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39편은 시편 중의 왕관이란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읽어보면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알 것 같죠.
이 시편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다윗의 신앙심, 하나님에 대한 지식, 아름다운 표현이 정말 돋보이는 시입니다.
평생 하나님과 함께 한 다윗의 신앙간증이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자신이 아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오롯이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 헌정시일 것입니다.
우리도 부족하지만, 그렇게 우리 하나님을 믿고 경험해 왔죠.
그렇기에 오늘 시편을 읽을 때 ‘맞아, 나도 그런데, 나도 그런 하나님을 아는 데’ 이런 공감과 수긍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시편은 그냥 읽기만 해도 은혜가 되지만, 약간의 해석을 좀 덧붙이면 이해가 더 잘 될 것입니다.
전체 내용 중에서 오늘 읽은 부분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1절부터 6절까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세세히 나를 아시는지를 구절마다 고백하고 있죠.
1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여기서 살펴본다는 것은 금속을 찾기 위해 땅을 뚫고 헤치며 샅샅이 뒤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그냥 우리의 모든 것을 직관하여 아십니다.
그러나 샅샅이 뒤져서 우리를 아신다는 것은 의지를 동원해서 우리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상대하신다는 것이죠.
그러니 나는 별 것 아닌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2절, 3절을 보면 내가 앉고 일어서는 것 그리고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다고 합니다.
나의 존재만 아시는 게 아니라 내 삶과 생활 전부를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앉고 일어서는 것, 내가 눕는 것’을 다 살펴보신다고 하죠.
그렇게 나를 관심있게 봐 주는 사람이 누가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그렇게 살펴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내 모든 길을 아신다는 것’은 내 지난 날과 미래를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미리 아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3절하에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는 것은 원문 대로 번역하면 ‘당신께서 나의 모든 길에 도움이 되셨습니다’입니다.
우리의 모든 길을 다 아실 뿐 아니라 함께 하시며 도우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이죠.
4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특히 다윗이 하나님이 나의 말을 아신다고 꼽은 것은 말이 곧 우리 인격이고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또 말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우리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원어를 직역하면 ‘아직 혀에 말이 있기도 전에’ 벌써 아셨다는 뜻입니다.
입에서 우물거리고 아직 꺼내 놓지 않은 말도 주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하려다가 ‘에이, 말을 말자’ 하고 입을 닫기도 하죠.
하나님은 내가 뱉지 못한 그 말을 이미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니라 왜 내가 그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아십니다.
왜 하지 않았는지도 아십니다.
할 말을 못해 답답하고 억울할 때가 있잖아요?
돌아서서 그때 내 변호를 못한 걸 자꾸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말도 들으셨고 내 억울한 속마음도 아신 것을 생각하며 위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 말이 다른 사람을 찔렀거나, 아니면 겉으로 내뱉지 않은 말 속에 가시가 있었다면 성령께서 우리 양심을 찌르실 것입니다.
다윗의 평생을 보면 말에 대해서 정말 신중했던 걸 볼 수 있습니다.
입에서 낸 말을 하나님 앞에서 한 것으로 여겨 끝까지 지키려는 것도 우리를 다 아시는 하나님께 진지한 태도일 것입니다.
여기까지를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지식으로 아는 걸까요, 경험으로 아는 걸까요?
경험으로 안다는 느낌이 오잖아요?
하나님은 이렇게 나 같은 존재를 속속들이 아신다는 게 믿는 우리도 때로 실감이 안 날 때가 많죠.
지구의 모든 사람들은 고사하고 25억 신자들만 대충 아신다는 것만도 아찔하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피조물인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서번트증후군 환자들은 신기한 능력이 있죠.
몇 년 몇 월 몇 일을 대면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날의 요일을 맞춥니다.
전화번호부를 한번 훑어 본 것만으로 이름과 번호를 정확히 기억해 냅니다.
이것은 과학이나 의학으로는 밝힐 수 없는 두뇌의 직관적 능력입니다.
피조물의 두뇌에도 그런 능력이 있다면 하나님의 직관적인 지식과 능력은 당연히 우리 상상을 초월해야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그런 전능하심에 대해 다윗처럼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6절,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전에 한 성도님께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 사람 기도도 들으시고, 저 사람 기도도 들으실 수 있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너무 기이하고 높아서 우리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를 감찰하시고 쉬지 않고 지켜보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은 어떨까요?
실제로 성도들이 거듭나면 신기하게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시선을 언제든지 인식하게 됩니다.
다른 일에 몰두할 때는 아니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순간은 언제든지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숨기고 싶은 것이 많잖아요?
사람들이 자기 속내를 숨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죄인 사회는 나를 드러내면 그걸 약점으로 이용합니다.
정치가였던 다윗은 그걸 잘 알았죠.
정치판은 오늘 함께 대사를 모의하고 내일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요즘 내란 법정을 보면 같이 모의하고 자기만 살자고 서로 등을 돌리잖아요?
이번에 개그우먼 박나0씨가 매니저의 폭로로 인생의 큰 위기를 맞았더군요.
주사 이모에게 불법의료시술을 하는 동영상까지 공개 되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영상이 찍혔나 했더니 매니저가 찍어 놓았다고 합니다.
순진하다 해야 할지, 어떻게 남을 믿고 그런 불법들을 용감히 행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 관계는 언제든 틀어질 수 있습니다.
자기를 다 알리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은 우리 약점을 잡고 잘못하면 징계하려 감시하는 게 아닙니다.
5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감시가 아니라 보호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옆에서 놀고 있는 어린 자녀의 모습을 계속 눈으로 따라갑니다.
위험한 상황만 부모가 살피는 게 아닙니다.
아이가 어디가 불편한지, 뭐가 지금 필요한지, 그걸 부모가 다 매의 눈으로 보고 있다가 달려가는 것이죠.
하나님이 바로 그러시기에,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부르짖을 때라도 즉각 손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상황을 번번이 설명하고 간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 아시죠? 제 마음 아시죠?
우리가 때로 그렇게 밖에 기도가 나오지 않을 때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 안수하셨다는 것은 주님의 눈으로만 나를 살피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은 우리를 직접 도우시고 우리를 위해 능력을 행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세세히 아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더 풍성히 경험하시길 축복드립니다.
2. 7절부터 12절까지는 어느 곳에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입니다.
편재하시다, 무소부재하시다 그렇게도 말하죠.
7절,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이 구절은 다윗이 하나님을 떠나고 싶고, 피하고 싶은 때가 있었다는 얘기겠죠.
성도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을 피하려는 본성도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뒤 하나님을 피하잖아요?
죄가 들어온 인간은 하나님을 피합니다.
우리의 작은 죄라도 하나님을 피하게 한다는 게 사실 지은 죄보다 더 심각한 폐해일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가까이 하고 싶은 소원과 피하고 싶은 본성의 갈등이 늘 있습니다.
매일성경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유튜브 보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이죠.
하나님을 신앙하는 데서 오는 평강과 영혼의 만족을 누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친숙한 세상의 소소한 재미를 하나님 눈치 안 보고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입니다.
때로 예수님을 따르고 헌신하는 게 힘에 부쳐 피하고 싶기도 합니다.
다윗의 이런 고백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죠.
그러나 결코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8절,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이 고백은 다윗이 자기 신앙의 극단적인 과거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항상 하나님께 고양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보좌 우편의 그리스도를 성령의 감동으로 바라보았던 사람입니다.
하늘에 오를 만큼 은혜롭고 거룩한 신앙 안에 있다가도 지옥 속으로 함몰되기도 하는 게 이땅의 신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오를 것만큼 경건하고 밝은 날이나 지옥과 같이 영적으로 무너진 날이 모두 하나님의 눈 앞일 뿐입니다.
밧세바의 때 다윗의 영혼은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마저도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시험도 하나님 앞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다윗은 도주하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9절,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지금 이 환경을 순식간에 벗어나 먼 바다 끝에 거주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사방을 에워싸며 점점 다가오는 사울왕의 추격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날마다 느낄 때 얼마나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겠습니까?
다윗이 왕의 야심을 가졌던 것도 아니잖아요?
내일 수백 명 무리들을 먹일 빵이 없을 때, 아침이 오는 게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렇게 새벽이 밝아올 때 그 빛이 달려가는 바다 저 끝을 동경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갈 수 없고, 아무 일도 없는 저 바다 끝에 가서 무심하게 거주할 수만 있다면.
삶의 속박에서 달아나고 싶을 때 우리도 그런 마음이 들죠.
그러나 도망치든, 아니면 피할 수 없이 그 자리에 있든,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어려움을 이기게 하십니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항상 추격하시는 것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11절과 12절은 다윗이 도망치고 싶던 때의 위급함과 절망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이렇게 돌아봅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우리 말 번역에 혹시라는 가정법을 넣었지만 원문은 그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피할 수없이 흑암이 덮치고 밝고 행복했던 모든 것이 어둠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빛났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지나고 보니 주님 앞에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12절,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깜깜한 어둠인 줄 알았는데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비추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우리의 입체적인 삶에는 명암이 생기는 것입니다.
밝은 부분만이 아니라 어둠을 통해서도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는 어떤 어둠도 결코 우리를 삼킬 수 없습니다.
다윗이 절망했던 어둠은 십 년, 긴 어둠의 터널이었죠.
그러나 그 시간이 하나님이 영원한 왕조를 다윗의 자손에게 주시겠다 언약하신 그 믿음의 사람 다윗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어둠과 흑암이 없으면 굴곡진 인생의 입체감을 모르는 평면적인 사람이 되죠.
어둠 가운데 있을지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는 그 빛 가운데로 걸어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25년12월10일 수요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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