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범죄 조직에 속아 캄보디아로 일하러 갔다 목숨을 잃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잔혹한 고문으로 청년을 죽음에 몰고 간 범죄조직에 모든 사람들이 분노했죠.
청년이 너무 세상 물정을 몰랐구나 안타까웠습니다.
만일 부모를 잘 만났어도 청년이 캄보디아를 갔을까요?
그걸 생각하면 인간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죠.
사람들은 쉽게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하지만 본래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게 아니잖아요?
이 청년의 죽음이 발단이 되어 조직에 붙잡혀 있던 사람들이 구출되었죠.
그런데 대다수가 피해자이면서 범죄에 가담한 가해자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사람에게는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인 그런 양면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기드온에게서 그걸 볼 수 있죠.
과연 기드온의 이 전쟁을 성령께서 이끌고 계실까요?
기드온이 부르심에 순종했을 때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셨고 승리했습니다.
기드온은 지금의 이 전쟁도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 의지로 나선 순간 성령께서 떠나가시고 자기 힘으로 이 전쟁을 하고 있지만 그걸 몰랐던 것이죠.
몰라서 그랬다 해도 기드온의 나머지 전쟁은 치명적인 결말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모르고 짓는 죄도 우리 인생에 독이 됩니다.
오늘 기드온의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지만 그냥 인간의 전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똑같은 것입니다.
그 결과를 기드온의 이 전쟁에서 볼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마음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믿음을 따르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내 뜻대로 사는 건지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 않죠.
오늘 이 중요한 믿음 생활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잘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1. 오늘 본문은 크게 네 가지 에피소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가 진행되면서 기드온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아직 전쟁을 수행 중인 기드온에게 내부에서 갈등이 불거집니다.
처음 기드온이 네 지파에만 사람을 보내 민병대를 모집했었죠.
미디안 연합군이 진을 친 이스르엘 골짜기 가까이 있는 지파들입니다.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 작전으로 승리를 거머쥔 기드온은 해산했던 군대를 다시 소집합니다.
도망치는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서죠.
이번엔 적군의 도주로의 길목에 있는 에브라임지파에도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 에브라임 지파가 전쟁에 동참해 미디안 장군 오렙과 스엡을 죽입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기드온에게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는 것입니다.
왜 처음부터 우리를 부르지 않았냐는 것이죠.
에브라임지파와 기드온이 속한 므낫세지파는 요셉의 두 아들로 부터 나온 지파입니다.
민족을 위한 요셉의 공을 인정해 두 지파가 되게 한 것이죠.
그러면 13지파가 되잖아요?
그런데 레위지파는 들어갔다 뺏다 합니다.
레위지파를 넣을 땐 요셉지파로 묶어서 열두 지파가 되고, 레위지파를 뺄 때는 에브라임, 므낫세로 넣어 다시 12지파가 되는 것입니다.
원래 므낫세가 형이고 에브라임이 동생입니다.
야곱이 축복할 때 동생 에브라임을 장자처럼 축복했었죠.
두 형제 지파 사이에는 장자권을 잃은 므낫세와 동생이지만 유력한 지파를 이룬 에브라임과의 보이지 않는 경쟁심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또 여호수아가 이 에브라임지파에 속합니다.
그런 자만심으로 에브라임은 다른 지파들과 종종 충돌을 빚었던 것이죠.
에브라임은 다 차려진 밥상에 뒤늦게 숟가락을 얹었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지금 밥상을 뒤집어 엎겠다는 것입니다.
아마 네 지파가 챙긴 어마어마한 전리품에 대한 질투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명분을 내세우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손에 쥘 이득을 계산한 경우가 많죠.
미디안이 몰고 왔던 낙타만 해도 해변에 모래 같았다고 했잖아요?
오늘 기드온이 이 문제를 해결한 방법은 일반적인 처세술과 지혜입니다.
일반적인 처세술은 믿음의 관점과는 본질이 다릅니다.
믿음의 화해는 관용과 용서와 사랑에서 나오지만 세상의 처세술은 자기를 보호하려는 임기응변에서 나오는 것이죠.
기드온의 이 말 한 마디에 에브라임지파의 분노가 누그러집니다.
2절,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또 하나님이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주시지 않았냐고 치켜 세우죠.
그렇게 에브라임 지파의 자존심을 세워주며 갈등이 잘 봉합됩니다.
기드온도 사실 속으로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미디안이 쳐들어 온 것을 모를 리가 없잖아요?
마음이 있었다면 그때 자발적으로 참여했어야죠.
그러나 대부분 갈등은 옳은 소리에서 시작됩니다.
가족끼리도 솔직하면 불화가 잦습니다.
가족끼리 전쟁에는 승자가 없습니다.
잠언 15장1절에서 무엇이 지혜인지 말씀하죠.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기드온의 유순한 말이 내전으로 번질 위기를 막은 것입니다.
사사 입다의 때에도 에브라임이 이렇게 딴지를 걸다가 결국 내전이 일어나고 맙니다.
그때는 에브라임 사람 4만2천명이 동족의 칼에 죽습니다.
그런데 오늘 기드온이 정말 에브라임과 화해했을까요?
뒤에 보면 그게 이상한 방향으로 튑니다.
인간의 처세로 막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믿었던 처세술이 오히려 나를 함정에 몰아넣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스킬을 사용하면 결국엔 알아차립니다.
처세술은 버거운 상대에 대한 거잖아요?
약자에게야 처세술 쓸 것 있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죠.
세상적인 체세술로 대인 관계를 유리하게 하려하면 늘 눈치를 보게 되고, 늘 꿀립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인 사랑으로 대하면 편합니다.
그렇기에 사람관계도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세술이 아닌 사랑으로 갈등을 이기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두 번째 사건은 좀 더 탐탁하지 않은 느낌이 듭니다.
미디안의 두 장군은 죽였지만 아직 두 왕이 살아서 도주한 상태입니다.
기드온은 삼백 명 용사만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 동방 사람들의 땅으로 도망한 두 왕을 추격합니다.
그런데 오랜 전쟁으로 삼백명의 용사들은 매우 지쳐 있었습니다.
4절입니다.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여
삼백용사가 피곤한 정도는 원어로 보면 기진 맥진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들에게는 잠시의 휴식과 보급품이 절실했던 것이죠.
기드온은 숙곳이라는 동네에 들어가 음식을 구합니다.
5절,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 하니
현재 유리한 전쟁 상황을 잘 설명하고 상당히 정중하게 음식을 구하죠.
사실 요단강 동편에 있는 이 숙곳과 브누엘사람들이야 말로 미디안의 피해를 가장 많이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미디안을 소탕하는 기드온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죠.
기드온은 아마도 숙곳 사람들의 환대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냉대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내 생각과 같지 않습니다.
6절,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 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숙곳 사람들은 좀 전에 만 오천 명의 미디안 군사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잖아요?
만 오천 명만 해도 규모가 대단하죠.
힘이 다 빠진 기드온의 삼백 용사들을 보니 절대로 미디안 왕을 붙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잘못하다간 나중에 미디안의 보복이라도 받기 십상이잖아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제 나라 전쟁에 몸을 사리는 숙곳 사람들의 이기적인 행태는 나쁜 짓입니다.
지금 굶주린 병사들은 그들의 말대로 미디안에 패배하면 죽을 목숨입니다.
일말의 동정심은커녕 남의 고통을 웃음거리로 여기는 숙곳사람들에게 기드온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기드온은 숙곳과 브누엘에게 복수를 경고합니다.
에브라임의 시비에 아주 겸손하게 대처했던 기드온과 숙곳과 브두엘을 대하는 기드온 중 누가 진짜일까요?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게 구는 게 인간 본성이죠.
성령이 함께 하셔서 행할 때와 내 육신으로 행할 때 차이가 이런 것입니다.
결국 미디안 왕을 포획하고 돌아오던 기드온은 자비가 없던 두 마을에 대해 자비 없이 앙갚음합니다.
숙곳에는 77명의 방백과 장로들의 살생부를 만들어 들가시와 찔레로 고문합니다.
브누엘에 가서는 망대를 헐고 사람들을 잡아 죽입니다.
이렇게 징벌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신약성경에서 이와 비슷한 장면이 떠오르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의 한 마을로 들어가시려 합니다.
고단한 행로에 좀 쉬시며 제자들과 음식을 사서 드시려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사람들이 나와서 주님 일행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습니다.
혈기 많은 요한과 야고보가 분노하며 하늘에서 불을 내려야 한다고 하죠.
그때 예수님이 오히려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지금 기드온에게 성령이 계셨다면 당연히 그러셨을 것입니다.
점점 기드온이 하고 있는 이 전쟁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끝까지 기드온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을 구원자 사사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세우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에 절반의 순종이라 해도 기드온을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백퍼센트 순종만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습니까?
아니잖아요?
우리가 순종할 때만 도우셨다면 그 수많은 실패와 죄악 중 어딘가에는 빠져 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하셨기에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건져주시고 구원의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천재 음악가로 인정받던 지0박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 가수들이 미국공연을 가면 지0박의 연주가 없이는 안 하겠다는 가수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분은 아버지가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젊을 때 마약에 손을 대게 되었습니다.
처음 몇 년간은 남들이 눈치 못 챌 정도로 조절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십여 년이 되면서 부터 무서운 마약중독 증세가 나타나서 결국 모두가 알게 됩니다.
망상에 시달리고 몸은 점점 피폐해지고 몇 번 자살 시도도 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간신히 하나님을 붙들게 되었지만 마약을 끊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큰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경찰이 오고 앰블란스가 오더니 이미 사망했다고 천을 덮어 씌웠습니다.
자기는 분명히 그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의학적으로는 이미 죽었다고 판정이 난 것이죠.
병원에 도착해 영안실로 가다 깨어나자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신기하게 몸에는 바늘 구멍 만한 상처도 없었습니다.
퇴원한 뒤 사고 난 차를 보러 갔는데 차가 완전히 짓이겨진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구토가 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자기가 마약을 안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가 2주 정도 지난 때인데 마약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25년 만에 마약이 저절로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걸 설명하겠습니까?
지노박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신 것이죠.
지노박은 지금 찬양선교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시고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하지만 사실 믿음도 주셔서 믿게 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성령님과 함께 하는 것도, 백퍼센트의 순종도 우리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으십니다.
그 예수님을 믿기에 그러려는 마음이라도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보기에도 미흡하기 짝이 없는 믿음일지라도 너무 귀하고 소중한 믿음입니다.
포기하거나 자책하지 말고 조금씩만 더 예수님을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전쟁을 끝낸 뒤 이스라엘이 기드온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합니다.
22절,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하나님이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지만 결국 사람들은 기드온이 구원했다고 하잖아요?
기드온이 이래서 자기 전쟁 한 것 아니겠습니까?
기드온은 그 말에 손사래를 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할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왕이 되라고 합니다.
그것도 대대로 세습하는 왕의 자리를 제안하는 것이죠.
기드온은 마음 속으로 은근히 미소짓지 않았을까요?
‘내가 왕이 될 상인가?’
그렇지만 기드온은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이죠.
내가 다스리지 않겠다, 하나님이 다스리실 것이라고 올바른 대답을 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말은 했지만 말한 대로 사는 건 아닙니다.
기드온이 그후 어떻게 살았느냐가 나옵니다.
29절, 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이 돌아가서 자기 집에 거주하였는데
30절,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
31절, 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
아내가 얼마나 많았으면 아들이 칠십 명이겠습니까?
이 정도면 왕처럼 산 것 아닙니까?
첩이 낳은 아들의 이름이 아비멜렉입니다.
내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아버지가 지어주었을 텐데 좀 묘합니다.
기드온은 공식적인 왕을 거절했지만 왕처럼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인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못합니다.
내가 왕이 되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합니다.
4) 또 하나 기드온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사건이 나오죠.
기드온이 전리품 중에서 금을 요구합니다.
전쟁의 댓가로 사람들의 금을 전부 기드온이 취했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렇게 받은 금이 천칠백 세겔입니다.
이 금으로 기드온이 에봇을 만듭니다.
에봇은 대제사장의 예복입니다.
세마포 속옷 위에 겉옷을 입고 그 위에 긴 앞치마와 같은 화려한 에봇을 입고 가슴엔 보석이 달린 흉패를 착용했습니다.
일반 제사장은 에봇을 입지 못했고 대제사장만 에봇을 입고 섬겼습니다.
왜 레위지파도 아닌 기드온이 대제사장의 에봇을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되죠.
그것도 실로 짠 에봇이 아니라 번쩍번쩍하는 금으로 만든 에봇입니다.
그것을 자기 고향인 오브라에 두었다고 하죠.
이때 성막과 성소는 에브라임지파의 땅인 실로에 있었습니다.
물론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자기 성읍에다 이 황금 에봇을 전시했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지파가 신앙의 중심에 있는 잘난 척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까 좀 꿀렸잖아요?
그게 이리로 튄 것입니다.
정치적인 왕의 자리뿐 아니라 백성들의 믿음을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무서운 야심입니다.
기드온의 망령된 행위는 결국 이스라엘을 죄악으로 이끌게 됩니다.
27절 하,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음란은 육체적인 것 뿐 아니라 우상숭배와 같은 신앙의 배신을 의미합니다.
결국 기드온의 지파는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성막과 법궤와 율법 중심의 신앙을 벗어난 것이죠.
금 에봇에는 법궤도 속죄제사도 율법도 없잖아요?
사람들은 수백 년 전 만든 낡은 성막보다, 황금으로 번쩍이는 기드온의 에봇을 예배하며 미디안의 날과 같은 성공과 복을 빌게 된 것입니다.
진리가 빠진 신앙은 인간 본성에서 나온 세상 종교와 똑같아집니다.
기드온이 설령 금에봇을 통해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하려 했다 쳐도 그런 무지 때문에 신앙을 우상숭배로 타락시킨 것입니다.
백성들의 육신은 구했지만 영혼은 오히려 우상의 늪에 빠트린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패배만도 못한 승리가 되고 만 것이죠.
이게 인간의 육신에서 나오는 신앙의 한계입니다.
성령과 진리를 통해서만 우리는 참된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가 있다는 것을 꼭 붙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하나님이 이 기드온의 전쟁을 어떻게 평가하시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 그렇듯이 기드온이 완벽하게 하나님께 순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에는 사사 기드온이 믿음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 부름 받았을 때 하나님을 믿고 두려운 전쟁을 수행했던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죽은 뒤,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왕이 되겠다고 기드온의 아들 70명을 죽입니다.
사람들은 기드온을 배신하고 다시 바알을 섬깁니다.
기드온의 이 결말은 오늘 기드온의 육신으로 행했던 남은 전쟁과 왕 놀음과 신앙의 우상화에 대한 평가입니다.
이런 게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인생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령님의 은혜가 아니라 육신으로 살아갈 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으로 행하는 것은 아이언맨의 수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본래의 내가 바뀌는 것이 아니지만 수트의 능력을 입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 경우는 아예 없던 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새사람이 수트의 능력으로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죠.
사랑도 지혜도 인내도 용기도 능력도 겸손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그렇게 해 주시는 성령님의 힘을 구하고 덧입어야 합니다.
기드온 같은 찝찝한 승리가 아니라 복되고 완전한 승리를 원하신다면 매일 기도로 성령님의 능력을 덧입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책망했죠.
3장3절,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오늘 기드온의 전쟁에서 이 말씀이 떠오릅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과 육신으로 행하는 일의 경계가 얕은 것 같습니다.
담을 쳐 놓은 게 아니라 금을 그어 놓은 것 같은 것이죠.
왜 은혜받기가 그렇게 힘들고 받은 은혜를 유지하기가 그렇게 어려울까요?
본성과 기질과 습관을 바꾸며 사는 게 당연히 쉽지 않죠.
그래서 바닥에 그어 놓은 선을 넘나들 듯이 그러면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성령님을 의지하고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외부의 적과 내면의 죄와 싸우는 게 성도의 숙명입니다.
믿기만 하는 것도 사실 귀하죠.
그러나 성령님을 의지해서 이 원수들과 매일 싸우지 않으면 뭔가 찝찝한 하루하루를 계속 보내게 됩니다.
그 결과는 쌓여서 어느날 육신이 낳은 열매들로 가득한 나를 볼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길 매일 기도하며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지고 겉과 속의 전투에서 매일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사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사기13장1절-25절 (나실인 삼손) (0) | 2025.11.25 |
|---|---|
| 입다의 서원 (사사기 11장) (1) | 2025.11.12 |
| 사사기7장1절-25절 (보리떡의 승리) 기드온과 삼백 용사 (0) | 2025.10.30 |
| 사사기6장25절-40절 (기드온의 양털 시험) (1) | 2025.10.20 |
| 큰 용사 기드온 (사사기6장1절-24절) (1) | 2025.10.15 |