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던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믿음의 두 기둥입니다.
이것이 잘 세워져 있지 않으면 흔들리는 집처럼 믿음이 늘 불안합니다.
부활에 대해서 막연히 알면 내 신앙이 막연해집니다.
인생의 결말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니 사는 것도 불안하죠.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부활하는 걸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당연히 싫어하죠.
죽음 뒤의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으면 끝인 게 더 낫잖아요?
무엇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 있다면 하나님도 계시다는 거잖아요?
부활이 없어야 하나님도 없고, 지금을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으니 오늘 부활절도 짐짓 모른 척 하는 것이죠.
미국에는 무신론자 단체가 하나님이 없다는 걸 조직적으로 광고합니다.
전에 ‘부활은 없다’라는 광고를 단 버스가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걸 보는 사람들은 왠지 죄책감도 없어지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죠.
사람의 본심은 하나님이 없는 걸 다 원합니다.
전에 한 목사님이 간증을 하는 데 교회를 잘 다니던 딸이 예수님을 안 믿겠다고 선언하고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아무리 설득해도, 혼내도, 기도해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 목사님 말이 그런 딸을 보면서 솔직히 하나님이 안 계신 게 진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계시면 내 딸이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게 되잖아요?
이런 본성을 생각할 때 정말 우리가 믿음을 붙들고 사는 게 기적인 것입니다.
부활은 없다라는 광고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방종하도록 미혹했겠습니까?
그걸 보다 못한 한 성도가 개인으로 버스에 이렇게 광고를 달았습니다.
‘만일 있다면?’
‘부활은 없다!’ 버스가 지나가고 ‘만일 있다면?’ 버스가 따라간다면 사람들 마음은 다시 복잡해 지는 것이죠.
오늘 바울사도는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이 아름다운 휴일에 왜 여기에 앉아 있겠습니까?
죽으면 끝이니 먹고 마시자, 그렇게 사는 게 더 나을지 모르죠.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다 믿을까요?
자기들이 부활할 것은 믿을까요?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보았다면 제자들처럼 믿었겠죠.
그러나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보았던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잘 생각하고 믿어야 합니다.
오늘 부활절에 우리 믿음을 지탱하는 기둥인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신앙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반복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정상에 오른 운동선수나 예술가들도 끊임없이 반복하잖아요?
신앙도 끊임없이 반복하지 않으면 잡초보다 더 끈질긴 본성이 마음 밭을 금세 망칩니다.
성령께서 오늘 부활의 진리를 나누는 가운데 불신의 잡초들은 뽑히고 부활신앙이 다시 건강하게 자라게 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세 가지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몇 가지 쟁점을 알아보구요.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부활 생명을 가진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쟁점에 대해서입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이 과연 사실일까 하는 것입니다.
본문 고린도전서는 전에 여러 달 설교했던 성경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상당히 문제가 많은 교회였죠.
바울사도가 마음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다루는 것은 고린도교회의 부활 신앙의 문제점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부활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죠.
고린도교회의 많은 문제점은 실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끝이라고 믿는다면 지금 예수님 말씀대로 애쓰며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각자의 좌우명대로 살면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고린도교회에 믿음에서 탈선한 심각한 문제들이 생길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신자들은 부활을 잘 믿고 있을까요?
작년에 한국리서치에서 실시한 종교 인식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 신자의 66%가 부활을 믿는다고 답했습니다.
천주교는 33%가 믿는다고 답했습니다.
개신교 신자들 중에도 열 명 중 서너 명은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죠.
믿는다는 신자 중에는 부활을 교리로 인정하는 수준에 머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부활을 교리로 인정하는 수준과 진짜 부활 신앙을 갖고 사는 것은 다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목회했던 사람입니다.
부활을 안 믿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소식이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바울사도는 이 문제에 대해 우물쭈물 에둘러 말하지 않고 단호히 말합니다.
너희가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죠.
2절,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죠.
바울이 전한 것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3,4절에 이어지죠.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사도가 이걸 전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는 근거를 대죠.
부활하신 예수님을 베드로와 열두 제자와 오백여 형제가 만났다는 것입니다.
나도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본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부활이 가짜겠냐는 것이죠.
그중에 태반이나 살아있는데 어찌 거짓말이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둘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조작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다 둘 중 하나겠죠.
부활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그런 지점은 없으니까요.
우리가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은 본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들이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불사해야 하는 전파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주님의 십자가 근처도 못 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유대인들이 모인 데서 아주 당당히 예수님을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겐 신성모독입니다.
대놓고 너희가 메시야를 죽였다고 자극하는 것입니다.
유대교 율법에 의하면 사방에서 돌이 날라 와 맞아 죽을 말을 한 것입니다.
스데반집사가 그렇게 죽었잖아요?
제자 중에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사도도 부활을 증거하다 헤롯왕에게 잡혀 사도들 중에서 제일 먼저 순교합니다.
보지도 못한 것, 사실도 아닌 조작한 신념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잖아요?
이들이 예수님의 도덕적인 가르침과 인류애를 가르치다 죽은 게 아닙니다.
부활을 전하다 죽은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따지면 따질수록 분명한 사실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들은 너무 많습니다.
해마다 부활절 때 들은 증거들을 얼마나 기억하며 믿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믿는다’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남은 설득하지 못해도 적어도 나 자신은 설득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신자의 입장에서의 의문점은 예수님이 왜 부활하셨냐는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관심을 가질 때엔 대체 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지 십자가만큼이나 이해가 안됩니다.
부활하셔서 기쁘다?
정말 기쁘십니까?
믿음이 생긴 다음에도 믿기는 하지만 따져보면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죠.
예수님이 죽으시고 그냥 하늘로 가지 않고 왜 부활해서 세상에 다시 보이셨냐는 것이죠.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주님이 누구신지를 무엇으로 증명하겠습니까?
그냥 부조리와 악에 대항하다 죽은 한 의로운 선지자의 죽음 밖에 안됩니다.
구약성경 속 선지자들도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하기도 했고, 대부분 고난받고 죽었잖아요?
예수님이 죽고 끝이셨다면, 한 의로운 선지자의 억울한 죽음이겠지만, 실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사망의 길을 간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말씀하죠.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러니까 사람이 죽는 것은 죄인이라는 증거인 것이죠.
성경은 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니까 안 죽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인간 역사상 유일하게 부활하셨다는 것은, 주님만 죄인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주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 속죄하는 죽음이라는 게 성립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이렇게 죄가 없으시다는 건 또 무얼 증명합니까?
주님은 모든 사람들처럼 아담의 혈통에서 나온 존재가 아니시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또 입증되는 것이죠.
-이로써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저절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달려 있는 조형물이 아니시라는 게 얼마나 기쁩니까?
우리가 가상의 신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부활이 기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정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인 것은 증인들이 있고, 증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전한 것으로 볼 때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또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주님이 반드시 부활하셔야 생전에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아들이고 죄가 없으시다는 게 증명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값을 대신 받으신 속죄가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잘 이해가 되셨으면 잘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2.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이 어떤 관련이 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부활하시는 게 당연한 것이죠.
그런데 주님의 부활이 나와 어떻게 관련이 생기냐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증거입니다.
16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이 말씀에는 성도들의 부활만이 아니라 죄인들의 부활도 포함됩니다.
죄인들도 자신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부활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요한복음 5장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 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속죄하신 게 아닙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이 여전히 사람이셨죠.
예수님은 성육신하실 때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되어버리신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이셨던 때로 돌아가실 수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천국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신이시며 인간이신 신비로운 형상으로 존재하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사람은 죽어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처럼 모두 다 부활시키십니다.
바울사도가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활하지 않을 거라면 사람이신 예수님도 부활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사람이 죽은 다음에 다시 부활하지 않는다면, 사람이신 예수님도 부활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이죠.
특히 예수님의 영광스런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의 예표입니다.
2)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는 반드시 부활합니다.
그런데 악인의 부활이 아니라 의인의 부활이 되어야 하잖아요?
어떻게 의인으로 부활할 수가 있습니까?
바울사도가 처음에 말씀했죠.
내가 전한 부활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도식을 21절, 22절에서 명료하게 설명해 줍니다.
21절,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너무나 선명한 도식이잖아요?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왔고 모든 사람은 아담의 혈통을 따라 죄인으로 태어나 사망에 이릅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히 심판을 받는 사망입니다.
또 다른 아담인 예수님은 정반대가 되는 것이죠.
예수님의 순종과 대속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영원한 삶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타락했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롭게 된다’
아주 쉽죠?
한 사람으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다면 한 사람으로 인해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 공평한 것이죠.
2절,3절,4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니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사도들이 목숨을 내걸고 전한 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부활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셔서 부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3.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물론 우리가 죽은 다음에 천국을 누릴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게 합니다.
그러나 부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기능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부활의 생명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감을 나타내죠.
부활의 생명이 얼마나 강력하겠습니까?
1)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이신 부활의 영, 성령이 계시면 영원한 부활을 목적으로 살아집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천국을 목적으로 사는 지, 완전히 이 세상을 목적으로 사는 지를 보면 내 안에 부활의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어느 정도 알 것입니다.
그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과 초대교회의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부활을 깨닫게 되면 삶의 목적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부활을 믿고 부활생명을 받은 우리들은 그에 비해 너무 부끄럽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이렇게 명확한 데도 왜 많은 신자들이 멀찍이 주님을 따를까요?
호세아서에 보면 이스라엘을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책망하십니다.
뒤집지 않은 전병이란 표현이 절묘하죠.
아래는 타서 못 먹고 위는 안 익어서 못 먹잖아요?
하나님께 마음을 못 정하고 여기저기 기웃대는 이스라엘을 꼭 찝은 말씀입니다.
적당히 믿고 적당히 세속적인 신자들의 믿음이 그렇다는 것이죠.
결국은 두 가지 모두에서 맛없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제 하나님이 없다, 부활도 없다, 그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지구촌 교회 담임목사였던 분이 4대째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교회 안에서 자라다시피 했습니다.
예배와 신앙생활이 숨을 쉬듯 자연스러웠죠.
그런데 고3때 신앙의 사춘기를 혹독하게 겪게 됩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다 보니 하나님이 없다고 나름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3개월 동안 우울증에 걸려 매일 울었다고 합니다.
부활이 없고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게 너무 허무했습니다.
내가 착하게 사는 게 무슨 의미일까?
누가 나를 판단해 줄까?
사람들이 나름 도덕적으로 살고 선하게 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삶을 평가해 줄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계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창조주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밥만 먹고 만족하게 살지 못합니다.
전도서3장1절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잠시 사는 이 땅에서도 좀 더 철저히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법을 따르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또 부활 생명은 죽음을 이길 능력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성령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실 뿐 아니라 현재 사망의 권력에 속한 질병, 궁핍, 죄, 불화, 저주 같은 것들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죠.
어떤 목사님이 아이티 난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도미니카공화국으로 갔습니다.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는 국경이 맞닿아 있습니다.
전에 아이티에 큰 지진이 나서 20만명 이상 사망한 적도 있죠.
경제수준이 최하위에 속한 나라에 지진도 자주 발생합니다.
그러다보니 2백만 명 이상의 아이티 난민들이 도미니카로 넘어가서 살고 있습니다.
아이티난민들은 도미니카공화국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예처럼 삽니다.
일하다 맞아 죽어도 시신도 수습해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농장에서 만든 설탕을 시신 위에 뿌려 놓으면 하루도 안되서 짐승들이 다 먹어 치우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사는 사람들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아이들은 태어나 거지처럼 살다 성인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런 아이들을 모아 놓고 복음을 전하려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아이티 아이들에게 전할 것은 부활의 복음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스럽게 부활할 수 있다.
아이들의 눈이 놀랍게도 반짝였다고 합니다.
그들의 일생은 사탕수수밭이 전부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부활의 생명이 그 마음에 들어온다면 똑같은 사탕수수밭 일생이 아닙니다.
이미 쓰레기매립지 마을에 세워진 교회에는 아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우리가 어떤 형편에 놓였든 그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강력한 힘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활의 능력을 작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은 또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사망의 그늘이 다가온다 해도 두려워하지 마시고 주님처럼 잘 인내하여 반드시 부활의 아침을 맞으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사도가 이렇게 부활에 대한 종지부를 찍습니다.
58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는 다시 부활할 것이고 우리의 모든 선한 일들도 주님께서 평가해 주실 것입니다.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잘 사는 것도 못 사는 것도, 건강한 것도 아픈 것도, 모두 다 잠깐 살다 가는 인생의 사탕수수밭일 뿐입니다.
부활의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부활의 생명을 갖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꿋꿋이 살아간다면 사망도 절망도 뚫고 매일 부활하는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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