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017년 두 번째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들께 큰 은혜와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됐는데 벌써 피부에 와 닿는 문제들이 심상치 않죠?
마트에서 물건 몇 개 집어 넣었을 뿐인데, 영수증을 보니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요즘 청문회를 보면 비리들이 속 시원히 밝혀지기는커녕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와 이러다 국민들이 다 화병 걸릴 것 같습니다.
정의가 되려 밀리는 것 같고, 과연 이 모든 게 바로잡힐 수 있을지 막막한 마음이 듭니다.
게다가 미국발, 중국발, 일본발 정치,외교,경제적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예상해 우리는 올해 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올해 다 같이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인도를 따른다면 이미 시작된 만만찮은 이 한해의 모든 문제들과 환경들을 잘 뚫고 나가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사도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인 로마서에서 살펴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 부분을 좀 알아야 합니다.
본문이 ‘그러므로’라고 시작되기 때문에 앞부분 없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죠.
로마교회는 유대인들이 모인 교회가 아니라 로마사람들의 교회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나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근본적으로 갖는 질문이 있죠.
‘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안 믿고 우리는 믿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죠.
어찌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였고 동역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된 이 유대민족은 구원사의 난제 중에 난제입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관계를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우리처럼 의문을 가질 로마교회에 이 관계를 자세히 설명해 써 보낸 것입니다.
말하자면 논문을 한편 작성한 거나 같습니다.
로마서 안에는 왜 인간이 죄인인지, 왜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시는지, 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죄인 중 얼마를 구원하려 하시는지, 왜 유대인은 예수님을 배척했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계를 설명하는 데 로마서의 1장부터 11장까지가 할애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아주 간단한 복된 소식이지만 그것을 확실히 믿게 되려면 성경 한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예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잡이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도 잘 모른다고 생각하면 과히 틀리지 않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같은 민족으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신비한 답변을 합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함으로 오히려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먼저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한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대신 이방인들을 먼저 구원하셨다는 것이죠.
인간이 아무리 불순종해도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또 길을 내십니다.
그런데 그 길 또한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잘못된 선택으로 어려움에 빠지고, 죄의 결과로 곤욕을 치르기도 하지만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를 이렇게 좋은 길로 인도해 오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현재 자기 민족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어가는 것에 대해 너무나 고통스럽고 갈등한다고 솔직히 이야기 합니다.
자기 민족이 구원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어느 정도인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구원받지 못하는 대신 우리 민족들이 구원받게 된다면 차라리 그걸 택하겠다’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네가 천국에 갈 수만 있다면 나는 지옥에 가도 좋다 이런 말입니다.
이런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뛰어넘는 이타성이 복음의 능력이고 성도의 영광스러운 존재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잖아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죄 값을 치르고 심판받는 자리로 내려 오신 것입니다.
그게 우리에게도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녀와 가족들에 대한 동일한 마음인 것이죠.
바울은 그러나 이방인들의 구원의 충만한 숫자가 채워지면 지구역사의 종말에 유대인들의 엄청난 수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을 것이고 하나님나라는 완성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성경에도 숱하게 예언 된 내용들입니다.
이런 구약과 신약의 예언 때문에 교회는 이스라엘의 복음화를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하자면 이스라엘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기 시작하는 것은 곧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뜻이 되는 것이죠.
최근 이스라엘의 동향은 어떨까요?
1948년 지금의 중동에 이스라엘이 방랑 2천년만에 다시 국가를 세울 때 기독교인은 단 40명 뿐이었습니다.
그 이후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십년 전에는 만 명, 그리고 최근에는 그 숫자가 두 배가 넘어 2만5천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있습니다.
현재도 유대인사회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요즘 한국에서 교회 나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박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겠죠.
로마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현재 이스라엘이 이처럼 구원에서 낙오된 것에 대해 이방인들의 교회는 무시하거나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11장22절에서 이렇게 일침을 놓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해산의 고통으로 낳은 성도들을 또 눈물로 훈계하고 감싸던 바울이 이런 두려운 경고를 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 누구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 맹신할 수 없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넘어짐에 대해 경솔히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믿음에 넘어지는 사람들을 볼 때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장자로 선택한 이스라엘의 잘못을 심판하셨다면 너희 이방인 성도들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의 이천년 역사동안 하나님의 선민으로 율법과 성경을 기록해 지켜내고 숱한 고난을 겪었지만 복음을 거부했을 때 준엄하셨습니다.
로마사람들, 너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조상 때부터 수많은 신화 속의 신들을 섬기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죄 속에서 살았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한 일이 뭐가 있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려놓은 셈이라는 것이죠.
너희는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하시고 천국의 상속자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구원받은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못하도록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이지만 구원에서 유보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율법을 가진 선민이라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려고 했기에 순종하지 않은 상태에 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왜요?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로 다시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로마교회 성도들만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받은 게 아니라, 이게 다름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다 우상숭배 가문에서 자라 제사상에 절하고, 정한수 떠놓고 비는 할머니 밑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할머니들이 우리를 귀신에게 부탁했었다니까요.
정말 어쩌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 죄값을 십자가에서 다 갚아주셨는지를 믿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신비 중에 신비이고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불신자들 속에 우리가 쌓여 있습니까?
왜 우리만 믿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은 믿지 못하는 이 사실을 우리는 믿게 된 것인지 누가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여러 경로를 통해서 모으셔서 점점 믿음을 주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오묘하고 신비한 뜻에 대해 알 수 없고, 간섭할 수도, 반론을 제기할 수도 없다고 바울은 본문 바로 앞 11장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그러므로 형제들아, 이렇게 오늘 본문으로 전체 내용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이런 두려운 현실을 보았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유대인들을 보고 경계하고 그들처럼 하지 말아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너희는 하나님을 ‘이렇게 믿어야 된다’는 중요한 핵심이겠죠?
먼저 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이런 명령을 짐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명령은 자비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시는 안전하고 복된 삶의 방식입니다.
너희가 완전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인자와 충만한 은혜 안에서 점점 보람있게 발전하며 살려면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 안에는 유대인의 실패한 신앙을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제물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죄에 대한 심판과 대속에 대한 모형과 죄에 대한 경각심이었는데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적인 제물제사만 남은 것이죠.
로마서를 기록하던 그 때도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는 매일 아침 상번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모든 절기마다, 또 개인의 신앙에 따라 성전에서 동물을 죽여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섬기는데도 구원받지 못했습니까?
그들은 죽은 제물만 바쳤지 자기의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제사법과 제사자체였지, 삶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의 종교 의식으로 하나님을 섬겼지 개인의 인격과 삶을 하나님께 맞추며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너희 로마교회성도들은 이것을 잘 보고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동물을 제물로 바치며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듯이 단지 예배드리는 교회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죠.
예배만 드리고 가서 내 마음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느냐, 아니면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게 살아가냐가 참 믿음의 진위를 가르는 차이입니다.
너희의 몸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예배라는 것입니다.
영적예배라면 현실과 분리된 종교적인 거룩한 행위만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몸을 움직이고 이성을 갖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영적예배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신앙과 삶을 분리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삶 전체에 반영하기를 교묘하게 거부하는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 만들어낸 악입니다.
이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적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만, 예배드릴 때만, 신앙적인 모임에서만, 그 때만 구별해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나머지 시간엔 자유롭게 내가 주인으로 살 길 원합니다.
그래서 신앙과 삶을 재빨리 구분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교회 문을 나가면서 즉시 자연인으로 돌아갑니다.
성과 속을 분리해서 종교의 영역을 우리 삶에 따로 조금 구별해 놓는 것은 가장 위험한 신앙입니다.
그게 바로 유대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종교적 의무만 다하고 삶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유대인들을 지적하자 그들이 분해서 이를 갈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를 해서 좀 미안하지만 명절에 부모님 댁을 간다고 합시다.
시댁에 가는 며느리 입장은 어떻습니까?
시부모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고 얼른 돌아오려고 하죠.
친정에 가는 입장은 다릅니다.
명절을 지내고 친정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고 늙으신 부모님의 허전해 보이는 눈빛이 자꾸 어른거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물을 훔치기도 합니다.
남자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인들이 제사의 의무만 마치고 그 마음은 서둘러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셨죠.
그들이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우리 모두가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정말 귀하고 축복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이루며 살아갈 때 우리가 하나님의 준엄하심이 아닌 인자하심 안에 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삶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2절에서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먼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어를 직역하면 ‘너희는 스스로를 이 세대에 순응시키지 말라’입니다.
이 세대의 영향력 아래 우리를 그냥 방치하고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어떤지는 최근 뉴스 하나만 봐도 명약관화하게 드러납니다.
그게 이 세대를 지배하는 마귀의 경향성이고 거기에 동조하는 인간의 죄의 본성입니다.
욕하며 닮는다는 말이 있죠?
결국 이 세대는 다 한 통속입니다.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각자의 죄의 분량을 다 채우며 몰락해 갈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마음을 새롭게 하냐고 바울사도에게 묻는다면, 바울은 성령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어떻게 스스로 새롭게 해서 변화를 시키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아도 변화되라고 하지 않고 변화를 받으라고 하죠?
인간은 자기 마음이 얼마나 부패하고 좀먹었는지 인식조차 못하고 삽니다.
청문회에 나와서 진실을 조롱하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증인들의 모습을 보면 수치심도 모르고 염치도 없는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잖아요?
우리라고 본질이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큰 죄는 짓지 않지만 사람들은 사소한 죄를 끊임없이 지으며 삽니다.
가만히 보면 별 거 아닌데도 자기를 돋보이려고 위선을 떨고 허세를 부립니다.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적반하장이 되고, 이익을 계산하고 조금 더 챙기는 데는 얼마나 빠릅니까?
결국 모든 것은 다 나를 위해 이용할 뿐이죠.
이런 본성을 무슨 수로 새롭게 해서 변화시키겠어요?
변화시킬 생각들도 없는데.
오직 성령께서만 우리를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시켜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총은 먼 장래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게 전부가 아니라 현재 우리 마음을 새 마음으로 바꿔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직 우리가 과거와 비슷하게 잘못 하는 게 많지만 절대 똑같지는 않습니다.
남들이 보면 저 사람 여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미 우리는 거짓 된 행동에 후회하고 죄에 수치심을 느끼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그런 마음으로 변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점점 더 힘써서 이 세대와 죄의 본성으로부터 우리를 거룩하게 지켜나가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바울사도의 권면대로 이 세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뜻을 분별해서 따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하나님의 뜻에 조율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맞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무엇이 완벽하고 성숙한 것인지.
매 순간 이 하나님의 뜻에 내 생각을 비교해보며 살아간다면 단언컨대, 우리는 반드시 행복하게 됩니다.
불행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때 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설사 불행을 당했다 해도 반드시 그걸 디디고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요셉의 생애에서 보여주시잖아요?
이번엔 정말 틀린 것 같았지만 번번이 그걸 디디고 더 높은 단계로 오르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도 똑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고통을 이기면 결코 우리의 고통을 값싸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나를 조율해 살아간다면 마음엔 늘 평안이 있고 관계에는 화목이 있고 자신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도 가로막힌 게 없이 맑고 쾌청합니다.
그걸 점점 더 알게 되고, 그래서 점점 더 하나님의 뜻에 맞춰 행하려는 자발적인 마음이 많아지는 게 믿음의 성숙입니다.
저는 요즘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하는 중에도 성령님께서 관여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실수가 너무나 많고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 후회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꾸 나를 맞추는 것은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내 죄성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점점 더 알아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올해 우리는 삶을 파멸과 불행으로 끌고 가는 이 세대의 풍조와 죄의 근성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맞춰가며 살아가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세속과 종교의 영역을 구분해 놓지만 하나님을 믿는 데는 그런 것없습니다.
교회에 나와 모여서 하나님을 섬기고, 돌아가면 생활 속에서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똑같이 예배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주에 나눈 말씀대로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문에서 공의를 세우고, 악을 택하지 말고 선을 택하며 살아가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존 파이퍼목사는 “개인의 삶은 자신이 고백하는 진리에 대한 증언을 담고 있어야 한다. ”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은 나의 믿음을 증언하고 있습니까?
이 세대에 휩쓸려 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서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우리가 삽니다.
그것이 가장 복되고 보람 있고 안전한 삶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길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항상 우리 부패한 마음이 성령으로 새롭게 되기를 기도하며 성령님의 지도를 구하고 선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의 하루하루가 복되고, 평안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중에 우리를 향하신 가장 좋은 결실들을 만들어내는 한 해가 반드시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2017년1월8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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