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고린도성도들의 신앙을 보며 좀 답답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고린도성도들은 바울사도의 해산하는 수고로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켰습니다.
해피 엔딩이죠.
오늘부터 살펴보는 사사기는 구약성도 이스라엘의 신앙이 점점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다 그대로 끝납니다.
마지막 장에 가면 심신미약자는 보기 괴로운 기괴한 사건까지 나옵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겨우 한 세대 만에 가나안 종교와 문명에 동화된 것이죠.
사사기는 가나안 같은 세상 문명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한 메시지를 주는 성경입니다.
오늘부터 사사기를 통해 믿음을 지키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에 마음에 깊이 새겨질 말씀을 주시길 기대합니다.
1. 사사기가 어떤 성경인지에 대해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사시대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전쟁 시대가 끝난 뒤부터 사울왕정이 시작되기까지의 약 350년 기간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을 열 개 시대로 구분했던 것 기억나십니까?
창조시대, 족장시대, 출애굽시대, 정복시대, 그 다음이 사사시대가 됩니다.
사사기를 누가 기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전통적으로는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기록했다고 봅니다.
역대기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역대상 29장 29 다윗 왕의 시종 행적이 선견자 사무엘의 글과 선지자 나단의 글과 선견자 갓의 글에 다 기록되고
사무엘이 다윗에 대한 글을 기록했다고 하죠.
사무엘이 역사 기록에 관심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그 시대 가장 공신력 있는 하나님의 종 사무엘을 감동하셔서 사사기 역사도 간추려 기록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사사라는 말은 재판관, 구원자라는 히브리말을 우리 말로 옮긴 것입니다.
‘선비사’에 ‘스승사’를 합쳐 사사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사의 뜻은 원어 그대로 나라를 구하고 재판하고 다스린 사람들이라고 알면 되겠습니다.
사사기엔 열두 명 이상의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사로는 기드온, 삼손이 있죠.
사사시대는 삼백 오십 년 동안 반복되는 일정한 순환 패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 하나님의 징계, 이스라엘의 회개, 하나님의 구원.
이 네 가지 사이클이 계속 반복되며 점점 깊은 악에 빠지는 이스라엘 역사가 바로 사사시대입니다.
2. 오늘 본문은 사사시대의 문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왜 암흑기라 불리는 사사시대가 있었는지 잘 설명해 주는 사건입니다.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와 그 죄를 엄히 추궁 하시죠.
그들의 선택이 옆구리의 가시가 되겠지만 도와주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이 경고에 온 이스라엘이 얼마나 크게 울었던지 그 동네 이름이 보김이 되었다고 합니다.
보김은 ‘우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크게 울었던 비슷한 상황이 구약성경 느헤미야서에 나오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이 성벽을 완공하고 광장에 모입니다.
그때 학자 에스라가 율법을 가져와 낭독하고 해석할 때 백성들이 모두 다 울었다고 합니다.
그날의 눈물은 곧 기쁨으로 바뀌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날의 눈물은 진정한 회개와 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보김에서 큰 회개와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는 말은 없습니다.
오늘 보김의 눈물이 진정한 회개의 울음이었다면 사사시대는 없었지 모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울음은 앞으로 일어날 사사시대의 비극을 예견한 것으로 끝이 납니다.
본문 말씀의 순서대로 이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 여호와의 사자에 대해서입니다.
1절,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성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메신저입니다.
주로 선지자들의 역할이지만 천사를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것을 가브리엘 천사가 직접 전했죠.
그리고 구약의 성자하나님을 여호와의 사자, 또는 여호와의 군대장관 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구약시대에도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소돔이 멸망되기 전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분도, 삼손의 어머니에게 나타나신 분도 사람의 모습을 한 성자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창조사역을 하셨고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일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과 광야생활과 정복시대를 인도하셨습니다.
성육신 이전 예수님이 구약시대엔 아무 일도 안 하셨을 리는 없잖아요?
오늘 본문의 여호와의 사자도 성자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는 반드시 나오는 형식이 있습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구분이 정확하지 않죠.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 같으면서도 여호와의 사자 당사자의 말 같기도 합니다.
이 메신저가 선지자였거나 천사였다면 감히 그렇게 전하지 못합니다.
2) 여호와의 사자께서 왜 길갈에서 보김으로 오셨을까요?
하늘에서 오셨다고 하지 않고 굳이 길갈에서 올라오셨다고 하죠.
이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가나안 정복과 구원을 위해 여전히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길갈은 가나안정복 전쟁의 본부가 있던 곳이죠.
이동식 성막도 당연히 길갈에다 세웠습니다.
정복 전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된 뒤 성막은 가나안땅의 중심부인 실로로 이동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땅 여러 곳에서 전쟁을 치르고 항상 길갈로 돌아왔습니다.
길갈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와 제일 먼저 밟은 땅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곳에서 백성들이 좀 이해가 안되는 일을 행하죠.
광야에서 태어나 할례받지 못한 세대에게 명령대로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할례 의식 속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할례는 생식기의 표피를 베어내는 것으로, 육으로 태어난 생명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육의 생명을 죽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의미죠.
하나님은 할례를 행하는 조건으로 아브라함과 자손들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할례가 구약성도들에게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모세도 아들에게 할례하지 않았다가 죽을 뻔 했잖아요?
아들에게 할례를 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신이기에 아들 뿐 아니라 본인도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엄중한 할례의 언약자들만 가나안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나안 입성을 앞둔 광야 세대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명령하신 것이죠.
고린도교회 같은 외국인 교회들이 우리도 할례받아야 하나 헷갈릴만도 하죠.
새언약 시대의 우리들은 할례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영적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골로새서 2장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 육의 몸이 죽는 것이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그 당시 큰 전쟁을 앞둔 시점에 부싯돌을 갈아서 모든 군인들의 표피를 베었다는 것은 확실히 좋은 전술은 아닌 것 같죠.
가나안 부족들이 숨죽여 지켜보는 중이잖아요?
그럼에도 그 말 많은 이스라엘이 군말 없이 할례를 행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야 가나안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금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 속에 강을 건너왔잖아요?
무엇인들 못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열정이 최고조였던 때니 불리한 명령에도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죠.
어차피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의 힘으로 하는 건 아닙니다.
철기문명을 가진 가나안 부족들과 무기 하나 제대로 없는 이스라엘은 애당초 상대가 안됩니다.
그때나 지금 우리들이나 힘에 부치는 일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는 것이죠.
전에 국회위원이었던 고유재0장로님이 자기가 어떻게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미국에서 변호사시험을 치르는 데, 말하기 창피할 정도로 많이 떨어졌다는 거예요.
그것도 1, 2점 차이로 계속 떨어지니 이러다 정말 안되는 게 아닌가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이죠.
그때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진짜 믿음을 갖게 되었고 시험에도 합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은 실력대로 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저는 실력보다 하나님의 지원으로 더 큰 이익을 보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는 방법을 알아요.
하나님의 말씀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죠.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은 뜻을 이루십니다.
철병거를 몰고 적들이 쳐들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할례를 행하고 얌전히 누워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만 따르는 양무리들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날 ‘내가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죠.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여전히 그때 그 길갈에 머물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날의 감격이 다 사라졌는데, 예수님만 거기 남아 계셨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말미에 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와 다른 주님께 실망해서 떠납니다.
주님께서 남은 열두제자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던 게 생각납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주님은 떠난 이스라엘의 마음을 돌이키려 오셨지만 그들은 울었을 뿐이지 길갈의 마음으로 돌이키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무엘은 길갈의 의미를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11장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가장 중요한 건 주님과 나의 구원과 은혜의 경험이 있는 길갈입니다.
한 청년 사업가의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기업가로 성공하기 위해 두 시간만 자며 달리던 한 청년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목적이 바뀌어서 이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업가가 될 꿈을 꿉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청년의 길을 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어느날 찬양을 틀고 운전을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는데 눈물이 흐르며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저 사업하지 않아도 성공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지금처럼 주님과 이렇게 은혜 안에서 살 수 있다면 그냥 편의점에서 알바 하며 살아도 전 좋습니다. 지금처럼 이런 마음만 주세요.’
그리고 나서 얼마 뒤 하나님이 기적처럼 창업 아이템을 떠올려 주셨습니다.
이어서 창업 공모전에 당선이 되게 하십니다.
지금 장애인용품을 개발하는 사업가의 길을 힘차게 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영적인 경험과 교제가 있는 길갈이 우리 신앙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우리 신앙의 길갈이 대체 어느 곳인지 막연하게 느끼시는 성도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신앙의 길갈은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내 죄의 수치가 제하여졌다는 걸 확신할 수 있는 믿음으로 만들어진 신앙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주님께 매일 순종하는 삶으로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실제적으로는 기도와 예배와 경건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믿음의 장소입니다.
우리가 그걸 바라고 만들어 간다면 주님은 그곳에 찾아오십니다.
그렇게 믿음의 길갈을 만들고 항상 거기서 주님과 교제하며 은혜를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여호와의 사자가 하신 말씀입니다.
1) 이스라엘의 잘못을 책망하기 앞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먼저 말씀합니다.
1절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베푼 세 가지 은혜를 말씀합니다.
애굽의 종살이로 일생을 마칠 이스라엘을 건져 내셨다고 합니다.
수많은 반역에도 불구하고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하셨던 그 가나안땅으로 마침내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씨,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언약을 영원히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베푸셨던 은혜인가요?
이것을 나의 언어로 한번 바꿔 보십시오.
나에게도 그대로 해 주셨잖아요?
죄와 사망의 종이 되었던 나를 풀어 자유를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의심하던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 천국의 유업을 주셨잖아요?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들락달락 한다 해도 예수님 안에서 맺은 구원의 언약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세 가지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2) 그에 반해 이스라엘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를 지목하십니다.
2절,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가나안 주민들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종교를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그러셨는지 그 이유를 압니다.
가나안 부족을 정벌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가나안 부족들의 음행, 우상숭배, 인신제사, 악독이 허용되는 수위를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고대 문명은 인간 본성의 날 것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똑같은 죄인 이스라엘이 가나안 주민들과 섞이면 백프로 그 문화에 동화됩니다.
세상 속에 머물면서 나를 너무 믿으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심판한 가나안 주민과 똑같이 되면 그들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스라엘도 그 땅에서 쫒겨 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 당하고 뿔뿔이 흩어졌잖아요?
그러니 본래 가나안 주민들을 진멸하는 것 밖엔 답이 없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악을 다 걷어내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국가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 만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동화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만 이스라엘 사람들도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본문 앞 1장을 보면 가나안 부족에게 철병거가 있어서 쫒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느 민족은 작심하고 버텨서 차마 못 쫒아냈다고 합니다.
왜 바알을 섬기게 되었냐고요?
그것은 영적이기 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더 잘 살아보려고 그랬다고 하겠죠.
우상숭배는 원래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주민들의 풍요의 신 바알을 나만 안 믿으면 불안한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도 믿고 바알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버린 것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의 신자들이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부분과 세상에서 얻을 것이 따로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나의 실리를 생각하면 내 인생을 통째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게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만이 내 인생 전체를 복되게 인도하실 유일한 신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피조물의 생존과 복지를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주시잖아요?
우리가 먹고 싶은 걸 못 먹고 헐벗고 살지 않잖아요?
너무 잘 먹고, 웬만큼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삽니다.
무엇이 더 필요해서 세상에서 구하겠습니까?
세상이 화려해 보이고 내게 부와 행복을 줄 것 같아도 그것은 생명도 아니고 평안도 아니고 부요도 아닙니다.
번뇌와 갈증과 좌절을 주는 세상을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따라가는 것이죠.
먼저 그 길을 갔던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신 것마저 다 뺏기는 가나안의 가장 비천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내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걸 수 있는 믿음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3) 여호와의 사자는 그 불순종의 결과에 대해 엄단하십니다.
3절,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여호수아의 가나안정복 전쟁은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싸워주셨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은 부족들과 싸울 때 함께 싸우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명령을 거역하고 남겨둔 그 부족들이 결국 강성해져 옆구리를 괴롭히는 가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민수기 33장 55절에서도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미 경고하셨죠.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 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이것은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모든 것은 결국 우리 옆구리의 가시가 되어 우리를 괴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걸 해결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당연히 도와주실 수 없는 것이죠.
미움을 품으면 그 미움이 상대방을 찌르기에 앞서 나를 찌릅니다.
교만으로 높아진 마음을 품으면 교만은 자가면역질환처럼 나를 무너뜨립니다.
알고 지은 죄든 모르고 지은 죄든 우리 고통의 대부분의 원인은 죄라는 걸 기억하고 말씀에 주의해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4)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4절,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절,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그런데 정작 이들이 그 우상숭배에서 돌이키고, 가나안주민들을 몰아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강한 적은 두려웠고, 약한 적은 노예로 부려 먹기 위해서였죠.
고통이 사라지길 바라며 후회의 눈물은 흘렸지만 얼마 안 가 다시 가나안방식, 내 방식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가 구원하는 동안 하나님을 찾지만, 곧 다시 우상숭배와 죄에 빠지는 반복되는 사사기 패턴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선을 알아도 행하지 못하는 죄인들의 인생을 사사기 350년 동안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라고 뭐가 많이 다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좀 살아보려는 마음을 먹지만 또 내 삶의 패턴으로 돌아가죠.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예수님의 완전한 대속이 소망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왜 사사기를 길갈과 보김으로 시작하셨을까요?
길갈의 신앙은 가나안을 축복의 땅으로 만들지만, 보김의 신앙은 가나안일지라도 우는 땅이 된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사사기 흑역사의 원인을 사사기 저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진단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말 왕이 없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셨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바르게 사느냐는 신앙의 최우선 과제가 아닙니다.
죄의 수치를 영원히 굴려 보내주신 내 믿음의 길갈을 잊지 않고 항상 왕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믿음이 최우선입니다.
성화도 내가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온전한 왕으로 모시게 되는 게 성화입니다.
그러다보면 점점 죄와 악을 멀리하고 구원의 풍성한 은혜 안에서 살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의 구원과 은혜의 장소, 내 믿음의 길갈을 꼭 만들어 가시고 거기서 복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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