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에베소서3장14절-19절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남수연 2018. 8. 3. 14:26

연일 폭염 속에 성도님들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주도 성빈이부터 이안순집사님까지 우리 모두를 강건하게 지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지난 주일 설교 말씀대로 속사람은 강건하셨나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겉모양을 가꾸고 단련하는 데는 아낌없이 시간과 돈을 씁니다.

요즘은 젊은 여성들도 건강미를 중시해 근력을 키우고 근육을 만드느라 구슬땀을 흘리죠.

정신력을 키운다고 마음수련을 하고 의지를 단련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론 우리도 속사람을 담고 있는 육체의 건강을 위해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국 육체의 집은 점점 무너져간다고 상기시킵니다.

건강도 미모도 정신력도 한없이 부여잡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육체의 집이 무너져 간다 해도 속사람이 점점 강하게 우리를 떠받쳐 줄 것입니다.

우리 속사람을 앞으로도 계속 연단해 가도록 노력하고 성령께서 도와주시길 기도해야겠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성도를 위한 바울사도의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떻게 우리 믿음의 큰 그림, 빅픽처를 갖고 살아갈 것인지 큰 은혜와 깨달음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바울사도는 성도들의 신앙이 더 현실 속에 자리 잡길 간곡히 기도합니다.

구원이 진짜임을 깨닫게 되면 모든 생활이 믿음을 중심으로 다시 각을 잡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으로 다시 맞춰지게 되는 것이죠.

바울사도는 성도들의 삶이 그렇게 되길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하나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먼저 바울은 성도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동거하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죠.

신앙에서의 관건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냐 보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냐 아니냐 입니다.

성도들이 종교심을 갖고 하나님을 믿는 것엔 큰 거부감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아무거나 잘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서 내 삶을 주도하시게 하는 것엔 망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계십니까?

예수님이 마음에 내주하시는지를 알고 싶다면 먼저 자신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나는 진짜 예수님이 내 삶에 관여하고 내 인생의 통치자가 되시길 원하는가?

정말 예수님이 가족처럼 나와 교류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를 바꿔갈 의향이 있는가?

내 미래를 예수님의 결정에 맡길 수 있는가?
만일 솔직하게 그것을 원하고 있다면 예수님은 이미 함께 하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원하고 마음의 문을 여는 사람에게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내 인생을 주님께 양도하거나 전심으로 따를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은 그렇게 결단하기까지 더 우리를 이해시키고 설득해 가실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과 귀를 활짝 여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려하는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전까지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 내주하시기 전까지 우리를 차지한 주인이 따로 있다고 성경은 밝힙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로 말씀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1229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강한 자 사탄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누구도 사탄이 차지한 영혼을 되찾아 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도 마귀를 이길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정신력이라는게 아주 작은 말 한마디에도 무너질 만큼 불안정합니다.

과수원에 물 좀 더 대려고 싸우다 사람을 죽이는 게 그런 게 인간의 정신력입니다.

그런 뉴스 보면 정말 사람이 뭔가 싶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사람을 죽일 만큼 그렇게 악하게 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히 훈련된 운동선수들도 어느 경기에서 말 그대로 무너지잖아요?
권력과 돈이 있으면 겁날 게 없는 것 같지만 그걸 콘트롤 못하는 게 인간입니다.

마귀가 조종하기 제일 쉬운 게 권력과 돈 위에 올라탄 사람입니다.

탐욕과 죄악의 속살이 다 보이게 끌고 다니다 무너뜨리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보다 강한 자, 마귀를 결박하고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사도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래도 많은 부분을 희생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참 믿음의 언저리만 계속 맴도는 것이 될까봐 두렵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피아노도 조금, 바이올린도 조금, 수영도 조금, 태권도도 조금, 그렇게 찔끔 찔끔 맛만 보다 말잖아요?
정작 필요할 때 단 한 개도 제대로 써 먹을 수가 없습니다.

더 깊이 발을 들이지 않고 믿음의 언저리만 맴돌다 정작 천국문 앞에서 내밀어야 할 믿음의 티켓을 꺼내지 못한다면요.

예수님은 정말 살벌하게 구원의 긴박성을 경고하셨습니다.

네 오른손이 범죄케 하면 찍어내버리라. 그거 하나 버리고 천국가는 게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요즘 사람들은 신앙의 문제를 가볍고 달콤하게 다루려고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것을 희생해서라도 꼭 우리가 가야 할 영원한 본향입니다.

제가 방향감각이 많이 없습니다.

건물이나 지하도에서 원하는 방향을 추측해서 나오면 꼭 반대쪽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하는 말이 요단강 건넌 뒤에 천국 가는 방향도 거꾸로 잡아 지옥으로 갈까봐 요단강 까지 손 붙잡고 같이 가야한다고 놀립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유일한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예수님을 영원한 주님과 보호자로 모시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은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신뢰를 뜻합니다.

믿을만한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뢰하게 되잖아요?

예수님을 신뢰하고 내 소중한 인생을 맡기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마음에 계신다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느낌으로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이 그러시겠다는 말씀을 신뢰하고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또 이 믿음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뒤 평생 현실에서 적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셔놓고 완전히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매순간 예수님께서 내 삶에 주인이심을 떠올리고 의식하며 살아야 되는 것이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고 매순간도 역시 믿음으로 우리 안에 영원히 눌러 사시는 예수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참 믿음을 가지게 도와주세요

오늘 하루도 예수님께서 나와 동거하시니 주님의 말씀대로 살게 해 주세요.’

기도는 막연한 바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고 바라는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여전히 눈에 보이진 않고 느낌은 없지만 점점 부정할 수 없이 확실하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믿음을 갖게 해 주실 것입니다.

 

다음은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다면 주님은 우리를 사랑가운데서 행하도록 가르치실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이 믿음으로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된다고 합니다.

뜨거운 믿음과 충정심이 성도들을 견고하게 할 것 같지만 하나님이 정해주신 원리는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견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위해 기도했고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남을 향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힘을 주시길 기도하고 힘써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사랑하라고 할 때는 사랑의 감정을 따르라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사랑을 명령할 때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인 면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감정이 있다면야 저절로 사랑이 되는 것이지, 거기다 사랑을 하라는 명령은 맞지 않죠.

사랑할 수 있는 의지야 말로 진정한 힘입니다.

사랑이 안 되면 아무리 열성적인 믿음이 있다 해도 사실은 뿌리와 터가 약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터가 약한 사람의 특징은 미움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좋다고 뭉쳐 다니다가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금방 마음이 바뀝니다.

의지적으로 남을 사랑할 힘이 없는 것이죠.

성도들의 강인하고 견고함은 사랑에 있다고 오늘 바울사도의 기도가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랑이야말로 가장 힘써서 기도하며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뿌리가 깊게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항상 이것을 기도하며 하나님과 이웃과 나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형제사랑은 우리 감정이 미움이든 애정이든 느껴지지만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정리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1415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이미 주신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시험과 어려움을 이기고 주님의 날을 지켰으니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배운 말씀을 기억해서 지켰다면 예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감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감사입니다.

저는 감사가 가장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일에 감사가 나온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며, 감사하며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 자신도 사랑해야 합니다.

단 신앙의 관점에서 새롭게 사랑해야 합니다.

나의 여건들과 가진 능력과 세상의 평가대로 나를 보는 것은 믿음의 관점이 아닙니다.

남과 비교하며 나를 사랑한다면 우월감에 빠지거나 열등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죄로 오염되고 일그러졌겠어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지금보다 더 악할 때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바울사도의 기도처럼 더 성숙한 믿음으로 가야 하지만 조금씩 주님을 향해 나가는 현재의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주방에서 땀 흘리며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할 때 스스로를 칭찬하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누가 좀 몰라주고 칭찬해주지 않아도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진실한 마음으로 나와 예배를 드리고, 찬양으로 봉사도 하고, 열심히 믿음이 자라려고 하는 성도님들 다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일터에서 신자임을 드러내는 나, 누군가를 교회로 인도하려고 애쓰는 나, 다 사랑할 만합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에 이렇게 차분하게 마음을 정하고 예수님을 믿는 청소년부 매우 사랑할 만 합니다.

매서운 시련 속에서 꺽일 듯 꺽이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도, 곁에 있는 사람도, 나 자신도, 사랑해야만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는 것을 잘 기억하시고 사랑가운데 더 견고해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18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특히 바울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최대치로 알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그 사랑을 모든 성도가 함께 알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는 성도 한 사람이 시험에 들고 믿음이 약화되면 다른 성도들도 영향을 받습니다.

한 성도가 믿음이 굳건하고 충성되어지면 다른 성도들에게도 힘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시험에 들지 말고 함께 보조를 맞춰 성장해 가야 합니다.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인격과 사랑에 대해서는 먼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전해 준 성경말씀을 통해서 배웁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능가해 흘러넘치는 예수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이 일하시는 영역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의 최대치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단연코 십자가의 사랑에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주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주님의 사랑의 최대치는 십자가에서 밝혀졌습니다.

지난 주 제가 몸살이 좀 나서 두통과 구토 증세로 좀 고생했습니다.

토하다 보니 머리가 정말 우직근하고 깨지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이 왔습니다.

그때 제 생각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 격렬한 고통을 어떻게 여섯 시간을 쉴 틈도 없이 견디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숨이 멎을 듯한 고통이 숨 돌릴 틈도 없이 온 몸을 쥐어 짤 때 어떻게 견디셨을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내 죄를 속죄하고 영생의 복을 주시기 위한 것이기에 주님은 십자가를 견디셔야 했습니다.

토하면서 흘린 눈물 위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최대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비한 것은 고난 속에서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슴에 와 닿는다는 것이예요.

그러므로 고난이 여러모로 유익이라고 성경은 우리를 위로합니다.

삶이 행복하고 풍요롭고 모두가 내 곁에 있을 때가 아니라 가장 아픈 순간, 가장 고통의 시간에 예수님은 그 사랑을 가장 깊이 깨닫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사랑을 알고 또 역경을 이길 힘을 주시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모든 것이 풍요롭고 건강할 땐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고, 어려움 중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으니 범사가 복된 것입니다.

열심히 지식의 말씀을 배우며 십자가 위에 부어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사랑의 최대치를 점점 더 알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19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앞부분과 연결시켜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가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은 만큼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 주신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배제 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충만을 받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깨달아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지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충만하다는 것은 꽉 차서 다른 게 더 필요 없다는 것이잖아요?

하나님 자신의 완전하신 충만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신다면 영과 육에 있어서 가장 복된 상태가 되는 것이겠죠.

그렇기에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지면 다른 것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10개를 갖고도 하나님의 충만이 없다면 항상 불만족과 부족을 느낍니다.

그런데 1을 갖고 있어도 하나님의 충만이 있으면 만족하게 됩니다.

이미 채워져 있으니 조금만 더 채워도 가득 찬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어차피 우리 원하는 것 10개를 다 가질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이 가장 꽉 차고 보람 있는 삶으로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오늘도 우리 장년세대는 건강에서 부족함을 느낍니다.

저도 원래 약하게 태어나서 전체적으로 좀 부실합니다.

요즘 발바닥이 아프니 운동도 못나가고 건강관리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때 생각은 다릅니다.

내 결핍과 부족함이 그렇게 크게 느껴지질 않습니다.

심지어 그래 발이 없는 것 보다 발바닥이 좀 아픈 게 낫지이런 생각이 들며 그것도 감사하게 되더군요.

어차피 우리 나이쯤 되면 뭐든지 내려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열 개의 건강이 없어도 한 개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케 될 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점점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할수록 우리 삶이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진다는 비밀을 알았으니 바울처럼 그것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 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의 기도대로 우리도 기도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도록 기도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매 순간 믿음으로 내 안에 계심을 확신하며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가 사랑을 행하는 가운데 더 강인하고 깊은 믿음으로 자라갑시다.

말씀과 삶의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십자가의 그 깊고 위대한 사랑을 알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만큼 하나님은 모든 충만하심으로 우리 영혼과 삶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2018년7월22일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