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립보2장12절-18절)

남수연 2014. 9. 11. 13:04

우리 사회를 흉내만 내는 사회라고 비꼬는 말이 있습니다.

정량을 채우지 않고 흉내만 내는 고질적인 풍조로 인해 점점 사회가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이죠.

콘크리트에 필수인 강섬유를 정량의 4분의 1만 넣어 흉내만 내는 터널공사를 했다죠.

배 밑바닥에 평형수를 4분의 1만 넣어 흉내만 내다 넘어간 선박에 대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터질 때 마다 대책도 흉내만 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사회에 불신과 불안이 점점 짙어질수 밖에 없는 것이죠.

흉내만 낸 것은 어느 순간 큰 재앙을 불러옵니다.

신앙생활이야말로 흉내만 내서는 결코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진심이 있고 온 마음을 다한 전심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흉내만 내는 신앙행위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받을 신앙에는 진심과 전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이미 꽤 많은 것을 희생하며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을 다 마친 뒤, 영광의 천국생활을 거머쥘 때까지 믿음의 전력을 다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아직 불명확하고 흔들리는 믿음이라면 오늘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해 사실을 더 배우고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믿음이라면 더욱 성숙한 믿음으로 한 걸음 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감옥에서 수감 중에 써서 빌립보교회로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사도가 개척한 교회입니다.

바울의 선교인생 중에 특별한 애착관계에 있던 교회를 들자면 안디옥교회와 빌립보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바울사도는 모든 교회들을 목숨을 아끼지 않을 만큼 사랑했지만 여러모로 바울사도의 선교사역을 도와주고 함께 했던 교회가 안디옥교회와 빌립보교회입니다.

아무래도 바울사도에게 더 각별할 수 밖에 없었겠죠.

바울이 감옥에서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빌립보교회가 감옥에 수감된 바울을 염려해 또 돈을 좀 모아서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에 문제가 좀 생겼다는 소식도 함께 듣게 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에 신앙적으로 박해와 시험이 있었고, 성도들은 매우 가난한 가운데 생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성도들 사이에 내분도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의 자랑이던 빌립보교회가 시끄러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죠.

믿음으로 잘 달려가다가도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고 위기를 만날 때가 모든 교회와 성도들 개인에 있습니다.

바울사도의 편지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충고와 격려가 오늘 예배가운데 충만히 임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1.먼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12절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걷잡을 수 없는 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교회에 대한 권면은 시선을 다시 구원이라는 본질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언제고 우리의 시선을 하늘을 향하고 위엣 것을 찾으면 어떤 풍랑에서든 벗어날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빌립보교회의 재정문제와 분열과 환경적인 박해에 대해 구원에 대한 권면이 직접적인 문제의 해법 같아 보이진 않습니다.

신기하게 이 땅의 어떤 평지풍파에도 구원의 본질로 돌아가면 어떤 문제이건 다 먹힙니다.

육적인 일이라고 육적으로 해결하려하면 잘 안됩니다.

몸이 아프면 처방약을 먹으면 될 것 같지만 그것으로 다 되지가 않잖습니까?

믿음에 바르게 서면 아무리 광폭한 환경도 순순히 다스려지는 것을 수도 없이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는 것을 주의해서 살펴보길 원합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일까요?우리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구원이 죄를 짓거나 믿음을 버림으로 해서 변동이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 편지는 불신자가 아니라 분명히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구원의 불확실하다거나 구원을 받기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계속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고 천국까지 안전하게 보장이 됩니다.

그 증거로 우리를 부활하게 하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구원이 우리 행위에 따라 무효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더 착하게 살고 더 열심히 봉사한다고 구원을 더 확실히 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데 우리의 착함이나 칭찬받을 행위 같은 것은 저울 위에 먼지 한 톨 올려 진 것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구원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엄밀하게 말해 믿음의 결단조차도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하심이 작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교리적으로는 우리가 이미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았지만 천국에 가는 순간까지 거룩하게 성화되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구원을 받는 순간 우리의 영적인 호적이 바뀌게 됩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나는 데,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존재하는 죄의 본성으로 인해 생기는 죄 문제를 이기고 거룩하게 되어 가는 과정을 성화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미 구원받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성화되어 가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인 것이죠.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믿음이 칭의에서 끝나지 않고 성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칭의만 있고 성화가 없을 수 있냐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서 자녀를 삼으실 때, 어느 정도 천국시민으로 성화되어가고자 하는 선한 욕구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로 세우시기 위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어느 정도의 성화를 이룰 능력을 주십니다.

이 말씀이 13절에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는 말씀과 조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특별히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고 떨면서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것일까요?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달아보시고 불합격 판정을 내릴 것을 두려워하여 계속해서 선을 행하고 구원을 위해 노력하라는 말씀처럼 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런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뒤에 구원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은 옳지 않습니다.

다만 천국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을 깊이 인식해 갈수록 생기는 지금 바울사도가 말씀하는 두려움과 떨림은 좀 다릅니다.

하나님을 확신해 갈수록 좀 더 예수님을 따르는 데 결점이 없이 더 순수하고 진지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거든요.

그러나 죄성을 가진 내 모습은 항상 부족하고 불만족스럽다 보니 거기서 오는 갈등과 두려움 같은 긴장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확신이 생길수록 애착도 깊어지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죠.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애착을 갖고 계십니까?

바울사도는 천국의 펙트를 분명히 체험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손에 막 쥐려는 순간, 그것을 놓치게 될까봐 두렵고 떨렸던 경험들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홈쇼핑 마감 1분전에 전화기를 붙잡아 본 사람은 쉽게 이해가 갈텐데요.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성취되기 직전, 긴장은 최고에 도달하고 마음은 조마조마해 집니다.

바울사도가 천국을 본 순간 어땠을까요?

자기 눈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눈이 부셔 차마 바라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과 완벽한 천국을 보며 이런 세계를 장차 누리며 산다는 게 도저히 실감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국만 가서 봐도 그런 마음이 들던 데 천국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죠.

‘이건, 너무 엄청나다. 이런 세계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

바울이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그 곳을 놓친다면, 혹시라도 믿음에서 미끄러지고 천국 문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이런 조바심이 때때로 바울사도의 마음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천국의 실제를 눈으로 본 바울이기에 절대 구원을 놓칠 수 없다는 떨림이 있었던 것이죠.

엄청나게 좋은 것일수록 그런 마음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바울사도 처럼 천국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해도, 정말 천국의 영원한 아름다운 삶을 확신한다면 그것을 차지하기 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날을 생각하며 조바심으로 나 자신을 더 거룩하게 지켜나가려고 하는 것이죠.

구원을 받은 자의 특징은 구원에 대한 진지함과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의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구원은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끝까지 추적해야 할 우리의 목표입니다.

바울사도는 빌립보교인들이 분열과 시련 속에 신앙의 목표가 빗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울사도에게 교회의 성도들은 자식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자신의 구원 뿐 아니라 빌립보교회들의 구원을 생각해도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영광스런 천국에서 받을 기업을 잊고 세상 근심으로 혹여 그 영광의 반열에서 떨어져 나갈 까 바울자신이 지금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16절과 17절 말씀이 바로 그런 바울사도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심지어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리라.

빌립보교회를 위해 자기 목숨을 다 부어드려도 성도들이 구원을 받기만 한다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말씀이죠.

천국과 내세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사랑하는 자들의 구원에 대해 이런 마음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녀의 구원을 위해, 가족의 구원을 위해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글쎄요. 천국에 대해 나 역시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는지를 알 수도 있겠군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고 우리가 받은 영생은 결코 놓쳐서는 안될 보물 중에 보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천국비유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정말 값진 진주를 만난 한 상인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사기까지의 긴박감이 느껴지십니까?

다른 사람이 그걸 알아채고 사 갈까봐 소유를 처분하고, 진주가 그 손에 들어올 때 까지 마음이 떨리고 초조했을 게 분명합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구원을 이루는 신자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기적이고 천국에 거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바울도, 천국의 펙트를 아시기에 그 길로 간절히 부르시지만 사실을 알지 못하니 사람들이 죽을 길로 가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저희 어머니가 혼수상태가 와서 병원에 입원 중에 계십니다.

밤에 기분 좋게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가보니 의식을 잃고 쓰러지신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현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완전히 세상과 단절되어 버리시더군요.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자기 원대로 몸을 움직이며 사는 것도 한순간에 거둬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응급실 복도에 나와 잠시 앉아 있는 데,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눈물이 나고 막막했습니다.

그 때, 응급 CT촬영실 앞에서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어머니를 흔들고 있던 어떤 여자 분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동병상련라고 해야겠죠.

아무 것도 우리 힘으로 안되는 막다른 골목에서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절망과 무력감이 서로 느껴지는 것이죠.

정말 어머니가 깨어나리라는 기대는 10%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만에 기적적으로 의식이 다 회복이 되셨습니다.

아직 기력이 없지만 이번 주에 퇴원을 하실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깨어나신 뒤 바로 죽어서 천국으로 갈 절호의 기회를 놓치셔서 그런지 기분이 썩 좋지 않으시더군요.

119구급차에 실고 온 저를 좀 원망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급작스럽게 어머니의 죽음을 예견하게 된 순간, 어머니가 죽어서 가실 천국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축복인지 정말 현실감이 느껴졌습니다.

남은 생명의 기간들을 어떻게 보내게 될지 모르지만 생의 마지막에 대면할 고통도 잘 감당하시고 병과 잘 싸우시다 주님 품으로 가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친숙해 보이는 세상과 영원히 단절되는 날이 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받게 된 것에 감사하며 주님의 거룩함을 따르려고 노력해서 이루게 된 각각의 성화 된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뿐 아니라 여러 말씀을 통해 이미 구원받은 우리가 그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닮도록 성장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십니다.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우리에게 점점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 인격과 삶을 통해 보여져야 맞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가능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세속과 별다르게 보이는 종교성을 추구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반대로 너무나 종교적이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최악은 속이 전혀 아닌 데 겉으로 거룩하게 보이는 외식입니다.

속이 아직 아니면 그냥 겉도 아닌 게 좋습니다.

성화는 교회의 전통에 익숙해지고 교회 문화에 동화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조금씩 이뤄집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만큼 예수님의 모습을 향해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화는 겉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이뤄지고 겉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에서 바울은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죠.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같이 의지박약하고 연약한 자들에게 구원의 역사를 홀로 감당하게 하시겠습니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서 행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행하신다라는 동사의 시제는 현재분사가 원문에 사용되었습니다.

지금 현재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무언가를 계속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순간도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순종할 마음을 가지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시고, 구원받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하고 선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되, 우리에게 소원을 주셔서 따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가르쳐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겠습니까?우연히 장님 문고리 잡듯이 어쩌다 보니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하고 싶은 마음, 하나님의 뜻을 우리도 원하도록 소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화를 위해 거듭난 다음 믿음에 강해지고 싶은 소원을 주십니다.

말씀에 대해 관심이 생기고 기도를 어떻게 하는 지 궁금해지고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그런 소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악독한 죄성을 이기고 순한 주님의 양떼가 되는 것이죠.

또 우리 삶을 통해 무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쓰임받고자 하는 소원을 주십니다.

과거에는 세상적인 성공만을 위해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했다면 내게 주어진 환경과 직장과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고 싶은 소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너무나 심오하고 정교하고 자상하십니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공을 들이십니다.

우리를 이렇게 공들여 만들어 오신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해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우리 삶을 조율하는 인생이 진정 성공한 인생인줄 믿습니다.

우리 안에 주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잘 발견하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길을 순종하며 따르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이 성취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원은 아주 작아서 잘 확신할 수 조차 없는 것 같지만 본성의 욕망을 이길 만큼 생명력이 강합니다.

어떤 악조건도 뚫고 나갈 추진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땅에서 우리 같이 연약하고 의지박약한 자들을 통해 한 가지인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지금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소원을 따라 행하고 있다면 14절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직접 모든 일을 계획하고 인도하시기에 원망과 시비하는 마음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장 하나님의 인도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 일에는 하나님이 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때, 우리가 할 일은 원망하고 시비거는 입을 막고 잠잠히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분명히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소원을 따라 왔다면 하나님이 자기의 기쁘신 뜻을 반드시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 그리고 청년들이 마음을 정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을 따라 장래를 잘 이루어 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또 이 말씀은 빌립보교회 공동체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신비는 하나님의 비밀 중에 비밀입니다.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님께 연결 된 주님의 피가 흐르는 몸입니다.

교회의 세포가 되고 구성원으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해 가십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세상 권세를 쥐고 고통의 원흉인 사탄의 세력을 이길 유일한 것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사탄의 힘을 이길 유일한 주님의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있을 때 악한 세력을 이길 힘을 더 얻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교회가 더 강력한 힘을 갖도록 교회의 세포인 우리에게 소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교회의 설교자가 되고자 하는 소원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업을 잘해서 돈을 벌어 교회가 선한 일을 하도록 소원을 주십니다.

아름다운 예배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소원을 주시고, 교회의 성장을 위해 각 사람마다 소원을 두시고 일하도록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삶을 인도하시지만 더 큰 몸인 교회 공동체를 우선으로 생각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 각 성도들을 축복하고 성장시키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아니면 우리가 어디가서 복을 받겠습니까?

어디가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기도의 동역자를 구하겠습니까?

어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교회가 우리의 축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건강하고 은혜와 활력이 넘쳐야 교회에 붙어있는 지체와 장기들인 우리 개인도 풍부한 영양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 끊임없이 말씀과 은혜 안에 건강하게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 개인의 믿음이 아름답게 성화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처럼 교회가 아름답게 성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교회가 흠이 없고 순전하게 성화되길 원하십니다.

사탄을 이길 교회의 능력은 거룩함에서 나옵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로 아름답게 성장하도록 선한 소원을 주시는 대로 신실하게 섬길 때, 하나님의 축복이 교회를 통해 풍성하게 우리에게 부어지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난과 가난과 분열의 어려움을 겪는 빌립보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격려하십니다.

우리가 소유한 천국은 모든 것을 내 주더라도 끝까지 붙들어야 할 진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구원받은 아름다운 성도로 더욱 성화되어가길 원합니다.

또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이 무엇인지 민감하게 깨닫도록 영적으로 더욱 깨어 있고 우리 교회와 함께 소원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4.8.31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