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매일성경 본문은 야곱의 인생 파노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늘어 놓으면 만만치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1.야곱은 20여 년 머물던 밧단아람 외삼촌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심은 야반의 태도에서 시작되었죠.
야곱의 목축이 번창하자 외삼촌 눈에 조카가 곱게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한번 눈에 나면 이전처럼 대해지지 않죠.
그런 불편한 관계가 되면 다시 되돌리기가 힘듭니다.
이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아버지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만일 밧단아람에서 네 명의 아내와 자식들과 행복하기만 했다면 쉽지 않은 결심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형 에서가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우리도 지금 생활이 더 편하면 세상 속에 안주하고 싶잖아요?
사람이든 환경이든 불편해져야 하나님의 뜻이 뭔가를 헤아려보게 되죠.
자의 반 타의 반, 외삼촌집을 떠난 야곱은 두려움의 대상인 형 에서와도 극적 화해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 헤브론으로 향해 가다 세겜에 장막을 칩니다.
긴 여정에 밤이면 장막을 치고, 쉴 마을이 있으면 쉬어도 가야죠.
그런데 34장을 보면 야곱이 땅을 사서 장막을 쳤습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세속의 도시 세겜에 눌러 살겠다는 것입니다.
가시방석이 힘들어 하나님을 따랐는데, 조금이라도 편한 환경이 되면 거기 또 주저앉는 것이죠.
결국 고명딸인 디나가 세겜 족장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에 분개한 오라비 레위와 시므온이 혼인을 빙자한 할례를 하게 하고 세겜 남자들을 다 살해하죠.
야곱 사전에 처음으로 부족 간 전쟁에 휘말리게 된 것입니다.
가족들 숫자로 볼 때 야곱 집안은 세겜 부족 연합에게 전멸할 것입니다.
야곱이 겁나 겁쟁이입니다.
사건이 생길 때마다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게 애처로울 지경입니다.
야곱이 자기와 가족들의 생명과 모은 재산을 지키려고 얼마나 머리를 쓰고 전전긍긍하는지 야곱 일대기에 잘 나타나잖아요?
아버지집이라면 안전하고 평화로웠겠죠.
2.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신 것이 본장입니다.
하나님은 왜 여기 이러고 있냐고 야곱을 혼내지 않으십니다.
그러게 왜 세겜에 주저앉았냐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야곱이 하나님의 현현을 목격했다 해도 야곱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속도는 정말 느렸던 것이죠.
야곱이 굉장히 일이 빠르고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손발이 민첩해도 하나님께로 가는 걸음은 다 더딘 것이 사람입니다.
1) 하나님은 야곱에게 먼저 벧엘로 가라고 하십니다.
벧엘은 야곱이 외삼촌집으로 도망갈 때 돌베개를 베고 자던 곳이죠.
그날 밤 사닥다리 위의 하나님을 보았잖아요?
그날 벧엘에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서원했었죠.
내가 무사히 아버지집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대로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가나안땅에 돌아와서 할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예배하지 않는 곳은 결국 좋은 곳이 되지 않습니다.
야곱은 서원을 지키기 위해 세겜을 떠나 벧엘로 향합니다.
그리고 벧엘에 다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아브라함과 맺었던 그 복의 언약을 다시 야곱과 맺으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인 것이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2) 이후 야곱은 벧엘에서 다시 이동해 고향으로 향합니다.
고향 가는 길이 참 멀고도 길죠.
제가 인공지능에 물어보니 헤브론까지 걸린 시간을 10년 정도로 계산해 주더군요.
보내드린 야곱의 여정 자료를 참고하셔서 야곱의 이동 경로를 머리 속에 한번 정리해 보면 좋겠습니다.
가나안땅의 북동쪽 하란에 외삼촌 라반의 집이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남쪽으로 쭉 내려오는 것입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에서와 화해를 하죠.
그리고 숙곳에서 머물다 세겜으로 갑니다.
세겜을 떠나 오늘 벧엘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벧엘에서 이삭이 사는 헤브론을 향해 가다 중간 베들레헴 에브랏 근처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밧단아람에서 분명히 네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야곱이 왜 이삭에게 곧바로 가지 않고 이렇게 떠돈 것일까요?
아버지와 형에게 복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에 불편함이 있지는 않았을까요?
자기 죄로 아버지집에서 쫒겨났지만 떠돌며 살다보니 다시 속박되고 싶지도 않은 것이죠.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가나안땅 어디선가 내 부족을 크게 이루려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런 축복도 받았잖아요?
하나님의 복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는 것이지 야곱 단독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복의 근원으로 택하신 게 아니죠.
그리스도의 족보는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신앙이 이런 역사적 뿌리, 교회라는 뿌리를 통해 복을 받는 것임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3) 그런데 베들레헴에 가까워 가슴 아픈 사고가 발생하죠.
라헬이 출산을 하다 죽은 것입니다.
16절, 17절에 나와 있죠.
아마도 임신한 몸으로 여행하는 게 무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이 황당한 비극에 이렇게 하나님께 따질만도 하죠.
아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으로 가고 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라헬은 네 명의 아내 중 야곱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입니다.
네 명 중에서 제일 많이 사랑한 게 아니라 유일하게 사랑했습니다.
사랑은 유일한 게 맞을 것입니다.
오늘 짧은 기사에 야곱의 고통으로 무너진 마음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성경은 수많은 시련을 통과한 야곱이 어떻게 이 고난을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줍니다.
라헬은 죽어가며 얼마나 애닯고 슬펐겠습니까?
이 갓난 아들이 누구 젖을 먹고 자라겠어요?
라헬은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향해 마지막 숨을 다해 ‘베노니’라고 부릅니다.
‘나의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두고 떠나야 하는 그 어린 아들은 라헬에게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라헬을 향해 고개를 젓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를 보며 ‘벤야민’이라고 부릅니다.
‘오른 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이 엄마 젖을 먹지 못하고 자라겠지만 그 아들이 슬픔의 아들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이어갈 야곱에게서 태어난 이상 그 아들은 복의 아들입니다.
왼손보다 더 강한 오른 손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약속 안에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을 오른 손의 아들로 키워주실 것입니다.
3. 야곱을 생각해 봅시다.
라헬을 사랑했던 만큼 그 아기를 보는 게 고통스럽지 않았을까요?
아들을 보며 ‘베노니, 너는 슬픔의 아들이구나’ 그렇게 부르고 싶은 사람은 실은 야곱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서 일을 하던 중 만삭의 아내에게 갑자기 진통이 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내를 먼저 병원으로 보내고 급히 차를 운전해 병원으로 가던 중 의료진의 전화가 옵니다.
응급상황이 일어나 아내와 아기 중 한쪽은 포기해야 한다는 거예요.
어느 쪽을 포기하겠냐고 다급히 묻습니다.
그 목사님은 ‘주저 없이 아내를 살려주십시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야곱이 만일 살릴 수 있었다면 라헬을 살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아내를 살리지 못한 야곱에게 살아있는 아들은 베노니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라헬의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라헬이 낳은 아기를 오른 손의 아들로 키울 것을 다짐하는 것이죠.
야곱에게 어느덧 비극적인 일도 소망으로 보는 믿음의 눈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신다는 것을 알면 아무리 고난 중이라도 절망스럽지만은 않습니다.
희한하게도 뭔가 한줄기 소망의 빛을 봅니다.
그 빛이 아주 작아도 어둠 속에 확실한 희망을 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그 빛이 있으면 어떻게든 이기고 살아집니다.
시각장애인인 바리톤 김봉0 성악가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이탈리아 최상위권 음악원인 파르마국립음악원에서 유학 중이었습니다.
유명 음악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비롯해 다수의 상을 받았습니다.
여러 오페라 무대에서도 촉망받는 성악가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기차를 타고 가던 중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병명은 망막박리였습니다.
간단한 수술로 보일 거라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재수술을 한 뒤 결국 두 눈을 다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귀국해서 장애인의 삶을 살게 된 것이죠.
후천적 장애가 더 견디기 힘들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분이 믿음이 각별했던 성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원망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장애를 입은 지 불과 4년도 안 되었으니 아직 좌절감도 크겠죠.
그런데 김봉0 성악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감사하다’였습니다.
어떻게 맹인이 된 자신에 대한 연민도 동정도 억울함도 없겠습니까?
그런데 가식이 아니라 정말 지금 상태에 대해서도 감사하다고 하더군요.
예수님이 빛이 되시니 문제 될 게 없다고 담담하고 힘있게 말합니다.
지금 자신의 처지를 통해 많은 장애인들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힘을 얻게 되는 게 하나님의 뜻이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현재는 장애인 예술단 회원으로, 사회적기업의 지원을 받는 예술가로 훌륭하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종잡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예측대로 된 게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와 하나님으로 확신할 때 장애도 비장애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는 놀라운 믿음의 힘을 이 성악가에게서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 예수님을 향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보다 크십니다.
내 문제보다 훨씬 크십니다.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신뢰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4. 라헬에 대해 좀 생각해 보았습니다.
라헬은 어떤 면에서 야곱 가정에 은근히 분란을 가져온 여인입니다.
야곱의 사랑을 믿고 언니 레아와 늘 경쟁을 벌이죠.
몸종을 내주고 애기낳기 경쟁을 먼저 벌인 것도 라헬입니다.
오라비 라반의 집을 떠날 때 라헬은 그 집에 있던 작은 신상을 훔칩니다.
고대엔 집집마다 드라빔이라는 작은 우상 모형을 두고 섬겼습니다.
지난번 한 여행지를 소개하는 프로에서 홍콩이 나오더군요.
홍콩도 지금까지 집에 작은 우상을 두고 섬기는 가정 신당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홍콩 어느 산에 신들의 묘지라고 불리는 구역이 있더군요.
집에서 섬기던 신들을 함부로 버리자니 두렵잖아요?
그래서 하나 둘 갖다 놓다 보니 기괴한 신들의 묘지가 된 것입니다.
라반이 쫒아와 신상을 찾을 때, 라헬은 나귀 안장 밑에 그 드라빔을 숨기고 막 생리가 시작되어 못 내린다고 거짓말을 하죠.
그 당시 개념으로라면 지금 라헬은 여호와의 땅으로 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밧단아람의 우상신을 데려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야곱이 이렇게 말합니다.
31장32절,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어쩌면 야곱이 모르고 했던 그 말이 그대로 이뤄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가나안땅으로 돌아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야곱의 생애입니다.
딱 이 시점에서 라헬이 죽은 것이 의미가 있어 보이죠.
라헬은 야곱에게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애착 관계를 상징할 것입니다.
라헬의 죽음은 그런 관계를 뛰어넘어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할 야곱의 변화를 암시하는 것일지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모든 일이 퍼즐 조각처럼 어떤 원인과 목적 때문으로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라헬에게서 우리에게도 버리지 못한 우상을 품은 채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는지를 돌아보길 원합니다.
오늘 야곱에게서 처럼 사람의 인생과 생로병사는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종잡을 수 없는 인생길에서 곤두박질치지 않으려면 우리 믿음을 스스로 견고히 해야 합니다.
야곱처럼 지나온 날들에 함께 해 주시고 건져주셨던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계십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매일 굳게 지키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점점 더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쌓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26년5월6일 주는나의산성교회 수요기도회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창세기27장 (그래서, 복을 받았나) (1) | 2026.04.28 |
|---|---|
| 창세기20장 (아브라함의 두려움) (0) | 2026.02.04 |
| 아브라함의 웃음 (창세기17장15절-22절) (1) | 2026.01.31 |
| 노아의 예배 (창세기7장15절-22절) (1) | 2026.01.22 |
|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세기1장26절-28절) (1) | 2026.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