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창세기27장 (그래서, 복을 받았나)

남수연 2026. 4. 28. 23:57

오늘 말씀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한 가정이 큰 불행에 빠지게 된 위험한 범죄가 일어나고 있죠.

게다가 이 가정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 있는 메시야의 조상인 가정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너무나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이삭이 장남 에서에게 주려던 축복을 차남인 야곱이 가로챈 내용이죠.

이 일을 주도한 것은 어머니 리브가입니다.

보통 가정에서도 이렇게 모자가 짜고 아버지를 속이는 일은 흔치 않죠.

이 기묘한 사건은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하며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1.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 세운 사람들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인물들이 상식을 벗어난 결함을 보일 때 당황스럽죠.

우리는 구약성경의 인물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에게까지 의구심이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가문의 선택은 메시아를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빌드업 과정입니다.

죄인들의 역사 속에서 차근차근 예수님을 보내실 작업을 해 나가시는 것이죠.

그런데 이 택한 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 외에는 그 당시 가나안 주민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아내를 동생이라 속였던 아브라함이과 이삭을, 오히려 가나안 족장이 책망하는 수치를 당하기까지 합니다.

오늘만 보아도 이 정도면 거의 콩가루 집안 아닙니까?

이 가정에는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던 것일까요?

이삭과 리브가는 두 아들을 각자 편애하고 있었습니다.

부부 사이는 같은 목적을 합의할 수 없을 만큼 멀어져 있습니다.

형제 사이는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 관계가 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개입하고 역사하시는 인생들인데 어떻게 다들 믿음이 아니라 육신과 혈기대로 사는 것일까요?

구약시대 성도들은 우리와 다르다는 걸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서신서의 성도들을 생각하면 우리와 크게 다른 걸 못 느낍니다.

시대와 상관없이 모든 성도들은 같은 예수님을 믿고,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같은 말씀을 기준으로 살기 때문이죠.

그러나 구약의 인물들은 좀 느낌이 다르죠.

구약시대는 우리처럼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시고, 마음과 행위를 감화하시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구약시대에도 계속 역사하셨습니다.

그랬기에 구약성도들이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이 완성되고 성령이 우리와 완전히 연합되신 것과는 다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거듭난 것도 아니고 외적인 감화를 간헐적으로 받은 것입니다.

이삭도 하나님을 믿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복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처럼 성령께서 계속 동행하고 감화하시는 것과는 다른 것이죠.

창세기5장에서는 이미 신약성도들의 완전한 구원을 표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아담 이후 자손들이 몇 살까지 살다 죽었다는 죽음의 기록들이 쭉 나오죠.

그러다 갑자기 한 사람이 툭 튀어 나옵니다.

에녹입니다.

생존자가 나온 것이죠.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감화하셨던 사람이 에녹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다 죽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었습니다.

에녹은 장차 사람이 그럴 수 있게 된다는 걸 예표 하는 특별한 인물입니다.

신약성도의 그림자인 것이죠.

이외 구약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도 차이가 있게 성령님의 감화를 받은 것입니다.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성경을 기록한 예언자들은 특별히 성령께서 강하게 붙드시고 역사한 사람들입니다.

야곱처럼 보통은 기질적인 약점 그대로 인생을 살죠.

구약성도들은 이런 관점으로 보아야 이해가 됩니다.

한편 우리가 성령님의 감화를 충만히 받지 못할 때 이들과 비슷하게 육신으로 살게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2.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냐는 문제입니다.

이삭은 죽을 날이 가까운 것을 알고 아들에게 유언 같은 축복을 하려고 합니다.

사람이 죽을 날을 헤아린다는 것은 좋은 지혜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 이생을 마감할 때가 있다는 걸 생각하며 살아야 하죠.

축구선수 안00씨가 유튜브 수익금 4억을 가난한 조손가정과 축구 꿈나무들을 위해 전액 기부했다고 하더군요.

판자촌에서 할머니 손에 자랄 때 어렵게 축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축구선수가 된 이유가 훈련 뒤에 주는 빵과 우유를 얻어 먹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안00씨가 인터뷰를 할 때 보면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는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당한 연봉 협상에서도 어차피 빈손으로 왔는데, 이 정도면 엄청나다 생각한다고 합니다.

00씨가 젊을 때 한 기독교 프로에 나왔던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왠지 선교사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는 말을 하더군요.

00씨가 2002년 월드컵에서 골을 넣고 했던 반지세레머니는 전설이었죠.

그런데 2006년 월드컵 토고전에서 골을 넣고 기도 세레머니를 못한 데 대한 자책감을 갖고 있더군요.

물론 안00선수가 실제 얼마나 경건한 신자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의식이 있기에 계속 기부를 해 왔고 또 4억의 통 큰 기부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도 빈손으로 왔다 다시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다들 그렇게 돌아가는 데, 땅만 보면 그런 생각이 안 들죠.

돌아갈 천국을 늘 기억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오늘 이삭도 자기가 죽을 날이 가깝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죽을 날을 대비하는 행동이 좀 난감하죠.

에서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사냥감을 요리를 맛있게 해 주면 그걸 먹고 축복하겠다고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시점에서 이삭의 최대 관심사가 자기 입맛이라는 데 좀 당황스럽죠.

자기가 좋아하는 아들만 생각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두 아들이 태중에 있을 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복의 가문의 축복을 편애하는 에서에게 몽땅 부어주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관심 밖인 야곱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요?

나중에 야곱이 죽을 때는 가장 사랑했던 요셉에게만 축복하지 않죠.

열 두 아들 모두를 축복합니다.

에서만 축복하려던 자기 아버지를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이삭이 믿음의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인간적일 수 있을까요?

우리도 믿음보다 감정과 주관을 따를 때가 많으니 이해가 아주 안되는 건 아니죠.

성경에 나오는 이삭의 인생은 모리아산에서 번제가 될 뻔한 사건 외에는 극적인 시련이 별로 없습니다.

이삭은 거부인 아버지 아브라함 밑에서 유복하고 안정되게 살았습니다.

주변 부족들과의 갈등도 있었지만 다른 족장들의 삶에 비하면 순탄한 편이죠.

어쩌면 그런 순탄한 인생이 이삭의 눈을 점점 가렸을지 모르겠습니다.

1절을 보면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라고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눈이 어둡다는 것은 육신의 눈을 포함해서 영적 눈이 어두운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24장에서 이삭이 리브가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이삭이 들에서 묵상하고 있었다고 하죠.

오늘 나이가 든 이삭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어두웠고 영적으로 자기만 아는 편협한 노인이 된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와 하나님의 축복을 잇는 중대한 문제를 두고도 자기 입맛과 애착만 챙기는 노인네가 된 것이죠.

노인과 어른의 차이 아십니까?

자기만 생각하면 노인이고 남을 생각하면 어른이라고 하더군요.

모두 노인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가시길 축복드립니다.

 

3. 리브가의 속임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냐는 문제입니다.

야곱을 편애하던 리브가가 다급해 집니다.

야곱이 아무런 복을 받지 못하게 생긴 것이죠.

게다가 작은 자를 축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리브가는 과감하게 작전에 돌입합니다.

에서가 사냥하러 간 사이 먼저 염소 새끼를 준비해 별식을 만듭니다.

아마 양보다 염소가 들짐승 맛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염소 털로 털이 많은 에서처럼 야곱을 꾸미고 에서의 옷을 입히죠.

그런 어설픈 위장도 분별 못 할 만큼 이삭의 감각이 둔해졌던 것 같습니다.

리브가의 속임수는 분명히 악입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들켜서 저주를 받을까 두려워하자 리브라가 말하죠.

13,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지금 이짓이 저주 받을만한 행위라 생각했었다는 것이죠.

이런 말은 죄짓는 걸 만만히 생각하는 위험천만한 망언입니다.

결과를 생각하면 우리가 말과 행동을 어떻게 할지에 늘 주의해야 합니다.

형 에서는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걸 알고 이성을 잃죠.

아버지가 죽으면 동생을 죽이겠다고 마음에 칼을 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야곱을 밧단아람에 있는 자기 오빠 라반에게로 피신시키며 형의 분노가 가라앉으면 사람을 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보내죠.

그때까지도 에서의 살의는 가라앉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리브가는 이후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을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합니다.

야곱이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올 때 리브가는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리브가가 나섰기에 장자의 축복을 하나님이 원하셨던 야곱이 받게 된 것 아니냐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했지 작은 자가 큰 자의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그냥 작은 아들 야곱을 통해 이뤄질 거란 뜻이죠.

예수님의 족보가 장자들만의 족보가 아닙니다.

다윗만 봐도 팔 형제 중에서 막내였습니다.

하나님이 작은 자를 구원에서 우선하시는 것은 주일 설교와 같은 맥락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 강한 자들이 예수님께 순복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성경에서 에서가 믿음을 보인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또 영적 맏아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하고, 탕자 같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넘어간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사람을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동기가 악하고 죄와 편법을 이용한 리브가의 작전 때문에 야곱이 메시야의 조상이 된 것은 아니죠.

하나님 계획대로 야곱의 혈통에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을 뿐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이뤄질 일인 것이죠.

야곱의 입장에서도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게 현실적으로 아무 도움이 안됐습니다.

객지 생할 20년에 아버지 재산은 다 에서에게 넘어갔잖아요.

모자가 머리를 맞대고 꾸민 이 사건은 가족 누구에게도 복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은 믿음을 빙자한다 해도 거의 나를 계산에 넣은 이기적인 동기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이런 인간적인 모습은 낯설지 않습니다.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자기 성품과 본성대로 삽니다.

성도들 인생의 많은 어려움은 리브가처럼 하나님까지 동원해서 내 목적을 이루려다 생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끝까지 보장하시고 그걸 통해 야곱을 연단하심 처럼 우리를 유익하도록 연단하시는 게 감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