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9EsrIjaTGBQ
지난주까지 바울의 2차전도여행에서 빌립보와 고린도에 교회가 세워짐을 살펴보았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사도가 로마감옥에서 그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빌립보교회에는 우리가 잘 아는 성도들이 있죠.
의류사업가 루디아, 점치는 귀신이 들렸던 여종, 형기를 마치고 나온 죄수들, 빌립보감옥의 간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빌립보서를 쓴 때가 서기 62년경이고, 처음 빌립보에 갔을 때가 서기 50년경이니 십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뒤입니다.
1절 편지의 서두에서 빌립보 교회에 그 사이 장로들과 집사들이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사도가 생각할 때 얼마나 이 교회가 귀하겠어요?
본문을 읽어보면 바울과 빌립보교회 성도들과의 신뢰와 사랑이 물씬 느껴집니다.
사랑을 외치는 현대 교회에 진짜 사랑이 있습니까?
홍정길 목사님은 말씀과 사랑이 없는 한국교회는 없어질지 모른다는 뼈아픈 말을 했습니다.
실제 유럽의 개신교회들이 다 문을 닫았다는 걸 두려운 사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바울의 사랑이 녹아있고, 빌립보교인들의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더 풍성해야 한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을 오늘 성령께서 귀를 열어 듣게 해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먼저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 바울사도의 사랑부터 시작합니다.
1절에서 바울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종이라는 말조차도 거북해 하겠지만 예수님은 종의 형체로 오셔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들은 종이라는 말을 거북해 하면 안됩니다.
사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도 다 누군가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 같은 주인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주인이시면 주님을 섬길 때 우리에게 만족을 주시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에겐 늘 만족감이 있습니다.
제가 살면서 경험해 보니 예수님을 섬겼을 때 만족감이 가장 큰 것을 알았습니다.
주인은 큰 계획을 세우고 종에게는 매일 할 일을 지시합니다.
예수님은 매일 우리가 지키고 따라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시잖아요?
되지도 않을 먼 미래의 일을 앞서 계획하고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루하루 주인께서 열어 주시는 대로 순종하며 가면 됩니다.
그렇게 가다 뒤를 돌아보면 내 힘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었던 멋진 인생그림이 그려져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던 이 땅의 삶이 끝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수고한 모든 것을 우리의 공로로 다시 돌려주십니다.
충성 된 종의 비유에서 종들의 마지막에 받을 영광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12장37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님께서 이 땅의 종들이 섬긴 수고를 이렇게 귀하게 여기십니다.
만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은 백 프로 자기 자신을 주인의 자리에 앉혔을 것입니다.
내가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누가 나를 주인으로 섬기겠어요?
결국 자기 자신이 종이 되어 주인의 자리에 앉은 탐욕과 죄악 덩어리인 자기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 주인의 욕심을 이루려고 평생 허덕이며 살지만 둘 다 만족하지 못하고, 채워지지 못하는 불쌍한 삶을 사는 것이죠.
더 최악의 경우는 빌립보의 점치는 여종처럼 귀신주인과 인간 주인의 지배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영적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은 사람들은 마귀의 종으로 살아간다고 성경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동의하고 자발적인 선택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도 자발적으로 갇힌 것입니다.
바울은 3차전도여행이 끝나고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모은 헌금을 갖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붙잡힐 걸 알고도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로마시민권자로서 로마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상소해서 지금 로마 감옥까지 와서 갇혀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편지를 쓰면서도 기쁨이란 단어를 열여덟번이나 씁니다.
비록 갇혀있지만 어디에도 낙담하거나 우울한 마음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과 예수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주님께 헌신하는 선교사들, 사역자들, 성도들이 누가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화장실도 없는 캄보디아 선교지에서 십 몇 년을 섬기다 잠시 귀국한 선교사님의 간증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몸만 한국에 와 있지, 마음은 그 열악한 선교지에 두고 온게 느껴졌습니다.
싫은데 하나님이 우격다짐으로 그 일을 시키셔서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20절,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지금보다 더 예수님을 섬기지 못해 안타까울 뿐인 게 느껴지죠.
하나님의 일, 교회 일에 혼신을 다하고 열정을 쏟아 붓는 사람들은 그래도 많습니다.
그런데 직접 하나님께, 직접 예수님을 사랑해 헌신하는 그런 사람들은 만나보기 힘듭니다.
하나님을 보고 시작했는데 표적을 놓쳐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께 헌신한 그런 사람들이 성경에서 가끔 나오죠.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그렇잖아요?
블레셋군대와 거인 골리앗이 그 앞에서 잔뜩 쫄아있는 이스라엘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합니다.
그 전쟁에 참전한 형들에게 음식을 전해주려고 갔던 어린 다윗이 자기 하나님이 모욕 받는 상황에 분노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골리앗을 상대하겠다고 나서죠.
하나님이 다윗을 보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상의 신전에서 나온 바벨론 왕의 진미를 거부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여호와의 이름이 한갓 우상처럼 여겨지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보며 눈물의 선지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예레미야.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치들의 상을 뒤엎으시던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사랑하시기에 격분하신 그 헌신과 열정이 보이시잖아요?
우리가 다 예수님의 종 된 복된 삶을 선택하되 주님을 점점 더 사랑하는 바울사도 같은 종 되길 더욱 원합니다.
천국의 기쁨의 극치는 바로 그 예수님을 만나는데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내가 영원히 영화를 누리며 사는 기쁨이 천국의 기쁨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렇게 천국을 알고 있기에 ‘천국’해도 실감이 안 나고 심드렁한 것입니다.
재판을 앞 둔 바울사도가 뭐라고 하는지 볼까요?23절,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절,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사도의 천국 소망이 무엇인지 아시겠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천국에 다녀왔지만 함구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싫었을테지만, 예수님보다 천국이란 장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싫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우리 주인이신 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목숨까지 내어 주셨잖아요?
혹 주님이 우리를 데려다가 바울처럼 옥에 갇히는 그런 수난을 주실까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고난은 믿음이 되면 자청해서 받는 것이지 억지로 밀어 넣으시는 게 아니라니까요.
또 천국에서는 주님을 위해 받은 고난만큼 가치있고 아름다운 면류관이 어디 있겠어요.아무 이유 없이 성도를 고난에 밀어 넣으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감옥살이가 복음전파를 위한 중요한 수단임을 알았습니다.
재판이 아니라면 일개 시민 바울이 어떻게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가서 황제 앞에 복음을 변론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종이 되어 따르는 길에 물론 겪고 싶지 않은 일들도 만납니다.
세상사가 누구나 다 그런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설령 감옥과 같은 상황을 만날지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당시엔 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고 괴롭기만 했지만 이젠 해석되고 감사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의 일들도 훗날에 다 해석이 될 것입니다.
로마로 호송되기까지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 다시 로마감옥에서 2년, 총 4년의 감옥생활이 괴롭게 낭비한 시간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황제를 비롯한 왕과 고위 관료, 귀족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한 것은 다 이 투옥생활 때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종으로 주님만을 따르고 있다면 지금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든 하나님께서 반드시 좋은 그림을 완성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사도처럼 예수님 자신께 헌신하는 종들이 되길 원합니다.
매일 마음을 드리고, 시선을 향하고, 말씀 속에서 주님을 찾고, 진심을 다해 따르는 복된 우리가 되기만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2.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성경에 기록될 만큼 바울사도의 복음사역에 참여할 수 있었을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사도의 든든한 동역자였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누구나 복음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부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고난과 복음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안에 있는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영이 서로 소통하여 함께 하나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 온 순례객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나라 순례객인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 각자 자기나라 말로 그 찬양을 함께 따라 불렀습니다.
그 때 그 전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사도와 빌립보교회가 끈끈한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각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서로에게 끌리고, 잘 되길 바라고, 함께 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 아닙니다.
한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짜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면 성격이 다르고 배경이 달라도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나 가정이나 자꾸 다투는 일이 발생한다면 각자가 예수님 안에 살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제가 가끔 기독교 TV의 간증 토크 프로그램을 보는데요.
겉으로 보기에 여느 연예인, 음악인, 기업인, 이런 분들인데 그 분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영락없는 믿음의 형제입니다.
그런 프로를 보고나면 한번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인데 그렇게 가깝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오은0 박사, 배달의 민족의 김봉0 대표, 뮤지컬가수 이충0 , 가수 백지0 , 연기자 조승0 , 이런 분이 새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교회가 더 친해지기 위해 밥을 같이 먹는 게 참 좋죠.
그래서 어느 교회든 밥 먹는 일을 아주 중요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밥만 열 번 먹는 것 보다 한번 믿음을 나누고 말씀을 나누는 게 훨씬 더 속 깊게 가까워집니다.
말씀을 나누며 각자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내 놓으면 거기서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인 게 얼마나 뿌듯하게 느껴집니까?
코로나로 부서별 말씀교제를 오래 하지 못해서 얼마나 아쉬운지 모릅니다.
그나마 매일성경묵상방을 통해 함께 하고 있는 것이 정말 주님의 큰 은혜입니다.
하나가 되게 하시는 성령께서는 성도들이 서로 연결해 주님의 복음을 위해 동역하게 하십니다.
5절,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은 첫날부터 바울의 선교 활동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루디아성도는 예수님을 믿자마자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모시고 선교 본부가 되게 했잖아요?
믿음이 다 자라고 성장해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게 아닙니다.
아직 우리 안의 빛이 희미하더라도 어둠을 향해 비춰야 하고, 작은 소금 한톨이라도 세상에 던져 넣어야 합니다.
행복한 신앙생활만 하면 안되고,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훈련받고 가정과 직장과 학교에 파송되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 찐 행복임을 점점 알게 되실 것입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지방을 전도하고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모금을 할 때 적극 참여했던 곳이 빌립보교회입니다.
빌립보를 떠나 다른 지역을 선교할 때도 바울의 경비를 대 주었고, 바울사도가 투옥되었을 때 필요한 것들을 대 주고 섬겼습니다.
지금도 빌립보교인들처럼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동역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헌신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고 주님의 재림의 날이 점점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과 함께 동역한 빌립보교회를 향해 바울사도가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복음을 위해 빌립보교회가 참여한 일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착한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 바울사도를 빌립보에 보내셨잖아요?
아시아전도를 막으시고 이리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믿게 하시고 사업을 축복하셔서 바울의 복음사역에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 교회에도 하나님은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떤 문도 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의 문, 상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문, 환경의 문.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셔서 오늘 이 자리까지 왔으니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지키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문들이 열리리라 믿습니다.
한 사람도 이 착한 일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예수님의 날까지 함께 따르시길 축원드립니다.
3. 바울사도는 사랑하는 빌립보교회를 위해 사랑을 더 풍성하게 되길 기도합니다.
9절부터 11절까지 바울사도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울이 종종 자기가 성도들을 위해 무슨 기도를 하는지 알려주는 이유는 너희도 그렇게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또 그렇게 기도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맞는 한 가지 기도제목만을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9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바울의 첫 번째 기도제목은 빌립보교인들의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믿음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미 바울이 칭찬했듯이 빌립보교회는 사랑으로 수고한 교회입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도 풍성한 헌금을 모아서 보내주었습니다.
고린도후서8장2절을 보면 빌립보교회가 극한 가난 중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랑이 많은 빌립보교회인데도 지식과 총명을 더해 사랑을 더욱 풍성히 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사랑이 풍성해지고 있나요?
저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녔더니 뭔가 다르겠지, 사랑을 기대하고 다가왔다 실망해 돌아가지는 않을까요?
사랑에 지식과 총명을 더하라는 것은 사랑이 정서나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의지와 이성의 영역에 있다는 걸 뜻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사랑하려한다면 사랑에 실패합니다.
사람들 안에 항상 먼저 움찔거리는 것은 사랑보다 미움입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사랑이 안되는 죄인들입니다.
어쩌다 하는 사랑이란 것은 거의 나의 이기심에서 발현 된 사랑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해도 그 뿌리는 결국 나를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죠.
나를 사랑해서 하는 사랑은 내가 힘들어지면 사랑도 미움으로 바뀝니다.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배우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사랑할 상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평생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데, 그 어느 누구도 선택하고 차별해서 사랑할 권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잉여분을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희생까지 하는 사랑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이렇듯 어려운 사랑의 계명의 올가미를 씌워 우리를 끌고 가시는지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모든 율법의 조항들은 다 흉내 내고 따라 할 수 있지만 사랑은 따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백일 새벽기도는 할지언정 내가 싫은 저 사람을 사랑하긴 싫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육 백개가 넘는 율법 조항들을 다 지켰잖아요?
예수님은 딱 한 가지를 지적하십니다.
너희들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
너희에게 인애, 사랑이 없잖니?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뼈저리게 경험하지 못하면 사람은 자신이 모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게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죄인들이 심판을 피해보려고 쥐꼬리만한 자선을 사랑이라고 내놓습니다.
수많은 자선사업을 하고, 몸을 불태워 봉사를 했다 해도, 원수 한명을 옆에 데려다 놓으시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를 보게 됩니다.
아니, 사랑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자기를 보게 되는 것이죠.
말씀에 순종을 않는 자기 주장을 비로서 보게 됩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떤 목사님이 목회 생활 30년에 배운 것이 있다면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가 막히게 데려다 놓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라시는 데 처음엔 항의도 하고 반항도 했습니다.
순복한 다음에도 사랑이 안되고, 용서가 안되서 매일 회개하고 평생 눈물도 그렇게 흘렸다고 합니다.
한 성도가 그런 질문을 하더군요.
그렇게 무조건 사랑을 하고 용납해서 상대가 어떻게 변화되었냐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 분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참 죄송하게도 그래서 변화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는 거예요.
듣는 저도 놀랐습니다.
하나님은 저 사람이 어찌되던 상관 말고 너는 저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잖아요?
저 사람이 조금이라도 바뀌는 게 있어야 사랑하지 그런 마음은 아예 안 갖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늘 실패하는 사랑의 문제를 어떻게 조금씩이라도 정복해 나갈 수가 있을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이미 사랑이 성령의 열매임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싫은 사람을 내 의지로라도 사랑하려고 노력해 보면 전혀 약발이 안 먹힌다는 걸 알게 됩니다.
억지로 사랑하려고 할수록 더 싫어집니다.
성령님의 능력 외에는 지독한 인간본성 자기애라는 장벽을 넘어 남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강요하는 게 아니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충만하게 내 인격과 마음을 계속 주장해 주시길 기도하고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미움이라는 죄에 압도당하지 않고 의지를 발휘해 볼 여력이 생깁니다.
그 힘으로 내 감정대로 살려는 고집을 꺾고 단 1초라도 용서하고 사랑해 보는 것이죠.
아까 말씀했던 그 목사님도 평생을 그렇게 남을 사랑하려고 애를 썼더니 이제는 좀 사람들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하더군요.
사랑하지 않는 채로 살다 죽을 생각은 오늘 다 내려 놓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를 예수님의 심장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바울사도가 예수님을 심장에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죠.
사랑을 배우라고 평생 한 사람을 숙제로 우리 곁에 붙여 놓으실 수도 있습니다.
제멋대로 사는 것을 포기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말씀과 성령께서 분명히 가르치시는 데도 자기 안에 언제나 고집스런 자기 주장이 하나 있는 것은 불순종이고, 성령님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잘 가고있는지를 점검하는 측정기준은 하나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고, 사랑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지. 이것을 기준으로 살아간다면 다른 생활의 모든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복된 궤도를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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