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는 영생을 얻는 방법이 있고 현세를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영생을 얻었는데 현세는 성경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방식 대로 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대로 삽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산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자들은 세상법과 하나님의 법이 충돌할 때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법을 따릅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가 세상법이었지만 신실한 성도들은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기쁘게 순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 우리 스스로가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이것입니다.
세상법이나 세상방식이 하나님의 계명과 부딪칠 때 어느 편을 옹호하고 지키냐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공기업 입사시험이 주일에 주로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주일을 지켜야 하기에 불이익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기독교단체에서 소송을 제기해 많은 시험들이 토요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 건 세상법에 맞춰야지 유난스럽게 그럴 것 있냐고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저절로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고 그 법을 더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세상법과 비교할 수 없이 하나님의 법이 월등하고 초월적이며 그 속에는 모든 것을 살리고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에게 이 율법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사람들 머리로 제작한 게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십계명을 보면 인간 편에서 유리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유리한 게 하나도 없는 것을 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서 족쇄를 채웠겠습니까?
모든 계명은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 백성들은 거룩하게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5장 40절을 보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함으로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즉, 계명을 준행할 때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불의하고 악한 사람은 피차 함께 하지 못합니다.
공의로운 하나님 편에서도 악을 참아보지 못하시고 죄로 오염된 인간 편에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견디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현대교회가 구원을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강화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심판, 믿음과 행함은 다 빼 놓을 수 없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성경은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구원, 심판이 빠진 십자가, 행함 없는 믿음을 모두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예수님도 신자들의 믿음을 진단할 때 보이지 않는 내면의 믿음보다 겉으로 드러난 행실과 열매에 초점을 맞추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사도도 본서에서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구원의 교리를 조목조목 설명한 뒤에 그렇다면 이 땅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본문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매일 무엇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고 있습니까?
성경은 믿음으로 천국가는데만 유용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도 가장 잘 사는 방법도 성경에 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바로 그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지킴으로 복되고 안전하게 될 주님의 계명을 잘 이해하고 지키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본문은 8절을 중심으로 우리가 살면서 지지 말아야 할 빚과 져야 할 빚을 대비해서 말씀합니다.
8절의 앞 부분은 당시 로마교회의 신자들이 권력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그리고 관세와 조세를 바치는 것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줍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은 앞의 말씀을 받아 세상에는 어떤 빚도 지지 말고 사랑의 빚은 적극적으로 지라는 것입니다.
먼저 세상 빚은 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 빚은 금전적인 채무관계나 국가나 사회에 대한 도덕적인 의무를 말합니다.
세금을 정당하게 내고 개인적인 빚도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월급장이들이야 어쩔 수 없는 유리지갑이지만 자영업자들의 경우 세금 제대로 내면 바보취급 당합니다.
그러나 납세에 대해 성경적인 관점은 정직히 내라는 것이고 편법을 쓰는 것은 불법이고 불의한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제이스도시락 사업을 해봐서 압니다.
부가가치세를 법대로 내려니 손익이 맞지 않아 정말 유혹을 받게 되더군요.
그러나 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법대로 하고 차라리 이익을 덜 내는 것이 떳떳한 일이고 믿음으로 바른 기업을 세우는 것인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투명경영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놀랍게 기업을 축복하셨다 그런 간증들은 많지 않습니까?
개인적인 채무에 대해서도 성경은 빚지고 살지 말라는 입장입니다.
우리 사회를 공공연하게 빚 권하는 사회라고들 합니다.
빚 없이 살기가 녹록치 않습니다.
청년실신시대라는 말 들어보셨죠?
청년들의 현실인 실업자와 신용불량자를 합친 신조어라고 합니다.
최근 온라인 취업포탈 업체에서 청년 구직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0% 정도가 현재 빚을 지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빚 규모는 1인당 2769만원이라고 합니다.
청년들에게 적지 않은 액수인 데 학자금 대출로 인한 것이 많다고 합니다.
사회에 진출하기도 전에 빚을 떠안고 시작하니 청년실신시대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자식들 교육에, 먹고 사는 문제에 장년세대의 빚 문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개인에 대해서건 사회의 의무에 대해서건 빚지고 살지 말라는 입장을 오늘 분명히 해주십니다.
물질 관리에 대한 지혜로운 교훈이 많은 잠언을 보면 가난하고 빚지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잠언22장7절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또 어쩌다 빚을 지게 된 사람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네 눈을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을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빚이 해결될 때까지 열심히 뛰라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이유로 조금씩 빚더미에 올라 앉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빚진 상태로 사는 걸 하나님이 권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붙드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지지해주시는 대로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빚지고 사는 환경을 잘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죠.
잠언에는 한결 같이 빚진 상태를 부정적으로 보고 부지런히 힘써서 가난을 벗어날 것을 권고합니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
옛날 어른들 말씀에도 죽 먹을 팔자라도 부지런하면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느 중소기업 연수원 앞에 있는 돌 위에 이런 사훈이 실제로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닥치는 대로 살아라’
이 말은 되는대로 살라는 말이겠습니까?
어떤 일이든 고르지 말고 닥치는 대로 하라는 것이고 또 미리 걱정하지 말고 문제가 닥치는대로 정신 차리고 해나가라는 뜻이겠죠.
처음부터 내게 완벽한 일이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현재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재정형편이라면 성경에서 제시하는 대로 부지런히 손에 닿는 대로 일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저도 가족의 보증을 서서 떠안은 엄청난 빚을 달랑 월급만 가지고 6년만에 다 갚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도대체 월급만으로 그 빚을 갚았다는 게 계산이 나오지를 않는 데 어떻게 그 빚이 다 사라졌는지 신기할 뿐입니다.
매일 빚 문제를 놓고 기도로 하나님께만 매달렸더니 이리저리 환경을 열어주시고 돈이 새나가지 않게 막아 주시고 그래서 어느 날 보니 빚이 다 청산되었더군요.
당장 다 갚아지는 것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 빚진 재정상황을 매일 말씀드리며 해결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미 빚을 지기 시작한 악화 된 재정 형편이라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그리고 어려서 부터 수입과 지출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자녀들을 가르치고 우리 청년들도 계획적인 삶을 살도록 훈련하십시오.
들어오는 돈에 맞춰서 지출하는 건전한 습관은 재정관리의 실수로 빚더미에 앉는 위험을 면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이 고단한 인생에 부채까지 지고 사는 것은 정말 안쓰러운 삶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적용해 빚지지 않는 생활이 되도록 재정을 지혜롭게 경영하고 기도하며 부지런히 일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다음은 우리에게 피차 지라고 명령하신 사랑의 빚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을 지라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사랑의 빚을 주고 받는 것도 금전적인 빚 못지않게 내 맘대로 잘 안됩니다.
어쩌면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보다 더 사랑에 인색하고 아무나 하고 사랑을 주고 받는 게 힘든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사랑의 계명을 말씀할 때 우리는 다 어느 정도 곤혹스럽습니다.
또 나 살기도 바쁘고 가족 사랑도 안되는 판국에 다른 사람에게까지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게 버겁게 느껴집니다.
세상은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할 만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아래에서 그것은 분명한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이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주셨던 과거의 율법을 가장 온전히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분명하게 지켜야 할 주님의 나라의 법도이고 무시할 경우 명백한 범죄행위 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사람을 선별해서 관계를 맺고, 사랑하고,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가 죄라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 바울사도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행하도록 권면하는 데 앞서 십계명의 네 가지 계명을 언급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 4가지 계명은 타인과의 관계에 악을 행하게 될 인간 심연에 도사리고 있는 강력한 죄의 성향을 지적하고 제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네가지 계명은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소극적으로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계명인 이웃사랑은 이 옛계명을 더 완전하게 지켜내는 것이고 그것이 본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던 율법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온전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본성적인 우리의 죄악을 제어할 수 있게 주신 옛계명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살펴본다면 인간이 다 음란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다 음란하기 때문에 이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음란문화가 왜 그렇게 번성하겠습니까?이제는 섹시하다는 말이 찬사가 되고 방송에서 대놓고 자기를 음란마귀라고 하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마귀는 쉴 새 없이 사람들에게 음란한 생각을 넣어 줍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인간 내면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타고난 음란성이 있어서 그런 것이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 음란함으로 인해 자기와 이웃을 파멸시킬 것을 금지 시킨 것입니다.
‘황홀한 이웃’의 탈을 쓰고 다가오는 음란한 마귀의 유혹을 주의해야 합니다.
음란한 영들은 성도들 마음에 엉뚱한 감정을 조장하고 생각을 넣어줍니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다 사랑이 아닙니다.
특히 청년들이 이런 음란한 영의 실체를 좀 알고 대처를 해야 합니다.
이성적으로나 객관적으로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한 감정이 우발적으로 생기는 것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특히 합법적이지 않은 관계에서 생기는 이성에 대한 감정은 음란한 우리 죄성을 부추기는 음란한 영들의 미혹임을 분별하고 일찍 감정의 싹을 잘라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대처하지 않으면 교회 내에서도 수많은 범죄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덫에 걸려 넘어지고 목회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옛계명을 이웃을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지키는 것은 단지 드러나지 않게 간음하지 않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사실들을 잘 파악하고 나를 잘 지킬 뿐 아니라 형제 자매가 성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인간 내면에 살인의 본능을 지목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태어난 가인에게서 즉시 이 살인의 본능이 나타나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어제 뉴스 보니 분식집 주인이 음식맛이 없다는 손님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는 기사가 있더군요.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인 데 항상 음식이 맛이 없다고 타박하는 걸 참았는데 그날도 또 음식이 맛없다 타박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한 수 더 떠서 능력도 없으면서 주제파악 못하고 음식점 한다는 말에 완전 이성을 잃고 어이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강도가 아니라 아주 평범한 분식집 사장님이 이렇게 살인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살인 같은 것 할 사람이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내면에 있는 살인의 본능을 아주 정확하게 꼬집어 주셨잖아요.
형제를 미워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이미 살인하였느니라
이웃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도 육체적인 살인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상대에게 정신적인 살인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받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무참히 짓밟는 것일 뿐 아니라 정신적인 살인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왜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겠습니까?
우리 마음에 다 도둑심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둑질하는 영화가 끝없이 나오고 그런 영화를 보면서 통쾌해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은 서슴없이 도둑질할 생각이 납니다.
큰 것 부터 아주 치사하게 작은 것 까지 추악한 죄의 본성에 이끌려 남의 것으로 자기 주머니를 채우려 한다니까요.
신기한 것은 도둑질은 발각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속이 썩었으면 그 냄새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습니다.
꼬투리가 잡히지 않았어도 도둑질하는 사람에 대해 주위사람들이 꺼려하고 신뢰하지 않는 것을 직장생활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정직하지 않은 인격은 어쨌든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밖으로 드러나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남의 것에 대해 항상 깨끗하고 정직한 마음을 가져야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인간의 만족을 모르는 탐욕스런 실체에 제동을 거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을 누가 채워줄 수 있습니까?
돈 좀 그만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습니가?
남의 몫까지 긁어 모아도 만족하질 못하는 게 인간의 탐욕입니다.
얼마 전 열렸던 다보스포럼에서 부의 편중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었다고 합니다.
그래봤자 부자들끼리 논의했으니 뾰족한 답이 나왔겠습니까?
이미 전세계1%의 부자들이 세계재산의 50%정도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상위 20%까지의 사람들이 전체 재산의 94%를 가졌다고 합니다.
나머지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평균재산은 4백만원씩이고 다 합쳐봤자 전체 부의 6%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상위 1%가 전세계 부의 99%를 갖게 될 거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도 가질 능력이 안되서 그렇지 이런 욕심이 언제고 가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에게 입으로만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하라 하는 게 위선이라고 야고보서는 지적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느새 머리로 계산되는 탐욕을 버리고 우리의 소유를 털어내는 희생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라하며 바울사도가 옛계명을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말로만 하는 추상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하라는 뜻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이런 죄의 본성을 잘 파악하는 것은 위선적인 사랑을 벗어나는 큰 무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을 바로 안다고 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바울사도는 ‘사랑의 빚’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바울사도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특이하게 피차 사랑의 빚을 지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사도가 말하는 빚진다는 것의 의미는 8장1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이 귀절들을 보면 바울사도의 빚진 자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눈치를 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을 받고 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빚진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받은 사랑이 계산되지 않게 과분하다는 것을 알면 어디든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빚진 자’라는 자각은 자연스럽게 형제자매들에게, 그리고 아직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들 봉사를 하려고 하는 것이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을 지라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 진 막대한 사랑의 빚을 서로를 사랑함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수록 우리의 이웃사랑도 범위가 넓어지고 그 진실함이 깊어집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빚을 서로에게 갚을 때 우리에게 복이 되고, 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 순간 분명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죄의 독은 당연히 자신을 파멸시킵니다.
찰스 스펄전은 죄를 너그럽게 봐주는 교회는 그 자신의 거룩을 파괴하고, 구성원들의 분별력을 뒤엎어 버린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분명하게 죄라는 것을 통감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명을 지키는 데 무감각해진 죄에 대해 관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자격도 없는 저 사람을 계명대로 사랑하는 것이 내게 큰 손해가 나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사랑하는 상태가 가장 행복하도록 지으셨습니다.
미워하고 남을 얕잡아 볼 때 보다 사랑하고 존경하면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 자신도 사랑하실 때 가장 행복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로 변치 않고 흘러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생각하고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심으로 우리도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해 흘러가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사랑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받은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지키지 않은 죄가 되기에 주님으로 부터 임하는 풍성한 은혜와 행복에 분명히 제한이 옵니다.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주님께서 오늘 명령하신 대로 서로를 더 용납하고 사랑하는 모두가 되길 축복드립니다.
지금은 이렇게 사랑도 제대로 못하고 힘들어 하는 연약한 우리지만 영원한 나라에서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된 우리는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를 아름답게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두 가지 빚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 땅에서 부지런히 규모있게 살아서 생활이 안정되고 재정이 넉넉해서 하나님나라와 가난한 이웃을 도우며 사는 것은 참 복된 삶입니다.
구태여 빚지고 가난한 자리를 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말씀도 분명히 그것을 부정했으니 경제관념을 바르게 세우고 매일 기도로 이 문제를 말씀드리고 그 다음은 ‘닥치는 대로’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악화된 재정을 맡아서 선하게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또 우리가 서로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항상 모두를 향해 마음을 열고 다가가 사랑을 베푼다면 큰 행복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은 폐기 된게 아니라 이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되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쁘게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삶의 기준으로 삼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5년2월15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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