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씨마저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지만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과 환경까지 다 따뜻하게 녹여 주시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새해 첫 주부터 올 한해를 잘 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잘 살게 해주실거다’ 라고 믿는다고 그 믿음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천국이라면 모를까 바란다고 그대로 되는 세상은 없습니다.
그런 걸 믿음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최근 남자 김연아라고 불리우는 피겨스케이터 차준0 학생이 기대를 받고 있죠.
얼굴도 귀엽게 생기고 4회전 점프를 높이 뛰는 모습이 정말 유망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어린 차선수가 걸그룹이 누군지도 모르고, 하루에 12시간씩 연습을 한다고 하더군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힘든 훈련이 필요한지 그걸 해 내는 어린 선수가 참 대견하기도 하고 대단하게도 보였습니다.
신앙에도 목표가 있고 훈련은 필수입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예수님의 형상을 가장 근접하게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잃어버린 우리들 안의 하나님 형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처럼 변해갈수록 나도, 하나님도, 내 이웃도 행복합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매일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조율하며 사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지난 주 말씀에서 나누었습니다.
또 이 세대를 본받지 않기 위해서 말씀으로 내 생각을 채우고 기도로 주님을 더 체험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교회와 교회생활에 대한 원리와 교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잘 살고 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셔서 즐겁게 따르게 해주시길 소망합니다.
바울은 삶과 일치하는 참된 신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한 뒤 곧 이어 오늘 본문인 교회와 봉사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 안에는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경험을 통해 교회가 곧 주님과 연합되어 있는 신비한 원리를 깨달았던 것이죠.
교회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교회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이 성장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신학자는 이런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교회만 다니지 말고 교회가 되라’
어떤 뜻인지 아시겠죠?
교회는 예배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주님을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연합체입니다.
우리 각자가 바로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바울이 교회생활을 먼저 언급하고 다음에 뒤에서 사회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순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중심을 잡아주는 축이 바로 교회생활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 배운 대로 가정과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순리이고 성공적이지 사회생활의 원리를 교회로 들여오는 게 아닙니다.
현대교회들은 세상의 마케팅원리나 성장원리를 교회로 들여와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도 하지만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교회를 향하시고 교회에 은혜를 베푸십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와 의무적인 예배를 드린 뒤에 썰물처럼 빠져 나가지만 교회생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교회를 통해 복을 받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기한 것은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만큼 교회에 오래 머물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구원과 모든 복의 풍성함을 부어 주시고 교회를 통해 성도들이 이를 공급받게 하십니다.
또 이런 성도의 연합인 교회는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머리되신 예수님의 몸이라는 독특한 원리를 바울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교회는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신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은 예수님의 몸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조직들은 필요해서 만들고 필요 없으면 해산합니다.
구성원들은 언제든지 조직을 떠나고 새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몸의 지체는 생명으로 이어져 있어서 그렇게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에서 지체가 된 우리를 끊어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사탄, 음부의 권세도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을 받고 악의 세력에게서 안전한 유일한 방법은 교회에 나와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든 부모든 어떤 가족이나 그 관계는 유한하고 이 땅에서일 뿐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성도들은 이미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엮여진 것입니다.
성도들 각 사람은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눈 새로운 DNA를 가진 새롭고 특별난 혈통이 된 것이고 그것이 실제라는 증거로 각 성도들에게는 한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십니다.
오직 머리되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생명과 축복이 모든 지체로 공급되고 성령의 은사로 몸 전체가 생기가 넘치고 아름답게 성장해 가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런 아이디어로 교회를 세우셨기에 교회라는 예수님의 몸을 떠나서는 풍부한 영양과 복을 공급받을 수가 없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나 줄기에서 꺾인 꽃가지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그 운명이 점점 피폐해지는 것처럼 그 결과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절대 건강하고 윤택하게 우리 영혼이 자랄 수 없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능력도 교회 안에서 공급하신다는 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올해도 주님의 교회를 통해 충만한 복을 받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에 성도들은 이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냥 밥이나 먹이시고 생존하게만 하시지 않습니다.
일거리를 주시고 그걸 통해 성장시키시고 하나님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에게 주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주님의 몸을 위한 봉사에 있어서도 성경적인 원리를 배워야 합니다.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나서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봉사에 있어서도 이 세상과는 다른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3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권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먼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아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교회에서 우쭐거리는 것,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벌써 칭찬보다는 어떤 긴장감이 느껴지죠?
로마교회 안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들을 바울이 감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아직 로마교회를 방문해본적은 없지만 여러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로마교회 사정을 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서가 기록된 때 역사적인 배경을 생각해 보면 이 말을 꺼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로마시민권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시대에 로마시민권은 미국시민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분증명입니다.
이들이 사는 곳은 당대 최고의 도시 로마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잖아요?
교회의 주축이 된 성도들은 귀족이나 학식이 있는 계층이었을 것입니다.
로마라는 대도시에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가진 로마교회 성도들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사람이 얼마나 하찮은 것에서도 우월감을 갖는 존재입니까?
사람들은 다 남보다는 자기가 낫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우월하지 않다면 적어도 자기가 표준인 줄 압니다.
우리는 정말 가지가지 별 볼일 없는 것을 갖고도 자기를 대단히 여깁니다.
누가봐도 이젠 그만 내려가도 좋을 것 같은데,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고 노욕을 부리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서는 절대로 자신을 열등한 자리에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 우월한 자리에 있고 싶어하죠.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한번도 그런 우월감으로 사람을 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마음이 높은 자의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낮고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의 영적 가난을 깨닫게 되는 데까지는 오래 걸립니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이런 우월한 로마시민들만 있는 게 아니라 유대인 성도들처럼 시민권이 없는 식민지사람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던 로마인성도들과 여전히 선민의식으로 이방인 성도를 얕잡아 보는 유대인 성도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있었습니다.
로마교인들이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시민권도 없는 약자인데, 선민의 자부심을 내세우는 유대성도들이 꼴 사나왔다는 것이죠.
로마서의 많은 부분에 이런 상황에 대한 교통정리 차원의 말씀들이 나옵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로마서를 읽으면 왜 이런 말씀이 나오는지 잘 이해가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앞 부분에서 유대인들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 중에 선민의식과 우월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너희” 위에 “내”가 있다 라는 것이죠.
그런데 교회 안에 다시 이런 현상이 드러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죄성이고 사람관계에서, 교회의 성도들 간에도 항상 바닥에 깔려있는 독소입니다.
이런 자만심이나 우월감을 단칼에 정리할 수 없지만 항상 염두에 두고 겸손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교만 때문에 망한 존재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너’ 위에 ‘내’가 있어, 라고 생각하는 한 하나님의 축복은 없습니다.
이런 차별성은 바울이 따르지 말라고 했던 이 세대의 방식들인 것이죠.
우리는 한 몸이고 서로가 잘되야 나도 좋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한 몸이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고 우월감을 갖는 것은 내 손이 내 발더러 더러우니 찌그러져 있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죠.
교회는 그래도 성도들이 서로 고충을 알아주고 안타까워하며 함께 기도하고,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해줍니다.
우리가 원근각처에서 부류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한 몸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교회만이 갖고 있는 영광입니다.
나와 생각이 비슷하고 잘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이 세대 사람들도 다 잘합니다.
취미가 같은 사람들끼리 동호회 만들면 얼마나 재미나게 잘 지냅니까?
직장에서도 보면 끼리끼리는 항상 하하호호 즐겁습니다.
평생 자기 맘에 맞고 수준에 맞는 사람만 상대한다면 영원히 자기 약점을 모른 채 착각 속에 살게 됩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유난스러운 사람과 지낼 때 저 사람 성격이 문제인 것 같지만 의외로 내가 가진 단점 때문에 그런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여곡절 중에 모인 성도들이 서로 한 지체가 되어 점점 모난 곳이 깎이고 온전하게 성장하도록 교회라는 아이디어를 내신 것입니다.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곳은 유일하게 교회뿐이고 그것이 세상에는 없는 교회의 힘이고 영광인 것입니다.
그것을 허물고 서로에게 자신의 우월감을 증명하려 들면 교회는 불화가 생기고 미운 감정들이 오가며 병듭니다.
이것은 가족간에도 직장생활에도 다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교회에서 배우고 가정과 사회에서 실천하기에 교회생활은 모든 사회생활의 기본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자신의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 올해 모든 주나산의 성도님들이 겸손하게 한 마음이 되고 한 몸을 이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3절 뒷부분을 보면 그런 우월한 마음이 얼마나 무지한데서 오는 지를 가르쳐 줍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모든 것과 믿음까지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나누어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 믿음이 내가 스스로 가진 것이고 내가 갈고 닦은 것 같지만 나 혼자 힘으로 해낸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내 믿음의 주도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얼핏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해서 믿음을 차등으로 주신다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가장 알맞은 믿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누가 봐도 성장과 성숙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받을 믿음을 주시고 그 다음은 우리가 알아서 해나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이 성숙하는 과정에 계속 관여하셔서 그 때마다 가장 적당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처음 믿은 사람에게 갑자기 큰 믿음의 분량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에 큰 차이가 나서 문제가 더 많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아직 믿음이 잘 연단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과도하게 봉사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자기의 믿음만큼 교회를 섬기는 게 제일 좋습니다.
하나님은 주시지도 않고 내놓으라는 분이 아니십니다.
반대로 이젠 좀 더 성도들을 위해 봉사할 만한 믿음을 주셨는데 여전히 섬김을 받기만 하는 자리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것이죠.
교회에는 우리 몸이 전체적으로 골고루 자라도록 구석구석 섬길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6절부터 8절까지에서 하나님께서 각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는 각각 다르고 다양하다고 합니다.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로는 먼저 예언하는 일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언은 미래를 점친다는 의미보다 옛 계시인 성경을 통찰하여 깨닫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 다음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은사, 남을 위로하는 은사, 구제하는 것, 교회 일을 돌보고 다스리는 것, 긍휼을 베푸는 일.
이 은사들을 한 사람에게 다 주지 않으십니다.
저는 가르치는 은사를 주셨지만 다른 분께는 찬양이나, 전도나, 음식봉사나, 정리정돈 같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세상일에는 다방면으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교회를 섬기는 일에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은사가 있고, 그 분야에서 봉사할 때 자기에게도, 교회에도 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은사가 다 합쳐져야 교회가 완성되도록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내 은사가 더 좋고 더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교회인 우리들을 더 성숙하게 자라게 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주님의 뜻일 뿐입니다.
남보다 더 대단한 믿음이나 대단한 봉사는 없습니다.
믿음이 좀 더 성장해서 더 많은 봉사를 하는 사람도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대가 구제하고 선을 행하는 것하고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양심의 작용으로 남을 위해 봉사를 하면 거기서 보람을 느낍니다.
봉사의 이유가 결국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죠.
교회에서 봉사할 때도 대개는 재능을 따라 봉사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자기가 만족을 얻으려고 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기에 기쁨을 얻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안되고 자기만족보다 부담이 더 되면 봉사를 잘 하다가도 어느날 때려 치우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자연적으로 잘하는 일이라도 교회봉사는 절대 그걸로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잘하는 재능에 플러스 믿음의 은사를 주셔야만 그게 꾸준하고 피차에 덕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는 일은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믿음에 의지해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네 힘으로 해라’ 말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더도 덜도 말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라 겸손히 섬기면 다른 성도들에게도 은혜를 끼치고 내가 건전하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는 요즘 하나님이 성숙하고 열심 있는 믿음에만 복을 주시는 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누구든 하나님 앞에 나와 현재 자기가 가진 믿음의 분량대로 말씀을 따라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며 성실하게 믿으면 하나님은 후히 복을 주신다는 것이죠.
어떤 이는 순교할 만한 충성된 믿음을 주셨고 어떤 이에겐 아직 주일예배에 나와 섬기는 정도의 믿음의 분량을 주셨지만 하나님의 축복은 동일하게 모두에게 부요하십니다.
올 한해 우리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교회가 되어서 교회 안에 부어주시는 모든 은혜와 복을 풍성히 누리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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