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사도의 큰 근심을 주었던 고린도교회와 대조적으로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사도에게 큰 기쁨을 준 교회였습니다.
짧은 기간 복음을 가르쳤지만 바울이 떠나고도 교회가 믿음을 잘 지켰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근심이 아니라 기쁨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지난 주 바울이 데살로니가성도들의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에 대해 칭찬하고 감사했죠.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게 된 것은 단지 안부를 묻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먼저 바울사도에게 신앙의 궁금한 점을 질문해왔기 때문입니다..
1.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재림의 질문에 대한 바울사도의 답변입니다.
성도들이 물어 온 것은 ‘재림 전에 죽은 형제들은 어떻게 되느냐’ 그리고 ‘재림의 때는 언제냐’였습니다.
재림 전에 죽은 형제들에 대해서는 본문 앞4장에서 답을 줍니다.
주 안에서 죽은 형제들은 주님의 재림 때 우리보다 먼저 부활해 우리와 함께 주님을 만나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라 위로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간 성도들을 다시 만난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죠.
저도 먼저 가신 어머니를 만날 순간을 늘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면 언제 재림하실 것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1절,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절,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데살로니가성도들은 재림에 대해서 이미 자세히 알고 있다고 하죠.
바울이 짧은 기간 중에도 예수님의 대속과 부활만 아니라 재림에 대해서도 자세히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주의 날은 분명히 올 것이나 그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고 가르쳤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바울도 가르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왜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 다시 물어 온 것일까요?
예수님의 재림을 정말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간절히 기다렸을까요?
데살로니가성도들이 지금 우리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성도들은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 많죠.
사실 한 사십 년 전 저 청년 때만 해도 예수님 재림에 대해 지금보다는 훨씬 간절했습니다.
그때는 신자들의 생각과 생활의 큰 부분이 신앙이기도 했죠.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만큼 당연히 여겼습니다.
그러다보니 믿음도 절실하고 예수님 사모하는 마음도 당연히 깊었습니다.
그러니 재림에 대한 소망이 더 간절했던 것이죠.
또 데살로니가성도들은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2장14절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예루살렘교회가 유대교인들에게 얼마나 큰 핍박을 받았습니까?
이 편지를 쓰던 때도 고난은 현재 진행 중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동족들에게 똑같은 박해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삶이 고달프면 믿음의 결말이 빨리 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청년 때 그런 면에서도 재림신앙이 간절했습니다.
그때 청년부에 모이던 사람들은 왜 그렇게 다 가난했나 모릅니다.
사는 게 다 고달팠어요.
제가 청년 때 다니던 교회가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였습니다.
교회 뒤에 한 집사님이 하시던 천 원짜리 밥집이 있었습니다.
점심은 교회에서 주는 점심으로 해결했죠.
음식이래야 된장국에 김치하고 반찬 한 가지 정도를 식판에 받았습니다.
그땐 반찬 집어주는 집사님들 손이 얼마나 위대해 보였나 모릅니다.
미안한 목소리로 김치 좀 더 주세요, 그러기도 했었죠.
그런데 저녁 늦게까지 봉사해야 하는 날은 할 수 없이 천 원을 주고 주로 그 밥집을 이용했습니다.
밥과 김치콩나물국에 오이무침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 밥이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요.
이백 원을 더 내면 계란 후라이를 먹을 수 있었는데, 대부분 천 원짜리 밥만 그냥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드니 얼마나 주님의 재림이 기다려졌겠어요?
혹시 재림의 징조라도 보일까 하늘도 참 자주 올려다 보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성도들이 왜 언제 재림하실지를 다시 또 물어왔는지 이해가 되시죠?
혹시 그 사이 바울이 다른 계시라도 받았는지도 궁금한 것입니다.
지금 성도들은 갑자기 주님 오시면 두고 가기 아까운 게 너무 많죠.
어쩐지 천국은 지금 같은 짜릿한 재미도 없을 것 같잖아요?
그러니 좀 더 벌어서 더 세상을 즐긴 뒤 주님 오시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 신앙이 그러니 목사들도 자연히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잘 설교하지 않게 된 것이죠.
우리의 신앙은 결국은 재림신앙이고 종말신앙입니다.
신랑에 대한 기다림이 간절하지 않은 신부는 사실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결국 신앙의 동력도 약해진다는 것을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2. 바울사도가 재림에 대해 무슨 답을 하는지를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3절,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임하는 것과 같이’ 라는 말씀은 오실 때를 모른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앞에서 ‘도둑과 같이’라는 말에 담겨있습니다.
해산의 비유는 아이를 가졌으면 반드시 해산하듯이 주의 날이 분명하게 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이 멸망할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재림은 나의 구원의 날만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믿지 않는 분들의 멸망의 날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예수님은 재림하십니다.
왜 세상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하고 있었을까요?
전쟁이 없어서 그럴까요?
예수님이 오실 때가 되면 처처에 기근과 전쟁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럼에도 안전을 느낀다면 어떤 재난도 피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는 뜻이죠.
사람들이 평안과 안전을 느끼는 것은 단연코 돈입니다.
권력의 종착역도 결국 돈입니다.
전쟁이 나면 돈 있는 사람만 살아 남는다고 하잖아요?
전쟁 난다면 생존할 만큼 돈 있으세요?
전 세계가 기근에 시달리고 식량부족으로 물가가 올라도 부자니까 안전하고 평안하다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인 것이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게 충분치 않은 데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지혜롭다는 말은 생각이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보다 살 궁리를 더 잘 합니다.
오히려 순진하게 신화 같은 재림을 믿고, 현재가 아니라 내세를 대비해 살아가는 성도들이 불쌍하다 생각할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의 자만심을 돈 없는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전에 어떤 배우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간증하러 한 프로에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어릴 때 금융회사 대표였고 잔디가 깔린 평창동에서 살았다고 하더군요.
부자죠.
본인은 꽤 잘 나가던 배우였으니 궁핍이 뭔지 모르고 산 것 같았습니다.
있는 집에서 자라 몸에 자신감이 배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배우가 믿은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은 그런 게 이해가 충분히 됩니다.
그랬던 그 형제가 공황장애를 겪게 됩니다.
고층빌딩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숨이 막히던 순간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 그렇게 주님께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간증보다 시종일관 형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 자만심을 더 관심 있게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큰 성 바벨론 즉 세상의 심판을 보여주시죠.
그 바벨론이 큰 돈을 치부하고 많은 영혼을 파멸시켰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의지하는 돈과 권력은 더욱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성도들도 믿음이 약하면 그것들이 주는 평안과 안전을 더 신뢰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도 돈이 좀 생기면 왠지 든든해지는 걸 어쩔 수 없잖아요?
데살로니가성도들은 핍박을 당하고 극한 가난 중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더 어려움을 당하는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에 최선을 다했다고 했잖아요?
돈이 평안과 안전을 준다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못했습니다.
돈이 없어도 예수님만 있으면 살 수 있을까요, 아니면 돈만 있으면 예수님 없이도 살 수 있을까요?
무엇이 나를 더 평안하고 안전하게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3) 주님의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4절, 그날이 도둑같이 임한다고 하시죠.
신자들의 관심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한때 우리나라도 재림 열풍이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1992년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시한부종말론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었죠.
다미선교회라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재림 날짜를 예언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봐도 조만간은 아니라고들 생각하나 봅니다.
대신 언제 전쟁이 일어난다, 지진이 일어난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된다, 그런 예언은 여전히 많이들 나옵니다.
주님의 날은 마감일을 딱 정해 놓고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만 구원받는다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날까지 택한 자가 믿지 않으면 벼락치기로 믿음을 주지는 않으시겠죠.
어느 때일지는 아시지만, 종말은 어느 정도 사람들에 달린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날이 지체되는 것은 하나님이 기다리시기 때문이라고 하시잖아요?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마치 하나님이 하루를 더 참으시면 천년이 미뤄지는 것 같은 것이죠.
그러나 주의 날이 언제든 나의 종말의 때는 우리가 어느 정도 알잖아요?
내 생명의 수한이 다 되면 종말을 맞는 것입니다.
십 년 뒤, 이십 년 뒤 주님이 오신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이상 무엇을 하겠습니까?
재림 전날까지 태만하게 살다가 직전에 주님 맞을 준비를 하시렵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성도가 그렇게 사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다가는 내 인생이 먼저 망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힘으로 이만큼 복되게 사는 것이잖아요?
3. 주의 재림을 믿는 너희는 빛의 자녀이니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5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바울은 데살로니가성도들을 보고 다 빛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들이 다 빛의 자녀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요?
1세기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얻을 세속의 이익이 한 개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1세기 성도들이 세례를 받았다면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고 봐도 좋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1세기 같은 박해가 없어 좋은 것 같지만,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는 것이죠.
내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라도 예수님을 믿을 사람인지, 아니면 등을 돌릴 사람인지 자기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시대의 우리들은 내 믿음을 스스로 확증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밤과 어둠에 속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다 아시죠?
자기 말고 깨어 정신차려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성도를 보면 믿음에 깨어 있는지 졸고 있는지 알 수 있잖아요?
나 자신을 그렇게 살피고 깨어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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