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1장1절-8절
올 여름이 지구온난화로 인해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찜통 여름이였다고 합니다.
더위에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저도 밤에 까지 에어컨을 틀고 자다 전기요금 폭탄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장차 지구온난화로 인한 재앙은 전기요금 폭탄에 비할게 못되겠죠.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생각하다보면 정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잘 하는 것인지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지난 한 주는 북한의 도발행동까지 있어 국민들이 다 뒤숭숭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는 소식과 실질 청년실업률이 20%에 달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우리 자녀들의 미래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져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만취한 대학생이 묻지마 살인을 저질렀던 사건도 어찌보면 미래에 대한 절망감에 술에 찌든 불행한 청년세대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합니다.
세계경제도 심상치가 않다고 합니다.
모르긴 해도 매일 새 것을 사 쓰고 어느 게 더 좋은 지를 비교하던 그런 호황을 다시 누리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우리 체질을 저성장에 맞춰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와 그가 편지를 보낸 빌립보교회는 지금 우리 형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실정에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감옥에 갇혀 선고와 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고, 빌립보교회는 외부의 박해와 성도들 간의 불화로 내홍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와 빌립보교회와의 끈끈한 사랑과 연합이 당시의 상황과 상관없이 빌립보서를 기쁨으로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 신기합니다.
주고받는 편지에는 현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빌립보서에는 기쁨을 나타내는 단어가 무려 16회나 나옵니다.
바울이 근심에 둘러싸인 환경 속에서 신앙의 내공을 과시하며 짐짓 기쁜 척 하고 있는 걸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근심은 다른 감정보다 너무 강력해서 억지로 기쁨을 가장할 수 없습니다.
한조각의 구름이 태양을 덮기에 족하다는 영국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한 가지 근심이 열 가지 기쁨을 족히 가립니다.
바울사도의 기쁨은 절대 위장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있어도 전혀 기쁘지 않은 일상과 부족해도 항상 기쁨이 있는 일상 중에 택하라면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둘 다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무언가 늘 부족한 중에 살아가는 우리다 보니 환경에 구애받지 않은 기쁨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입니다.
빌립보서에 넘치는 기쁨의 비결을 좀 살펴보며 우리도 매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길 소망합니다.
바울사도와 빌립보교회가 고난 중에도 그리스도의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울과 빌립보교회가 복음을 위한 일에 함께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절부터 5절까지에서 바울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유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생각할 때 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나오고, 기도할 때 마다 기쁨이 터져 나오는 것은 바로 그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먼저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주 안에서 기쁨을 누렸던 바울사도는 자기가 세운 교회가 복음에 동참하는 것을 볼 때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기쁘게 한 이 사실, 즉 빌립보교회가 복음에 참여한 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착한 일이라고 연이어 진술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자기애로 가득 찬 죄인들이 무슨 수로 자신을 헌신하며 복음을 위한 일을 감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성도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성도들 안에서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에 참여하도록 격려하시는 성령님의 감동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큰 기쁨으로 우리를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해 보았듯이 복음을 위한 일에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편안함을 희생하고 동참했을 때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쁨이 우리를 만족케 합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받은 은혜에 비례합니다.
천국에 대한 확신과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의 값어치를 아는 만큼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생생한 부르심과 천국까지 보았던 바울사도가 그의 생애를 완전히 복음을 위해 쏟아 부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서 그렇게 잡고자 하던 것들이 영원한 세계 앞에서 신기루처럼 흩어질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 왜 허망한 데 귀중한 삶을 투자하겠습니까?
바울사도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면 우리 기준으로 볼 때 서울대 총장이 되었을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학문으로 안정된 지위를 얻고 유대교 신앙 안에서 존경받으며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살 사람입니다.
태생적으로도 바울사도가 꽤 부유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변증하다 축축하고 더러운 지하감옥에 갇혀 있을 이유가 하등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삼십년 동안 유대교 신앙을 최고의 가치로 알았고 유대사회에서 인정받는 지위에 오르기 위해 야심차게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을 성경은 표현하기를 살기등등했다고 합니다.
그의 삶에 기쁨은 없었습니다.
살기등등하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하늘로부터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난 뒤 장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내어 준 예수님이 실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부활하신 하나님이심을 목격한 것입니다.
바울은 달려가던 방향을 급회전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 엄청난 비밀을 알았을 때, 그가 추구하고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려도 아깝지 않았던 것입니다.
복음의 비밀을 알고 구원을 확신하게 되면 살아오던 모든 방식들이 바뀌고 우선 순위들이 재정열 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살다보면 모든 것을 다시 불러와 믿음 앞에 줄을 세우지만, 근본적으로 우선 순위를 정한 것과 아닌 것은 다릅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셔서 열어놓은 십자가의 구원의 길을 알리고 증거하기 위해 그의 생애를 아낌없이 쏟았습니다.
이제 그의 최후의 몇 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있지만 결코 후회는 없습니다.
오히려 감옥에 갇힌 것 때문에 복음이 더 전파되고 있으니 기쁘다고 합니다.
바울사도의 기쁨은 오직 복음이 전해지고 복음의 능력으로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때 점점 강력해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과 함께 하는 빌립보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7절,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바울의 고난에 함께 한 빌립보교인들은 실은 은혜에 참여하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은 은혜에 참여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함께 복음을 위한 은혜에 참여할 때 그의 마음에 큰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고 생기가 없습니까?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교회는 어떻게 바울과 함께 복음의 일에 참여했을까요?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두 번째 전도여행 중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루디아와 그 가족들이 복음을 믿은 뒤, 바울과 실라는 심하게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그 감옥에서 간수가족을 전도하고 바로 데살로니가로 떠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빌립보교회를 위해 오래 머물렀던 것도 아닌데 복음을 받아들인 빌립보교회가 처음부터 즉시 바울의 전도사역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빌립보교회는 어떻게 처음부터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했을까요?
빌립보교회는 처음부터 구원받은 믿음으로 세워진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현실에 보탬이 될 게 아무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유대인이라면 유대공동체에서 쫒겨 나고, 빌립보교인들처럼 로마인인 경우는 나사렛이단이라는 신흥종교에 가담한 댓가로 로마시민으로 누릴 모든 혜택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로 한 사람들은 어떤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더 득이 된다는 걸 안 사람들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복음을 믿기로 결단하는 순간 복음 다음으로 중요한 것들은 잃어도 좋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진짜였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거의 그렇지 않죠.
현재의 내 생활에 뭔가 더 보탬이 되지 않을지, 내 문제를 좀 해결하고 복을 좀 받게 되지 않을지, 대개 이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점점 말씀을 듣고 성령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 속에 조금씩 복음의 실체를 알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아마 복음을 위한 헌신도 더딘 것 같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복음의 가치를 온전히 알고 시작했기에 첫날부터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바르게 심겨지면 무슨 일이든 일어납니다.
바울이 전도해 놓은 빌립보교인들은 루디아와 간수의 가족들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본문 1장을 보면 그 사이에 감독과 집사들이 세워지고 성도들이 많아지며 크게 성장을 한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스스로가 복음을 전하고 아름답게 성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은 우선 우리 믿음이 바로 세워지고 우리 교회공동체가 바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작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도 큰 축복이지만 한편 쉬운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내가 하나님을 위해 작은 부분이라도 희생하고 헌신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교회가 세워진다면, 그래서 죄인들이 우리 교회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머리에서 영원히 빛날 면류관 아니겠습니까?
아프리카 속담에 ‘아이들이 자라기 위해서는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와 자녀들이 구원받을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알맞은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힘써 세우면 하나님은 우리의 집을 세워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도 부족하고 물질과 재능도 부족하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짐을 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은 짐질만한 능력도 주시고 거기에 필요한 것도 반드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교회는 바울사도의 전도사역에 물질로 참여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기쁨이 될 만큼 아름답게 성장했지만 부자교회는 아니었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빌립보교회는 자기들도 극심한 가난 중에 있으면서 박해를 받는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풍성한 연보를 했고 바울의 투옥 중에 보석금을 보냈던 것입니다.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교회의 가난을 알고 있는 바울사도가 힘들게 보내온 돈을 받고 칭찬하고 기뻐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바울은 이미 언제나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운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빌립보교회가 복음을 위해 그들의 물질을 제대로 복되게 사용하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처지를 잘 알기에 본서에서 빌립보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우리가 좋아하는 이 말씀은 복음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가난한 주머니를 비워 바울과 성도들을 섬겼던 빌립보교회를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수고를 천국에서만 보상하시는 게 아니라 이 땅에서도 분명히 돌보십니다.
우리 삶의 전부도 아닌 일부를 복음을 위한 일에 헌신한다 해서 절대 가난해지지 않고 쇠잔해지지 않습니다.
물질을 하나님께 드려 교회를 섬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건 신앙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인지, 돈이 나의 주인인지 반드시 하나님은 확증하게 하십니다.
저는 가난하던 시절에 이 시험을 이기고 나서 돈 때문에 고생 안하고 삽니다.
복음을 위해 우리가 아끼는 것들을 헌신했다면 하나님도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이 필요에 따라 영적성장과 기쁨이든, 현실에서 필요한 성공과 재능과 건강이든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아주 풍성하게 돌려주신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제가 사실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퇴직금도 내놓고 목회를 하고 있지만 그전보다 그렇게 못하게 살지 않습니다.
먹고 살던 대로 잘 먹고 삽니다.
지난 번에 같이 근무하던 분들을 오랫만에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교회사정을 물으시더니 실은 저를 보는 순간, 교회가 아주 부흥해서 걱정거리가 없고 잘 되가는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제가 그렇게 못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복음에 참여하며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녀들 절대 거지같이 키우지 않으십니다.
이생에서 호의호식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도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영생을 받았을 때 부끄러울 것입니다.
정말 신자라면 그렇게 사는 게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아무리 잘 살아도 보람이 없으면 정말 삶에 맥이 빠집니다.
우리가 물질로 헌신하는 것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물질로 헌신해서 세운 교회가 우리와 자녀들의 영혼을 지켜주고 좋은 것들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빌립보교회는 지도자인 바울사도를 위해 사랑과 격려로 지원했습니다.
본서를 읽어보면 빌립보교회가 바울에게 돈만 보내는 게 아니라 사람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돈을 좀 마련해서 에바브라 디도편에 보내며 감옥에 있는 바울을 섬기게 합니다.
그런데 디도가 그만 죽을 병에 걸려 자기 목숨이 위태롭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디도를 낫게 하셔서 다시 교회로 돌려보낸다는 내용이 뒤에 나옵니다.
빌립보교회가 바울을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사려가 깊고 진심으로 바울을 걱정해주고 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빌립보교인들의 사랑의 섬김에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바울의 선교역사를 보면 항상 그를 도와주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너희가 나를 위해 눈이라도 빼서 주었을 거라고 바울이 고마워합니다.
사역자를 세워주고, 성도들을 위로하는 모든 일이 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백주0 교회를 담임하는 이재0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이분이 세상에서 도박중독, 알콜중독, 마리화나 중독까지 있던 사람인데 사모님의 신앙을 통해 결국은 회개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방탕한 삶에서 시작한 목회자의 길에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습니까?
목회자가 된다는 게 결코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회의와 실망감에 사로잡혀 그날 새벽기도를 마지막으로 사역을 그만 두려고 작정을 했다고 합니다.
어둠 속에서 낙망한 채 힘없이 앉아있는 데 어느 성도 한 분이 들릴듯 말듯한 소리로 ‘목사님 떡 드세요’ 하고 가더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이 본인의 생일이었고, 누군가가 막 해 온 뜨거운 떡을 보자기에 싸서 두고 갔던 것입니다.
그날 누군가가 두고 간 그 뜨거운 떡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다시 마음을 돌이켜 오늘까지 왔다고 하더군요.
목회를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중대한 결정이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결판난 게 아니라 뜨거운 떡 한덩이 때문에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누군지 모르는 그 집사님은 떡 한덩이의 섬김으로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 연약한 육체와 죄성이 남아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고 이뤄가는 일에 서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도 목회를 하며 좀 마음이 지칠 때면 모르셨겠지만 성도님들이 정말 다양하게 저를 위로해 주십니다.
성도님들의 격려와 지지가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주는 교회를 생각하며 잠시 상심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오진경성도님이 영은이하고 영민이가 야곱의 축복을 부르는 동영상을 보내왔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얼마나 은혜스럽고 감격이 되는 지 정말 한순간에 마음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세상에서 불러내셔서 주님의 몸이신 교회에 우리를 이식시키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 안에서 교회로 부름받은 우리는 이렇게 다 핏줄이 서로 엮여지고 주님의 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성도들이 서로 격려하고 부족함을 보충해 주는 것은 예수님을 위하는 일이고,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인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탤런트 박시0 자매가 이런 간증을 하더군요.
연예계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세상인지 화려함 뒤에 있는 잔혹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매가 여러 사람들을 통해 죽고 싶을 만큼 시련을 당하던 때, 교회에 나오면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날 새벽기도에 나왔는 데 눈물만 나오고 기도조차 할 수 없어 끝날 무렵까지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앉은 분이 일어서며 가만히 어깨를 짚어주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아픔을 만져주시는 것 같은 평안이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뒤로 몇 명인지 모를 사람들이 다 자기의 어깨에 손을 얹어 주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날 큰 용기를 얻어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하랴, 내게 하나님이 계신데 이런 마음으로 위기를 넘겼다고 합니다.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시고 모든 위기를 잘 넘어 이 땅에서 우리와 자녀들에게 주신 삶을 아름답게 이루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함께 부름 받은 우리가 복음을 위한 일에 충성되게 참여하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위로하고 기도하며 함께 나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한 줄을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2015년8월23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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