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가 하나님께 돌아가고 난 뒤 우리 자녀들은 남아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까요?
내가 죽고 난 뒤 내 자식이 나보다 더 진실되게 예수님을 따를까요?
그런 확신이 있다면 물려줄 유산이 없더라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식들의 기업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와 가나안정복 세대가 죽고 난 뒤 남은 자식들의 이야기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이민 2세대의 이야기나 마찬가지죠.
이것은 가나안 같은 세상에 남겨 둘 우리 자식들에 대한 말씀이고, 또 우리에게 남아있는 싸움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사기가 우리와 먼 이야기가 아닌 것을 오늘 말씀에서도 잘 배워 지키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1. 이스라엘 후손들은 어쩌다 가나안 부족들과 공존하게 되었을까요?
여호수아서를 읽으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정복 전쟁을 꽤 잘 수행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때 모든 가나안 부족을 정복한 것은 아닙니다.
정복 전쟁이 7년 정도 지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얻은 땅에 안주하길 원했습니다.
거친 광야 생활에 뒤이어 계속 전쟁을 했으니 당연한 생각이죠.
여호수아는 열두 지파가 정복해야 할 남은 영토를 제비뽑기로 정해줍니다.
먼저 정착하고, 남은 땅을 정복해 가라는 것이죠.
우리가 사사기1장 말씀을 나누지 않았는데요.
거기엔 각기 분배받은 영토에 살고있는 부족들과 싸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지파는 성공하고, 어떤 지파는 실패합니다.
결국 가나안땅에는 이스라엘 민족보다 훨씬 많은 부족들이 잔류하게 됩니다.
아군이 많아도 불안한 데, 이스라엘을 둘러 싼 적군의 수가 더 많은 것이죠.
그런데 본문 앞 2장에 보면 우리에게 더 불길한 정보를 줍니다.
10절,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을 알아도 살기 힘든데, 적들 속에 살며 하나님도 몰랐다는 것이죠.
어떻게 한 세대 만에 신앙이 단절되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나라를 봐도 이게 그렇게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들이나 부모세대에서 자식들이 다 신앙을 이어받았다면 이전 세대가 아직 생존해 있는 지금은 기독교인구가 적어도 두 배는 돼야 맞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감소한 걸 보면 우리의 신앙 사정도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정말 우리 자식들을 이렇게 남겨 두고 떠나야만 하는 걸까요?
가나안정복 세대는 하나님의 존재와 실력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남겨진 자녀들은 가나안에서 태어난 세대죠.
홍해의 기적도, 만나와 구름 기둥도, 요단강의 기적도, 전쟁과 승리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가르쳐야 할 부모세대가 왜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지 못했을까요?
쉽게 생각해 보면, 갈등이 싫어서였을 것입니다.
자식들 달래가며 주일예배 데리고 나와 본 성도들은 다 이해하실 거예요.
부모들은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을 자식들은 잔소리로 알고 짜증을 냅니다.
그러다 보니 옳은 소리도 덜 하게 되고 점점 자식 눈치를 보며 살게 되는 게 부모입니다.
또 가나안에서 태어난 세대의 환경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부모들이 하나님을 의지해 일군 복지를 그냥 누리던 세대입니다.
전쟁도 모르고, 보리고개도 모르고 IMF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고마움도 모릅니다.
저는 가끔 ‘동행’이라는 프로를 봅니다.
조부모 손에서 가난하게 자란 어린 손주들이 병든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하는 걸 보면서 놀랍니다.
너무 기특하면서도 안쓰럽습니다.
가난이 사람을 양순하게 하고 철이 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호의호식하고 자란 자식들은 그것도 부족해 항상 부모에게 투정을 부리죠.
올해 런던의 자선지원 재단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저소득국가가 고소득국가보다 소득 대비로 볼 때 두 배 이상 많이 후원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고소득 국가인 일본, 독일, 프랑스는 최하위에 속했습니다.
기부자가 제일 많은 지역이 아프리카이고 나이지리아 국민들이 기부에 제일 많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풍요가 주는 게 이기심과 자만심 외에 무엇이 있을까 싶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부유하게 사는 걸 당연히 생각한 게 가나안세대입니다.
또 태어나보니 이웃이 가나안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죄성 위에 세운 가나안 문명과 가나안사람들은 하나님 신앙을 모르는 이들에게 매력적일 뿐입니다.
퇴근 후 포장마차에서 한 잔이 낭만일 뿐이죠.
예수님의 구원을 깨닫기 전까지는 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지 절대 모릅니다.
결국 가나안 세대는 이방 민족들과 사돈을 맺고, 가나안 청년들과 연애하고 결혼합니다.
결혼을 했으니 그 민족의 종교도 받아들이고 신들에게 제사하게 되는 것이죠.
과거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졌던 가수 이승0씨는 불교인 아내와 결혼하며 불교로 개종했습니다.
장모 견미0씨가 소문난 불자이죠.
이승0씨는 올 석가탄신일에 불자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승0씨를 TV에서 볼 때마다 불교인과 결혼하지 않았었다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오늘 가나안 세대도 왜 그래야 했는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만일 하나님 명령대로 가나안 부족들을 다 몰아냈다면 어땠을까요?
2.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 문제에 대해 의외의 사실을 발표합니다.
1절,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절,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가나안 부족들을 다 정복하지 못한 것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하네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후손들을 시험하고 가르치시려 이방 민족들을 남겨 두셨다는 것이죠.
게다가 3절을 보면 남겨 두신 민족들이 엄청 많습니다.
이걸 보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못하셨네’
어찌 생각하면 선악과 문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사에 관여하신 일들이 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람들에겐 하나님께 대해 그런 피해의식이 있습니다.
나의 고난이 하나님 탓이거나 하나님이 방조하셔서 일어났다는 것이죠.
엘리야선지자 아시죠?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삼 년 기근을 선포하고 숨어다닙니다.
시돈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숨어지낼 때 그집 아들이 갑자기 죽잖아요?
과부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원망하고 엘리야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때 엘리야가 이렇게 하나님께 분통을 쏟아 놓습니다.
왕상17장20절,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이 말 속에 ‘주께서 또’라고 하죠.
‘재앙을 내리셔서 그 아들을 하나님이 죽게 하셨다’고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그만큼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걸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이 본질적인 죄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발작하듯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내 앞길을 하나님이 막으시는 순간 그렇죠.
우리가 조금이나마 예수님께 선의를 갖고 하나님께 호의를 가진다면, 그것은 이미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은 성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 변명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처럼 ‘그래, 내가 그랬다’ 그러십니다.
우리의 삶에 남아있는 많은 문제들, 하나님이 남겨 두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뜻이 있어 남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우리를 유익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남은 부족들을 점령하지 못한 것은 엄연한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수년 내에 가나안부족들을 다 정복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히 천천히 쫒아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가나안의 전쟁은 1세대 부모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닌 것이죠.
모든 이스라엘은 각자의 세대에 이 믿음의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구원에 무임승차는 없잖아요?
하나님은 정복세대가 가나안 부족들을 다 진멸할 것이라 믿으셨을까요?
그러지 못할 것을 다 아셨습니다.
이스라엘도 맡겨진 임무에 순종하지 않았고, 하나님도 혼자 나서서 가나안부족들을 쓸어 버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 사이 가나안땅에는 다시 이방 민족들이 번성해 구름떼 같이 된 것입니다.
3. 그렇다면 하나님은 남겨진 부족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려 했을까요?
1) 2절에 보면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전쟁을 가르치시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은 전쟁터라는 것입니다.
전쟁을 가르치신다는 것은 세상의 전쟁기술을 가르치시겠다는 게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끼리의 싸움과 성도들의 싸움은 다릅니다.
정복시대 부모들이 그랬듯이 하나님을 의지해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죠.
우리 믿음의 부모 세대가 전쟁의 폐허와 우상의 땅에서 어떻게 오늘날의 교회와 국가를 세웠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척박한 환경과 이 땅에 무겁게 드리운 어둠의 영들과 싸워서 이룬 것입니다.
정말 우리 부모 세대는 기도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전쟁과 사회적 혼란 속에 살지는 않죠.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세대에도 싸워야 할 전쟁을 남겨 주셨습니다.
이 세속사회에서 교회를 지키고 교회로 남기 위한 싸움입니다.
죄와 싸우고 말씀대로 살며 거룩을 이뤄야 할 전쟁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해내는 전쟁입니다.
지난 주 이 싸움을 위해 애쓰셨나요?
만일 이 전쟁에 계속 무관심하다면, 하나님은 어느날 남겨 두셨던 원수를 통해 전쟁으로 우리를 가르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2) 가나안 부족을 남겨 두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지 시험하시기 위해서입니다.
4절,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모세에게 하신 명령이 무엇입니까?
주거지에서 이방인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고 그들과 통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부족들의 악행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후손들이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죠.
5절부터 8절까지는 원문에서 계속 ‘그리고’로 연결된 문장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부족 중에 거주했다.
그리고 그들과 통혼했다.
그리고 악을 행하여 우상을 섬겼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진노하셨다.
남겨진 이방인을 통해 치렀던 시험 점수가 나왔죠.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세대라는 게 검증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징계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게 증명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겨 놓으신 시험문제들은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끊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해 안달하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고.
나도 몰랐던 그런 것들이 내 속에 있고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을, 남겨 두신 문제들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피아워십이라는 요즘 유명한 찬양사역을 이끄는 젊은 목사가 있습니다.
이분이 2년 전에 십자인대가 파열돼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간 회복하고 특별새벽기도회 찬양을 인도하면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화장실을 가려고 병실에서 나오다 의식을 잃고 쓰러집니다.
나중에 CCTV를 보니 머리가 먼저 땅에 부딪 쳤던 것입니다.
뇌출혈로 의식이 없는 채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게 됩니다.
이틀 만에 깨어났지만 미각과 후각을 잃고 한쪽 청각도 손상되었다고 합니다.
뭘 잘못했길래요.
정말 열심히 주님의 일을 했는데,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물론 골든 타임을 놓쳤음에도 사지에 장애가 없었고, 찬양할 수 있는 목소리와 시각을 지켜주신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의식을 차리고 깨어났을 때 정말 놀란 게 있다고 합니다.
다시 살았다는 게 그렇게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 자기는 정말 주님과 천국이면 되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부르던 그 찬양이 백 프로 진심은 아니었던 것이죠.
지금도 천국 찬양을 부르면 위선이 느껴져 좀 힘들다고 합니다.
믿음 좋은 성도에게도 하나님은 인생의 적들을 남겨 놓으십니다.
그것들이 우리 믿음을 과신하고 교만한 원초적 죄를 드러내 죄인인 나를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나타나는 인격은 어느 정도 가꿀 수있지만, 근본까지는 수양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매일 겸손하게 인정하게 되는 것이죠.
환경이 나를 두렵게 하고 사람이 내 속을 뒤집어 놓을 때, 거기서 무얼 보라고 그러시는지 깨닫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진노하시고 징계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어차피 이스라엘의 실패를 아셨을 텐데 새삼 진노하셨다는 게 좀 이해가 안되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시험해 보셨습니까?
시험해 보는 것은 이미 의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의심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날 때 왜 불같이 화가 납니까?
사랑했고, 그만큼 기대했기에 실망이 아니라 분노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만큼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1) 이스라엘은 적과 한편이 되었으니 걱정 없다 안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멀리 북방에 살던 메소보다미아 왕을 데려오십니다.
그 나라는 정말 이스라엘과 아무 관련도 없는 먼 나라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안전장치를 한다 해도 그게 안전을 다 보장하지 못합니다.
생각지도 않고 예상치도 않은 곳에서 무서운 게 날아오는 게 인생이죠.
제가 가끔 시청하는 유튜브 채널이 있는데, 오랫 만에 영상을 올렸더군요.
크리에이터가 하는 말이 작년 겨울부터 이제까지 간병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어머니가 아파서 몇 번 수술을 받고 계속 입원하는 바람에 몇 달 병원생활을 합니다.
어머니가 겨우 퇴원해서 통원치료를 받던 중에 이번엔 아버지가 입원해서 수술을 받게 됩니다.
또 몇 달간 간병인 생활을 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무려 9개월을 집과 병원과 병실을 오가느라 계획했던 영상을 못 올렸다고 하더군요.
이번에 인생이 예측한 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평소 충돌해 본 적이 없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적군이 내려 올 줄 은 전혀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실하게 양육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테스트하십니다.
마땅히 도달해야 할 믿음에 부족하면 외부의 시련을 통해 우리를 징계하고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자식들 눈치 보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은 이 정도면 안전하다 생각했지만 예기치 못한 데서 얻어맞았습니다.
2) 남의 나라에 8년간 조공을 바치고 내정간섭을 받는 게 피가 마르는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관세협정에 난항을 겪고 있죠.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미국에서 요구하는 투자 금액과 조건이 상당히 불공정한 것 같습니다.
어제 기사를 보니 트럼프가 전문직 취업비자를 받으려면 매년 1억4천만원씩을 내라는 행정명령에 서명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동안 백사십만원씩 받던 비자수수료를 백 배 올린 것입니다.
21세기 국제사회에서 이런 전횡을 휘두른다는 게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을 통치한 메소포타미아왕의 이름이 구산 리사다임이라고 하죠.
구산은 왕의 이름이고 리사다임은 두 배로 악하다라는 뜻입니다.
구산왕이 얼마나 악랄했으면 이스라엘이 그렇게 불렀겠습니까?
결국 이스라엘 후손들은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결국 손 벌릴 곳은 하나님입니다.
누가 우리를 도와주겠어요?
7절에서 그들이 여호와를 잊어버렸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모른 척 등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더 버티지 못하자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잖아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힘으로 안되는 한계에 부딪치면 모든 척 했던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4.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우리 같으면 들은 척도 안 할 것 같습니다.
9절,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하나님은 부르짖는 이스라엘을 위해 구원할 사사를 일으키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목적은 돌이키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죠.
첫 번째 사사로 갈렙의 조카이자 사위가 된 옷니엘이 부름을 받습니다.
1장에 보면 유다지파의 땅을 용감히 정복한 옷니엘의 과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읽을 때 당황스러운 것이 있죠.
뒤로 갈수록 자격이 의심되는 사사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결격 사유가 있는 사사들을 세우신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시대가 그만큼 어둡고 악해서 사람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죠.
오죽하시면 삼손을 어려서부터 아예 나실인으로 구별해서 키워 사용하시려 했겠습니까?
그마저도 삼손이 완전하게 이루지는 못했지만요.
옷니엘은 그래도 갈렙의 신앙의 영향을 받아 믿음을 가진 사사입니다.
10절,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아무리 옷니엘이 믿음이 좋고 전투에 탁월해도 자신의 힘으로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모든 전투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옷니엘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은 그 땅에 사십 년 평화를 주십니다.
압제당한 세월보다 훨씬 긴 평온을 주시죠.
하나님의 위로는 항상 넉넉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기록자의 표현이 기가 막힙니다.
11절,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사람들이 평온했다 하지 않고 땅이 평온했다고 하죠.
전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해결되지는 않았다는 암시입니다.
우리 마음이 평안 하려면 환경이 평온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내 마음에도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던 이스라엘은 옷니엘의 죽음 뒤에 다시 또 죄를 반복하게 됩니다.
사사시대의 긴 역사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그 죄로 얼룩진 인생을 구원할 구원자가 필요하다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의 오명에서 벗어나게 하신 구원자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으로 죄와 사망의 압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힘써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어 마음과 삶에 평온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버려야 할 것과 싸우지 않고 주변에 어수선하게 늘어놓고 삽니다.
인생의 성가신 문제들과 곤경은 결국 거기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행복한 게 싫어서가 아닙니다.
죄와 타협하고 끊지 못한 세상이 결국 우리 옆구리에 가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되 세상을 견제하며 하나님이 내주시는 남아있는 시험들을 잘 보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잘 전수되게 더 기도하고 힘쓰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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