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6장12절-23절
성경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지시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요구하는 신자의 삶은 꽤 까다롭습니다.
이런 것을 신자들이 다 지킬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철저한 세상과의 구별과 새로운 생명을 키워가기 위한 노력을 요구합니다.
세상살이에 지친 성도들에게 설교자들은 적당한 위로와 기대감을 심어주길 원하지만 사실상 성경에는 그런 사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적당하게 믿어서는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한 삶은 절대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악의 세력과 우리의 죄의 본성이 우리를 행복과 먼 고통으로 끌어가기 때문입니다.
입시생 자녀를 둔 부모들은 겪어 보셨을 것입니다.
피곤에 찌든 아이가 책상에 앉아 졸고 있을 때, 어떤 부모가 선뜻, 누워서 편히 자라고 말할 수 가 있겠습니까?
오늘 바울사도 역시 고군분투하는 교회를 향해 이젠 좀 쉬엄 쉬엄 믿으라고 말할 수가 없는 처지인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 즉 성도들은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아직 우리 안에 존재하는 죄의 본성과 외부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하는 악의 세력과 세상과의 타협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살아있는 한 멈출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쁨과 확신과 평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화해할 수 없는 전쟁에 돌입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굳게 버티지 않으면 영토를 뺏기고 포로로 끌려갑니다.
지난 한 주, 마음에 평안이 없었다면 어느 순간 마음의 진지를 죄와 마귀에게 약탈당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신자들이 매순간 선택해야 할 삶의 정확한 태도와 이유를 로마서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추구해야 할 삶은 애매하고 두루뭉술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분명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혼미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마음에 확정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12절에서 13절의 말씀은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라
너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우리가 직시해야 할 분명한 영적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 몸은 죄가 지배하던지 아니면 의가 지배하던 지 둘 중 하나의 상태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불의의 무기가 되어 죄를 짓던지, 아니면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의 삶을 돌이켜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 몸을 누구에게 바쳤습니까?
나는 그저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의의 무기로 드리지 않았다면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 준 것입니다.
냉정하게 나 자신을 살펴보면 이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계명대로 순종해서 우리가 사랑의 도구가 되지 못했다면, 분명히 소극적으로는 무관심, 적극적으로는 미움에 우리 감정을 내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더 적극적으로 가까이 하고 말씀과 기도로 믿음을 돌보지 않았다면 그 시간에 불신앙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았고 중립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선을 그어줍니다.
의를 행하지 않았다면, 죄를 지은 것이라고.
우리는 항상 죄를 짓기에 이 친숙한 죄를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비극을 초래한 이 ‘죄’를 하나님은 신자들에게도 절대 가볍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신 해법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독생자가 인간의 죄를 덮어쓰고 심판을 대신 받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내려오셔서 인간들에게 치욕을 당하고 육체의 고통과 수난을 당하는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구원이란 다르게 말하면 이 죄 문제를 해결 받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과 의로우신 심판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 수 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15절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도 이 ‘죄’ 문제는 심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죄는 지금도 우리 속에 살아서 우리 인생을 괴롭게 하는 원흉입니다.
죄를 잘 죽여야 거듭난 우리 생명이 잘 자라고 이생과 내세에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은 십자가 이전이나 이후나 똑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리의 죄를 못본 척 하시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여전히 죄는 하나님께로 부터 성도들에게 공급되는 풍성한 축복을 가로막는 주범입니다.
죄를 가볍게 다루는 현대교회의 풍조는 신자들의 거룩한 영광을 무너뜨리고 세상 속에서 한심하게 보는 존재가 되버린 것입니다.
얼마 전 한 기독교단체가 9호선 지하철 역명칭에 봉은사역이 웬말이냐 코엑스역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전체가 호되게 역풍을 맞았습니다.
실제 인터넷 네이트에서 봉은사역이 좋으냐 코엑스역이 좋으냐를 놓고 24시간 인터넷 찬반 투표를 실시했습니다.
보통 인터넷 투표가 1,2만명 정도의 참여율을 보이는 데, 그날 110만명이 참여했다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그만큼 뜨겁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코엑스역이 55%, 봉은사역이 45%로 집계되었습니다.
일반 시민들도 코엑스역이 좋다는 의견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단체가 봉은사역 반대 입장을 내놓자 인터넷 댓글은 정말 용암처럼 부글부글 들끓었습니다.
분노와 경멸에 가득차 교회를 향해 셀 수 없는 돌을 던졌습니다.
사도행전은 기록하기를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으로 가득 찼던 초대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칭송했고 상종하기도 어려워했다고 증언합니다.
죄 문제를 적당히 다룬 한국교회는 더 이상 사회에서 위엄과 칭송은 커녕 신임도 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 모든 게 우리가 해 놓은 작품이고 스스로 자기 발등을 찍은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향해 들끓는 적대세력의 조소와 폭력은 죄 문제를 청결하게 다루지 못한 신자 개인에게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신자들이 직장과 일터에서 가십거리가 되거나 여기저기 문제가 터지고 심신이 곤고하고 혼란 속에 있는 게 다 같은 원리입니다.
다 죄가 우리의 죽을 몸을 지배하도록 허용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매몰찰 정도로 잘라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믿고 싶지 않고 믿어지지 않지만 우리의 지위는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죄에게 굴복한 죄의 종과 하나님께 순종한 의의 종.
중간은 없습니다.
죄에게 우리 자신을 내주는 죄의 종의 끝은 사망이고 하나님을 위해 의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의 끝에는 영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삶을 바치는냐에 따라 누가 우리의 상관이 되는지가 결정되고 그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에게 자신을 내어주면 죄의 종이 된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과거에 최민수 흉내를 내며 죄민수라고 부르던 조원0 이라는 개그맨이 있었습니다.
최근 TV에서 본 적이 없으실 것입니다.
두 번의 음주운전으로 모든 방송활동을 중지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조원0 씨가 알콜 중독을 치료받았다는 인터넷기사를 보았습니다.
조원0 씨의 아버지가 알콜중독자였다고 하더군요.
음주가 심했던 아버지가 원0 씨 육학년 때 음주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을 보며 자기는 절대로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청소년 시절부터 술을 입에 대게 되었고 조씨도 역시 과도하게 술을 마셨던 것입니다.
첫 번째 음주운전으로 택시를 들이받은 날도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또 술을 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국 면허 정지에 해당할 만큼 술을 마시고 두 번째의 음주사고를 낸 뒤, 한창 잘나가던 모든 방송에서 하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알콜중독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끊어지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엔 사람이 술을 먹지만 나중엔 술이 사람을 먹는다는 소리가 이런 경우죠.
우리가 죄를 지으면 결국 이 경우처럼 그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세상에서 사는 우리가 어떻게 죄없이 사느냐, 몸의 욕구도 좀 따르고 세상의 풍조에 맞춰 좀 편하게 그렇게 살면 왜 안되냐 항변한다 해도 성경은 분명하게 그 결과에 대해 말씀할 뿐입니다.
죄에게 자신을 내주면 죄의 종이 되고 그 끝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죄는 아까울 게 없습니다.
끊지 못하고 적당히 살수록 삶이 더 길게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추상적이고 막연한 생각들을 성경이 보여주는 관점에서 잘 파악하고 심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가 모든 것의 주인이 되려고 반역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아름다우신 창조의 목적에 도전하고 망친 모든 죄를 심판하고 바로 잡으실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창조주로 섬기지 않고 자신의 몸을 죄의 병기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신분은 바뀌었지만 죄의 뿌리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조금만 건드려주면 여지없이 죄가 고개를 내밉니다.
신자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치열한 싸움이 바로 이 죄와의 싸움입니다.
우리 안에 죄의 뿌리는 잔뿌리가 아니라 깊게 본성 안에 박혀 있는 어마어마한 존재입니다.
우리 안의 도사리고 있는 죄는 예수님을 믿기 전, 과거에 행적인 옛날 정서로 옷 입은 우리 자아에 대한 강력한 애착입니다.
하나님을 배제시키려는 자기애, 성취욕, 모든 탐욕과 음란과 방탕함과 시기와 분노 등을 말합니다.
이런 우리의 죄를 강력하게 부추기는 외부의 작용들이 있어 우리 죄와 한 통속을 이룹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세상입니다.
세상은 구원받은 우리가 여전히 발을 디디고 사는 곳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새 생명을 질식시고 세상의 사상을 주입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유혹하는 강력한 적이 바로 세상입니다.
세상을 단지 쾌락이나 사치스런 물건이나 휘황찬란한 문명 같은 정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세속성은 훨씬 더 깊고 사악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향하는 마음을 약화시켜 끌고 가는 강력한 적입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바울사도의 말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 외부에서 우리의 적극적으로 죄를 부추기는 것은 마귀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죄로 유혹하는 것은 정말 교묘한 작업입니다.
우리 안에서 내 죄성이 움직이는 것인지 외부에서 마귀가 죄를 부추기는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성이 마귀의 계획에 아주 은밀하게 내통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신학자들의 경험을 토대로 마귀가 역사하는 죄는 우리의 죄성에서 나오는 죄와 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두면 영적으로 유익합니다.
모든 죄가 다 우리 죄성에서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이걸 잘 이해하면 우리 곁에서 얼마나 자주 마귀가 우리 감정과 생각에 작용하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1)먼저 마귀가 우리에게 쏘아대는 죄의 생각은 순간적이라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 죄성에 따른 죄는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서서히 죄의 형태가 드러나고 깊어집니다.
그런데 마귀가 주는 죄의 생각은 순식간에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인과관계도 없이 불현듯 증오심에 사로잡힌다거나, 갑작스런 우울감이나 음란한 생각 같은 경우입니다.
유혹을 사탄의 불화살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것이 부지불식간에 날아오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욕설 파문을 일으킨 탤런트 이모양의 경우 정말 뜬금없이 상대에게 무자비한 욕설을 쏟아 부었더군요.
전후 상황을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욕설이 나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갑자기 과도한 분노와 통제가 안되는 격정에 사로잡히는 경우는 마귀의 불화살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도 참고하면 좋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환경 속에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억지스럽지 않습니다.
무리한 계획이나 객관성이 부족한 아이디어들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합니다.
2)또 마귀가 주는 죄의 생각은 하고 나서 자기도 소스라치게 놀란다는 것입니다.
내 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이미 우리 자신의 성향이라 본인이 그렇게 깜짝 놀랄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죄의 생각은 불현듯 떠오르는 하나님께 대한 불경스런 생각이나 자살과 같이 소름이 끼치고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생각자체가 혐오스럽고, 빨리 벗어나고만 싶은 생각이 드는 죄의 생각은 마귀의 불화살이 쏘아진 것입니다.
이런 마귀의 미혹을 내 생각으로 알고 수용하기 시작하면 결국 마귀가 우리 마음에 진을 치고 권리를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유기적으로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죄를 잘 파악해야 죄에게 덥썩 우리 자신을 넘겨주어 죄의 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임의로 자유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자유롭게 죄를 짓다 하나님을 섬기다 넘나들 수 있을 것 같지만 죄를 짓는 순간 이미 죄의 종으로 속박되다는 것입니다.
한번 죄의 종이 되면 죄가 우리를 점점 옥죄고 우리 심령과 환경을 악하게 끌고 간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삶이 분명한 영적인 공식을 갖고 매일, 지금도 우리 앞에 현실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죄를 다루지 않고 죄에 지기 때문에 많은 순간 우리는 사악한 죄와 세상과 마귀의 종으로 고통당하면서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성경은 눈꼽만한 아량도 없이 죄에 대해 단호하게 싸우라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 낭만적이고, 조금은 매력적인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정말 우리는 세상에 살아갈 동안 이 죄를 죽이고 죄와 싸우고 죄를 혐오해야 합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를 괴롭게 하는 원흉은 바로 우리 안의 본질적인 죄이고 또 이 죄가 마귀와 세속과 은밀히 내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죄에 대한 인식도 없이 사는 신자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불행에 노출되어 사는 것입니까?
그런데 신자들이 이런 죄문제를 다루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만만하고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에 졌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과 같은 불행한 삶과 비슷한 상황 속에 들어간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부터 단절되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유롭던 심령이 무언가 억압되고 답답한 것을 느낍니다.
내가 홀로 있는 것 같다보니 현실이 두렵고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집니다.
죄를 짓고 나면 수치감이 있고 초라한 나락으로 떨어진 느낌이 듭니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던 영생의 능력이 사라지고 죄의 추악한 결과물들이 우리 주변에 곤혹스럽게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우리 안의 모든 죄와 싸워서 점점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죄를 죽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본문에서 바울사도가 제시합니다.
무조건 싸워서 되는게 아닙니다. 죄는 강력하고 끈질기고 교묘해서 바울사도가 말씀하기를 우리가 순식간에 죄에 팔려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의 방식대로 싸워야만 우리가 죄에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1. 그것은 13절에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앞 장에서 바울사도는 구원의 교리에 대해 아주 반복적으로 설명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우리의 죄악 된 옛사람이 함께 못 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나로 살겠다고 고집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심판당할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만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원리입니다.
이것은 명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공식이 아니라 실제로 믿음 안에서 이 일들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구원을 받듯이, 이 진리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옛날의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못박혀 죽어야만 합니다.
다들 그렇게 죄악으로 어쩔 수 없는 처치곤란한 과거의 나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몸을 갖고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로 끌고 가려는 옛사람은 이미 죽었다라고 믿음으로 확인하며 고개를 드는 죄를 단칼에 잘라내라는 것입니다.
2. 다음은 21절에 과거 우리가 죄의 종이었을 때의 부끄러웠던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바울사도 말씀합니다.
솔직히 탁 까놓고 말해보자, 과거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던 때 어땠었냐는 것입니다.
로마라는 향락 도시에서 성적 타락과 부도덕에 쩔어 살던 때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때에 무슨 열매가 있었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워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죄를 미화시키려 해도 결국 과거의 그 부끄러웠던 죄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생각이 올 때 과거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 우리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때 얼마나 우리가 불행했고, 가정은 망가졌었고, 죄 중에 뒹굴었고, 자괴감과 절망을 느꼈었는지를 기억한다면 다시 과거 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결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3. 또 17절에 교훈의 본을 적극적으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은 형태를 찍어내는 틀을 말합니다.
붕어빵 틀에다 넣고 찍으면 똑같은 붕어빵이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교훈의 틀에 우리 자신을 맞춰 똑같은 형태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나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방식은 자기 소견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것은 사사기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성이 섞이지 않도록 교훈의 본을 만들어 놓으셨고 거기에 우리를 맞춰 찍어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교훈의 본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의 행하신 일과 그 인격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선지자들에게 전하게 하신 교훈과 계명들입니다.
그 틀에 우리를 부어 넣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경건한 형상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매일 적극적으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성도들의 올바른 행동을 따른다면 경건의 능력이 강화되고 죄에 대한 욕구를 다루기가 점점 쉬워질 것입니다.
4. 다음은 우리를 은혜 아래 두라는 것입니다.
14절에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의롭게 된 우리는 과거처럼 속수무책으로 죄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신분이 의롭게 바뀌었을 뿐 아니라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군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는 가장 강력한 지원군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입니다.
죄의 유혹이 오고, 하나님께 나를 드리기 보다 죄의 병기가 되어갈 때,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셔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죄를 혐오하는 마음을 주시고, 의지를 더 강하게 작동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불을 끄기 위해서는 물이 있어야 하듯이 죄를 끄기 위해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의 방편인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순종 봉사 전도 이런 삶을 더 추구하면 우리가 흠뻑 은혜 안에 사는 삶이 되리라 믿습니다.
5.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종으로 드릴 때, 우리는 결코 죄의 종이 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지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것은 죄의 종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인지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종이 되지 않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우리를 의에 드려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될 때, 죄는 결코 우리를 끌고 가 자기의 종을 삼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완벽하게 보호받고 최고의 영광과 영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관은 모든 악을 이기시고, 크신 능력으로 우리가 실패하지 않는 선한 싸움을 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조금 복잡한 것 같지만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짚어주는 말씀입니다.
세가지 죄의 주체들을 기억하고 경계하십시오.
우리의 옛육신과 세상과 마귀이고 이들은 은밀히 내통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죄의 종으로 속박되어 선하고 아름다운 은혜로 부터 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죄를 이기기 위해 힘써야 할 유익한 다섯가지 기억나십니까?
죄를 좋아하는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인정하고 죄를 지으려는 속성을 믿음으로 죽이십시오.
죄중에 있던 과거의 부끄럽고 고통스럽고 열매 없던 삶을 상기해 보십시오.
성경의 교훈의 본을 적극적으로 따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에 더 가까이 다가 가십시오.
그리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종이 되기로 결심한다면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가장 최상의 상태로 날마다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2015년3월8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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