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9장1절-7절 (누구의 죄도 아니다)

남수연 2026. 3. 5. 21:08

1.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성전으로 가시다 한 맹인을 보셨습니다.

순례객들로 북적이는 성전 주변엔 구걸하는 앉은뱅이, 맹인, 불구자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맹인을 바라보시는 눈길에서 각별함을 느낀 제자들이 그제야 관심 있게 맹인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이 누군가를 바라보시는 것과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죠.

예수님은 불쌍한 우리를 돕기 위해 보십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 해도 본능적으로 상대가 내게 이익이 될 점을 생각하죠.

예수님은 맹인의 불쌍한 인생을 돕기 위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보는 눈은 완전 다르죠.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2,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은 맹인의 장애가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자신들의 의를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불행한 사람을 보며 동정심을 갖기도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내게 그런 불행이 오지 않은 것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장애인, 가난한 사람, 난민, 이민자,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참 곱지 못하죠.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기차 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한 한 여성 사역자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목회하던 교회에 당시 대학 입시생이 열두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 이 자매만 유일하게 총신대에 합격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딸의 합격을 축하하며 새 구두를 사 주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 사이에서 목사님이 딸만 위해 기도했나 보다라는 말이 들리는 거예요.

성도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딸을 잠시 시골 할머니댁으로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입학식이 가까워서 자매는 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옵니다.

새벽에 서울역에 도착 했을 때 눈이 오고 있었습니다.

어둑한 승강장에 내리던 자매의 새 구두가 쌓인 눈에 삐끗하며 승강장과 열차 사이 틈으로 자매가 빠졌고 열차는 그걸 모른 채 출발했습니다.

승무원이 뭔가 딸려 가는 걸 보고 다급히 신호를 보내 열차가 정지했지만 80미터 정도 끌려간 상태였습니다.

이 사고로 결국 허벅지 아래 두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자매는 나중에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았습니다.

두 아이 모두 말을 하기 시작하며 엄마는 왜 다리가 없어?’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두 다리가 있던 때 사진을 보여주고 기차 사고로 다리를 절단하게 된 걸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장애를 잘 이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엄마가 다리가 없는 게 좀 창피하긴 해

사실 장애를 가진 게 창피한 것은 아니잖아요?

남에게 죄짓고 악하게 사는 게 창피한 거지 장애는 그럴 이유가 없죠.

그런데 사람들의 나쁜 시선이 장애를 흉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두 다리를 절단한 자매는 의족을 끼고 총신대 계단을 오르내리며 신학대학을 마치고 신대원까지 졸업했습니다.

이게 창피할 일인가요?

장애의 고통을 그렇게 강인하게 이겨낸 게 얼마나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일입니까?

인종차별도 그렇죠.

우리나라 이주민 노동자들이 차별 많이 받습니다.

그 사람들이 고국에선 다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었잖아요?

언어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아무 기반도 없이 새 삶을 시작한다는 것만 보아도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눈에 아직도 차별이라는 들보가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도 벌써 이 맹인을 무시하는 태도가 드러나죠.

만일 정상인이라면 이런 말을 대 놓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맹인은 눈만 안 보이는 것이지 말소리도 못 듣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귀는 일반인들보다 더 예민합니다.

제자들이 자기의 불행한 처지를 두고 이런 말을 주고 받을 때 맹인의 마음이 얼마나 원통했겠습니까?

태어나면서 이렇게 된 게 내 죄라구?

내가 모태에서 무슨 죄를 지었다구.

그럼 내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그 벌을 왜 내가 받아야 해?

제자들의 말을 들으며 그렇게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3,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주님은 먼저 죄인으로 낙인찍혀 살아 온 맹인의 누명을 벗겨주십니다.

그게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사람이 불행을 당하는 게 모두 그 사람의 죄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불행은 개인의 죄가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재난을 당한 사람 대부분은 열심히 살다가 인생에 봉변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맹인처럼 때로 해석되지 않는 고난을 만납니다.

질병, 재난, 빈곤, 고독, 실직, 대인관계의 고충.

예수님은 오늘 맹인을 보시던 그 눈으로 이런 고난 중에 있는 우리를 보십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처럼 재난을 만난다 해도 반드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2) 성도들은 그 불행 중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심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말씀은 사람에게 아무 고난과 근심이 없으면 하나님이 나타나시기 힘들다는 뜻도 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은 찾는 이에게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생 아무 환난도 없이 호강만 하고 산다면 누가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성공만 한 사람을 통해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건 세상의 모든 기복주의 종교의 신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히려 약함 속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이겨내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증거되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때만 그걸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다리를 절단한 그 사역자가 불같은 시련을 이겨내고 평안히 간증하는 그 모습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난 중에 있을 때 주님을 의지해 잘 이겨냄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우리를 통해 나타내지길 축복드립니다.

 

3. 예수님은 이렇게 맹인을 구원하시는 일이 우리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맹인을 고치시고 또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실 분은 예수님이시죠.

그런데 주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요즘 같은 시대는 세속의 파도가 모두를 삼킬 듯이 밀려 오는 것 같습니다.

내 믿음을 버티는 것만도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그러나 먼저 눈을 뜬 성도들은 눈 먼 사람의 손을 붙잡고 예수님께로 데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오늘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잖아요?

우리의 손이 누군가를 일으켜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때가 아직 낮이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다고 하시죠.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살아있는 날은 모두 낮입니다.

절망 같은 상황처럼 보여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에 밤이 아니라 낮입니다.

낮 동안 우리는 묵묵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던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지막 숨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 나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4.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고쳐주십니다.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침으로 진흙을 이겨 발라주신 것이 좀 꺼려지십니까?

요한 사도는 왜 굳이 이걸 기록했을까요?

옛날 어머니들은 급하면 가제 수건에 침을 묻혀 꾀죄죄한 자식들 얼굴을 대충 닦아 주기도 했죠.

모기 물렸을 때 엄마가 침 발라 주었잖아요?

부모와 자식이기에 그게 허용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제 침을 자식이 아니라면 다른 아무에게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바닥에 앉아 있던 맹인에게 다가가 그 옆에 쭈그리고 앉으십니다.

그리고 땅바닥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맹인의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맹인의 얼굴을 감싸고 진흙을 발라주는 예수님 모습을 생각하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듭니다.

예수님은 소경 바디매오를 말씀만으로 눈뜨게 하셨습니다.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신 것은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진흙을 발라서 눈을 고쳐주신 것에 특별한 의미를 담으셨다는 것이죠.

고대 문헌에는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기록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분은 진흙으로 맹인의 눈을 만드셨다

창세기에서 처음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던 것이 생각나죠.

이레니우스란 신학자는 이 부분을 이렇게 주석해 놓았습니다.

창조자인 말씀, 그 분께서 태 속에서 만들기를 빠트렸던 것을 공중 앞에서 보충하셨다

너무 절묘한 해석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다시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하니 뭔가 느낌이 다르죠.

우리에게도 없이 태어났던 영의 눈을 재창조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이 본문을 묵상하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나도 예수님이 맹인이었던 눈을 뜨게 해 주셨는 데.

모두 그렇게 눈 뜬 고백이 있으시길 축복드립니다.

 

5. 왜 예수님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을까요?

본래 예루살렘 성 안에는 식수가 될 샘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수원은 성 밖에 있는 기혼샘입니다.

이 물이 성곽 밖의 긴 도랑을 타고 흘러와서 성안에 있는 이 실로암 저수조에 저장됩니다.

실로암 물은 예루살렘 주민의 생명수였습니다.

본문7절을 보면 실로암의 뜻이 보내심을 받았다라고 굳이 밝히죠.

실로암은 근원인 기혼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신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뜻이죠.

맹인이 씻고 보게 된 이 실로암 물도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맹인을 고쳐주신 표적은 우리의 감겼던 눈이 예수님께로 갈 때 떠져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상징입니다.

뒤에 보면 맹인이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정말 영의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고 자신의 구주되심을 고백합니다.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우리도 모두 그렇게 고백한 사람들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실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처럼 우리 육체의 병든 곳도 고쳐주시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며 살아가게 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026년3월4일 주는나의산성교회 수요기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