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가정주일을 맞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 가정에 더욱 충만히 임하시길 소망합니다.
지난 주 거리두기가 해제 된 어린이날을 맞아서 에버랜드와 레고랜드를 찾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모습을 뉴스에서 보았습니다.
역시나 부모들은 제일 먼저 자식들 바깥 구경 시켜주려고 나선 것이죠.
우리나라 아이들 다섯명 중 네 명은 그래도 가정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어른들의 삶의 행복지수는 바닥이잖아요?
이에 비해 그나마 아이들의 만족도가 높은 것은 부모들이 자식들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 때 부모들은 노력해도 안되는 빈곤 속에서 자식들 키우시느라 얼마나 더 힘들었을지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이 새삼스럽습니다.
서울시 발표에 따르면 2030 청년 세대들의 가정생활에 대한 만족도, 재정만족도가 작년에 최저까지 떨어졌다고 하더군요.
다들 열심히 살고 있지만 가정생활이 여전히 힘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생육과 행복을 위해 가정을 설계하셨습니다.
죄로 어긋난 세상에서 가정의 행복도 빗나가고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전보다 더 복된 가정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오늘 잠언 말씀이 우리 가정을 더 행복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잠언은 스토리가 없이 교훈이 되는 개별적인 격언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잠언이 얼핏 보기엔 세상 명언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다른 점은 분명합니다.
다른 명언들은 사람의 지혜에서 나온 것인 반면 잠언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지혜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인생을 파헤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해법은 하나님께로 부터만 나옵니다.
잠언에는 인생의 문제들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4장32절을 보면 솔로몬왕이 잠언 삼천개를 지었다고 하죠.
이 잠언들과 그 외의 잠언을 후대에 모아 놓은 것이 성경 잠언입니다.
잠언은 인생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는 지혜서이자 근본적인 인간의 복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참 지혜를 가르칩니다.
가정의 문제들을 오늘 다섯가지 잠언 말씀이 주시는 지혜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1. 우리 가정의 문제 중 큰 부분은 돈과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한창 자녀들을 키워야 하는 가정은 늘 월급이 빠듯하죠.
나이 든 세대는 노후를 생각하면 노후대책이 늘 불안합니다.
결혼과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세대도 돈이 큰 걸림돌이죠.
그동안 놀지 않고 열심히 일해 왔지만 여전히 우리의 고민은 돈 문제입니다.
돈 때문에 불행하실 때 많으시죠?
이 문제에 대해 오늘 잠언 16절은 이렇게 답을 줍니다.
16절,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좀 가난하더라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큰 부자이면서 번뇌하며 사는 사람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잘못 들으면 좀 화가 나죠?
이 잠언은 돈이 많은 것보다 적은 것이 더 행복하다고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닙니다.
1) 행복은 어느 쪽이든 하나님을 경외하냐 아니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집과 부잣집의 행복을 비교하는 게 무의미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체급이 다른 이 싸움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난한 집이 이겼다는 것이죠.
돈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행복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도 큰 부자가 싫은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난한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재벌 중에서 고르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믿음을 지키려고 재산과 목숨까지 버린 성도들의 지나 온 교회사가 그게 사실임을 증명하잖아요?
2) 오늘 잠언을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하고 싶을 것입니다.
‘큰 부자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면 되겠네.’
이 지혜의 잠언이 그렇게 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성경이 돈을 많이 벌지 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돈방석을 깔고 앉아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라면 자기의 필요를 채우고 어느 정도 미래를 대비하면 남은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 말씀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큰 부자로 남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돌보라고 하신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한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고용주들의 박한 임금과 그것마저 체불 하는 탐욕에 대해 심판을 경고합니다.
큰 부자도 되고 하나님도 경외한다는 게 원천적으로 어렵다는 뜻입니다.
많이 버는 부자는 괜찮지만 부를 축적하는 부자는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또 이 잠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 있는 큰 번뇌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번뇌라는 단어는 단순한 근심이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두려움과 괴로움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요즘 우크라이나의 전쟁 참상을 생생히 보듯이 폭탄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여기저기 초토화 된 맹렬한 번뇌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목적도 모르고 사는 인생의 답답함, 미래에 대한 두려움, 사후세계, 이런 것들은 인생을 근본적으로 정처 없고 암담하게 합니다.
옛어른들이 부평초 같다고들 하잖아요?
하나님을 믿을 때만 이런 번뇌와 인생의 짐인 생로병사의 두려움을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매일 이런 저런 걱정 근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지 말라고 하셔도 어쩔 수 없이 현실만 보며 보통 그러고 살죠.
그러나 생각해 보시면 이전에 나를 억누르던 이런 번뇌케 하는 문제들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단걸 알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구원자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내면에 깊이 또아리를 틀고 있던 이런 것들이 스르르 풀려 사라져 버린 것이죠.
오히려 소망과 기쁨이 깊은 곳 어딘가에 생겨 우리를 받쳐 줍니다.
4) 또 돈이 많으면 걱정거리가 훨씬 줄어들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큰 재물을 끼고 있는 것은 오히려 더 큰 번민을 끼고 살게 된다는 것을 본 잠언이 말해주시는 것입니다.
돈 뒤에서 사람을 조종하는 맘몬신 사탄이 가담했기 때문이죠.
하나님을 모르면 인생의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큰 재물은 맘몬신을 부르니 더욱 불행하게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5) 또 16절 잠언은 우리의 현재 상태가 어떻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더하면 결국 행복하다는 걸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누리게 될 것을 잠언19장23절이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또 22장4절도 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이런 여러 잠언구절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부자보다 나은지를 증거해 줍니다.
그렇기에 잠언은 이런 결론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잠언23장17절,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 를 경외하라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가정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6)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가 있을까요?
말라기서를 보면 타락한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괴롭게 했다고 책망하자 이들이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괴롭게 했냐고 대듭니다.
그들은 율법이 정한 제사들을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충분히 경외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닌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다스리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내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마지막으로 사람의 모든 선악간의 삶을 심판하심으로 완성됨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과 심판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에 대해 잘 배우고 깨닫고 확신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해도 불상에 절하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오늘도 그런 종교성으로 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돌이켜 하나님이 지도하시는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 왜 내 말은 지키지 않냐고 하셨다는 것은 항상 우리 행동의 시금석이 되어야 합니다.
잠언8장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악을 미워하고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멀리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죠.
다 마음과 행동의 교정을 말합니다.
우리를 말씀에 따라 고쳐가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복된 성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우리 가정의 또 다른 문제는 사랑입니다.
가정에 사랑이 없으면 불행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잠언 17장은 이렇게 답을 내립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앞의 잠언은 하나님 사랑, 뒤에 잠언은 가족 사랑이 가정의 행복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소고기를 먹으며 미워한다는 설정은 부자가 하나님 경외하기가 어렵듯이 가족 사랑도 더 어렵다는 걸 예리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돈 걱정이 없으면 가정이 더 화목할 것 같은 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재벌 친척은 없지만 들리는 얘기와 보는 게 다 그렇잖아요?
그렇다면 가난한 가족들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경제적 위기에 가정이 파탄이 나는 경우가 많잖아요?
1)이 지혜의 잠언 또한 가난하든 부요하든 가정엔 사랑이 있어야 행복하다는 데 중점을 둔 것입니다.
성도들 가정은 비신자들 가정보다 더 사랑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는 사랑해야 하지만 그 사랑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경건한 성도들을 매일 좌절시키는 것도 사랑이 안되서입니다.
2)성경은 사랑하라고 하셨지 저절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철저히 알아두지 않으면 오늘도 사랑하자는 구호로 끝나고 맙니다.
사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사랑하시겠다는 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인간에 대해 얼마나 모욕감을 느끼시고 죄에 불쾌감을 느끼시겠습니까?
쳐다 보고 싶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죄를 용서해 주고 사랑하기로 결심하시고 그 ‘의지’를 영원히 바꾸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감정이라면 죄를 짓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겠어요?
만일 죄지을 때도 마냥 사랑하신다면 그것도 이상하죠?
하나님의 의지가 사랑하기로 하셨기에 우리가 죄를 지어도 사랑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완전한 사랑이 회복 되기 까지 사랑은 의지입니다.
너희도 이렇게 사랑하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의지적인 사랑이 어렵습니다.
또 의지를 다해 사랑을 하다보면 불쑥 드는 생각이 있죠.
사랑을 베풀기만 하면 나는 뭔데?
그런 허기감이 몰려 오는 것이죠.
그렇기에 나에게 사랑의 최고치를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이 목숨을 주시고 구원하실 정도로 사랑하신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실 때만 나를 위해 희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 삼십삼년을 온전히 다 나를 위해 희생하신 것입니다.
나를 속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면 뭐하러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를 두고 인생이 되셔서 그 긴 세월 동안 인생의 고통을 다 겪으셨겠습니까?
때로 자식을 위해 일생을 희생하는 부모가 있잖아요?
예수님이 그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인식하고 있는 정도보다 훨씬 크고 깊으십니다.
그 사랑의 분량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한 두 바가지 사랑을 퍼 주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본성적인 감정만 사랑이라고 생각하기에 가정의 사랑이 고갈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다 본성이고 죄의 뿌리에서 나옵니다.
생각이고 행동이고 감정이고 다 하나님의 말씀의 필터를 통과해야 바르고 선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움은 말씀의 필터를 거치면 ‘그래도 사랑해야지’로 바뀌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저절로 되는 본성적 사랑이 말씀의 필터를 거치지 않는다면 이기적인 사랑인 줄 모릅니다.
사랑인 줄 알았던 이기심과 집착에 빠져 늘 가족에게 분노하고 찔러대죠.
그런 사랑은 오히려 번뇌입니다.
1) 특히 18절을 가족 간의 언어의 문제에 적용하면 좋을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는 가족을 대하는 태도와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가족들 간에 버럭 화를 내는 태도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다툼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대개 하찮은 말다툼이나 감정 싸움이 결국 서로 화를 내게 만듭니다.
우리가 보통 집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보다 가족들에게 더 무례하기가 쉽습니다.
예의를 잃은 관계는 설령 가족이라 할지라도 결국 금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과 가정생활에 성공한 보험왕이 일간지에서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그 사람은 일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제일 귀한 고객을 만나러 간다는 마음으로 집에 들어 간다고 합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죠.
그렇지 못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서 상처를 받습니다.
사람들이 관계에서 서로 감정이 상하고 갈등이 일어나는 원인은 나와 달라서일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랑 성격이 같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 준다면 갈등이 있을 이유가 없죠.
내가 하는 방식과 다를 때 금방 불편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가족이라 해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잖아요?
저희 부부 같은 경우는 같이 차를 타고 교회에 올 때 타는 차선이 다릅니다.
저는 항상 빠져 나가기 쉽게 우측 차선을 좀 미리 타는 편입니다.
그 쪽이 다른 차선보다 좀 막혀도 그래야 안심이 됩니다.
백목사님은 저랑 달라서 4차선으로 나가야 해도 차가 적은 1차선으로 달리다가 순식간에 2,3차선을 넘어서 4차선으로 들어옵니다.
저는 속으로 이게 불편한 거예요.
참고 있다가 한번씩 뭐라고 하죠.
그게 뭐라 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가족들이 다 내가 하는 것처럼 해 줘야 편한데 어떡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꾸 왜 이렇게 하냐, 왜 이렇게 안 하냐.
서로 잔소리를 하게 되고 그게 감정 소모가 되고 갈등이 되는 것이죠.
가족들 간엔 중대재해가 아닌 이상 장단점을 그대로 봐줘야 조용합니다.
정말 서로 조율해야 할 문제가 있다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마음을 낮춰서 해야 할 것입니다.
2) 또 19절은 일반적인 생활의 태도를 말하지만 가족문제에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이 잠언은 일반적으로 게으른 사람이 아무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훈계입니다.
성도들은 어느 직장이나 단체에 속하든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밖에서는 그나마 그렇게 관리하는 편이지만 가정에서는 안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에서도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게으른 사람과 부지런한 사람을 대비시키지 않고 대신 정직한 사람을 내세웁니다.
게으름이 정직하지 못한 것과 같은 뿌리라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무엇을, 언제, 해야 되는지를 알면서도 현실을 도피하고 미루며 자신을 합리화시킵니다.
그렇게 게으른 사람은 점점 더 솔직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한 성품이 되기 쉽습니다.
가정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알면서도 안 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내 피곤을 합리화하면서 다른 가족들의 희생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게으르고 부정직한 태도라고 잠언은 지적합니다.
사랑하는 것, 부드럽게 말하는 것, 가족을 위한 봉사, 모두 다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사랑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에 항상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더 사랑을 실천하는 행복한 가정되시길 바랍니다.
3. 또 우리를 힘들게 하는 가정의 문제는 자녀 문제입니다.
자식 문제로 힘들어 보지 않은 가정은 없을 것입니다.
20절,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이 잠언 말씀은 자식들이 부모를 업신여기는 우리 인생의 치부까지 들춥니다.
자식에게 무시당하면 부모로서의 자존감이 확 무너져 버리죠.
비딱하게 나가는 자식들로 인해 부모들도 마음이 상하지만 자식들도 부모가 못마땅해서 비딱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모든 잠언은 아이들을 지혜롭게 키우라고 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지혜로운 아들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키운 자식은 나를 즐겁게 해 줄 것입니다.
어떻게 지혜롭게 키웁니까?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식들은 반드시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경외하기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 자식들은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한다 해도 미련한 자가 되어서 부모를 업신여기게 될 것입니다.
자식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시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잠언17장6절은 이렇게 또 설명합니다.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자식과 후손은 우리의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좋은 부모를 두는 것은 자식에게도 큰 영화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부모만큼 자식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없고 성숙한 믿음의 인격을 가진 부모는 자식을 영화롭게 합니다.
자식에게 육체적 생명과 육체적 욕구만 채워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게 함으로 영의 생명과 영화로운 인생이 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성악가나 가수들 중에 믿음의 아들들이 많습니다.
팬텀싱어에 나왔던 존0 형제나 김주0 , 손태0 , 또 밴드 출신의 홍이0 이런 형제들이 찬양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그 믿음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 어쩌면 저렇게 잘 키우셨어요, 너무 잘 키우셨네요, 우리 주나산의 자녀들도 저렇게 키워주세요’ 이런 말이 절로 나옵니다.
부모들이 믿음의 자녀로 키우려 노력했겠지만 그것 만으로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훌륭한 믿음의 자녀로 키워주신 것이죠.
우리 자녀들도 그렇게 키워 내고 그렇게 키워주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인 줄 믿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왜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하며 감사를 드리겠습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내 가정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 자식들의 세대까지 복되게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들을 마음에 담아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가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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