 것들을 적어 놓고 계속 연습하는 것이죠.

어린아이라도 자기가 음악가라는 걸 알기에 그 어려운 걸 해 내는 것 아니겟습니까?

원경이라는 드라마에서 왕비역을 맡았던 배우도 나왔더군요.

자기를 배우라고 부끄럽지 않게 소개하기 위해 역할을 맡을 때마다 최선을 다한다고 합니다.

배역을 맡으면 잠도 자지 않고 몰두하다 보니 이번에도 잇몸이 다 내려앉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요.

이번 한 주는 내 입에 재갈 물리는 노력을 해 보면 좋겠습니다.

김범0작가의 책에 이런 말이 있는데 공감이 되더군요.

나이 50이 되면 힘을 좀 빼고 말하라

우리의 혀를 잘 다스려서 삶의 수레바퀴가 막힘없이 잘 굴러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