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주 안에 서라 (빌립보서4장1절-7절)

남수연 2012. 7. 19. 20:56

오늘 본문은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바울사도가 고난당하는 교회에 보낸 이 위로와 권면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든 마음에도 큰 위로를 주실 줄 믿습니다.

먼저 본문 빌립보서의 배경과 바울사도가 편지를 써 보내게 된 이유를 좀 살펴보겠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지금 세 가지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신앙의 시련을 당하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다른 지방보다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다고 고린도후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오늘 읽은 본문대로 교회는 두 파로 나뉘어 분열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현대에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합니다.

경제적인 문제들은 항상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되는 때는 아니지만 여전히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세상이죠.

교회나 가정이나 직장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또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격려의 편지를 보낸 바울사도의 형편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로마의 감옥에 갇혀 언제 사형판결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전도해서 낳은 성도들의 고난 소식을 들을 때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달려가서 문제를 해결해 주고 말씀과 성령의 은사로 믿음을 바로 세워주고 싶었지만 쇠사슬에 묶인 몸입니다.

편지만이 환난과 시련 속에 있는 빌립보교회를 붙들어 줄 유일한 방편이었습니다.

바울사도의 애틋한 마음을 담은 간절한 권면은 1절에 있는 대로 빌립보교회와 성도들에게 고난을 이기고 주 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의 믿음과 가정과 직장이 주 안에 굳게 서야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어떤 시련이나 풍파에도 넘어지지 말고 오늘 말씀대로 순종하여 복된 인생을 견고히 세워나가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본문은 고난 가운데 넘어지지 않고 주 안에 서기 위해서 몇 가지의 지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째는 동역자들이 한 마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위기가 닥치고 위태로울 때 함께 하는 가족과 동역자들이 하나가 되어야만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장애아를 낳을 경우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90%이상의 가정이 깨진다고 합니다.

성경은 혼자가 아닌 둘, 그리고 셋이 얼마나 인생에 힘을 보태주는 지를 말씀합니다.

전도서 4장 12절은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4장 10절엔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가정도 교회도 절대 분열되거나 흩어지면 안됩니다.

언제 우리 인생을 덮칠지 모르는 세상의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 가족들은 신뢰와 사랑으로 뭉치고 하나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믿음의 시련과 고난 앞에서 분열하는 교회를 바라보는 바울사도의 아픈 마음은 곧 피 흘려 세우신 교회를 바라보는 우리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안타까움과 사랑의 마음이 1절에 너무나 잘 나타납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참 따뜻하죠?

마음이 상한 자녀들을 꼭 끌어안고 토닥여주는 부모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항상 이렇게 다정하게 부르고 위로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힘을 얻겠습니까?

바울사도의 진정이 담긴 이 마음은 또한 성령께서 고난당하는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성도들을 향한 예수님의 진실하고도 애절한 사랑을 남녀의 사랑으로 표현한 아가서에는 주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아가 7장 6절에서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시는 사랑의 마음이 이 정도라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주의 주관자이신 광대한 하나님의 이 지극하신 사랑을 우리가 받고 있는 것입니다.

힘든 나날 속에 혹시 소망이 흐려지고 지쳐가고 있다면 바울사도의 편지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으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질병과 답답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로 낙망하지 말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반드시 소망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함께 인생의 항해를 동승하며 같은 풍랑을 맞으며 애쓰는 우리 성도들과 가족들에게도 이런 위로와 사랑으로 격려하고 도와줘야 할 줄 믿습니다.

2절에 보면 빌립보교회 분열의 중심에 있는 두 여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인이죠.

교회에 공적으로 보내는 편지인데 이름을 밝히는 것을 보면 두 여인의 다툼이 공공연하게 드러난 상황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교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을 두 여인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며 교회 전체를 어렵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나라 교회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고 자칫 교회가 둘로 쪼개 질 수도 있는 심각한 위기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이 여인들이 한 때는 바울과 함께 빌립보교회를 세우기 위해 분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들고 아시아를 전도하길 원했었죠.

그러나 성령께서 아시아 전도의 문을 막으시고 유럽의 마게도냐로 바울을 인도하십니다.

마게도냐에 도착해 처음 복음을 전한 곳이 바로 빌립보란 도시입니다.

그러나 빌립보 전도는 순탄치 않았죠.

바울은 전도를 하다 붙잡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루디아라는 여인과 간수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으며 생겨난 게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복음을 이렇게 핍박하는 곳에서 여인들과 간수의 식구들 몇 명으로 시작 된 개척교회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겠습니까?

아마 두 여인은 개척멤버로 빌립보교회를 굳게 세우기 위해 희생적인 수고와 영적 싸움을 감수했을 것입니다.

한때는 뜨거운 믿음으로 마음을 합쳐 주의 일도 하고 헌신도 했지만 지금 교회에 위협적인 존재가 된 그들을 바울은 책망하지 않고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따뜻하게 권면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헌신했던 두 여인의 수고를 인정하고 모든 교회가 중재하며 그들을 사랑으로 도와주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미움과 증오를 불러 분열시키지만 하나님은 사랑으로 싸매시는 줄 믿습니다.

마귀의 충동으로 틈이 생기기 시작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덮어야 하는 것입니다.

잘잘못을 따지고 판결을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을 많이 봅니다.

아마 이 편지를 읽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함께 고생하며 개척교회를 섬기던 그 때를 떠올리며 화해의 포옹을 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들처럼 주님의 교회를 견고히 세우기 위해 힘을 다해 수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수고한 성도님들의 상은 영원히 잃어버려지지 않습니다.

3절에 보면 지금 그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여전히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특별히 말씀하지 않습니가?

잠시 시험에 들고 낙심한 지체들을 서로 긍휼히 여기고 돌볼 때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굳게 세워지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부부들 젊은 날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합해 가정을 이루고 참 열심히 달려오지 않았습니까?

아픈 자식을 놓고 함께 마음을 끓이고 위기 앞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참 평탄치 않은 세월을 함께 한 부부이고 가족들입니다.

험악한 인생에 좌절도 하고 실패도 하며 때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실망도 안겨주었겠죠.

그러나 한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려왔고 넘어질 때 마다 서로를 향해 내밀어 주었던 따뜻한 손길을 잊지 말아야 할 줄 믿습니다.

우연히 길에서 식구들의 모습을 볼 때 참 묘한 기분이 들죠.

나를 발견 못하고 길을 걷거나 딴 곳을 응시하고 있는 식구들을 멀리서 보는 순간 왠지 측은한 마음이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귀가하는 자식의 모습을 먼저 발견하는 순간 무거운 가방에 쳐진 어깨는 또 얼마나 우리 마음을 휘젓는지요.

우리 가족은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가장 아름다운 축복인줄 믿습니다.

우리 청년들 이런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을 이루시길 축원드립니다.

앞으로도 멀고 먼 인생길을 함께 가며 넘어질 때 손을 잡아 줄 사람은 그래도 우리 가족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의 힘으로 넘지 못할 산은 우리 교회가 함께 기도하며 이겨내는 것이구요.

오늘 본문에서 시험에 들고 상처가운데 있는 여인들을 권면하듯 하나님은 늘 상처받는 우리를 싸매시고 붙들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으로 동역하며 격려하며 주 안에 견고히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둘 째로 빌립보 교회가 시련을 이기고 주 안에서 서기 위해서 오히려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하시죠.

삼중고에 짓눌려 있는 빌립보교회를 위한 바울사도의 강력한 권고는 그것을 이기고 서기 위해서는 오히려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남편이 해고당하고 아들이 대학 떨어졌는 데 거기다 대고 모든 것을 기뻐하라고 말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실제 걱정거리를 앞에 두고 우리 마음에 어떻게 기뻐할 수 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말씀이 명령하신 대로 성도들에겐 시련을 뛰어넘고 기뻐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는 모든 위기를 뛰어넘을 수 있는 주님의 기쁨을 다 주셨습니다.

다만 죄를 가진 인간 내면의 본질적인 정서는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작가 마크 트웨인의 말대로 우리가 기뻐하기보다 우울한 기분에 잠겨있는 걸 선호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고통스런 환경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게 우릴 더 많이 불행하게 만드는 함정인 것이죠.

그렇기에 하나님은 궁색한 연민을 멈추고 우리 안에 주신 기쁨의 능력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못하고 있을 경우 환경과 기분에 따라 우울한 영향을 받기가 더 쉽습니다.

거듭되는 우환과 경제적인 빈곤과 온갖 문제들의 비중은 점점 크게 보이고 어느새 우리 안에 기쁨이 다 사라져버린 것 같아지죠.

이럴 때 깊이 가라앉은 기쁨의 우물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 한 바가지는 오늘 말씀대로 믿음으로 의지적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가난과 박해와 분열로 침울한 교회를 향해 기뻐하라고 다시 한번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의지적인 노력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심리학에서도 그렇게들 합니다.

심리학자들이 어떻게 알았는 지 억지로 웃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억지로 기쁜 듯이 웃으면 두뇌가 정말 기쁜 줄 착각해서 행복한 호르몬을 내보내 실제로 마음이 기뻐진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레크먼 박사의 말에 따르면 실험결과 우리 뇌는 실제 웃음과 거짓 웃음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밝은 표정만 지어도 뇌는 실제 웃을 때와 똑같이 뇌하수체에서 엔돌핀 같은 자연 진통제를 생성한다고 합니다.

또 혈액 내에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량을 줄여주고 동맥이 이완되고 혈액순환을 잘되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 웃는 것이 아니라 웃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이 있죠.

기쁨이 우리 몸을 유익하게 한다고 잠언 17장 22절에서 말씀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잠언 18장 14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 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저도 좀 웃고 살려고 주일 저녁엔 개그콘서트를 자주 봅니다.

집에서 얘기할 때 개콘 용어 쓰면서 얘기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재미있게 보고 나서 마지막 네 가지가 끝나고, 들어가 자자 그러는 순간 웃음기가 사라지고 잠시 어색한 분위기와 허탈한 마음이 들죠.

월요일 출근을 생각한 사람들이라면 순식간에 모든 즐거움이 사라지고 월요병이 불쑥 덮쳐올지도 모릅니다.

세상적인 유머나 개그의 한계가 바로 여기까지 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한 번 크게 웃으면 에어로빅 5분 한 효과와 같다고 하죠?

박장대소하며 15초만 웃으면 백미터달리기를 전력질주 한 것과 맞먹는 운동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기뻐하시고 또 삶에 활력이 될 기쁨들을 찾아 즐겁게 사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침울한 사람 싫어하고 그 곁에 잘 가지 않으려고 하잖아요?

우리가 잘 아는 닉 부이치치라는 사람은 사지가 없고 몸통만 있는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집회에 나와 강단 위에 올라앉아 신앙을 나누는 것을 보면 얼마나 유머가 풍부하고 유쾌한 사람인지 장애인이란 사실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간증이 끝나고 몸통만 있는 그를 끌어안으며 사람들이 오히려 마음의 치유를 받고 믿음이 회복되어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걸 봅니다.

어떻게 항상 그렇게 기쁘게 살 수 있냐는 기자의 말의 그는 자신의 감사와 기쁨이 감정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 몸이 비록 이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반드시 내 인생을 인도하실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을 매 순간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즉시 주님의 기쁨이 그를 충만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믿음의 능력이고 신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즐거워하며 환희에 차 생동감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을 기쁨으로 누리며 감사할 때 창조주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죠.

저는 잠실 야구장을 가득 매운 사람들이 열기로 터질듯하고 안타 한 방에 환호성을 지르고 한껏 즐거워하는 광경을 볼 때 마다 하나님께서 참 흐믓하게 보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식으로 인간이 이루어 놓은 이 문명과 지식들을 누리며 기뻐하는 것이 곧 창조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 15장 11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입안 가득 웃음을 머금고 내일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을 확신하고 저 우울에 빠진 세상과 다르게 살길 원하십니다.

하루의 매순간 우리는 기쁨과 불쾌를 선택할 능력이 있는 줄 믿습니다.

불행에 빠진 순간에도 반드시 기뻐할 조건은 함께 존재합니다.

자식이 문을 쾅 닫고 나가 마음을 상하는 순간에도 건강한 두 발이 있어 신경질 내고 밖으로 나갔으니 얼마나 기뻐할 일입니까?

말씀에 순종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마음을 선택한다면 어떤 시련 중에 있다 해도 능히 이기고 믿음으로 굳게 서리라 확신합니다. 아멘.

세 번째로 빌립보교회의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시죠.

지금 빌립보교회는 염려 않을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 형편 역시 염려 않을 상황이 아니죠.

밥상물가가 비상이고 세계적인 기상이변으로 식료품 가격은 더 오를 거란 기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불황의 늪이 10년 이상 지속될 것이란 전망들을 들을 때 마음이 무거워짐을 어쩔 수 없습니다.

카드명세서를 보는 순간 시작 된 걱정은 어느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노후문제와 자식들 장래까지 떠오르며 순식간에 우리를 낙담시키죠.

정말 살아있다면 벗어날 수 없는 게 걱정, 근심, 염려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앞날을 미리 걱정해 놓는 게 무슨 적금 들어 놓은 것도 아닌 데 막연한 미래의 걱정거리를 놓고 끙끙거리는 게 참 어리석은 우리 모습이죠.

미국 심리학 박사인 베벌리 포터는 그의 책 ‘쓸데없는 걱정 현명한 걱정’에서 쓸데없는 염려는 마약 같은 중독성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염려하는 성격은 점점 더 깊은 염려 속에 빠져서 살게 된다는 것이죠.

오히려 평안한 상태가 불안해서 자꾸 염려를 끌어안는 다고 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쓸데없는 걱정부터 중단해야 합니다.

염려는 건설적인 계획과 다릅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고 오히려 영적인 측면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어 염려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욥이 고난 중에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그가 동방의 부자였고 신앙적으로도 빈틈없이 노력했던 사람이었는데도 그 맘에 행복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있었기에 마귀의 시험이 온 것입니다.

우리 걱정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대개는 돈과 건강, 자녀 문제일 것 같습니다.

돈 걱정 없이 사는 부자들은 아무 염려 없을 것 같죠?

그러나 신문 기사를 보면 부자들도 돈이 인생의 가장 큰 걱정거리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소득 상위 1%를 상대로 한 조사를 보면 가계 빚을 진 부자들이 43%나 됩니다.

그리고 그 중 62%는 그 빚에 대한 부담을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부자들이라고 돈 걱정 안하고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미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게이츠재단이 재산 300억이 넘는 165가구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그들은 자신의 돈이 아직 부족해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식당에 갈 때 마다 누가 돈을 낼 것인지 쳐다보는 시선이 늘 불편하고 기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큰 교회를 담임하고 계신 데 힘들게 작은 목회를 하고 있는 친구목사님들이 많으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임 때 마다 항상 이 목사님이 식사비를 내시고 가까운 곳에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차편에 숙박비까지 늘 감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구하나 설렁탕 한 그릇 대접하는 친구가 없어서 은근히 화가 나 어느 날 어째 그렇게 대접받기만 하느냐고 한 마디 한 겁니다.

다음 달 모임에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 걸 보고 씁쓸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돈 많아서 쓰고 다니면 마냥 좋기만 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지금 당장 애들 교육과 노후문제와 생활자금으로 압박을 받다보니 돈만 있으면 모든 염려가 사라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건강 문제만 해결되면 걱정 없을 것 같지만 그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곧 대기하고 있던 다음 염려거리가 밀고 들어 올테죠.

혹시 걱정거리 없으면 무기력과 권태라는 만만찮은 놈이 밀고 들어옵니다.

염려거리가 사라지길 기다리다 인생 다 갑니다.

오늘 바울사도의 말씀은 원어대로 표현하자면 예외 없이 모든 걱정하는 것을 당장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마음을 중단해야 하는 이유는 염려하는 순간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앙에 있기 때문입니다.

걱정거리에 집중했던 시선을 하나님께 돌릴 때 비로서 우리 목을 누르던 걱정이 물러가는 줄 믿습니다.

성도들에게도 걱정 근심할 고난들이 다른 사람들과 꼭 같이 닥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덜하지도 그렇다고 더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상황 속에서 염려만 할 것이 아니라 기도로 이길 능력을 주신 줄 믿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초등학생인 아들을 사고로 잃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인생에 모든 의미가 사라지고 살 소망도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14층 아파트에서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 그 아래로 뛰어내리면 마치 푹신한 것이 몸을 받아줄 것 같고 모든 고통이 다 끝날 것 같은 유혹을 떨치기가 그렇게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아버지, 저는 이렇게 죽을 수 없습니다. 저를 살려주세요라는 기도로 매달리면 어느새 정신이 돌아오곤 했다고 합니다.

기도로 우울증을 이겨낸 것입니다.

자녀들의 간절한 기도를 반드시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정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간절히 진실하게 기도했는 데 주님이 외면하시고 결과가 나쁘게 된 적이 있으십니까?

절대 없는 줄 믿습니다.

혹시 지금 나빠진 상황 속에 있다면 믿음으로 좀 더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좋지 않다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결국 나를 위해 더 좋은 길이었음을 반드시 발견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하는 빌립보교회에 바울사도는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걱정거리를 놓고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능력이 있는 아버지께 알려드리면 문제는 우리 하나님아버지께서 맡으시는 줄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7절에 보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지키신다는 헬라어 원뜻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철저히 보초를 선다는 군사 용어입니다.

우리의 시험과 고난이 있을 때 틈을 타 우리 마음과 생각을 공략해 오는 악한 영의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기도할 때 말씀대로 악한 자들로부터 우리 마음을 평안 가운데 철통 같이 굳게 지켜주시는 줄 믿습니다.

기도할 때 당황하지 않는 평상심을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일을 해결해 나갈 올바른 생각도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6장3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누군가 말하길 염려하는 것은 자동차 기어를 중립에 놓고 가속페달을 밟는 것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아무리 밟아도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고 엔진만 죽어라고 돌아가는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해야만 상황이 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우리 삶의 염려할 일을 만났을 때 기도는 최후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도는 최초의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사도의 권면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듣고 모든 시련을 이겨낸 줄 믿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순종해 이겨낼 줄 믿습니다.

사랑으로 가족과 성도들과 함께 동역할 때 고난을 능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시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며 아버지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들을 기억하고 꼭 지키셔서 성도님들의 믿음과 가족과 직장과 장래의 모든 일들이 주 안에서 견고하게 세워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