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5NPIdn392J0
누군가를 전도해서 믿음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만한 기쁨이 없죠.
그 기쁨은 몇 년의 수고와 섬김이든 다 보상이 됩니다.
바울사도가 이 빌립보교회를 어떻게 세웠는지 기억하시죠?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쫒았다가 고소당해 매질을 당하고 빌립보감옥에 갇혔던 그런 우여곡절 끝에 세운 교회잖아요?
그런 빌립보교회가 자기와 같은 믿음으로 든든히 세워지는 것 이상 큰 기쁨이 더 있겠습니까?
1절에서 빌립보교회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느껴지죠.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가족들을 부르는 것보다 더 진한 애정이 담겨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의 혈육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의 영적 유대감이 오히려 더 돈독한 것이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나 가족들도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혈육에 형제애가 더해져 점점 더 이런 깊이 애정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죠.
우리 가족들이 혈육과 형제애가 더해져 바울사도처럼 서로를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될까요?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내 자녀, 내 부모, 내 남편, 내 아내여.
가족들이 이렇게 서로가 기쁨이고 면류관이 되길 축복드립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이들에게 바울사도가 강조하며 당부합니다.
주 안에 서라
사랑하는 이가 낙담하고 주저앉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믿음에서 넘어진 사람이 아예 처음부터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상황이 안 좋고 딱해 보이죠.
주님께서 믿음의 위태한 성도들과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주 안에 서라
빌립보교회가 믿음에 바로 서지 못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기에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이 역시 우리에게도 동일한 문제들이기에 말씀을 잘 듣고 우리도 바로 서게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1. 한 마음을 가져야 교회가 서고 성도들이 설 수 있습니다.
2절,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지난 주에 잠깐 등장했던 여집사님들입니다.
이 두 여집사님들의 다툼이 빌립보교회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들 간의 싸움이 그렇듯이 성도들 간의 다툼도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굳게 서있는 교회에 속해 있다면 성도들의 믿음도 바로 서기가 훨씬 쉽습니다.
분열되는 교회에서 나 혼자 믿음이 굳게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 조직이나 단체와 다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고, 몸으로 조직 된 구성원 성도 하나하나가 성령님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영향을 받습니다.
아마도 두 여집사님들은 빌립보교회의 개척멤버였던 것 같습니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 이라고 하죠?
그래서 이 둘 중 한 사람이 자주옷감 사업가인 루디아가 아닐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루디아가 정식 이름이 아니라 고향이 두아디라시의 루디아마을이라서 불려진 호칭일 수도 있다고 가정한 경우죠.
이들은 분명히 함께 복음을 위해 힘썼던 여인들입니다.
한 때는 의기투합 해 복음을 위해 혼신을 다했지만 지금은 마음이 갈라지고 서로 등지고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살다보면 항상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아니, 좋을 때보다 싫을 때가 더 많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다툼과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을 쪼개는 가장 큰 죄입니다.
오래 된 교회들도 쪼개지고 분열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울사도는 이 두 여인들에게 뿐 아니라 온 교회에 명령합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교회건 가정이건 자꾸 마음을 합쳐가려고 노력해야지 제각각의 마음을 가지고 갈라지면 안된다는 것이죠.
한번 틈이 생긴 마음이 다시 하나 되기는 참 힘듭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에게 이들을 도와 화합하게 하라고 합니다.
3절,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교회 안이나 가정에서 이렇게 갈라진 관계가 있으면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며 해결되게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자기 힘만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분명히 큰 힘이 되는 것이죠.
오늘 이 다툼이 있는 집사님들을 어떻게 도울 수가 있을까요?
바울사도가 가장 지혜로운 해법을 제시합니다.
두 여인들이 과거에 했던 착한 일을 상기시킵니다.
저들이 빌립보교회를 세우기 위해, 바울의 선교사역에 얼마나 헌신했고 열정으로 수고했는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를 하던 성도들이 서로 다투고 교회의 걱정거리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그들의 노고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간과 물질을 쏟아 부어 교회를 섬겼는데, 나중에 사람들은 그런 수고를 당연지사로 여깁니다.
두 사람 다 너무 많은 일을 감당하다 지쳤는데 이제는 더 이상 진심어린 칭찬이 들리지 않을 때 마음에서 시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이미 편지 서두에서 너희 사랑을 더 풍성하게 하라고 하잖아요?
교회가 사랑과 칭찬이 가물면 서로 인정받으려고 경쟁심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심리는 자기가 칭찬 못 받으면 남을 깎아 내리잖아요?
천국에선 우리가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충족되니 경쟁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교회는 경쟁구도를 만들면 안됩니다.
다 주님의 동역자들이고 성도들은 모두가 주님께 인정받고 칭찬받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서로 간에는 작은 수고라도 칭찬하고 고마워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사도가 분열과 다툼의 문제를 칭찬과 인정으로 푸는 것을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사람관계에 갈등이 있을 때 시비를 가려 한쪽에서 잘못을 인정한다고 해도 갈라진 마음이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이미 상처가 난 두 집사님에게 각각 과거 그들이 얼마나 진액을 짜는 수고를 했는지를 알아주고 다시 위로해 주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위로와 사랑이 풍성하면 경쟁심도 사라지고, 남을 깎아 내리지도 않고, 따뜻하게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 간엔 누군가의 부족한 점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장단점을 모를리야 있겠습니까?어떤 성도가 심각한 죄를 지어 당사자에게 신중히 개입할 것이 아니면 어지간한 허물은 다른 사람에게 들추지 말고 덮어주어야 합니다.
서로의 잘한 점, 점점 좋아지는 점들을 이야기하며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교회든 가정이든 탈 날 것이 없고 점점 한 마음이 되어갈 것입니다.
함께 의좋게 살라는 것이 성도들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가정과 교회가 더 든든히 설 수 있음을 잘 새기시길 축복드립니다.
2. 주 안에 서있기 위해서 우리 마음은 항상 기쁨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며 산다는 것은 단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기쁨은 누구나 원하지만 사는 데는 기쁜 일보다 안 기쁜 일이 더 많잖아요?그렇기에 이 기쁨이 평범한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범한 기쁨은 기쁜 일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성도들의 기쁨의 조건은 기쁨이 되는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쁨의 조건은 단 하나인데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예수님 안에서’이면 매일 달라지는 많은 상황들과 어떤 환경 속에서든 기뻐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은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하심에 대한 온전한 신뢰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지금 빌립보교회의 상황을 볼 때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성도들은 극심한 가난 중에 있다고 했고, 바울사도와 동역하며 열심을 내던 교회에는 다툼과 분열의 힘든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의 시비와 로마황제의 박해 정책도 점점 심상치 않습니다.
바울사도의 재판 결과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삶이 선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령님의 충만하심 안에서 살 때 이런 믿음의 기쁨만이 아니라 전인적 측면에서 정서적인 기쁨을 실제 맛보기도 합니다.
저도 지난 주 운전하며 교회에 올 때 그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며 감사하는 중에 평소의 기쁨과는 질과 양에서 완전히 다른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희락을 주셨습니다.
그 기쁨은 우리 영혼이 곧 하늘의 하나님께 닿을 듯한 그런 기쁨입니다.
세상에선 그런 기쁨이 없죠.
잠시 좋다가 마는 세상의 기쁨에 대해 잠언에서 배웠잖아요?14장13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성도들이 성실히 주님을 따를 때 하나님의 기쁨을 종종 허락하시죠.
저 같은 경우는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할 때 말씀에서 하나님을 알고, 가슴이 벅찰 만큼 오묘한 진리를 깨달을 때 그런 기쁨을 누립니다.
기도할 때, 찬양할 때, 믿음의 교제 중에 다양한 순간에 장차 천국에서 항상 누릴 그 하나님의 기쁨을 잠깐씩 맛볼 수가 있죠.
그러나 항상 그런 천상의 기쁨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 기쁨은 우리의 선택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하시는 것은 매일 만나는 골치 아픈 문제들과 마음 상할 일들과 근심스러운 상황 앞에서 내 생각과 의지로 조절 가능한 기쁨이라는 감정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작은 문제에도 전전긍긍하며 근심에 빠져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힘은 걱정과 짜증대신 감사와 기쁨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당장 처한 환경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의 마음과 관점은 바꿀 수 있죠.
지금은 수렁에 빠진 듯 두렵지만 곧 하나님이 끌어내서 단단한 땅에 세우실 것을 믿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령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순종할 때 우리를 결박하고 해치려는 곤란한 문제들과 악의 공격에서 꼿꼿이 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크 트웨인이란 작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를 가진 인간 내면의 본질적인 정서는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다’
슬픔과 우울이 타고난 본성이라 우리는 기쁜 감정보다 오히려 우울한 기분에 잠겨있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이죠.
예수님 안에서 기쁨이라는 새 정서를 얻었지만 슬픔이라는 본성이 더 강합니다.
본성과 맞서려면 계속 기쁨을 학습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바울사도는 이렇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기쁨의 상태를 견지하려는 마음을 굳게 새겨두고 기쁨으로 든든히 서있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관대함이 우리를 바로 서게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감정과 믿음에 큰 장애물이 됩니다.
우리가 바로 서 있으려면 보편적인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5절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고 남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 안에 든든히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렇게 내 권리를 포기하면서 까지 타인에게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안에 이게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에 좀 범위를 좁혀서 사람 관계에서 마음을 넓히라는 것이죠.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하기 위해 나름 넓은 아량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 부딪혀 보면 내 마음이 참 옹졸하고, 때로 너무 치사하기까지 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예민하게 느껴지는 것은 관대하게 사람을 대하라는 원칙대로 안 할 때 거기서 실족할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너그럽게 넘어가지 않고 마음을 좁혔을 때, 당장 내 마음이 뭔가 꺼림직한 상태가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지 않는 순간 거의 양심적으로 그런 것을 느끼죠.
아무리 상대가 잘못해서 내가 정당방위로 맞대응을 했다 해도 성도들의 양심은 참는 게 더 나았다는 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우리도 감정을 가진 사람인데요.
아무리 너그럽게 대해도 계속 무례하게 굴고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을 때 끝까지 관대하기가 힘들죠.
그런 사람에게까지 넓은 아량을 가지라고 할 때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말씀이 그럴 수 있는 동기를 더 강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기서 ‘가깝다’는 헬라어 단어는 ‘가까이 곁에 있다’ 라는 뜻과 ‘시간적으로 임박했다’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바울사도가 이 단어를 골라서 쓴 것은 이 두 경우가 다 우리가 관용을 베풀 어야 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 곁에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관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주님께서 내게 얼마나 관대하게 대하시는지를 알고 계십니까?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일 뾰족한 눈으로 보고 계시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디 잘하나 잘못하나 보자’ 이렇게 시험하시는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우리에게 갖고 계신지를 알려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성만찬 이후에 제자들을 다독이는 14장부터 17장까지를 보시면 됩니다.
거기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다 적혀있습니다.
김화영집사님이 소은이를 사랑하고 그 눈에 맞춰 심술내는 마음을 달래고 다독이는 그런 마음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눈은 애정이 가득한 눈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스바냐서에서 이미 또 밝혀 주셨잖아요?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이런 분에 넘치는 주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넓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선악 간에 모든 사람을 판단하실 날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의 선을 악으로 대하는 저 사람을 내가 심판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도리로 관용을 지켜나가는 것이죠.
내 마음을 너그럽게 해서 넘어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모든 시험과 실족은 내 마음을 좁히고 옹졸하게 할 때 생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환경에 대해서는 기도로 바로 서야 합니다.
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 말씀은 염려할 일이 있다면 먼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참 염려를 하다가 겨우 기도할 생각을 하는 편이죠.
염려를 당장 멈추라고 오늘 말씀합니다.
즉시 기도할수록 감정에 빠지지 않고 상황을 해결하는 데 더 유리합니다.
큰 문제보다 작은 근심이 있을 때 그걸 훈련하는 게 좋습니다.
작은 염려는 대개 내 선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잘 기도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작은 염려라도 기도로 주님께 맡기면 더 빨리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훈련이 되면 큰 근심이나 염려에도 기도할 자신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현대교회의 문제 중 하나가 기도의 양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의 양이 줄어드는 데 기도의 질이 좋아질 수는 없습니다.
일정 시간 기도의 시간을 갖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깊은 보좌 앞으로 나가는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기도의 문이 열린 사람은 어떤 어려움에 빠져도 살아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지어진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안됩니다.
그걸 인정한 사람들이 성도잖아요?
하나님께 기도하며 내 삶을 의논하지 않고 사는 것은 자기 주도적으로 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고 사는 분들이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를 보면 분명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모든 일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공급이 매 기도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항상 염려할 일이 생기는 것은 사실 믿음의 측면에서는 걱정할 게 전혀 아닙니다.
염려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지 염려할 일이 없다면 지금 기도의 절반도 안 하게 될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생활의 염려로 인해서라도 우리가 복된 하나님께 접속되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시스템은 충전지처럼 풀로 채운 다음 그 힘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플러그 인 된 상태로 매 순간 그 힘을 공급받으며 사는 시스템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을 주셔서 감당하게 하시는 게 아니라 기도로 감당하게 하십니다.
한번에 능력을 풀 충전 받은 케이스가 삼손입니다.
엄청난 성령의 힘을 한번에 받았지만 삼손은 큰 능력을 하나님의 뜻에 턱도 없이 못 미치게 사용한 사사입니다.
반면에 기드온은 자기의 무능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묻고 전략을 받아서 블레셋과 싸웁니다.
기드온이 블레셋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이스라엘에 40년간 평화를 가져옵니다.
이 두 명의 사사의 이야기는 우리가 항상, 모든 일에 기도로 깨어 있고 하나님께 의존해 있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매일 근심거리가 있고,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될 문제들을 허용하시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가장 먼저 주시는 응답이 7절에 나옵니다.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되는 사건을 해결해 가는 데는 당연히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지만 우선 내 생각과 감정을 덮을만한 하나님의 평강이 파수꾼처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빨리 안되서 답답하지? 걱정하지 말고 계속 기도해. 내가 함께 한다’
그러면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은 상태로 문제를 바로 보며 주님과 더불어 잘 풀어 나갈 수가 있는 것이죠.
다만 기도해도 염려가 가시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를까봐서 그런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대로 되길 고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기도를 하고도 하나님 방식으로 인도하실까봐 근심스러운 것이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나보다 더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응답을 주실거라는 믿음이 근거입니다.
우리는 당장 내일 일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시종을 한 눈에 보고 계시잖아요?
믿고 평강 중에 주님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기도하고 응답된 모든 것을 볼 때 ‘역시 내가 바랬던 것이 더 좋았는데’라고 생각되는 게 있으십니까?
없으실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항상 부딪치고 해결해야 할 내용들입니다.
한 마음이 되지 못하는 것, 그리스도인이며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 남에게 너그럽지 못한 것, 항상 염려되는 문제를 안고 사는 것,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받으신 줄 믿습니다.
이것이 한번에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 주신 말씀의 해법으로 매일 풀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 안에 바로 서고,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바로 서는 귀한 축복이 항상 넘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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