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빌립보서4장10절-20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남수연 2021. 7. 1. 13:42

https://www.youtube.com/watch?v=QLPgA2dvCeI 

지난 한 주 다들 평안하셨나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시각각 변화하고 우리를 압박하는 상황들 속에서 평안과 만족을 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돌보고 계시나?’
이런 두려움이 순간순간 찾아오는 중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족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이유는 인생에는 원하는 풍요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송창0 씨 처럼 한 때 최말단 노숙자였고 양희0 씨 처럼 아버지의 빚에 허덕여 스타킹 살 돈을 감당 못해 늘 청바지를 입었다는 분들이 크게 성공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인기 절정에 있을 때 한 달에 집 한 채씩을 살만큼 벌었지만 현재는 월세방을 전전한다는 연예인도 많습니다.

이렇게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사람들은 부요한 때가 있고 비천할 때가 있는데 자기 힘으로 그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어떻게 풍부해졌는지, 어쩌다 빈곤에 처하게 되었는지, 우리 노력과 의지대로 된 것이 아니잖아요?

인생에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주신 것은 우리를 거룩히 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항상 만족한 환경 속에서만 살 수는 없기에 자족하기를 배워야 하는 것이죠.

언제 실패와 가난과 병마의 함정에 빠질지 모르는 세상에서 환경이 우리를 지배한다면 매일이 우리에게 지옥일 것입니다.

돈과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게 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고 자족하며 평안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바울사도는 그런 믿음을 가졌다고 공언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했던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비결을 전수합니다.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도 자족하는 비결을 깨닫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먼저 감옥에 갇힌 고난 중에 있는 바울사도의 자족하는 믿음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빌립보교회가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의 소식을 듣고 에바브로디도 편에 헌금을 보낸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동역자들이 어려운 지경에 있는 자신을 생각해 준 것은 사실 기쁜 일이죠.

이번에 우리교회 역시 코로나상황 중에 보낸 선교헌금에 몽골 목사님이 큰 힘을 얻으셨습니다.

모든 식구들이 코로나에서 완치되었다고 감사를 전해 오셨습니다.

10절,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바울은 이 로마감옥에 오기 전에 이스라엘의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여를 보냈습니다.

그때는 소식을 들었어도 마게도냐 땅과 너무 멀어 헌금을 들고 가기가 수월치 않았던 것입니다.

로마 감옥에 이송 된 지금은 거리상으로 훨씬 가깝기에 헌금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런 빌립보교회의 헌금이 기쁘지만 바울사도는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항상 자족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사도는 생업을 하면서 선교 경비를 충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서신서 곳곳에 보면 그런 사실들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전서2장9절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바울의 선교 사역의 노고가 느껴져 가슴이 뭉클하죠.

지금은 감옥에 갇힌 상태라 일을 못하지만 돈은 계속 필요합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에 인편으로 소식을 전하고, 교회들에 사역자들을 파송하는 일들을 감옥에서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걱정하지 않고 자족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주관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가 선교인생에서 배운 것은 모든 열정과 수고를 하되 결과는 사람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바로 선다는 것입니다.

선교여정 조차도 자기가 짜는 대로 되지 않았잖아요?
감옥에 갇혀 4년을 보내게 된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시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사도에게는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대로, 허락하시는 대로, 주시는 대로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면 되었다는 것이죠.

자족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이런 온전한 신뢰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경우 일이 잘 될 땐 하나님을 잘 의존하지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삶에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은 만족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 만족은 곧 자신을 스스로 높이 여기는 교만한 죄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원치 않는 비천에도 처하게 하시고, 반대로 과거에는 노력한 대로 되지 않았지만 어느 때는 기대 이상의 형통함도 주십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을 알아가고 점점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신뢰하게 되는 것이죠.

왜 내게 이런 어려움이 있냐고 이상해 하는 게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만 하신다는 건 뭔가 맞지 않는다고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가난에 처하고 병약해지고 악인들이 대적하고 고통스러울 때 까닭 없이 높아진 나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를 바로잡게 하신다는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성공해야 하고, 더 똑똑해야 하고, 더 잘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정당한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언제, 누가 너를 그렇게 남달리 구별했느냐 반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욕심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게 아닙니다.

주변에 내 비위를 맞춰주는 사람들만 있고, 세상적으로 일이 잘 풀리면 점점 우리 눈은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스스로 만족해서 높아진 눈은 점점 모든 일에 성이 안 차 불만족과 불평의 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제가 이사를 했습니다.

신축 아파트에 살다가 오래 된 아파트로 이사를 가니 감사와 만족보다 불만스러운 마음이 더 컸습니다.

사람에게 제일 힘든 것 중 하나가 자기가 누리던 어떤 지위나 명예나 경제력이나 인기 같은 것에서 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잖아요?

이런 저런 불평이 나오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옛날에 단칸방에서도 온 가족이 우글거리고 살았는데, 지금도 훨씬 안 좋은 주거지에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제부터 내가 나를 구별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제일 좋은 것, 최신의 것, 고급 진 것, 그런 것들을 당연히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언제 또 커졌는지 회개했습니다.

사람이 조금이라도 교만해진 데서 내려갈 수 있으려면 현장학습 없이는 안됩니다.

저는 주일 저녁에 1박2일이라는 예능 프로를 즐겨 봅니다.

거기서 게임에 이긴 팀에겐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고 진 팀에게는 겨우 밥한 공기에 고추장 반찬 정도로 얄밉게 식사를 제공합니다.

진 팀원들은 갖다 준 음식에 실망하지만 곧 맛있게 그걸 먹으며 만족합니다.

게임에서 번 몇 천원으로 값싼 음식을 사먹으며 기뻐하고, 밤샘 조업 뒤에 라면 한 냄비에 만족하는 연예인들의 모습에서 새삼 소박하고 조촐한 삶에의 만족도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필립얀시의 책에 한 수도원을 방문한 여행객과 수도승과의 대화를 기록한 내용이 있습니다.

수도승이 여행객에게 수도원을 소개한 후 이렇게 말합니다.

‘머무시는 동안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없이도 사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이 없어도 살 수 있게 강합니다.

더 성공해야 하고,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이 있어야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부추기는 세상의 가치관을 믿음으로 방어하고 어떤 형편이든 자족하는 승리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우리가 자족할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은 예수님 안에 있다고 바울은 가르쳐줍니다.

13절에서 말씀하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게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스스로 훈련해서 가질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건 정말 마음을 다잡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 안에서 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미 얻은 영원한 부요함을 알면 자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없기 때문에 할 수없이 이것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데서 오는 것이 자족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은 언제든 더 가져서 만족하게 될 상태를 갈망하고 뒤쫒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고정시키고 살아갈 때 평안과 기쁨과 소망과 담대함을 주시죠.

그것은 현재 내가 가진 보이지 않는 보화들이 사실인 것을 확신시켜줍니다.

그렇기에 오늘 고된 시련과 가난과 비천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미 말로는 형용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영화로운 천국의 기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조금 더 갖고 좀 더 화려하고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영생을 생각할 때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소유를 목적으로 사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참 이유를 알고 그것을 이루며 사는 것이 목적이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을 주목하고 바라면 진짜 영광과 보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구주 예수님, 그 한 분 자신이십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 갚아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성령께서 잔잔히 마음에 부어주실 때 ‘족하다’란 생각이 절로 듭니다.

바울사도가 가르쳐 주려는 자족하는 비결이 바로 이것입니다.

CS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 한 분만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이 가졌다고 할 수 없다.’

이 계산법이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을 우리가 가졌다는 것은 너무나 광대하고 완전해서 이 세상의 다른 재물, 명예, 인기, 성공 이런 것을 아무리 갖다 붙인다 해도,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과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울에 먼지가 한 톨 붙었다고 눈금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사도는 자기에게 있던 모든 부와 명예와 최고의 학문까지 다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을 좇아 달려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환경을 능가하는 자족하는 마음은 나를 강하게 하시는 예수님께로부터 옵니다.

매일 주님을 바라는 기도를 하고, 주님께로부터 매일 부어지는 사랑의 확신과 천국의 소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환경에 처할지라도 자족하는 마음으로 힘있게 문제를 돌파할 담대함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

 

3. 바울사도는 가난한 가운데 하나님께 드린 빌립보교회를 축복합니다.

물질을 의존하지 않는 삶은 드리고 베푸는 데서 시작됩니다.

겁나서 못 드리면 자족하는 삶은 시작하지도 못합니다.

항상 부족하게 느낄 걸요?

오늘 바울 사도는 빌립보교회가 보내준 헌금에 대한 감사보다, 그런 믿음을 가진 성도들로 인해 더욱 기뻐하고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워보면 아이들이 성장하며 스스로 하나님께 헌금을 준비할 때 참 기쁘죠.

우리 청소년부가 용돈을 아껴 천원을 헌금한 봉투를 볼 때 제 마음이 찡하고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성도들의 물질에 대한 생각은 믿음이 어떠한지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을 두 주인이라고 꿰뚫어 주신 것입니다.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복음전파를 위해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보내 준 헌금에 대해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18절,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내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느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바울사도의 처지를 걱정해 보내 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린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셨다고 하죠.

여기서 ‘향기로운 제물’은 에베소서 5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린 것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성도들이 하나님나라를 위해 드리는 물질을 예수님이 제물되신 것과 똑같이 표현하고 있다는 게 놀랍죠?

성도들이 드리는 물질이 곧 자기를 쪼개어 드리는 헌신과 희생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생명을 위한 것이니 돈을 드린다는 것은 생명을 쪼개서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하나님나라를 위해, 선교를 위해 물질을 드리려면 내가 쓸 것을 안 쓰고, 택시타지 않고 지하철 타는 불편을 감수하고 드리는 것이잖아요?

바울사도가 이렇게 궁핍과 여러 가지 곤란한 중에서도 바울의 괴로운 처지와 복음에 동참한 빌립보교회를 축복합니다.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 말씀은 막연히 채워주시길 기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법상으로 채워주실 것이 기정사실이라는 확고한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칙을 바울사도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바울사도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여기서 ‘준 것을 받았다’는 것이나 15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에서 ‘주고 받다’는 헬라어 단어가 모두 상거래에서 물건을 주고 받거나 영수증을 주는 그런 용어입니다.

왜 하나님께 드린 헌금인데 바울이 이런 단어를 선택해서 썼을까요?

하나님이 헌금을 받으시고 영수증을 주셨다면 반드시 거기에 맞춰 댓가를 지불하신다는 것입니다.

부요하신 하나님이 받기만 하시고 성도들의 처지와 궁핍을 외면하시겠어요?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영광 중에 모든 걸 풍성히 가진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하나님이 가지신 그 풍성한 영광만큼 채워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는 축복입니까?

지금까지 각자가 가진 믿음과 능력에 따라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섬기시느라 성도님들 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빌립보교회의 충성에 대해 천국에서 갚아주신다는 게 아닙니다.

오늘 필요한 것, 지금 열심히 일하며 추진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사도 역시 늘 비천하고 배고프고 궁핍했던 게 아니라 풍부와 배부름에도 처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동역자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대규모 선교활동의 경비를 충당했던 바울인데 어떻게 매일 가난과 궁핍에만 처하게 하셨겠습니까?

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물질과 생활에 속한 것들만은 아닙니다.

바울이 그것만이 아니라 빌립보교회의 믿음의 성장과 부요해짐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한 공동체가 되고 예수님의 몸의 각 지체들이 되어 양육 받음이 복입니다.

수국은 토양이 산성이냐 알칼리성이냐 또 흙 속에 있는 성분에 따라 꽃의 색이 달라진다는 얘기를 서원이한테 들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말씀을 먹고 자라냐가 우리의 신앙인격을 어떻게 변모시키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고 하셨습니다.

저는 목사로 세워주신 이상 주님의 양떼를 위해 생명과 믿음의 성장을 위한 말씀의 꼴을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늘 기도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양가 있는 말씀을 구합니다.

양들을 맡겨 놓으시고 먹일 꼴을 안 주실 리가 없다는 게 제 믿음입니다.

단 얼마나 은혜의 말씀을 주실지에 대해서는 저 역시 자족하는 마음으로 따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만족을 두고 열심히 일해 얻은 물질로 주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봉사하는 우리 성도님들께 영과 육의 풍성한 필요를 반드시 공급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만족이라는 한자어를 아실 것입니다.

‘찰 만 자’에 ‘발 족 자’를 씁니다.

겨우 발까지 차는 것을 만족한 상태로 보았다는 게 좀 의외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목까지 채우고 심지어 머리꼭대기까지 채워야 만족할 것 같지만 발만 찰랑 찰랑 채워도 만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 형편에서든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에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안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이라면 내가 원하는 것에 발목까지만 차도 우리는 충분히 자족하며 살아낼 수 있습니다.

또 부족할수록 빌립보교회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물질의 궁핍을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암시합니다.

그리하면 너의 모든 쓸 것을 풍성하게 채우시리라.

가난한 중에 드리는 것은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거든요.

지금 성도님들이 처한 형편은 다 다르십니다.

내 속이 어떤지 남들이 어떻게 알겠냐며 한탄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형편에서 자족하고 행복을 누리지 못하면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며 예수님을 주목해 구하면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지금 낮추신다면 다음엔 풍부와 배부름에도 처하게 하셔서 빌립보교회처럼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게 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족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