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빌립보서2장1절-11절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남수연 2021. 6. 9. 13:40

 

https://www.youtube.com/watch?v=J8CouisnCiw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를 함께 읽으며 배우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잠깐 주일예배를 드리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교회 생활을 성도의 삶의 핵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직장생활보다 교회에서의 생활에 더 관심을 두십니다.

그렇기에 복음서와 서신서들 대부분이 개인에게 보내진 게 아니라 교회에 보내졌고, 개인보다는 공동체 생활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잘 배워 가정과 사회에서도 좋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생활에서 계속 발전하고 도약하는 것이 생활 전체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의 일원으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 교회생활이 내 삶 전체를 훌륭하게 세워가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교회는 성도들 서로를 위해 가장 좋은 것들을 제공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교회 안에 곧 성도들 안에는 권면과 위로와 교제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해야 합니다.

이런 좋은 영향들을 교회에서 받으며 함께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그런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런 아름다운 덕행들을 행할 수가 없죠.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서’가 전제되고 ‘성령’께서 거기 끼어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적으로 알고, 성령님의 감화하심이 있어야 이런 아름다운 덕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사실 교회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죠.

예수님을 교회의 주인으로, 성령님을 교회의 인도자로 모시고 그 힘으로 격려와 위로와 교제와 긍휼과 자비를 베풀만한 사람들로 실제 자라야 합니다.

우리가 그래서 매일성경묵상을 하며 믿음의 성장을 이뤄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윤동주시인이 그런 시를 지었잖아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 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냥 사는 인생도 그렇게 어려운 데, 싸워야 할 것들이 더 많은 믿음의 인생이 쉽다면 오히려 부끄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마땅히 행하고, 되어야 할 기준을 연약하다는 이유로 포기하지 말고 내 자신에게 깐깐하게 명령하고 따라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가정에, 내 사회생활 안에 오늘 명령하신 격려와 위로와 교제와 긍휼과 자비가 점점 풍성해 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다친 마음들을 교회 안에서 위로받고 치유 받아야 합니다.

세상에도 좋은 관계들이 있지만 사실 교회 공동체와는 비교가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교제는 즐거울 때는 좋지만 문제가 생길 때 내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단지 육신에 속한 것 밖에는 나누지 못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성령 안에서 이뤄지기에 생명에 대한 고귀한 것을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또 함께 기도함으로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중 누군가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긴다면 그 문제를 제일 먼저 교회가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지만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보에 항상 성도들 가정의 기도제목이 넘치게 되길 저는 바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교회 안의 이런 좋은 일에도 다 같은 마음으로 다툼 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2절,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2절 한 절에 ‘같이, 같은, 뜻을 합하여, 한마음’ 이런 똑같은 의미의 단어를 무려 네 개나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한 마음이 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몇 명 안 되는 가족끼리도 한 마음 되기가 어렵잖아요?

야고보서를 보면 그 이유가 ‘싸우는 본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사람 안에 있는 고유한 죄성이 ‘분쟁’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사이가 좋다가 결국은 싸우는 데, 여러 가지 실망도 하고 상처를 줘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각자의 안에 싸우는 본성 때문입니다.

어릴 때 애들만 늘 싸우고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사람들 마음엔 하루 종일 이일 저일 다투었던 문제로 마음이 더 천근만근인 것입니다.

평상 시 마음의 불편한 짐들은 아마 거의가 다툰 문제에서 오지 않나 싶습니다.

바울사도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빌립보교회 내의 다툼에 대해서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교회에 분쟁이 있는 것은 성도들이 고의적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망칠 목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는 성도들 중에 그런 고의성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교회 안에는 분쟁과 다툼이 있을 것인데 그 이유는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빌립보교회가 하나님의 일에 열의를 갖고 복음에 참여했는데 그 결과 바울사도를 기쁘게 했던 좋은 결과만 있는 게 아니라 다툼과 허영의 문제도 불거져 나온 것이죠.

이 내용은 4장에 가면 좀 더 구체적으로 거론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교회의 분열과 다툼의 중심에 있는 두 여인이 등장하죠.

그러나 바울사도는 이들을 심하게 책망하기보다 교회가 이 문제에 개입해서 이들을 도우라고 부탁합니다.

교회든 믿음의 가정이든 아무 문제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셨지만 죄 짓는 권리를 없애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지상 교회는 불완전합니다.

모두가 아직 공사 중이고, 아직 성령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불완전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서로를 정결하게 제련하고, 서로를 통해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됩니다.

가족도 그렇습니다.

서로는 믿음의 길을 함께 가는 동반자이되, 그것이 선한 도구일 때도 있고 부정적인 도구가 될 때도 있습니다.

동반자인 누군가가 갈등과 시험을 준다면 그것은 분명히 부정적인 역할이죠.

그러나 그 결과가 내게 반드시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를 항상 옳다 지지해 주고, 항상 내 편이 되어서 기분 좋게 해주는 사람보다 내게 더 유익한 쓴 양약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부부가 돕는 배필인 것도 선한 측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서로의 미숙함을 통해 나의 본모습을 알게 하고, 점점 함께 성장하게 하는 것이기에 나쁜 측면에서 조차도 돕는 배필은 맞는 것이죠.

다만 바울사도가 그런 우리 모두의 죄 된 성품을 단단히 조여서 다루라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각자가 남을 대할 때 수시로 제동을 걸지 않는다면 교회 안에 늘 다툼이 있고 분열되어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성을 허용하시되, 그것을 스스로가 통제하고, 또 남에게 상처와 도전을 받으며 다시 자기의 악이 발견되어 회개하는, 교육 시스템을 교회에 두신 것입니다.

그런 사실들을 우리가 이해하고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교제한다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고, 서로의 악의 찌꺼기가 제거되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런 갈등을 피하려고 혼자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훨씬 안 좋은 쪽입니다.

거울은 멋지고 만족한 내 모습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씻어야 할 더러운 부분도 보여줍니다.

우리 교회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다 한 마음이 되어 사랑하리라는 생각은 단지 희망사항입니다.

오히려 그때 그때 생기는 문제를 너그럽게, 믿음으로, 잘 해결해 갈 수 있다는 것이 성숙한 교회의 위엄입니다.

 

2. 바울사도는 교회의 연합이 깨지는 문제에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합니다.

1)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툼이라고 번역된 원 단어는 이기적인 야망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기적인 야망이 있기에 그것을 고집하다 다툼이 생기는 것이죠.

허영이라고 번역된 원 단어는 빈 영광이란 뜻입니다.

허영심은 있지도 않은 영광을 스스로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체에 무슨 영광이 있다고 그걸 좀 사람들에게서 그렇게 과시해 보려고 합니까?

그 반대가 겸손입니다.

겸손은 태생적으로 사람이 절대 되지 못하는 인격입니다.

겸손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본성은 교만입니다.

겸손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고 교만은 남보다 나를 더 낫게 여기는 것이죠.

사람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기가 힘듭니다.

보통 자기의 장점을 타인의 약점과 비교하는 편이라 왠만하면 나보다 저 사람이 나아보이기가 힘듭니다.

겉으로는 나보다 낫다고 말할지 몰라도 속으로는 다 자기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을 순종하기가 다 어렵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오늘 말씀은 정말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일지 모릅니다.

어떻게든 겸손하게 남을 높여주려고 노력해 실패했던 경험이 다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려면 먼저 교만한 나의 본성을 잘 알고 인정하는 게 우선 일 것입니다.

어제 이런 기사를 제가 읽었습니다.

어떤 장애를 가진 한 노인이 폐지를 줍는 리어커를 끌다가 잘못해서 아우디 차량을 긁었다고 합니다.

아우디 차량 운전자가 반드시 노인을 처벌해 달라고 해서 법원이 할 수 없이 벌금 30만원형을 내렸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 의원이 그 벌금을 대신 내 주었다는 기사였습니다.

왜 벌금을 내 줬냐고 하니까 그 의원이 하는 말이 그냥 마음이 아파서 대신 내 주었다고 했습니다.

폐지를 산더미처럼 쌓아도 5천원을 겨우 버는 데 장애까지 가진 노인에게 30만원이 얼마나 큰 돈이였겠냐는 것입니다.

그 노인의 사정에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자기 마음을 낮추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여성의원에게는 발달장애를 가진 딸이 있다는 내용이 있더군요.

제가 오늘 겸손이라는 문제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아픔을 겪어 보았기에 낮은 곳에도 그 분의 마음이 일치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 나의 본성의 참상을 들여다 본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그런 나를 경멸하시는 게 아니라 긍휼히 보시는 마음으로 함께 낮춰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에게 가능한 것이죠.

우리가 죄지으며 힘든 세상사는 거 아니까, 저 사람도 참 힘들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거기다 맞춰 본다면 그게 그나마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만 가져도 함께 살아가는 게 덜 어려울 것 같습니다.

 

2) 특히 바울사도는 겸손하지 못해 다툼이 일어나는 교회 공동체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해답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목표로 삼고 따라야 할 것은 예수님 자신 외에 아무도 아닙니다.

사람을 예수님과 나 사이에 세운다면 예수님을 닮지 않고 그 사람을 닮을 게 뻔합니다.

믿음 안에서 어떤 올바른 규칙을 정해 놓고 목표를 삼아 따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옳은 규정만 지키고 따랐던 사람들이 바리새인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겸손히 낮아지셨는지를 본문은 단계적으로 보여줍니다.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점점 낮아지시죠?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 성자하나님으로서 본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해 스스로 낮아지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비천하고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죽기 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하시는 데 이걸 따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자기 현 위치보다 더 허세를 부리고, 마땅한 대접보다 더 후하게 대접받고 싶어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데요.

사람이 무시당한 기억은 평생 속에 품고 삽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큰 희생을 하고 부당하게 천대 받기까지 자신을 낮추길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이 마음을 품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바울사도의 논지를 우리가 잘 들어야 합니다.

9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십자가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높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원칙이시고 우리에게도 동일하십니다.

특히 이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 아주 심오한 지식을 계시하는 특별한 말씀입니다.

살짝 어려운 느낌이 들지 몰라도 한번 들으시면 잊혀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높여주신 데 대해 저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신 분인데, 낮아지신 댓가가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찾으신 것이라면 좀 이상하잖아요?

이 부분은 이런 깊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 하나님으로서의 신성과 영광은 그대로셨습니다.

사람이 되셨다고 하나님의 속성과 존재가 없어질 수가 없잖아요?

예수님을 지척에서 보고 섬긴 사도요한이 이렇게 요한복음에 기록했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께 죄인들에게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과 위대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신성과 함께 완전한 사람의 인격성을 가진 신비롭고 새로운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와 동일한 사람의 인격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완전한 신성을 지니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마음을 버리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주장하셨다면 그것은 주님의 인간으로서의 측면에서 죄가 됩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자신을 낮추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런 예수님을 성부께서 높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본래적인 ‘신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성’의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십자가의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의 인성의 부분을 신적으로 승귀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 전체가 하나님이 되신 것이죠.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아서 이런 내용들이 왜 나오는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믿어오던 유대인들에게는 분명히 사람이셨던 예수님을 하나님이라는 게 쉽게 납득하기가 어려운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님이 신이시라는 것을 가장 믿기 어려워합니다.

하나님아버지는 본래 신이시고 어떤 종교에나 신의 이미지가 비슷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더 쉽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다니엘이 본 환상 속에서도 그런 의아함이 묻어 있습니다.

7장13절,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게 지금 본문을 비디오처럼 정확히 보여주시죠?
사람의 외모를 가지신 분이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얻는 것이 다니엘에게 얼마나 이상했겠습니까?

불변하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가 사람의 몸을 취하시고 그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게 되신 것은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왜 예수님은 여전히 사람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이시기를 택하셨나요?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와 완전한 동질감을 가진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아니셨을까요?

그런 겸손과 헌신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10절, 그 예수님을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길을 열어주셨죠.

이전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못한 우리가 우리 입으로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입교와 유아세례가 바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낮아지심으로 구원받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세상사는 지혜를 얻는 것이 너무나 귀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우리 영혼에 큰 비췸을 받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믿음과 인격이 이런 신령한 지식을 얻을 때 더욱 고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사도가 얼마나 이런 것들을 빌립보교회에 가르쳐 주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감옥에 갇혀있으니 이렇게 논문으로 써야 할 내용을 간략하게 편지로 쓸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을 아는 참지식은 많아질수록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겸손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끼리 누가 더 나으냐, 교회에서 무얼 그리 다투고 경쟁할 게 있겠습니까?

이렇게 자신을 비하시켜 옷 입으셨던 ‘인성’조차 하나님이 높여 완전한 하나님의 속성이 되게 해주신 사실이 성도들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요한복음18장4절,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모든 형제들 앞에서 어떤 형태로 나를 낮추던 ‘나를 낮춘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큰 영광으로 높여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사랑하며 교회가 연합되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지난 주 서원이가 한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소라게들이 쉘갈이하는 영상이었습니다.

소라게는 등껍질이 없어서 소라나 조개 같은 빈껍데기를 집으로 삼아야만 하는 게입니다.

그런데 몸이 자라면 입고 있던 소라껍질이 작아져서 쉘갈이를 해야 합니다.

제가 영상을 보고 너무 재미있고, 놀랐던 것은 이 게들이 쉘갈이를 단체로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큰 게부터 아주 작은 게까지 더듬이로 크기를 서로 측정한 다음 한 줄로 죽 늘어서는 거예요.

그리고 제일 큰 게가 자기 집을 나와 좀 더 큰 새집으로 들어가면 그 다음 타자인 게가 나와서 잽싸게 그 빈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모든 게가 순서대로 자기 집을 다음 게에게 비워주고 앞의 큰 게가 이사 간 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열 마리 가까이 한 줄로 서서 집을 옮기는 모습에 진짜 감탄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았어요.

우리 교회가 먼저 믿은 사람이 잘 성장해서 다음 사람이 그 뒤를 따르고 또 다음 사람이 그 뒤를 따르며 제일 마지막에 믿음을 시작한 새신자까지 그렇게 믿음을 나누고 자리를 내 주며 함께 간다는 생각을 한다면 오늘 말씀처럼 오직 겸손으로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들 동의하시면 그렇게 겸손하게 서로를 위해 수고하고 서로 끌어주는 우리 주나산이 되도록 함께 가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