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가지면 우리가 행복하고 만족할까요?
중산층만 된다면 우리 삶이 참 괜찮을 것 같죠?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산층 기준이 무엇인지 설문조사를 해봤습니다.
우선 빚이 없어야 합니다.
대출 없는 40평대 아파트에 살면서 월급 5백만원 이상, 중형차, 통장 잔고 1억. 1년에 한 두 번 해외여행 다닐 수 있는 정도.
이 정도 되야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중산층이 아니라서 갑자기 불행해 지셨습니까?
그러니 자신이 하위 계층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50%가 넘는다고 합니다.
부자나라 미국도 빈곤층 비율이 15%가 넘는다고 하죠.
얼마 전 미국 대형교회 설교방송을 보는 데 생활이 쪼들린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는 말에 거의 다가 손을 들더군요.
집 대출금, 자동차 할부금, 카드대금, 학자금 상환, 부자나라 미국도 우리처럼 사는 게 팍팍하긴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그런 부자나라 대형교회에서 비싼 커피마시지 말고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며 빚 갚으라고 설교하는 데 좀 의외였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설교는 하지 않잖아요?
인류가 갈수록 잘 살거라는 핑크빛 전망은 도대체 어느 연구소에서 나온 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만족할 만하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불만족 정도가 아니라 불안할 만큼 힘든 상황에 놓일 때가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충족되지 않는 환경 속에 살아야 한다면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가진 것이 부족해서 불행하다고 속삭입니다.
지금보다 더 가져야 행복하다고 부추깁니다.
인간의 탐욕을 아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지금 있는 것에 스스로 만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족하는 믿음은 게으름이나 포기나 안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자족을 말하는 바울사도는 체념할 사람이 아닙니다.
천막을 만들어 선교비를 벌어가며 치열하게 복음전파를 위해 달렸던 사람입니다.
최악의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 삶을 이끄시기에 언제고 족하다는 것입니다.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투덜거리며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고 불행하게 삽니다.
디모데전서 6장 8절에도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가장 성공한 사람 중 하나인 애플사의 스티브잡스는 ‘성공의 비결은 계속 불만족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큰 성공에 계속 불만족하며 더 이상을 쫒았지만 결국 이룬 것을 다 세상에 두고 빈 손으로 떠났습니다.
불만을 버리고 자족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인간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선하고 아름다운 법칙을 거역하고 예측불허한 위험한 무법천지를 선택했습니다.
언제 실패와 가난과 병마의 함정에 빠질지 모르는 세상에서 환경이 우리를 지배한다면 매일이 우리에게 지옥일 것입니다.
돈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게 해야 합니다.
이 결핍되고 불안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자족하며 평안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오늘 바울사도의 자족하는 믿음을 통해 우리도 현재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믿음을 배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먼저 오늘 편지가 보내진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배경도 함께 아셔야 성경이해에 대한 기초를 튼튼히 할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또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이번 투옥에서 사형판결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바울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심각한 수감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가 급히 헌금을 모아서 에바브로디도편에 보냈습니다.
아마 보석금을 내서라도 바울사도가 석방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바울사도는 후원금을 받고 빌립보 교회에 이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편지 내용이 후원금에 대한 감사보다는 오히려 이런 것 보내지 않아도 난 충분히 자족한다는 것을 더 강조합니다.
‘뭘 이런 걸 다’ 이런 소리가 아닙니다.
왜 바울사도는 굳이 자신의 자족하는 믿음을 여기서 강조하는 걸까요?
자격지심이나 허세였을까요?
우리 속담에도 양반은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는 말이 있죠.
바울사도가 새삼 자기의 믿음의 경지를 자랑하려는 의도도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빌립보교회도 바울의 자족하는 믿음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는 말을 이미 두 번이나 언급합니다.
누구에게 나를 본받으라는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지금 감옥에 수감된 고통스러운 형편에도 자족하는 자기의 믿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빌립보교회의 형편도 결코 만족스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빌립보교회의 형편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있습니다.
빌립보교인들은 지금 극심한 박해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가난한 중에서도 바울의 선교를 돕기 위해 힘에 지나도록 후원금을 보냈다고 썼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각성 좀 하라는 뜻이죠.
거긴 부자 교회였거든요.
궁핍하고 박해당하는 빌립보교회가 또 어려운 살림을 털어 후원금을 보낸 것을 보고 바울사도가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빌립보교회가 힘든 시련을 이기는 비결인 자기처럼 자족하는 마음을 갖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와 함께 우리도 바울의 자족하는 마음에 대해 배우길 원합니다.
먼저 인생에 대해 정리를 좀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에 가난과 시련에 대해 왜 내게 이런 일이 있냐는 원망이 없어지고 자족하기가 쉬워집니다.
오늘 바울사도가 비천과 풍부와 배부름과 배고픔에 처했었다는 말씀은 우리 인생을 깔끔하게 정리해 줍니다.
인생이 항상 풍족하고 형통한 일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7장14절은 말씀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우리 사는 동안 곤고한 날과 형통한 날이 평생 같이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이렇게 인생을 좀 이해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원하는대로 안되냐는 불만을 그쳐야 합니다.
우리의 고난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사도에게도 하나님은 곤고를 면제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선교비가 풍족할 때도 있고 딱 끊겨 끼니가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당연히 박해가 있고 사탄의 방해로 일이 더 꼬이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바울은 39대씩 맞는 태장을 세 번이나 당했고 거의 죽어서 거적대기에 말려 성밖으로 버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밝히는 대로 배고픔과 굶주림과 비천한 지경을 수없이 당했습니다.
복음전도자의 이런 극심한 고난은 더욱 이해하기가 어렵죠.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성도의 고난은 신비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고 당당하게 고난을 대면하라고 합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얼굴을 찌푸리고, 가난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다는생각은 지나친 기복신앙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복을 대줘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으리라.
믿음대로 될지어다.
굉장한 믿음 같지만 비성경적인 믿음이고 신앙인격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도들은 대개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잘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우리를 인도해주시기 때문이죠.
또 자연적인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건전하게 살고 오락과 유흥비로 탕진하지 않으니 돈이 절약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좋은 마음으로 살면 몸도 좀 건강해지고 병원비도 절약되겠죠.
그런 차원에서도 결국은 믿는 가정이 더 잘 살게 되는 것이 한편은 맞습니다.
우리의 삶을 봐도 예수님을 믿고 확실히 더 잘된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과정 중에는 고통과 실패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대비한 믿음의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만사형통하다는 신앙은 현실이 그렇지 않을 때 실망과 좌절도 큽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커너먼교수는 ‘잘되는 나’ 이런 사고방식으로 자기최면을 걸며 원하는 것을 쫒던 사람이 더 크게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비합리적인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더 많이 실패한다고 합니다.
펜실베니아대학의 외팅겐교수는 다이어트그룹을 통해 이 사실을 입증합니다.
한 그룹에는 다이어트가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적 상상을 시켰습니다.
다른 그룹에는 실패할 가능성에 대한 부정적 상상을 시켰습니다.
1년 후 결과는 부정적 상상을 한 쪽의 성공률이 훨씬 더 높았다고 합니다.
비슷한 실험이 또 있습니다.
대학생의 한 그룹은 2년 동안 자기가 원하는 직장에서 일하는 긍정적인 상상을 시켰습니다.
결과는 그렇게 안한 학생들보다 오히려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취업률도 낮았고 보수도 훨씬 적게 받는 직장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근거도 없이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고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항상 만사형통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렇지 않은 현실에서 감사 대신 불평하기가 더 쉽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길에 예수님이 동행하시고 위기와 절망 중에 도와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음 안에 있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난과 형통이 다행히도 다 좋은 일입니다.
결국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유익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가난과 비천과 고난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절대 자족하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현재의 모든 형편은 모두 다 하나님의 최선이라는 것을 믿으시고 어떤 상황에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족하다고 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그러면 바울사도는 어떻게 이런 절대적인 궁핍 속에서 자족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1절에서 그 비결을 말씀합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즉 자족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되어야 합니다.
12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사도는 그의 모든 경험을 통해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어떤 고난에서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복음의 능력으로 자기가 하려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바울은 옥에 갇혀 전도 할 수 없는 형편이지만 그렇다고 복음전파가 막혔냐 그렇지 않습니다.
앞 장에 보면 바울의 투옥으로 인해 다른 성도들이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바울사도는 아시아지역에 먼저 복음을 전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도와달라는 꿈을 꾸게 됩니다.
마게도냐는 유럽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성령께서 유럽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고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기는 커녕 겨우 옷감장수 루디아라는 여인이 회심을 합니다.
게다가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의 귀신을 쫒았다가 고소당해 심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처지가 됩니다.
보내시는 곳으로 갔는 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찬송을 불렀던 것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때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차꼬가 다 벗겨집니다.
간수는 대 탈옥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 절망해서 자결하려는 순간 바울사도가 그를 저지합니다.
그날 밤 간수장은 바울사도를 집으로 모시고 온 가족이 세례를 받습니다.
맞고 감옥에 갇힌 걸로 해서 예상치 못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간수와 루디아의 가족들이 주축이 되어 세워진 것이 바로 지금 편지하는 빌립보교회입니다.
바울사도의 선교사역엔 맨 이런 일들입니다.
우리의 삶을 뒤돌아봐도 그렇지 않습니까?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결국 하나님은 선을 이뤄주셨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여도 소망이 생기고 믿는 구석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그런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결말을 안다면 뭐하러 마음을 졸이고 투덜대고 걱정하겠습니까?
투덜거렸는데 결과가 좋으면 민망하고 머쓱해지기만 하는 거죠.
물론 우리 삶의 궁핍과 가난은 가볍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남보다 적어서 불만이라면 마음을 고쳐먹으면 해소됩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궁핍이 문제입니다.
당장 갚을 빚이 있다거나, 버는 것 보다 나가는 게 더 많은 재정구조에서는 자족하는 마음으로 바꿔 먹는다고 일이 해결되질 않습니다.
절대적인 궁핍은 물론 돈 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해결되기 힘든 모든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병과 가정문제, 자녀문제, 막막한 진로도 절대적인 궁핍과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적인 궁핍은 항상 우리 심령을 짓누릅니다.
가슴에 뭐가 뭉친 것 같이 항상 불편을 느낍니다.
머리로 걱정하는 데 신기하게 가슴 부위가 뻐근해지지 않습니까?
왜 그런지 아십니까?
머리 속에 걱정과 근심의 감정이 꽉 차면 교감신경이 극대화됩니다.
그러면 주로 가슴과 명치 부위에 위치한 교감신경절의 신경물질 분비가 많아집니다.
그러면 심장근육과 흉부근육에 미세한 수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속상하고 억울하고 슬플 때 가슴이 막 저리는 것을 느끼게 되죠.
위산의 분비도 교감신경과 연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위염이나 위궤양이 생기는 것이죠.
매일 뭔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불안하고 답답하게 살다보면 항상 가슴에 뭉근한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가슴이 뻥 뚫리고 날아갈 듯 가볍게 산다는 것은 참 꿈같은 일이죠.
바울사도의 궁핍도 이런 절대적인 궁핍입니다.
차꼬에 차여 갇혀있는 현실, 굶주림, 비천한 대우, 마음먹는다고 해소될 문제들이 아닙니다.
이런 절대적인 궁핍 속에서도 배운 대로 자족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소망을 갖고 위기와 환경을 뚫고 가는 것입니다.
가난을 너무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머니에 천원 짜리 몇 장 남았다고 죽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과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따르면 모든 것을 헤쳐 나갈 지혜를 주시고 환경을 통해 차츰 우리를 인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세상사람들도 다 역경을 이기는 데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데 왜 안됩니까?
절약할 것은 절약하고 좋은 문이 열리기를 두드리며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상황을 경영해 나가면 결국 위기도 벗어나게 됩니다.
동쪽에서 귀인이 나타나 갑자기 모든 빚을 갚아주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청년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며 열심히 실력을 갖추십시오.
바라기만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 우리를 비천한 처지에 두셨다면 그걸 통해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자신을 낮추면 때가 되면 높여주십니다.
필립얀시의 책에 한 수도원을 방문한 여행객과 수도승과의 대화를 기록했습니다.
수도승이 여행객에게 수도원을 소개한 후 이렇게 말합니다.
머무시는 동안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없이도 사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이 없어도 살 수 있게 강합니다.
요즘 성공하는 오락프로그램은 먹방, 오디션프로, 정글의 법칙이라죠.
왜 사람들이 여전히 정글의 법칙에 열광을 합니까?
정글 같은 나의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강인한 인간상을 동경한다는 것입니다.
성공과 부요만을 기대할수록 실패에 대해서 더욱 두려워지고 모든 일에 약체가 되어갑니다.
모든 환경을 주관하시며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가난에도 풍부에도 처할 수있는 담대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고 긍정은 하지만 마음이 자족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그러려고 생각해도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잘 되질 않습니다.
바울사도는 자족하는 비결의 비밀을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족하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바울사도가 가는 곳마다 되풀이 되는 역경 속에서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능력주시는 주 예수님을 끊임없이 주목하고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가련한 처지를 이기려면 오직 기도를 통해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굳게 붙들면 현실을 이길 능력도 자족감도 생깁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거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줄을 놓으면 끈 떨어진 연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다가 매다 꽂힐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도하며 주님을 붙들고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독립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독립하면 마귀가 손을 대고, 죄성이 내 인생을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우리의 힘든 처지를 하나님 앞에 기도로 간구하면 하나님의 큰 손이 움직이시잖아요.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도 주님의 손이 우리를 편안히 잠들게 합니다.
아침에 또 용기를 내서 주님과 함께 내 삶을 용감하게 대면하는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수도 없이 한 다윗은 시편30편에서 고백합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우리는 이미 말로는 형용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영화로운 천국의 기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 믿으시죠?
이 땅에서 조금 더 갖고 좀 더 화려하고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영생을 생각할 때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목하고 바라면 진짜 우리의 영광과 보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 갚아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약속받은 천국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족하다’란 생각이 절로 듭니다.
CS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 한 분만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이 가졌다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을 우리가 가졌다는 것은 너무나 크고 완벽해서 이 세상의 다른 무엇을 갖다 붙여도 아무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사도는 자기에게 있던 모든 부와 명예와 최고의 학문까지 다 배설물로 여겼던 것입니다.
환경을 능가하는 자족하는 마음은 나를 강하게 하시는 예수님께로부터 옵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주시길 진지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할 때 모든 고난을 뛰어넘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평강과 능력을 우리에게 주실 줄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성도들이 돈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지 알아보겠습니다.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의 헌금 자체를 고마워하기보다 그들이 바울의 선교에 대해 동참한 것을 기뻐한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종류의 헌금이든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부족한 것이 없고 만물이 주님의 것이기에 우리의 헌금이 고맙기보다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빌립보교회의 헌물에 대해 말씀합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라 그 헌금이 오히려 너희에게 유익한 풍성한 열매가 된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물질로 섬기면 유익은 결국 내게 돌아온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우리 보물을 천국에 쌓으라는 말씀 지난 주에도 나눴습니다.
천국에 무슨 돈이 필요하겠습니까?천국은 도로 포장재가 황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로 예수님을 섬기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천국에서 내게 유익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돈이 이 땅에서 얼마나 우리에게 귀합니까?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헌신에 대해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뿐 아니라 영원한 생에서도 쓸 수 있는 가치로 보존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선교바자회에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물질을 드린 것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우리에게 참 보람도 있고 몽골교회에서는 얼마나 요긴하게 어린이 사역을 더 잘 해나가겠습니까?
빌립보교회의 헌금에 대해 바울사도는 18절에서 향기로운 제물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돈을 드렸는 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제사로 여기시며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빌립보성도들이 궁핍한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다 옥살이를 하고 있는 초로의 사도를 위해 주머니를 털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찌 움직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이렇게 축복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런 축복이 모든 성도님들께도 임하시길 주예수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자족하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땅의 보물과 사라져버릴 행복에 가치를 두는 것보다 영원한 보물을 추구하길 원합니다.
토마스아퀴나스가 교황을 찾아갔을 때 교황이 이제 교회엔 은과 금이 풍성하다고 자랑했습니다.
토마스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이제 교회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능력은 나타낼 수 없습니다.’
돈이 우리에게 크게 느껴질수록 믿음의 능력은 분명히 작아집니다.
부요하십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며 적당히 누리시고 보물을 천국에 쌓아두십시오.
가난으로 마음이 힘드십니까?
자족하는 마음과 환경을 뚫고 나갈 능력을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사실은 부족할수록 빌립보교회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물질의 궁핍을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암시합니다.
그리하면 너의 모든 쓸 것을 풍성하게 채우시리라.
가난한 중에 드리는 것은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거든요.
지금 자족하고 행복을 누리지 못하면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게 주신 것을 감사하며 만족하게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에 처할 줄도 아는 강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들이 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3년9월22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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