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장을 읽으면 좀 어리둥절한 느낌이죠.
아니, 이 나이, 이 시점까지 와서도 아브라함이 이랬다고?
아브라함이 사라를 여동생이라고 하는 바람에 사라가 그랄왕 아비멜렉의 아내가 될 뻔하죠.
이게 처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12장에서도 그랬다가 사라가 애굽왕 바로의 아내가 될 뻔했죠.
잘못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특별히 취약한 죄가 있습니다.
성격과 습관과 살아온 환경 속에 어떤 죄의 경향이 굳어진 것이죠.
그런 종류의 죄는 대개 반복되기가 쉽습니다.
전에 흑백요리사2가 방영되었죠.
출연자들의 인생 이야기가 더해져 볼만했다고 합니다.
저는 넷플릭스 같은 서비스에 가입하지 않아서 못 봤습니다.
전에 사람들이 열광했던 폭삭 속았수다도 못 봤습니다.
이번 흑백요리사에서 사람들에게 상당히 호감을 얻었던 한 셰프가 있습니다.
호탕한 말투와 실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임모 셰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4번의 음주운전 경력으로 형사처벌도 받고 면허도 취소된 적이 있다는 게 밝혀졌죠.
끊지 못한 음주와 음주운전이 평생 쌓아온 셰프의 명예를 한순간 나락으로 보내더군요.
아브라함은 왜 사라에게 못할 짓을 두 번이나 시킨 것일까요?
믿음의 조상이라는 명예에 반복되는 오점이라니요.
하나님이 막지 않으셨다면 아브라함의 가정은 공중 분해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책망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오히려 사라를 데려갔던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꾸짖으십니다.
하나님이 내 백성이라고 불공정하게 개입하신 것일까요?
이삭이 태어나기 바로 전에 이런 내용을 굳이 기록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런 걸 좀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교훈을 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브라함이 헤브론에서 그랄로 장막을 옮깁니다.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가나안의 중심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랄은 서쪽 지중해 가까이 있는 블레셋 부족의 땅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갑자기 이사를 갔는지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 장에서 소돔이 유황불 심판을 받는 것을 본 충격 때문일 것입니다.
타락한 가나안 중심권에서 좀 떨어져 나오고 싶었겠죠.
또 아브라함이 유목민이잖아요?
가축을 먹이기 좋은 땅을 찾아 이동하는 것이 유목민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부족의 땅으로 찾아 들어 온 것이죠.
아브라함이 큰 민족의 약속은 받았지만 여지껏 안전하게 거주할 땅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라왔지만 이십오년 째 장막을 치고 살았던 것이죠.
이 아브라함의 장막생활에 대해 히브리서11장에는 이렇게 평가하죠.
아브라함이 장막에 거주한 것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 땅이 전부라고 믿었다면 부자였던 아브라함이 어떻게든 땅을 사고 한 성읍 정도는 이룰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주실 때까지 믿음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이죠.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후손인 성도들에게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기에 나그네와 같이 살라는 것이죠.
그런 믿음의 아브라함이이었지만 또 이런 오점을 남긴 것입니다.
2. 그랄왕 아비멜렉이 냉큼 아내를 삼겠다고 사라를 데려갑니다.
사라가 어느 정도 미인이였는지 참 궁금하죠.
우리 생각에는 나이 구십에 미모가 얼마나 대단할까 싶지만 왕이 탐낼 정도로 아리따웠나 봅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사라 나이가 있고, 설마 또 애굽에서 있었던 일이 일어날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아무리 완벽하게 방비해도 우리 힘으로 안될 일도 수두룩합니다.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피하고 발을 들이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사라를 누이라고 했는지는 11절에서 알 수 있죠.
사라를 아내라고 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사라를 취할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사라와 약속을 했던 것이죠.
‘가는 곳 마다 오라비와 동생처럼 행동하자.’
무법했던 그 시대에 고향을 떠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런 데서 드러나는 것이죠.
뒤에 보면 이삭도 똑같이 행동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책망하지 않으신 것은 죽음에 대한 절박한 두려움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편한 대로 사는 사람들과 우리를 똑같이 보지 않으십니다.
물론 우리에게 죄에 대해 엄중히 말씀하시죠.
그러나 아무 죄책감도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세상 사람들과 우리를 똑같이 보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 고향을 떠나 가나안땅을 떠돌지 않았다면 왜 이런 일이 생겼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된 삶은 우리에게 지극한 복이고 영광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살 때 이로 인해 감수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무법한 시대에 다른 부족들 사이를 유랑하며 사는 것은 이렇게 목숨을 건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현실은 현실대로 두려운 것이죠.
큰 어려움을 만나면 우선은 현실의 두려움에 압도됩니다.
힘들게 쌓아왔던 경건이 환경과 악의 압박에 너무 쉽게 굴복합니다.
그런 나를 보며 우리는 자신에게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하죠.
사람이 그렇게 대단치 않고 우리 믿음이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닙니다.
이삭을 낳기 바로 전 이런 아브라함의 실수를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의 자격이 완전해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하셨고, 그것을 친히 이루신다는 것이죠.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언약이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먼저 계약을 하셨고 우리의 수 없는 실수와 실패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결국 구원의 자손으로 인도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기아대책이사장을 맡고 있는 손봉0교수가 있습니다.
손교수님을 가까이 보고 지내는 사람들은 이 시대 우리 사회에서 믿을만한 사람을 꼽으라면 손교수님을 꼽겠다고 합니다.
청렴하고 정직하고 올바른 분이죠.
어떤 목사님이 손교수님을 만나서 짖궂게 물었다고 합니다.
교수님도 여자 유혹 받으시나요?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셨다면 무수히 넘어졌을 겁니다’
손교수님이 쓴 책이 있는 데 제목이 ‘별수 없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다 별수 없는 인간들이잖아요?
3. 결국 하나님께서 직접 이 일에 개입하십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아브라함의 힘으로 이게 해결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절망할 때 하나님은 가만 보고 있지 않으십니다.
1) 밤에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임을 밝히고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모르고 한 일이라고 해명합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정직함을 인정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막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죠.
그러나 18절을 보면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온 것에 대해서는 이미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 집안의 태를 닫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일 사라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집안을 다 멸하시겠다고 합니다.
잘못은 아브라함이 했는데 혼나는 건 아비멜렉인 셈이죠.
이것은 불신자들이 아무리 정당하게 행동했다고 죄가 없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다 하나님 앞에서 무죄를 주장하지 않겠습니까?
권력을 이용해 특혜를 누리려는 것도, 하나님 계획에 해를 끼치는 것도 다 심판을 받을 유죄라는 것입니다.
2) 아비멜렉이 용서받을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7절,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고 또 중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중재하는 기도를 해야 아비멜렉의 죄가 용서된다는 것이죠.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마태복음18장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잖아요?
이런 모든 것들이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물론 유일한 중보자, 중재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그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의 완전한 중보사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족해도 주님을 대행하는 중재의 역할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4. 모든 일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잘 완결이 됩니다.
우리의 많고 많은 위기도 그렇게 넘어간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이 상황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피해자 사라의 명예를 복구시켜 줍니다.
사라를 돌려보내며 막대한 재물을 함께 보내죠.
우리가 힘든 일을 겪고 나면 그런 위로를 주시잖아요?
형제들의 위로와 격려의 말이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통장에 돈이 꽂히는 금융 치료도 괜찮죠.
하나님은 우리가 잘했을 때만 미소를 보내시는 게 아닙니다.
힘겹게 버티며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잘하고 있다 격려하는 미소를 보내십니다.
죄를 짓고 난처한 상황에 고민하는 우리를 보시는 눈도 절대로 뾰족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실패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유익을 만들어 주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아비멜렉이 자기 땅에 아브라함에게 영주권을 준 것이죠.
아브라함은 이 블레셋 땅에서 이삭을 낳고, 이삭이 성장하도록 거기서 오래 안전하게 지냅니다.
다만 오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좀 더 붙들지 못한 게 아쉽죠.
성도는 하나님께 강하게 붙을수록 강해집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떨어져 세상 원리에 기댈 때, 세상의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하는 말이 뼈가 있죠.
16절,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자기 생명을 아끼고 사라를 배려하지 않은 것을 꼬집는 것이죠.
우리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길에 버려져 밟힌다고 하셨잖아요?
믿음으로 온전히 사는 게 참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버리고, 사라도 버리는 걸 보았잖아요?
아브라함은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을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의 믿음 만으로가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다시 살리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쳤겠습니까?
무엇을 잃을까 두려우십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우십니까?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우리의 부활과 영생을 믿게 될수록 그 또한 점점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 그렇지 못해도 아브라함을 약속 안에서 지키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지키시고 인도하심을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2026년2월4일 수요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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