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5장1절-11절)

남수연 2013. 5. 6. 19:02

오늘 본문1절을 보면 의롭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자신을 바라볼 때 의롭다는 말이 어울리기나 합니까?

만일 남들이 나를 보고 의롭다고 한다면 차라리 화를 내고 싶은 심정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오늘 하나님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판결하십니다.

크고 작은 죄악이 여전히 존재하는 데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모든 인간은 창조 된 목적대로 일생을 살았는가 판결을 받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며 섬기고 살았는가?

양심의 법, 사랑의 법을 따라 살았는가?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법을 누구나 깨달을 수 있도록 만물과 사람의 양심 속에 심어 놓으셨기 때문에 아무도 몰랐다고 핑계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수많은 천사들과 증인들로 둘러싸인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의 일생을 셈할 때 나의 모든 불법과 은밀한 죄가 다 드러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눈물 나게 고마운 것이 우리가 의롭다는 판결을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헬라어 원어는 법정용어입니다.

죄의 값이 청산되었다. 무죄다.

공의로운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에게 무죄 판결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받을 형벌의 값을 대신 치러줬다는 것입니다.

보석금을 냈다는 뜻이죠.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 각자의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 형틀에서.

이 사실을 믿을 때 놀랍게도 우리가 의롭다는 판결을 받고 의로운 자가 되버린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게 바로 구원의 핵심인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제가 아무리 잘 설명해도 구원은 우리의 합리성이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냥 어느 날 이해가 안되는 그 사실이 믿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해도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고 아무것도 몰라도 그냥 믿어지는 사람이 있다는 게 구원의 신비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아무리 가르친다고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어찌보면 성경말씀은 이미 믿게 된 사람에게만 이해가 된다는 것이죠.

어떻게 이 십자가의 대속이 믿어지게 되었는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전도자는 어떻게든 말씀을 전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새신자는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믿어보려고 미심쩍은 마음으로 하루 하루 교회에 나오다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홀연히 성령에 의해 거듭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거듭나게 되면 그렇게 따지던 것들이 다 진실이라고 믿어집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믿고 의롭게 된 자들이니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통해 의롭게 된 우리가 이 땅에서도 누리게 된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이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첫 째는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화평이란 충돌이나 다툼이 없이 평화롭다는 뜻이죠.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는 갈등과 충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죄를 돌격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롭게 된 우리에겐 피차간에 이런 갈등과 충돌이 다 사라지고 하나님과 화평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의미를 더 잘 이해하려면 반대로 9절에 기록 된 진노를 생각하면 됩니다.

10절에 기록 된 원수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화평하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실감이 날 것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그 머리에 쌓아두고 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기에 인간은 불행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통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물건이 하나 만들어져도 그 매뉴얼대로 사용될 때 가치가 발휘되고 물건의 효용성이 높아지는 것이죠.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과 소통 할 때 존재감이 충만하고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7에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러니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의 인간에게 무슨 복이 있고 무슨 평강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철천지원수로 행동하던 성경인물이 바로 이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사도입니다.

그는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제자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들고 240킬로나 떨어진 다메섹까지 좇아가던 사람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빛과 함께 음성으로 뭐라고 말씀합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가시채란 당시 철조각을 끝에 붙인 가축몰이 막대기입니다.

농부가 가축을 몰 때 못된 가축은 그게 싫어 이 가시채를 뒷발로 차다가 찔리고 상처를 입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사는 인생이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 같이 고생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과 싸워 이기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버티며 계속 가시채를 뒷발로 차 봤자 찔리고 상처만 입을 뿐이죠.

바울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어리석은 고생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고 본문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골로새121절에서도 말씀하시죠?

전에 악한 행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이 축복은 예수님의 육체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죄가 해결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평한 것은 근본적인 관계가 좋아졌다는 것만으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현재의 삶에서도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현재에도 누리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실제 인격적인 교감이 일어나는 관계입니다.

돌부처에게 절하는 사람이 돌부처와 나 사이에 뭔가 인격적인 교류가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사귀듯이 인격적인 면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노의 대상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바뀌었지만 관계의 친밀감은 사귐의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서로 인격체이기 때문에요.

하나님과 화평을 더욱 풍성히 누리려면 아버지 앞에서 날마다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과의 이 좋은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주일예배에 우리가 왜 나옵니까?

물론 구원받은 성도들이 당연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고백이지만 예배드리는 것이 내게도 유익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누리며 그 안에서 복을 받고 우리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머리나 감정으로 그 신비감을 미처 느끼지 못하는 때 조차도 우리 영은 이미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지금 소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말씀을 들을 때가 아니면 어디서 우리 영이 힘을 얻겠습니까?

혹시 주일 예배를 한번 못 드리고 한 주간 살아갈 때 어떻습니까?

뭔가 일 주일 내내 불편하고 불안하고 매사가 시들한 기분이 듭니다.

육적인 삶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상태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피폐해지면 육적인 삶에도 모든 게 결핍되고 곤고해지는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가운데 교제할 때 모든 좋은 것들이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집에서나 직장에서 시간을 내서 주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펴고 소원을 말씀드릴 때도 똑같은 영적인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기분이 그걸 느끼지 못해도 벌써 우리 영은 그 때 생기를 얻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생기가 그 다음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우리 골수를 윤택하게 하고 육신도 건강하게 회복되는 것이죠.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만이 불안한 이 세상에서 심령과 육신의 평강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민사고를 졸업하고 미국 명문대학 10군데에 동시에 합격했던 박원0 라는 여학생 기억하시죠?

처음에 유학생활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고 합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애들 대화를 아는 척 웃고 있으려니 정말 자괴감이 들고 바보가 된 느낌이었죠.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라는 성경 말씀이 진리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정반대로 하나님의 포근한 사랑이 느껴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게 신기한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느낄 때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깨달아지는 것이죠.

그 뒤 불안했던 마음에 하나님이 화평이 임하고 잘해야 된다는 무거운 강박증도 사라졌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 속에서 그냥 최선을 다했고 꼴찌였던 원0자매가 하버드에서 우등졸업을 한 것입니다.

장차 큰 욕심 없이 선한 사마리아인 같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0 교회를 다니는 현재 고등학교 3학년인 경0 라는 또 한 여학생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몸의 이상을 느껴 병원에 가보니 몸에서 단백질이 소멸되는 신증후군이란 병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신장이 망가져 힘겨운 혈액투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오른 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 경0 양이 오른 팔을 절단한 뒤 왼 손으로 턱을 괴고 활짝 웃는 모습이 교회 신문에 나왔을 때 사람들의 마음이 뭉클해졌다고 합니다.

어린 소녀가 한 쪽 팔을 절단한 채 어떻게 저렇게 평안하게 웃고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경아양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담담했다고 털어 놓았습니다.

본래의 팔이 아름답게 부활될 것이 믿어지며 이상하리만치 평안했다는 것입니다.

처지는 달랐지만 두 여학생 모두에게 하나님의 평안은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할 때 우리 각자의 처지와 환경은 다 다르다할지라도 넉넉히 모든 것을 이기고 아름답게 승리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화평을 얻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둘째로 의롭게 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한다고 말씀합니다.

즐거운 인생, 참 좋지 않습니까?

젊었을 땐 염세주의도 매력이 있었고 철학도의 고뇌도 멋있어 보였지만 나이가 들어가니 단순해지는 것일까요, 즐거운 인생이 좋다는 걸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도 다 즐겁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쫓아 허겁지겁 달려가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은 절대 행복해 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행복감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될 때만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환경이 항상 만족할 만한 조건이 됩니까?

오히려 항상 불만족할 조건 속에 쌓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요?

그러니 절대로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시 조건이 맞아 행복해지나 싶으면 여지없이 행복이 깨지는 문제가 생기는 게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러니까 좀 행복하다 싶으면 벌써 왠지 한 구석이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즐거움은 다릅니다.

환경과 처지가 좋지 않고 비관적일 때에도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이 성도들이 누리는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3절에 보니 심지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하죠.

환난 중에 행복하다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 성도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환난 속에서 주저앉아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게 아니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사람은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세상의 조건과 신뢰할만 한 구석이 전혀없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며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담대함은 자신과 물질과 건강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세상이 왜 두렵습니까?

모든 것이 예기치 않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과 계획대로 인생이 되지 않고 내 마음 조차도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내일은 예측불허이고 우리는 불안한 것이죠.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성도님들 마음먹은 대로 인생이 되셨습니까?

그렇지도 못한 데 어떻게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인생에 주인은 분명히 따로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고 선한 아버지 되신다는 것을 믿는 자녀들에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미래의 재난과 환난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사도는 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성도들이 당하는 모든 환난은 결국 우리에게 인내를 배우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내를 통해 우리 믿음과 인격이 연단을 이룹니다.

연단은 인정받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환난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의 가까이서 돌보시는 손길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환난을 통과하며 스스로 이렇게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내가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은 결국 우리에게 천국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인생의 역경을 만날 때 잊지 말고 붙들어야 할 말씀은 고린도전서 1013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정말 신실하시게 이 말씀대로 우리를 환난 중에서 도우십니다.

죄악과 사탄의 속한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당하는 시련을 성도들도 함께 겪을 수 밖에 없지만 우리의 모든 시련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인생의 풍랑도 마귀의 시험도 하나님의 허락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죠.

욥의 고난을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마귀는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져야 욥을 시험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사도는 이 사실을 요한일서5장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지난 주 학교 채플에 말레이시아에서 18년을 사역 중인 선교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선교는 고난을 마치 모험처럼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선교사님은 도시가 아닌 밀림 속에 들어가 소수 민족에게 의료사역과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분입니다.

한번은 부족들이 식사를 대접하는 데 바나나껍질에 쌓여있는 음식을 내오더랍니다.

껍질을 까보니 작은 애기 손목이 하나 나오는 데 기절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아주 귀한 사람에게 대접한다는 원숭이 손요리였습니다.

그걸 어떻게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입에 넣고 씹는 데 족발보다 더 쫄깃하고 맛이 있더라며 그렇게 재미있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 난처한 환경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 믿는 자들의 능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느 날 밀림을 걸어가는 데 선교사님의 아내와 세 살 먹은 딸이 앞서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종아리 뒤에 수박씨 같은 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보였습니다.

쫓아가서 씨를 떼어내려는 데 떨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지독한 정글 모기에게 물려 그 어린 것이 얼마나 긁었는지 상채기가 생기고 딱지가 까맣게 않았던 것이죠.

순간 아버지로서의 마음에 울컥 하고 올라오더랍니다.

가자, 내가 뭐를 한들 딸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하랴.

그러나 그런 모든 시련을 결국 인내로 참아낼 수 있는 게 믿는 자들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인내로 참아냈을 때 적대적인 원주민들이 선교사님의 진심을 인정하고 점차 마음을 열더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말레이시아에 80개의 교회를 세우고 많은 부족에게 구원의 소망을 심어준 것이죠.

이것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의 해석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 삶이 지금 어두움과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필포트란 사람은 성도들이 환난 중에서 이 역경을 믿음으로 통과하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빛의 자녀가 어둠 속을 걷는다

아무리 고난이 어둠처럼 깊다 해도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어둠은 빛이 비췰 때 물러갈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고난과 어려운 현실은 결국 우리에게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고 모든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고 영광스런 모습으로 서게 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망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을 이기고 인내하며 소망하는 것은 영광스런 천국의 삶입니다.

이 로마서 편지를 받을 당시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네로황제의 박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재산을 뺏기고 추방당하고 죽음을 맞기도 하며 오직 천국을 소망했습니다.

불같은 시련을 겪으며 이런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천국이 있을까?

그들도 우리처럼 예수님을 한번도 본적 없이 전도를 통해 믿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내 선택이 과연 맞는 것일까 때로 의심하며 불안해 할지 모르는 로마교인들을 위해 바울사도가 강력하게 구원의 확고함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소망이 결코 부끄럽게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소망이 결코 부끄럽지 않을 것이고 영광스러울 것을 확신합니다.

바울사도는 그 확신의 근거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능력이 부족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현대는 어찌보면 네로황제 때 못지않게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모든 종교는 서로를 인정하고 다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길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말하는 기독교는 점점 더 왕따를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생각보다 집요하게 모든 분야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견고히 붙들지 않으면 거센 물결에 넘어지고 쓸려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믿는 바는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십니다.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이 안타깝게 책망하지 않습니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생활고에 지치고 시련에 낙망하고 세상이 편히 살라고 유혹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붙듭니다.

이 땅에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 전능하신 주님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그 역사적인 사실을 굳게 붙들 때 의의 면류관을 지킬 수 있습니다.

7절에서 말씀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어쩌다 있을지모르지만 누가 나같은 죄인을 위해서 죽어주겠느냐, 그것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부부들 보면 누가 먼저 프로포즈했냐, 누가 먼저 좋아했냐로 민감한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가끔 봅니다.

먼저 사랑한 사람이 약자라는 것이죠.

요한일서410절이 약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아버지는 사랑에 있어서 스스로 약자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들 앞에서 늘 약자이듯이.

이 사랑을 믿으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또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환난을 이기고 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좋은 선물과 소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3년 4월28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