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 (로마서3장19절-26절)

남수연 2016. 8. 24. 13:19

오늘은 로마서를 통해 우리 구원의 핵심적인 원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 삶을 인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기본원리를 반복적으로 되새기며 다지는 것도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깊고 튼튼한 기초가 없으면 그 위에 세운 모든 것은 항상 불안정하기 마련입니다.

믿음의 기본적인 원리를 교리라고 합니다.

교리는 성경 전체의 내용에서 믿음의 핵심 원리들을 뽑아내서 정리한 것입니다.

교리라고 하면 딱딱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죠.

오늘 들어보시면 교리가 이렇게 쉽고 은혜스러웠나 하고 놀라실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한 줄의 지식과 깨달음을 얻을 때 그 기쁨과 놀라움은 형언할 수 없습니다.

당장 고민되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해결된 것보다 더 당당해지고 어깨가 펴집니다.

그런 지식과 지혜들이 쌓일수록 믿음은 점점 반석같이 튼튼해집니다.

그래서 청소년부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리를 잘 배우면 신앙이 아주 견고한 조직처럼 잘 짜여집니다.

우리나라처럼 이단이 잘 되는 나라가 없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대부분 교회 다니던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안 다니던 사람들은 아예 이단 같은 데 관심도 없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바른 신앙을 구분할 수 있는 교리가 너무 약해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교리 중의 교리, 보석 같은 교리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교리입니다.

모든 성경은 이 원리를 밝히기 위해 기록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알지를 못하기에 믿음이 막연하고 자신감이 부족한 것입니다.

오늘 보석 같은 진리를 잘 이해하고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는 바울사도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왜 로마교회에 이런 편지를 보냈을까요?

1장을 보면 바울이 로마교회를 여러 차례 방문하려고 했는데 길이 막혔다고 합니다.

바울은 멀리서 로마교회가 잘 성장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로마교회의 지도자 역시 이름난 제자가 아닙니다.

로마교회는 약간의 유대인이 섞여있었지만 대부분의 성도가 로마사람이었기에 역사적인 신앙지식이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화려한 세속세상의 중심지인 로마에 세워진 로마교회가 세상과 싸워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견고한 영적 지식으로 무장하길 바랬습니다.

그래서 빨리 로마교회를 찾아가 성경과 구원의 핵심원리들을 가르쳐주려고 마음을 먹게 된 것이죠.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왔을 때, 빠른 시간 안에 신앙의 기본원리들을 배우지 않으면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바울의 로마행이 번번이 가로 막혔다고 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간절하게 계속 기도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로마로 갈 길이 열리지 않았다면 뭔가 다른 뜻이 있었겠죠?

로마로 가지 못하게 된 바울사도는 직접 가서 전하려고 했던 모든 내용을 급한 대로 편지로 써서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논리적이고 상세하게 신앙의 원리들을 풀어 놓은 성경입니다.

만일 계획대로 로마에 갔다면 거기서 가르치고 끝났을 내용들이 이렇게 편지로 기록되어 우리 손에 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우리도 계획이 좌절되고, 기도한 문제들이 틀어져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잘 안되는 일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의 다른 편지인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너희에게 가려고 했지만 사탄이 막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탄도 우리 가는 길을 가로막고 방해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모든 일을 평가할 때, 그것이 결코 사탄의 뜻대로 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비밀을 모르면 하나님이 왜 세상에 악을 그냥 두고 보시냐며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누가 이렇게 하나님보다 더 똑똑합니까?

게다가 악은 인간이 불러왔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악으로 망해 놓은 지구역사를 지금도 붙들어 주십니다.

성도들과 교회를 악으로 가득 찬 세상 가운데서 오히려 온전하게 세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데는 오히려 시험하는 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막힘없이 잘 나가면 우리 믿음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죄성과 세속성으로 인해 믿음 자체를 유지하기 힘들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환경에 살면서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이 아담과 하와잖아요?

악이 주변에 있고 힘든 일이 있을 땐 이게 내게 영적인 보약이다 생각하면 맞습니다.

자만하는 것보다 자중하는 게 더 낫습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바울의 계획이 틀어지며 기록되었지만 성도들의 신앙을 위한 가장 귀중한 성경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기반이 약한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필요했던 로마서는, 오늘날 여전히 신앙의 기초가 부족한 우리에게도 이 로마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사도는 로마교회에 무슨 내용을 써 보냈을까요?

당연히 대부분의 성도들이 궁금해 할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체 무엇인가?

구약시대의 율법은 여전히 지켜야 하는가?
예수님을 모르는 시대 사람들은 심판받는 게 너무 억울한 것 아닌가?

이런 문제들이죠.

지금도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이런 의문들을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질문을 예상해서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답변을 보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오직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핵심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앞장에서부터 순서대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이해하려면 먼저 죄를 알아야 합니다.

죄도 없는 데,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납득이 안 되는 거죠.

또 이 모든 것이 앞뒤가 맞으려면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존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다면 슬쩍 죄를 지으며 사는 게 뭐가 문제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즐기며 살면 되죠.

유대인들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굳이 하나님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지만 로마교회의 대다수 로마인 성도들은 우리처럼 하나님을 역사적으로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논의합니다.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을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이 뭘 원하는지 모른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바울사도를 통해 말씀합니다.

핑계대지 말라

너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양심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으로 풀 수 없는 동물들의 귀소본능이 있죠.

수 천 킬로미터 떨어진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그곳을 기억하도록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저 곳이 고향이다아는 것이죠.

아침에 붉은 태양이 찬란하고 긴 광선으로 대지를 비출 때, 우리의 양심이 소리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서, 신이 계시다는 것을 알도록 하나님이 우리의 DNA를 지으신 것입니다.

모든 민족에 종교가 있고, 사람들이 막연하게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평생 죄를 지으며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인간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을 몰라서 안 섬기는 게 아니라, 싫어서 안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보란 듯이 자기 나름의 자잘한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만 빼고 정말 오만가지 것을 다 섬깁니다.

하나님만 안 섬깁니다.

왜 그렇겠어요?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삶의 주권을 양도하기 싫다는 것이죠.

현대에는 이런 양심과 자연세계의 분명한 증거들을 무시하고 아예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으로 사람들이 무장해 가고 있습니다.

진화론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동물에게서 나온 존재일 뿐이라 신 같은 것은 필요없다는 무신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서 그들의 교활한 잔꾀대로 살게 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간섭 없이 자율적으로 살려면 그러라고 유기하신다는 것이죠.

신자들의 경우도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살길 원하면 하나님은 당분간 그렇게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릴 붙들어주지 않으시면 우리의 안과 밖에는 순식간에 죄가 차오릅니다.

성도들이 인격적으로 악해지는 것은 하나님을 생활에서 배제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이 자율적으로 움직인 결과는 반드시 악이 팽배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2장에서 이 악의 목록을 열거합니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불효, 우매, 무정, 무자비.

이 중 몇 개나 걸리십니까?

이게 다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 모든 악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진노하고 분노하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어떤 악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악에 대해 침묵하신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지금도 악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만일 악이 심판 받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지구를 이미 지옥으로 만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죄목으로 심판대 앞에 서고 그 모든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판결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특히 지옥은 너무 가혹하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공의로 심판하고 죄인을 감옥에 넣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이런 비유를 들더군요.

내 가족이 내 눈 앞에서 범죄에 희생이 되었는데 재판관이 나와서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하는 것이죠.

나 재판관은 관대하고 동정심이 많고 자비로워서 범인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이것을 수긍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한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단지 실수가 아닙니다.

평생을 경찰직에 있다 퇴직한 사람이 인간에 대해 이렇게 비유를 들었다고 합니다.

어떤 부모가 두 살 된 아이를 안고 있는데 아기가 부모가 차고 있는 시계를 달라고 떼를 씁니다.

부모는 안된다고 달래보지만 아이는 점점 더 막무가내로 시계를 달라고 악을 쓰며 울고 불고 난리가 납니다.

어디서나 흔히 보는 모습이죠.

여기서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이가 만일 부모와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순간 부모를 죽이고 시계를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끔찍한 이야기지만 평생 범죄자들을 상대한 사람이 인간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지독한 죄악에 몸서리를 치며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흉악한 죄악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고 심판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죄인을 구원해 내려고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범죄 한 인간들을 한명도 구원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악행을 따라 심판하신다고 부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구원을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선택 된 첫 번째 대상자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이스라엘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을 모른 채로 우리의 구원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구원의 언약을 맺고 죄인으로 살지 말라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포함되는 것을 말합니다.

흉악한 죄가 있는 상태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조건으로 구원의 언약을 하신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종교를 받아들입니다.

인간 본성이 하나님만 아니면 뭐든지 믿는다니까요.

그렇게 언약은 파기되었고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과 똑같은 심판의 대상으로 돌아간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당시에도 여전히 유대인들은 율법을 붙들고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대 신학자 중에는 유대인은 율법으로 구원받고,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힘껏 지켜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죄인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실패를 통해 검증해낸 격이기 때문이죠.

바울사도는 19,20절에서 율법의 기능을 정확히 지적합니다.

율법은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기 위함이라.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법이 지정하지 않으면 죄인 줄 모른다는 것이죠.

미숙아, 사랑해이렇게 규탁형제가 바위에 쓰면 경범죄에 걸립니다.

법이 정하지 않으면, 그게 죄가 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율법의 역할은 무엇이 죄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지 구원의 방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의 입장은 뭐가 됩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과 함께 속죄를 위한 제사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범하고 찜찜한 사람들은 제사를 통해 회개하고 속죄를 받았고, 국민들을 단체로 속죄하기 위해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동물의 피로 속죄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게 벌써 율법이 아니라 속죄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럼 율법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이방인들은 어떡합니까?

그들은 죄가 죄인줄 몰랐다고 할텐데요.

그 사람들에게는 양심이 곧 율법의 기능을 대신한다고 대답합니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양심도 율법과 함께 매일 우리의 죄를 고발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찔려야 하고, 매일 우리의 양심에도 찔려야 합니다.

이것들은 죄에 대해 무지하고 뻔뻔한 모든 죄인들을 죄 아래, 심판아래 두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죄를 알아야 속죄를 받아들일 것 아닙니까?

 

여기까지 이해가 되었다면 드디어 하나님이 준비하신 가장 완벽하고 유일한 구원의 길이 찬연하게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인간의 죄로 인해 단 한걸음도 구원을 향해 스스로 나갈 수 없기에 하나님 편에서 준비하신 완전한 하나님의 의,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한 구원이 우리에게 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 하는 예수님의 속죄는 갑자기 신약시대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시고 오랫동안 준비되어 온 계획적인 사건입니다.

실로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의 모든 역사는 한 분 예수님을 우리에게 확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구약성경이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국가역사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냥 경전이 아니라 국가 역사입니다.

성경의 공신력과 권위를 나타낼 뿐 아니라, 역사책이니까 국가차원에서 이렇게 보존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준비 된 하나님의 의인 예수님의 구원은 오직 믿음이라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그대로 전가된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값으로 계산 할 수가 없어서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의 것이 됩니다.

죄인들의 편에서는 손가락 하나 쓸 힘도 거들 수 없는, 오직 예수님 홀로 모든 죄를 속량하신 것이라고 바울사도는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사람이 아무리 착한 일을 끊임없이 한다 해도 죄를 짓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평생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며 살아도 죄 지은 양을 삭감하기엔 턱도 없이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한가지 좋은 일을 하면 마음에 흡족함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몇 가지 죄를 창출해 낼 것 같습니까?

사람들이 만들어 낸 종교와 우리 신앙이 본질적으로 다른 게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종교는 자력종교입니다.

자기가 노력하고 덕을 쌓고 수행을 해서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무슬림들에게 당신은 천국에 갈 수 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확신하냐고 물으면 그들은 나는 코란을 암송하고, 메카 성지 순례를 다녀왔고, 하루에 다섯 번 기도시간을 지키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에게 물으면 나는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켰으니 천국에 간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불교인이나 천주교인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천국에 갑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인간의 몇 몇 선행과 노력으로 자기의 죄를 스스로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 우리는 의롭게 됩니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심판에서 영생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운명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고 자기 멋대로 살고 싶어 하는지를 폴워셔라는 목사님이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지옥 판결을 받게 된 사람에게 다시한번 기회를 줄테니 내게 와서 나를 섬기라고 간곡하게 말씀합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을 흘겨보고는 지옥문을 확 열고 들어가 문을 쾅 닫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가 이렇게 철저히 틀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인은 가히 원수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둘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예수님은 이렇게 골난 사람들을 향해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리고 화해하자고 하십니다.

자식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결국 먼저 화해하자고 하는 것은 부모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세상종교의 어떤 신도 사람을 사랑하는 신은 없습니다.

로마신화의 신들을 보세요 얼마나 인간을 괴롭히는지.

참 신이고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기이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은 너무나 원대해서 우리 이성이나 감성으로 체험 될 한계를 넘어섭니다.

오직 믿음으로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 오직 믿음으로 이 사랑을 받아들이고 의롭게 되는 구원의 원리를 들었습니다.

이해가 잘 되셨습니까?

왜 이 은혜의 초청을 거부하겠습니까?

오직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의롭게 되어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6년8월21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