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이 교회에서 가장 듣기 원하는 설교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기독교의 교리와 구원에 대한 설교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만큼 신자들에게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믿음에 대해 더 알길 원한다는 것이겠죠.
마음을 위로하고, 하면 된다고 용기를 주는 설교들이 당장은 좋지만, 믿음의 기초가 부족하면 실제 삶의 문제를 대처할 믿음의 실력이 나오질 않습니다.
물론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위안이 필요합니다.
지난주도 여러 번의 실망과 좌절, 기분 나쁜 일들을 수도 없이 겪으며 살다 온 성도들을 하나님도 위로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다 잘될거야 라는 말로 잠시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시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보여주시고, 그것을 해결할 원칙들을 가르쳐주셔서 삶의 방향을 믿음으로 설정해 가길 원하십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언제까지 우리가 나서서 모든 일을 일일이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바른 것을 선택하고 행동할 때 기쁩니다.
요즘 TV에 아빠들의 육아 프로그램이 나오더군요.
대한민국만세나 추사랑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시청자들이 마치 자기 자식 키우듯이 좋아하고 응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들도 점점 자라고 바뀌지만 아빠들도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 나올 때 보다 아빠들의 사랑이 점점 절제되고 아이들에게 올바른 것을 가르치려는 모습이 나타나더군요.
왜 그럴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기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다시 보았을 때, 그게 아이들을 위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자동차 뒤에 붙이는 문구 중에 ‘까칠한 아이가 타고 있어요’ 이런 게 좀 보기 거북하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죠.
아이를 까칠하게 키우는 게 아이에게도, 사회에도 최선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과 하나님나라와 세상을 위한 훌륭한 성도로 성장하길 바라십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미성숙하고 패배하는 삶을 사는 것은 영적인 기본기가 출발부터 약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로마서를 통해 기본기를 잘 다지기를 원합니다.
기초공사가 잘 되는 것은 집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한번씩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다지면서 가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세워 주리라 믿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했든, 얼마 되지 않았든지 간에 우리에게 아직 확신이 들지 않는 부분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는 바울사도가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고 어떻게 세워졌는지 알려주는 사료가 없습니다.
로마교회는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주축이 된 교회입니다.
사도들에 의해 세워지고 말씀으로 양육된 교회가 아니다 보니 사도들의 믿음이 바르게 전수되었는지 우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통해서라도 기독교의 진리를 정확히 진술해서 로마교회가 선지자들의 전승과 사도들의 신앙 위에 세워지도록 돕길 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에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신앙이 무엇인지 논리적으로 아주 상세히 진술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복음’을 제시하고 ‘복음’을 논증하고 ‘복음’을 옹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바울사도가 제시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십니까?
우리 말 ‘복음’이라고 번역한 ‘유앙겔리온’이란 헬라어의 뜻은 기쁜 메시지, 혹은 좋은 소식이란 뜻입니다.
인간에게 기쁨이 될 메시지, 좋은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좋은 소식의 핵심이 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편지의 서두인 2절에서부터 4절까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2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실 것을 구약의 역사 속에서 약속하셨고 예수님의 출생과 사역과 부활에 대해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다음 3절에,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예수님이 많은 선지자의 예언대로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예레미야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토에서 나실 것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또 예수님이 당시 로마인들이 섬기던 신화 속의 신이 아니라 실제 족보에 기록된, 육체로 태어나셨던 분이심을 차별화시켜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속죄하셨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일들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이 땅에서 일어났던 변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 복음에 대해 사람들은 각각의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16절에서 바울사도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 속에는 복음이 세상 사람들 눈에 별로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희망이 전혀 없는 인간을 위해 베풀어주신 이 유일하고도 엄청난 구원의 사실을 사람들은 대단치 않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마다 사람들이 복음을 하찮게 여기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왔습니다.
사도행전17장에서 바울이 아레오바고 집회장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다고 했습니까?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조롱했다고 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이성으로 납득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든 복음을 한번 설명해 보셨습니까?
아무리 진지하게 복음을 설명해도 듣고 나면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을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좋은 곳에 간다거나, 마음의 수련을 쌓아 모든 죄를 다스리면 누구든 신처럼 된다’ 이런 교리들보다 훨씬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게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그렇지만 17절에서 바울사도는 이 복음을 믿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 강조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지만 여기에서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가 정하신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사람을 구원하겠다고 언약 하셨고 때가 이르렀을 때 그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스스로가 먼저 구원을 약속하셨고 독생자를 대속제물로 내 놓으신 희생을 감수하셨겠습니까?
인간을 구원 할 다른 방법이 없어서입니다.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스스로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언약하셨고, 이루신 십자가의 복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또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씀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랑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를 묵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묵살하고 악을 행한 인간의 죄에 대해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신 십자가에서 때리고, 치시고, 못 박아 죽임으로 대속의 공의로운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만이 우리의 죄가 해결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나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부터 나타나나니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의아해 합니다.
‘아니, 난 하나님과 아무 상관도 없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데 왜 나를 심판해?’
바울은 핑계대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자신을 모든 사람들 속에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능력과 신성을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은 보여주셨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것이지 사람들이 알지도 못한 것에 대해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자연세계만으로도 충분히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 인간과 모든 생물과 우주와 만물들이 분명하게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과학으로는 그 숫자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우주의 별들, 그 중에 유일하게 생명체가 존재하는 지구는 지적능력을 가진 절대자의 창조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지구의 공전이나 자전속도 등과 같은 수많은 지구의 법칙들은 우연히 만들어진게 아니라 모든 걸 정교하게 계산해서 만들어졌다는 걸 보여줍니다.
영화에 보면 과학자들이 우주로 나갈 때 수많은 공식들을 막 계산하는 게 나오지 않습니까?
지구 안에 적용되는 이런 법칙들이 한 개라도 어긋나면 지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온 우주에는 하나님의 측량 못 할 지식으로 충만하고 장엄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모든 것을 응시하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눈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눈이 크다는 게 아니라 온 우주를 감찰하고 계신 전지전능하신 시선이 분명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 바다거북의 생애에 대해 보았습니다.
어미 바다거북이 해안 모래밭에 알을 낳고 바다로 돌아간 뒤, 아기 거북이 부화되자 본능적으로 바다 쪽을 향해 기어갑니다.
그리고 25년 뒤, 만2천킬로미터 이상을 이동해서 살던 바다거북이 정확하게 자기가 태어난 모래 해안으로 돌아와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자기가 부화된 해변과 바다 냄새를 기억하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미물의 기억 속에 누가 이 냄새를 기억하는 뇌를 만드셨습니까?
거대한 폭풍이 일어나고 뇌성벽력이 칠 때 누가 창조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진으로 땅이 터져 수많은 사람과 삶의 터전을 집어 삼킬 때 사람들은 신의 심판을 생각합니다.
인간의 지나온 역사를 볼 때도 우리는 모든 나라와 권세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느낍니다.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성공을 거둔 공산주의 혁명은 중국과 동남아와 동유럽을 강타하지 않습니까?
20세기 말에는 지구의 40%가 사회주의국가가 되고 공산주의가 전세계를 집어삼킬 것 같은 두려움이 지구촌을 덮었습니다.
왜 그 공산혁명이 스스로 실패하고 무너졌는지 누가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라를 세우기도 하고 뽑기도 하시며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인생사를 돌아보십시오.
아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그 때에도,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지탱해주고 내 운명에 개입했던 순간이 전혀 없었다고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순간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덫에서 빠져 나옵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연설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하나님을 힘입어 기동하며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핑계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은 정확하게 그들 기억 속에 있던 그 순간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한번만 좀 도와주시면, 하나님 한번만 살려주시면...’
그들의 마음속의 간절한 탄식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도와주셨을 때,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면서도 사람들은 냉정하게 등을 돌리며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리고 하나님을 지각하게 했더니 고작 한다는 짓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의 우상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보여주셨더니 하나님을 다루기 쉽고 만만한 우상으로 바꿔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할 수는 없으니 무언가 섬기긴 해야 되겠는 데, 내 임의대로 믿기 좋게 각색을 해서 내 스타일대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셔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양심을 따라 겸손하게 섬기는 게 아니라 항상 자기의 죄성을 중심으로 맴도는 것입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우상숭배가 인간이 무지할 때 최초로 발생하는 1차 종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종교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것이 우상화라고 합니다.
불교를 보면 석가는 생전에 세상의 끝이나 내세에 대해 답한 적이 없습니다.
석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간이 문제에 부딪혔을 때 현실적인 답변을 찾는 데 주력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사방으로 전래되며 내세가 첨가되고 힌두교의 교리인 ‘업’이나 ‘윤회’, ‘해탈’ 같은 것과 융합되어 다양하게 변천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분파만큼 서로 모순되고 복잡한 그런 종교도 없습니다.
불교도 타락하자 부처의 우상을 만들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년에 한두번 찾아가 복을 비는 우상종교로 전락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하나님을 우상화하려는 인간 본성이 작용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우리가 딱 원하는 그런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믿으려 하는 건 아닐까요?
절대로 우리 욕망과 죄성은 건드리지 못하실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지만 절대로 예수님 닮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내게 너무 손해가 나는 것 같거든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입니까?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심판은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어디에 빠지든지 상관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선하심이 개입하시지 않는 인간은 점점 더 더럽고 점점 더 나빠지고 점점 더 수치스럽게 한없이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 대표적인 현상이 영적으로는 우상숭배로 귀신을 섬기게 되는 것이고 육적으로는 비정상적인 성적 욕구들이라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다 더러워지는 것이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을 거절한 영혼들이 나날이 나빠지는 데는 그 바닥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교양 있고, 성품이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경우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시는 특별은총은 받지 못했지만 자연적인 교육의 혜택과 양심을 통해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일반 은총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상태를 만족하게 여기고, 자신을 존경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더더욱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은 자들의 받을 분명한 심판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대로 다들 괜찮아 보이십니까?
그들은 스스로를 욕되게 하고 있고 점점 나빠져 가고 있다고 오늘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전해져야 되고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한시바삐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기를 얼마나 바라셨는지 모릅니다.얼마 전 제가 카페에서 커피를 쏟다가 원두 몇 알이 밖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순간, 하나님이 어쩜 이렇게 우리가 세상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것 까지 창조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단지 배를 채우는 정도가 아니라 수많은 미각을 돋구는 재료들까지 다 우리를 위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좋으신 하나님을 멀리하고 미워하고 대적한다는 게 얼마나 슬픈 현실입니까?
감사하게도 예수님의 복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했고 더 이상 진노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웃으시고 기쁘게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단지 물려받을 천국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이를 악물고 괴로움을 참으며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공급자가 되시고 분명히 우리의 길을 기쁘게 지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만물을 보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물밀듯 밀려옵니다.
복음을 듣게 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더 아름다운 영원한 세상을 상속받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섬기길 원합니다.
아직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믿을 수가 없으시다면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령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자연적인 성품으로 살아온 우리의 삶이 이기적인 본성을 따라 사는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복음을 믿기를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를 주셔서 깨닫지 못했던 우리의 죄악된 본성과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2015년8월30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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