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에베소서3장14절-19절 (속 사람을 강건하게)

남수연 2018. 7. 20. 14:11

지난 한 주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믿음이 좋아지면 세상사는 것도 점점 더 쉬워지니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살다보면 좋은 점은 못 누리고 오히려 갈등의 소지만 높아집니다.

그래서 안 믿는 친구는 별 고민 없이 잘 사는 것 같은데 믿는 나는 더 사는 게 복잡하게 느껴지는 것이죠.

이번에 한국목회자협의회에서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예상대로 가나안성도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천만 기독교인 중 이백만명 이상이 현재 교회를 끊었다고 답했습니다.

또 자신의 신앙수준을 낮게 보는 성도들이 더 늘었다고 합니다.

열 명 중 4명이 자기 믿음이 기독교에 입문한 수준이라고 답했습니다.

새신자가 현저히 줄어든 교회 현실로 볼 때 이분들이 새신자는 아닐 겁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자기가 봐도 별로 아는 게 없고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솔직히 답한 것이죠.

우리 청소년부는 요즘 믿음이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나요?

바울사도가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 기도한 내용을 보면 왜 한국교회에 이런 문제들이 생겼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울사도의 기도내용을 보면 우리가 하는 기도와 좀 다릅니다.

기도의 내용은 곧 신앙의 내용입니다.

신자들의 기도가 성경의 기도와 다르다는 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문제와 큰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옛날엔 절대적인 빈곤을 벗어나기 위한 간절함이 신앙과 기도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습니다.

우리도 다 경험했지만 내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있을 때 제일 간절히 매달렸잖아요?

과거에는 구하는 게 기도의 내용이고 받아내는 게 기도의 목표였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경제가 힘들다고 하지만 무슨 일이든 해서 먹고 사는 것은 해결됩니다.

최저시급도 조금씩 오르고 있잖아요?

의식주와 축복을 내걸었던 한국 교회에 위기가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천년전 에베소교회라면 먹고사는 문제, 생존의 문제가 당연히 지금보다 더 절박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보니 사도는 그것에 매달려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 중요하고 더 강력한 삶의 무기가 되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바울사도를 통해 이미 가르쳐 놓으신 것입니다.

그걸 외면하고 당장 손에 쥘 떡만을 가르쳤던 한국교회는 현재의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제 손에 떡이 있으니 더 이상 구해야 할 필요가 없고 신앙의 방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다 같은 문제입니다.

지난 주에 왜 기도를 안 하셨습니까?

기도 안 해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구하지 않아도 필요한 게 충당이 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구하고 받는 것은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요즘 빅픽쳐란 말 많이 쓰죠.

큰 그림이란 뜻입니다.

오늘 바울사도의 기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큰 그림, 빅픽쳐를 보여줍니다.

이 신앙의 큰 그림을 마음판에 잘 입력하고 바울의 기도대로 우리도 기도하고 또 그 기도대로 살아갈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먼저 14, 15절은 우리가 어떤 하나님께,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믿음과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하나님은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만유의 아버지고 주인이시라는 진리의 표현입니다.

이름은 낳은 부모가 지어 줍니다.

우리 중 아무도 자기 이름을 자기가 지은 사람은 없잖아요?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생명에 관여한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또 우리가 강아지를 입양하면 이름을 지어주죠.

낳은 것은 아니지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주인으로서의 특권입니다.

또 이름은 그 사람을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놓고 몇날이 지나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면 그 자식은 부모에게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사람사이에서도 서로 이름을 모르고 지낸다는 것은 자기 인생에 깊이 끼워줄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겠죠.

하나님이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다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신 영의 아버지시고 모든 인간의 주인이십니다.

또 별 존재의 의미도 없이 살다 가는 것 같은 허다한 사람들이 하나님께는 다 각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이름을 지으신다고 이사야서4026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오늘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셨기에 이렇게 예배하러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아마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만의 이름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천국에 가면 아무래도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우리 육신의 부모님이 지어준 그 이름을 쓰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처음부터 이름을 지어주시거나 이름을 다시 지어 부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시몬을 베드로로.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하러 나갈 때 먼저 바울이 기도했던 그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을 주시고, 기쁨으로 우리 한 사람의 이름을 지어주시고, 이름을 불러주시는 하나님을 확신하며 나가시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아버지 앞에 바울사도는 무릎을 꿇고 빈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 앞에 라는 뜻은 친밀하게 마주 앉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심판관이나 주인 앞에 조아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바로 위 12절에서도 예수님 앞에 담대히 나간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그(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우리 역시 아버지께 나갈 때 담대함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무릎이 닿을 만큼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마주한다는 생각을 떠올리식 바랍니다.

그런데 왜 바울사도는 담대하면서도 무릎을 꿇고 빌까요?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간절함을 뜻하는 것이겠죠.

간절하면 저절로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해보면 간절히 구할 때는 몸의 자세가 벌써 간절해집니다.

설교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사도가 지금 무릎을 꿇은 것은 자기 자신의 기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을 위한 그 간절함으로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 기도도 아닌데 그런 간절함으로 무릎을 꿇을 수가 있을까요?
바울사도가 천성적으로 그렇게 사랑이 많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마음이 있는 것은 바울 자신만의 마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미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 구할 것을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함께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지금 바울사도이 기도할 내용은 성령께서 주신 것이고 그 간절함 속에는 성령님의 간절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분위기가 이런 것입니다.

옛날에 부모들이 왜 선생님 앞에 가서 머리를 조아립니까?
자식들이 부족하고 잘못하기 때문이죠.

또 자식 좀 더 잘되게 돌봐달라고 자세를 낮추고 부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실상 가장 중요한 기도가 필요한 당사자는 철없는 자식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잠만 자고 있는 것이죠.

에베소 성도들은 이런 기도를 할 생각도 안하고 우리처럼 겨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주 내내 화를 내고, 남을 헐뜯기도 하고, 부정직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생각도 못하고 살았겠죠.

그런 모든 연약함을 떠안고 기도하는 것은 본인이 아니라 지금 제 삼자입니다.

바울사도가 차가운 감옥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성령께서 탄식하며 바울과 함께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보좌우편에서 역시 그 기도에 대해 보증하시고 변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시고 기쁘게 응답하시는 것이구요.

우리가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기도를 위해 삼위 하나님께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일하신다는 게 놀라울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고 좀 더 가까이 불러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것 자체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가장 은혜롭고 복된 시간인 것입니다.

아무리 버벅거리고, 무엇을 기도할지 잘 몰라도, 그래도, 한마디라도 기도하는 게 복입니다.

성령께선 이런 연약한 우리를 위해 함께 간구해 주실 것입니다.

또 이런 은혜를 먼저 깨달은 성도들은 바울사도가 지금 기도하듯이 아직 믿음이 부족한 자식들과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본격적으로 바울사도가 무슨 내용을 기도했냐로 들어가겠습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기도의 내용이고 우리도 실제로 이것을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수박겉핥기식이 되기 때문에 이 부분은 다음 주까지 나누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16절만 보겠습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오며

바울사도가 먼저 기도하는 것은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아버지의 영광의 풍성함 때문입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속죄해 주시고 성령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아버지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의 풍성함 때문입니다.

또 그 영광의 풍성하심으로 자신의 거룩하고 성결한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성령께서도 하나님과 속성이 같으시기에 우리 안에서 우리를 부요하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바울사도는 성령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더 강하게 해주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속사람이 강건해지길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아니었다면 오늘부터 꼭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시길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속사람이 무엇인지, 왜 강건해야 되는지를 좀 알아야 하겠죠.

여기서 속사람은 외유내강에서의 내면의 정신력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정신력이 강해도 속사람은 허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속사람이 강하면 정신력도 강해집니다.

성경에서 속사람이라고 할 때는 겉사람과 대조적으로 쓰는 말입니다.

겉사람은 단지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라 자연상태로 태어난 사람의 인격전체를 말합니다.

육신, 옛사람, 다 같은 말입니다.

속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을 감각하고 하나님을 선호하는 영을 말합니다.

자연상태로 태어날 때 이 속사람은 죽은 채로 태어납니다.

뭔가 흔적은 있지만 사산된 채로 태어나는 것이죠.

속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고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그 성령의 능력이 사산되어 나온 속사람도 다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속사람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원숭이에서 진화 된 고등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에 파나마원숭이가 돌로 견과류 껍질을 까먹는 걸 발견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과학자들이 말하길 이 원숭이들이 석기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거예요.

좀 있으면 청동기로 칼과 화살도 만들고 폭탄도 제조하게 되겠네요.

인간은 진화한 고등동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고 믿어지지 않으니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인지하고 하나님께 향하는 속사람이 있는지를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속사람은 과거의 나와 완전히 다른 성향으로 하나님을 지향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셨나요?

과거 하나님께 무관심했던 나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자 하는 또 다른 나, 이 두 개의 내가 있습니까?

신자들의 땅의 삶은 이 두 개의 내가 서로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속사람인 나는 TV를 끄고 성경을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겉사람인 나는 오늘 피곤한 하루였으니 그냥 좀 생각 없이 쉬자고 의견을 냅니다.

속사람인 나는 요즘 왜 이렇게 믿음이 나태해지지 좀 정신을 차리자고 하지만, 겉사람은 다들 그렇다며 얼른 세상으로 관심을 돌리게 합니다.

겉사람만 있는 사람은 아무 갈등도 전쟁도 없이 나날이 평화로운 것이죠.

때로는 안 믿는 분들이 더 평화로워 보인다니까요.

이 싸움에서 속사람의 의견을 따를수록 속사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승리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단단해지고, 믿음은 강해지고 세상에 없는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바울사도가 그것을 기도하는 것이죠.

우리의 겉사람은 철저히 세속과 죄와 이기심과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의 사람입니다.

겉사람과 밀착된 우리 인격과 습관들을 속사람과 맞춰가는 것은 정말 새로운 삶인 것입니다.

바울사도은 그것이 쉽지 않다고 로마서7장에서 기록했죠.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죄의 법으로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안에 이 두 사람이 싸우는데 속사람이 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옵고

우리가 이길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속사람의 소원을 더 강력하게 일으키시고 행할 의지를 더 굳게 해주시며 기쁨으로 속사람을 따르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속사람을 강하게 하시는 방편은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행함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예배드리는 가운데 우리 속사람이 강해진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중 성령께서 우리를 분명히 강하게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중 우리 속사람이 점점 강해지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꾸준한 경건생활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더욱 강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삶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면 빵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진학문제도, 결혼문제도, 사업문제도 다 하나님의 인도를 잘 받을 수 있습니다.

속사람이 강해지면 의지도 강해지고 감정도 잘 다스릴 힘이 생깁니다.

속사람이 강해지면 이 땅의 삶을 능력 있게 감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도 헌신할 수 있습니다.

속사람이 약하면 믿음의 삶이 빈약하고 하나님을 위한 봉사자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세상과 악의 세력에 늘 시달립니다.

마귀는 영적 약자를 더 공격해서 믿는다는 이름은 있지만 아예 힘을 못쓰게 만들어 버립니다.

가나안신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죠.

세상사람들도 신자들을 공격합니다.

신자들이 시험에 걸려 넘어지는 걸 통해 하나님이 없다는 자기의 신념이 맞다고 확인하려고 합니다.

신자들이 강하고 잘되면 안 믿는 자신이 틀렸을까봐 좌불안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잘 되고 강건해야 합니다.

역경을 만나도 요셉처럼 점점 더 견고함을 보이며 결과적으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야 합니다.

시련이 와도 소망을 굳게 잡고 흔들리지 않게 속사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이 일엔 항상 마귀와 겉사람의 강력한 방해가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조금씩 이겨나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처음엔 주일성수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시험과 훈련을 반복하다 어느새 넉근이 주일성수하는 신앙이 되었잖아요?

오늘부터 당장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시길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과 기도로 속사람을 충실하게 키워가시길 바랍니다.

또 매사에 예수님의 말씀과 계명을 생각하며 생활 속에서 하루 한번이라도 실천하는 복된 습관을 훈련하시길 바랍니다.

훈련만이 몸의 근육을 만들 듯이 성령 안에서 살제 지켜나가는 훈련만이 우리 속사람을 강인하고 아름답고 복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2018년7월15일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