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 셋째 날 (로마서8장31절-39절)

남수연 2012. 8. 4. 01:00

 

만일 거대한 쓰나미가 우리 집을 향해 밀려오고 있다면 성도님들은 무엇을 제일 먼저 찾으시겠습니까?

분초를 다투는 상황이라면 지갑을 손에 들고 뛰는 게 아니라 집 안에 있는 우리 아이들, 우리 가족의 손을 먼저 붙잡고 뛰어나가지 않겠습니까?일본 동북부 쓰나미가 밀려가고 폐허가 된 마을에서 자신의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쓰나미가 몰려올 때 분명 아이의 손을 꽉 붙잡고 뛰었는 데 거센 물결에 순간 잡았던 아이의 손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막을 길 없는 쓰나미의 세력은 엄마와 딸의 손을 영원히 떼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잡은 하나님의 손을 떼어 놓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사랑의 손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절대 놓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천국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언제나 뚜렷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고 말씀을 들을 때는 하나님이 계신 듯 하다가 일상생활과 직장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하루를 보내다보면 하나님이 멀찍이 물러나 계신 듯 막연해지는 것이 성도들의 보편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아버지를 한 번도 본적이 없지 않습니까?

2천년 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에 대한 확신은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기 전까지 잘 믿어지지 않는 게 정상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로 확고한 구원과 내세를 확신했다 해도 때때로 시험에 들어 잘 믿어지던 것들도 의구심이 들게도 합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겁이 덜컥 납니다.

과연 내가 끝까지 이 믿음을 지키며 인생을 완주할 수 있을까?

혹시 어느 순간 안 믿어져서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보이지 않는 믿음과 소망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며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으로 평생 살아가기엔 우리가 참 의심이 많은 자들이란 것이죠.

또 이런 마음은 우리를 나약하게 하고 두려움을 주기 위한 악한 영이 수시로 우리를 미혹하는 생각을 넣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확신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잡았던 우리 손이 고난과 시련 속에 힘없이 풀린다 해도 더 강하게 잡으신 하나님의 손은 결코 우리를 놓치지 않으시는 줄 믿습니다.

이 험난한 인생길을 완주하고 천국문에 이르기 까지 우리를 붙들고 2인3각으로 뛰어주실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도대체 어느 정도 인지 정말 안심해도 좋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통해 기록 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실을 믿음으로 감사하게 받아 들일 때 성령께서 또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해 하나님의 사랑을 잔잔히 느끼게 해주시길 축원드립니다.

수련회 때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진리들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끔찍이도 위하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어느정도 우리를 위하시냐하면 첫째는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실 만큼 위하신다는 말입니다.

32절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준다는 게 참 좋지요.

그런데 진짜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요즘 젊은이들의 결혼풍속도를 보면 우리 때하고 그 기준이 많이 달라진 것을 보게 되죠.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최근 미국에서는 결혼 여부로 계층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대로 교육받고 잘사는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을 낳아서 키우지만 학력이 낮고 수입이 적은 사람들은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미국에서 출생하는 아이 10명중 4명은 결혼하지 않은 부모사이에서 태어난다고 합니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게 결혼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줄만한 능력을 가진 상대를 선택하는 게 결혼이 된 셈이죠.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하는 만둣집 딸과 부잣집 외동아들이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등장하는 전설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가족조차도 서로 피곤한 자기를 좀 위해달라고 신경전을 벌이기가 쉽습니다.

직장동료이건 친구건 자기가 받은 만큼 참 정확히 계산해서 주고 받는 것이 지 절대 내가 베푼 것 이상 나를 위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깊은 곳엔 누군가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좀 위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가정이 때로 상처를 입는 것은 우리 가족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 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위해 줄 사랑은 그래도 부모님 사랑이지만 부모의 사랑 역시 죄로 인해 자식에게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이 공허하고 바람에 휩쓸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낙엽더미 같은 이유도 이런 내게 목숨 건 사랑하나가 없다는 슬픔 때문은 아닐지요.

오히려 책임져야 하고 돌봐줘야만 하는 사랑의 의무만 있을 때 우리 어깨는 무겁고 심령의 샘은 바짝 말라버린 것을 발견하게 되죠.

그러나 외로워 마시고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기록한 바울사도는 결혼도 못했고 앞 날이 창창한 유대교 교수직도 포기했습니다.

가진 재산도 다 주를 위해 쓰고 간절히 소망하는 스페인 선교를 위해 편지말미에 아쉬운 소리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굶으면 굶는대로 먹으면 먹는대로 하루 하루를 살지만 이미 모든 것에 자족하는 비결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가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은 이유는 저 천국의 삼층천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34절에 기록한 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고 자기를 위해 항상 중보하고 계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도 하나님도 예수님도 보지 못했지만 바울사도의 간증을 믿는 것입니다.

성도들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 그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참 희한한 종교입니다.

창조주가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유일한 자기 아들을 내주었다고 주장합니다.

아이가 아플 때 내가 대신 아프면 좋겠고 아이가 죽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죽겠다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별 가치도 없어 보이는 죄인들을 위해 하늘의 영광을 누리던 성자하나님을 대신 죽게 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게 사실이라면 만일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위하신다면 도대체 문제될 게 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을 육신의 부모의 사랑으로 많이 비유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 이상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다는 게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고 살아 온 세월 중에 내가 잘못할 때 마다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시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면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아무리 부모가 우리를 사랑한다 해도 자식들은 내가 행동을 잘못했을 때 부모님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자랍니다.

유일하게 나를 진짜 사랑하는 부모님 마저 나를 밀어내면 어떻게 하냐는 불안감이 인간 내면의 깊은 트라우마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 49장15절 말씀인 것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인간은 하나님을 꼭 자기들 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 내는 종교의 신들을 보면 꼭 인간이 하는 짓과 똑같은 짓을 하게 만들죠.

자기들 처럼 옹졸하고 시기하고 변덕스러운 신들을 만들어 냅니다.

방탕하기 짝이 없고 힘없는 인간들을 괴롭혀 희생을 강요하는 게 인간이 만든 자기들과 꼭 닮은 신들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하고 고귀하심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고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견줄 수 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의 한계처럼 하나님의 사랑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애초에 그랬다면 독생자를 우리 위해 주실 수도 없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을 때 예수님을 주셨습니까?

아니잖아요,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어 하나님을 향해 못된 짓을 하고 있을 때 그 때 그 아들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우선인 것입니다.

죽어도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는 만일 이 세상에 나 하나만 죄인이라 할지라도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온 인류를 다 구하시겠다는 마음이라면 십자가를 혹 지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나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은 기꺼이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러 나서는 목자의 비유인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나 일 대 일의 사건입니다.

우리나라 천만 기독교인에 내가 묻혀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이 땅에 유일한 자식처럼 일 대 일로 상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셨지 않습니까?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은 나와 일 대 일로 동행해 주시고 계십니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31절에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고 묻습니다.

대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이 땅에서 우리를 대적하는 것들이 오히려 많다는 뜻입니다.

31절은 대적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33절에서 고발하는 자를 이야기 합니다.

35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고 하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36절에 주를 위한 우리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세력을 이야기 합니다.

38절과 39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려는 무수한 세력과 권세가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에 우리의 적수가 안된다는 뜻입니다.

 

 

두 번 째는 우리를 위하시기에 아들만 주시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재벌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겠다고 유언장을 작성했다고 살아생전 한 푼도 주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상대방의 결핍을 두고 볼 수 없는 것 인줄 믿습니다.

저도 우리 딸이 용돈 다 떨어졌을텐 데 생각하면 얘가 어디 나가도 마음이 조마조마 합니다.

자식이 스마트폰 필요하다면 역정을 냈던 부모라도 휴대폰가게 앞을 기웃거리며 도대체 스마트폰이 무언가 마음이 쓰이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자식들은 말만하면 필요한 것 다 얻어내지 않습니까?

한 수 더 떠서 판매원이 더 좋은 것이라고 권하면 쏠깃해서 사왔다가 핀잔들어본 경험이 자식 키우며 겪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11절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부모 마음이 항상 자식이 부족한 게 뭔 지 마음이 거기 가 있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궁핍한 가운데 구하는 것 절대 모른 척 하실 수 없으십니다.

웬만큼 인내가 필요한 교육을 시키려는 목적이 아닌 경우 우리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주고 싶은 게 하나님 아버지 마음입니다.

마태복음6장8절은 말씀합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으면 끈기 있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대0연합교회 김0민목사님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주님을 위해 살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유학 가는 남편을 따라 김목사님을 미국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 도저히 둘이 같이 공부할 형편이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날 하나님 앞에 울면서 공부시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데 한 백인 노신사가 운동을 하다 비를 좀 피할 수 있냐고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울다가 밖으로 나가서 문을 열어주니 노인이 왜 우냐고 묻는 것입니다.

영어도 잘 안되는 김목사님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스쿨, 스쿨, 스쿨하고 울면서 말했는 데 노인이 마음이 통했는지 유심히 보더니 내일 자기를 찾아오라고 명암을 주는 것입니다.

다음 날 노인을 찾아가보니 흰봉투를 하나 내미는 데 4년 치 등록금과 입학허가서였습니다.

그 노인이 바로 간절히 가고 싶어 하던 대학의 총장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간절히 기도하는 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보내서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자식이 마음에 애절하고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이 있으면 해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줄 믿습니다.

믿음을 갖고 소망하는 것을 끝까지 기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을 가장 기쁨으로 여겨야 할 줄 믿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최상의 선물 예수님 자신을 우리가 가장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이 우선인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어리석은지 값어치를 제대로 매기지 못하고 부수적인 것만 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과 그 사랑을 구하지 않고는 다른 선물이 하나님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귀한 것을 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도 명예도 권력도 배우자도 다 결코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죠.

우리가 예수님 자신을 먼저 구할 때 주님과 함께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함께 주시는 줄 믿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나의 주님을 묵상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해 중재하시는 주님을 먼저 구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마태복음 6장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부족해도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그 기쁨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동일한 간증입니다.

직장도 사업도 장래 진로도 결혼도 돈도 다 중요합니다.

모두 다 주 안에서 응답받으시길 축복드립니다.

다만 먼저 우리 영혼이 만족과 기쁨을 얻고 행복을 얻기 위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길 구하십시오.

그래서 성경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구하노라 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나를 위해 보내주신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날마다 묵상하면 그 은혜도 충만히 주실 것이고 구하는 모든 은사와 필요한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멘.

 

세 번째는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당하고 과분하고 편파적이라고 끊임없이 고소하는 인물이 있다고 33절은 기록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고소하고 정죄하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뛰어난 피조물인 천사장이었지만 그 본분을 벗어나 하나님과 견줄 생각을 한 타락한 천사입니다.

첫 번 째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교활하고 지능적인 사탄은 인간을 인질로 삼고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는 사악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심판 날 까지 주님의 특별난 섭리 아래 일부 활동을 묵인하고 계십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들의 잘못을 고발하고 참소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자격, 하나님의 자녀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 앞에서 비난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험담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자기의 불법적인 행실도 정당화시키고 묻어가는 것이죠.

아무튼 사탄의 교활한 수작은 하나님과 성도들의 사랑과 신뢰를 무너뜨리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정죄와 고발이 무용지물이 된 것은 34절에 우리를 위해 이미 모든 죄의 형벌을 다 치루신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35절에서 바울사도는 어떤 환란에도 끊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환란도 곤고나 박해도 기근이나 헐벗고 위험을 다하고 칼의 위협도 그의 입에서 마치 노래라도 하듯 흘러나오고 있죠.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은 변경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마치 도살할 양과 같이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우리가 넉넉히 이기고 믿음을 지키는 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때문입니다.

감비아에 계신 이재0환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감비아가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합니다.

사람들도 선량하고 착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감비아 사람들이 선교사님의 양말과 옷을 다 훔쳐가고 선교사님은 늘 해충들과 병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선교사님은 늘 감비아에 있기를 원합니다. 한국에 있다가도 한국은 불편하다며 감비아로 가기를 원합니다.

이선교사의 마음에 주신 성령의 그 사랑이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감비아사람들과 다름없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내시고 우리의 손을 붙드셨습니다.

어떤 역경도 환란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을 수 없음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